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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바람의 세월〉 인디토크 기록: 기억하고 기록하기

by indiespace_가람 2024. 4. 18.

기억하고 기록하기

〈바람의 세월〉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4년 04월 11일(목) 오후 7시 30분 상영 후

참석 김환태 감독, 변상욱 대기자

진행 문종택 감독

 

 

* 관객기자단 [인디즈] 서민서 님의 기록입니다.

 

 

‘다녀왔습니다.’라는 그 흔한 말을 듣지 못한 채 10년이 흘렀다. 하지만 세상은 바뀐 게 없고 같은 아픔만 되풀이되고 있다. 언제까지 피해자가 피해자를 위로해야 하는 걸까. 그저 진실을 밝히고 싶을 뿐인데, 언제까지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싸워야 할까. 10년의 세월 동안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날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했기에. 아무도 외롭지 않게 잊지 않고 기억해야 했기에. 그래서 카메라를 들었고 기록했다. 기록이 가진 힘을 믿는다. 그 힘을 품은 채, 10년에 걸친 그들의 간절한 바람과 외침이 다음 세대까지 닿을 수 있기를. 다시 한번 서로의 손을 잡아줄 수 있기를.

 

 

 

 

문종택 감독(이하 문종택): 안녕하세요. 지성이 아빠입니다. 반갑습니다. 귀한 시간 내서 참 쉽지 않은 일인데 발걸음해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한 분 한 분의 사연은 제가 다 일일이 알 순 없지만, 그래도 대략 10년의 세월을 보내다 보니 찾아주신 관객분들의 발걸음 노고와 또 함께 촛불 들었던 과정들이 바깥에 있으면서 계속 떠올랐습니다.

소개를 해 드려야 할 것 같은데 먼저 설명이 필요 없는, 영화 잘 만들어주신 우리 김환태 감독님. 또 어떻게 보면 개인 사심이 너무나 많이 들어간, 제가 꼭 모시고 싶었던 변상욱 대기자님. 너무 감사드립니다. 물어보실 이야기도 많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많겠지만, 제가 미리 말씀드리는데 꼭 영화 이야기 아니더라도요, 많은 이야기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지금 사실 꿈 같습니다. 우리 변상욱 대기자님을 옆에 모실 수 있었다는 게. 여러분들이 대기자님께 궁금한 점, 물으실 점 있으시면 질문 부탁드리고요. 무엇보다 이 영화가 탄생한 개요 그리고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에 대한 질문은 좀 줄이기 위해서 아무래도 환태 감독님이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주셨으면 합니다.

 

김환태 감독(이하 김환태): 지성 아버님과 함께 공동 연출한 김환태입니다. 이 영화는 보신 것처럼 세월호 가족분들의 10년의 걸음, 10년의 마음, 시간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한 영화입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아버님께서 10년 동안 기록하셨던 기록을 토대로 다양한 미디어 활동가들, 세월호에 관심 가지던 다양한 분들이 함께 촬영했던 것들을 수집해서 아카이브 다큐멘터리의 형태로 영화를 만들게 됐습니다. 처음에 아버님이 저한테 촬영본이라고 주셨던 게 한 7테라 정도 됐습니다. 나중에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길, 원래 본인이 촬영하신 게 한 50테라 정도 됐었다고 하더라고요. 어려운 선별 과정들을 거쳐서 저한테 영상을 주셨고 미디어 활동가들, 그중 미디어 몽구님이 특별히 주셨던 게 4테라 정도의 영상, 그리고 미디어위원회 활동가분들이 촬영하셨던 다양한 푸티지를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게 됐습니다. 2022년 10월에 아버님이 연락을 주셔서 10주기에 대한 기록들, 의미들을 영화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아버님이 딱 한 가지 생각이었어요. 우리 영화, 우리 가족들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셔서 우리 세월호 가족분들이 걸어 온 걸음이 온전하게 잘 드러나서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만들려고 노력했고, 이 영화가 단지 세월호 가족분들이 걸어 온 내용뿐만 아니라 그 시절을 함께 겪었던 우리들에게도 위로와 응원이 될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는데요, 궁금한 점 있으시면 아버님과 저에게 질문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귀한 걸음 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영화 〈바람의 세월〉 스틸컷

 

 

문종택: 원래 보통 이런 흐름에서는 게스트로 모신 변상욱 대기자님께 어떻게 보셨냐는 이야기를 먼저 할 것 같은데 건너뛰겠습니다. 왜냐면 말씀도 좋으시고 진솔하시고, 대기자님이 말씀해 주시면 관객분들의 질문이 조금 난감한 그런 문제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원체 분석도 잘하시고 그래서요. 혹시 관객분들 중에 질문 있으시면 우리 환태 감독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보충으로 설명해 드릴 수도 있고요. 손을 한번 드시면 마이크를 전달해 드릴 테니까요. 질문 있으십니까?

 

관객: 저는 정확히 10년 전에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수련회를 앞두고 있었어요. 그래서 사실 세월호가 굉장히 남다르고 저한테 오는 것도 좀 큰데, 처음에는 촛불집회도 있었고 탄핵 국면도 있어서 다들 기억하다가 5, 6주기쯤 지나면서는 많은 분이 좀 잊게 된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5, 6주기 때부터는 주변에서 오히려 저한테 ‘4.16을 기억하는 게 되게 유별나다.’고 말을 많이 했었어요. 그리고 어떠한 해결도 되지 못한 채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고. 세월호 해결에 미진한 부분들이 도화선이 돼서 채 상병 사건도 일어났었고 오송 참사도 원인 규명을 제대로 못 한 채 지나갔고 이태원 참사도 있었는데, 그러면서 4.16이 다시 소환되지만 금방 또 사람들이 많이 잊은 것 같더라고요. 결국은 ‘세월호를 계속 기억하는 사람들만 이태원도 기억하는구나.’라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총선과 대선에서도 그걸 다 잊은 채 윤석열 정권이 들어설 때도 세월호의 어떤 큰 원인을 제공한 잔존 세력들이 다시 집권하고 세월호 진상 규명에 대해서는 민주당에서도 너무 미진하고. 총선이 어제 끝났지만, 지금도 저는 이태원이나 세월호 이야기가 그런 쪽에서 거의 나오지 않아서 좀 무력감이나 막막함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라고 했을 때, 두 가지 부류가 있더라고요. 첫 번째는 제 또래들, 저는 제 또래들이 저처럼 어느 정도의 트라우마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거의 대부분 전혀 없더라고요. 오히려 저한테 ‘의아하다. 너는 아직도 기억하냐.’라는 게 대체로 제 또래였거든요. 그리고 두 번째 부류는 저희 부모님 세대들이었어요. 그분들은 세월호에 시옷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세요. 아직도 트라우마가 너무 짙게 남아서 ‘듣고 싶지 않다. 너무 슬프다’고. 그런데 사실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상처를 치료하려면 결국은 한 번 세게 아파야, 아픔을 직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10년 동안, 저도 부드럽게든 조금 세게든 세월호를 기억하게 하려고 제 주변 사람들한테 여러 방법을 써봤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이 두 부류의 분들한테, 첫 번째 부류는 잊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 4월이 되면 ‘맞아, 곧 있으면 세월호였지.’ 하거나, 제 세월호 배지를 본다거나, 제가 말을 한다거나. 아니면 두 번째, 조금 예민하게 반응하시고 더 깊게 알고 싶지 않아 하시는 우리 부모님 세대. 이런 분들께 어떤 방법으로 솔직히 다가가야 할지를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분들이 세월호의 진상 규명을 위해서 세월호에 대해 구체적으로 깊게 아셨으면 좋겠는데, 그걸 자꾸 외면하려고 하니까 ‘어떻게 하면 그분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지’가 깊은 고민이에요. 4, 5주기 때부터 계속 고민이어서 저는 답을 잘 못 내고 있는데, 혹시 생각하시는 답이 있으시면 궁금합니다.

 

문종택: 제가 들으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변상욱 기자님이 먼저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변상욱 대기자(이하 변상욱): 만드신 작품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인데 취재 생활 40년 하면서 지켜본 바로는, 저런 참사가 벌어지면 제일 먼저 논의하는 것은 ‘어디쯤에서 자를까’입니다. ‘어디 팀에서 누구한테 책임을 묻는 걸로 이 사태를 수습할 건가’를 제일 먼저 논의하죠. 사실은 그렇습니다. 그다음에 이것을 이행하고 해결하고 문제를 가져다 처리하고 덮어서 마무리 지을 사람을 지목하죠.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아랫사람한테 ‘언제까지 이 부분을 해결하고, 이 부분을 해결해.’ 하면서 이 지시가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거죠. 아까 영화에서 보신 것처럼 죄도 없는 의경은 매트리스를 들고 튀는 거죠. 이거라도 하면 내 일을 했다고 얘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 위에 사람은 세월호 유가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이런저런 물품들을 수거해서 딴 데다 치워버리면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하고. 다층적으로 계속 지시가 내려가고 내려가면서 결국 엉뚱한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재난과 참사에서 정치권과 국가 책임자들은 ‘어디에서 수습해서 누구 선에서 책임을 지고 꼬리를 자르고 몸통을 보존할 건가’를 정한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세월호는 ‘7시간, 8시간의 공백은 뭐야? 대통령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지?’라고 하는 것들 때문에 몸통이 대통령으로 바로 겨냥이 되니까 상당히 다급했던 거죠. 그러니까 국정원이 동원될 수밖에 없고 국정원이 문건을 만들었던 겁니다.

그게 행정권력이고, 정치권력은 여기에서 어떻게 돌아가든 좋은데 가끔 가서 악수하고 얼굴도 비춰서 나름대로 내 이미지를 보존하는 것. 이게 정치권의 제일 큰 목표죠. 사실은 유가족들이 있는 곳에 찾아오지 않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변호사들, 법률가들 데려다가 법률을 만들고 세월호 특별법을 어떻게 통과시킬 건지 논의하면 바로 해결되는 문제인데, 괜히 유가족들 있는데 와서 몇 번 사진 찍고 가고. 이런 일만 벌어지죠.

또 하나, 법이 문제인데 아까 헌법재판소 판결 나왔지만, ‘법을 잘 아는 자가 법대로 하자.’ 그럴 때가 가장 교활하고 참담합니다. 이 말은 안 하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교활할 때죠. 그러니까 법 전문가들은 법대로만 해석하는 거예요. 대통령은 국가의 모든 안전에 대해서 책임이 있지만, 시행령상 대통령이 그날 일어나서 무얼 해야 하는지는 규정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따로 규정이 없으니까, 규정을 어긴 바가 없어요. 국가라고 하는 체계가 엄청난 예산을 쓰니까 대단한 것 같아도 허술하기 그지없어요. 더군다나 그 권력을 갖고 있거나 잘 아는 사람들은 빠져나갈 통로들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그런 것이 국가의 구조인 거죠.

그래서 이걸 감시 감독할 첫째는 언론이죠. 당연히 언론입니다. 제주 4.3이든 광주 5.18이든 다 언론이 되살려내야 되는데, 언론에 기대하기는 어렵죠. 왜냐면 보시다시피 KBS가 제작진이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하니까 만들라고 했다가, “야 그러고 보니까 4월이다. 뒤로 미뤄라.”, “어차피 방송도 총선 지나서 하는데요.”, “그래도 예고편 나가고 뭐하고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미뤄라.”.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가 세월호 유가족들이나 여러분들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내가 윗사람한테 혼난다든가, 정치적으로 위협을 당한다든가,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는 뜻입니다. 이 미룬다는 문제를 가지고 싸우다가, 8월로 미룰 때까지 뭘 해야 하는지 논의를 하자고 합니다. 계획서를 짜 오라고. 그래서 계획서를 짜 왔는데 맨 앞에 ‘세월호 10주기 추모 다큐멘터리’라고 쓰여 있는 걸 보고 ‘세월호 10주기’라는 말이 들어갔기 때문에 논의할 수 없다고. 결국 그래서 논의가 무산된 거예요. 이게 세월호 KBS 다큐멘터리가 지금 가 있는 위치입니다. 그런 거죠. 언론은 못 하는 거죠. 기대할 수가 없는 상황까지 가버렸습니다.

그다음에 남은 방법은, 결국 기록이죠. 기록밖에 없습니다. 기록의 싸움이고 투쟁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큐멘터리지만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보셨던 〈1987〉 영화라든가 〈서울의 봄〉 같은 영화들이 만들어져야 하고, 그것이 또 문학 작품으로 나와서 시가 되고 소설이 돼서 우리 주변에 그것들이 잔뜩 생산되고 기억하고. 그 방법 외에는 남은 방법이 없네요. 언론들은 언젠가 조금은 좋은 세상이 오면 세월호에 대해서 다시 제대로 된 다큐멘터리를 만들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오늘 두 감독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 작품에서 가져다 쓰겠죠. 그래서 결국 지금으로서는 기억하는 건 투쟁이고, 기억할 사람들을 우리가 옆에서 힘을 잃지 않도록 돌봐드리고 또는 힘을 보태드리고 여러 가지 작품들로 남기고. 이거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언론이 이렇게 얘기하면 안 되는데, ‘저희가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는데 이렇게 말씀 못 드리는 게 죄송합니다.

 

 

영화 〈바람의 세월〉 스틸컷

 

 

문종택: 항상 느껴왔던 거지만, 말씀이 항상 품격이 있으신데 알아 듣기도 쉽게 말씀해주세요. 옆에서 들으니까 부럽기도 참 감사합니다. 어제 총선이 있었는데요, 사전 투표율 조사를 괜히 봤어요. 그걸 보고 언뜻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루도 아닌 밤에, 반나절 동안 제가 받았던 희망 고문. 제가 봐서는 결과가 좀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반나절 동안의 어떤 희망 고문의 과정이 있었죠. 여러분들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저희는 현 정부 말고 그 이전 정부의 5년 동안 희망 고문을 받았던 그런 세월이 있었습니다. 각자 느낌에 따라서 그런 성향도 있고 성격도 있고 감정선도 있겠지만, 저희 세월호 피해 가족들은 대부분이 섭섭한 감정이 아닙니다. 어떤 임계점을 전 정부에 대한, 특히나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감정들이 섭섭하거나 좀 너무했다, 이런 감정이 아니라 이미 넘어서 있어요. 그런 거죠.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그런 감정들이 있습니다.

 

변상욱: 영화에서 잘못 쓰인 것 하나를 보면 공권력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실은 공권력이라고 하는 공식 용어조차 없습니다. 공권력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경찰 병력이면 경찰 병력이고 군대는 군대고 탱크면 탱크지, 공권력이라고 하는 거는 법 용어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권력을 존중해 주십시오.’ 하면 거짓말입니다. 공권력 하면 뭔가 존중받아야 하고 엄정하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어떤 법의 집행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찰이 물대포를 쏘면 그냥 폭력입니다. ‘공권력이 나한테 물대포를 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되는 거죠. 결국 공권력이라고 하는 틀 속에 다 집어넣고 ‘이거 존중해. 우리는 공적으로 권력을 공정하게 행사하는 거야.’라고 하는 것이니까요. 그 물대포나 호위망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꼼짝달싹을 못 하는 거죠. 밖으로 나가면 범법자가 되는 것 같고 나라에 위해를 끼치는 것 같고 하니까 마음들이 너무 착해서 꼼짝을 못 하죠. 그러다가 벌어지는 일은 결국은 자기들끼리 책임을 전가하거나 괜히 원망하거나 하다 보면, 오히려 내부에서 갈등만 커지지.

그다음,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집에 다시 들어서는 순간까지, 그건 국가 책임입니다. 집에 문을 열고 나오고부터 다시 집에 들어가면서 문을 닫을 때까지의 모든 시간과 안전과 생명에 관한 거는 다 국가의 책임입니다. 심지어는 집 안에서 미끄러져서 넘어지거나 유리잔이 깨져서 손을 다치거나 하면 국가 책임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을 병원에 빨리 가서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은 국가 책임입니다. 근데 국가가 항상 책임질 순간이 딱 닥치면 ‘거기 왜 갔냐?’부터 시작해서 제일 가능한 한 책임의 손을 밑으로 빼려고 하죠. 세월호 같으면 선장 그다음에 해경, 중간 간부, 일선에 있던 사람들. 이태원 참사도 똑같습니다. ‘왜 출동을 왜 늦게 했어?’라고 119에 따져 묻는다든가 이런 식이죠. 그럼 용산구청장, 행정안전부 장관 다 책임을 면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항상 국가가 국가다운 것은 안전과 생명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집 바깥으로 나선 순간 다 책임져야 하는데, 국가의 책임이 아닌 것처럼 하면서 제일 약한 권리를 찾아 책임을 전가합니다. 지금으로서는 가슴 아픈 장면인데, 5.18 유가족들하고 대구 지하철 참사의 유가족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또 위로해야 하고, 세월호 유가족 유가족들은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을 또 위로해야 하고. 그러면 나중에 기다리는 그다음 유가족들은 또 누가 되는 겁니까? 국가가 책임을 안 지면 계속 그다음 유가족을 또 위로하러 가야 하고 그들은 그다음에 유가족들을 또 위로해야 하고. 이 악순환이 계속 끊어지지 않죠. 언론이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기사로 계속 써야 하는데 못하고 있으니까... 말씀드릴 게 없네요.

 

문종택: 말씀 중에 저희 김환태 감독님과 제가 영화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지금 그대로 그냥 다 말씀해주셨어요. 저희의 의중이 이런 참사를 계속 맞이할 것인가, 각자 학생의 위치에서 어떤 직장 내 위치에서 자기 현재 삶에 있어서 이 영화를 보시고 나가는 걸음에 어떤 방향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고요. 또 다른 참사는 당연히 없어야 하겠지만, 피해자인 저는 한 10년 동안 거의 야전에서 노숙하다 보니까 이게 피부에 와 있는 겁니다. 다음 사고가 제 옆에 와 있는 거예요. 이게 참 말씀드리기 참 죄송한데, 이게 보인다고나 할까요? 이대로 가면 정말 큰일 나거든요. 단지 내 가족이냐 내 친구냐 내 지인이냐 아니면 지방에 있는 누구냐. 이 차이만 있을 뿐이지, 이게 와 있는 걸 저는 느끼거든요.

 

변상욱: 실제로는 여러분들이 기억을 다 일일이 하시지는 못하지만, 엄청나게 왔다 갔죠. 전남에서 요양병원 화재 사고부터 시작해서 가까운 판교에서 환풍구가 무너져서 거기서 콘서트를 보던 사람들이 떨어져서 숨지고. 인천 앞바다에서 어린이들 펜션 사고하며 엄청난 사고들이 다 스쳐 지나갑니다. 정말 큰 사고여서 유가족들이 막 참지 못하고 들고 일어났을 때, 계속 사고들이 스쳐 지나가고 또 스쳐 지나갑니다.

 

 

영화 〈바람의 세월〉 스틸컷

 

 

문종택: 대기자님, 10년 전을 어떻게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언론적인 이야기보다 2014년 4월 16일에 대기자님은 어떻게 이 참사를 마주하셨는지요.

 

변상욱: 그때는 CBS에 몸담고 있을 때고 미디어 본부장이었습니다. 미디어 본부장은 간단히 말씀드리면 기자, PD, 아나운서, 기술 파트를 총책임지는 본부장 자리죠. 그래서 아침 8시에 보도국장하고 PD, 아나운서를 담당하는 제작국장을 쭉 앉혀놓고 회의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서가 쪽지를 갖고 와서 “커다란 여객선이 뭔지 모르지만, 바다에서 좀 기울어져 있답니다. 근데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타고 있답니다.” 그래서 회의를 진행하다가 “안 되겠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도국장이랑 편성국장, 제작국장 다 내려가라. 내려가서 지휘해라.” 저도 갸우뚱 하다가 바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가서 생방송으로 뉴스가 진행 중인 스튜디오로 들어갔죠. 그랬더니 보도국장이 긴급 뉴스를 계속 내보내고 있더라고요. 저도 보도국장 뒤에서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 갑자기 저쪽에 있는 모니터에서 반짝하더니 전원 구조 속보가 뜬 거예요. 그다음 KBS, MBC, SBS, YTN, 연합뉴스 해서 한 14개 방송사 모니터 자막에 전원 구조가 연달아 계속 켜지는 거죠. 그러니까 보도국장이 저를 쳐다보더라고요. “전원 구조됐다는데요.”하고. 글쎄, 내가 보기에도 진도가 팽목항에서 먼 거리도 아니고 배가 워낙 커서 일단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은데 조금 기울었다 하더라도 완전히 기울려면 한참 남았고 구조선들이 가면 전부 다 실어 내올 수 있을 만한 거리 같은데…. 다른 데는 이미 다 그렇게 나갔나 봤는데, 보도국장이 “전부 다 그렇게 나갔으니까, 우리도 전원 구조 속보 내야겠습니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도 전원 구조를 냈죠. 근데 전원 구조는커녕, 참담한 일이 벌어졌던 거죠.

그다음에 갑자기 어떤 영화감독이 전화를 거셨어요.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해서 실제로 전원구조 오보를 한 언론인을 인터뷰해야겠는데, 아직도 아무도 인터뷰를 안 해준다. 당신이 해줄 수 있냐.” 이게 아마 김동빈 감독이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아무도 안 한답니까?” 물어보니까 아무도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출연하게 됐습니다. 회사로 카메라 촬영 장비를 다 갖고 오셨더라고요. 근데 여러분들 아마 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맥베스 효과’라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손을 자주 씻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죄책감이 조금씩 덜어지거든요. 셰익스피어 희곡 ‘맥베스’에서 맥베스가 살인한 다음에 계속 손을 씻듯이, 뭔가 잘못한 사람이 손을 씻는 걸 맥베스라고 합니다. 저도 몰랐는데 나중에 다큐멘터리 보니까 제가 인터뷰하면서 계속 손을 맨손으로 이렇게 씻더라고요. 얼굴은 한 0.5초 나가고 손이 한 10초는 나간 것 같아요. 저도 죄책감 때문에 계속 손을 마찰하면서 씻고 있었던 거죠. 이 생각이 나고, 그다음에 국장들하고 부장들을 데리고 ‘단원고에 한번 가보자.’해서 단원고에 갔던 기억도 납니다.

근데 얘기를 꺼냈으니까 ‘왜 전원 구조 오보가 나느냐’ 하면은, 취재 시스템이 오보가 날 수밖에 없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면 미국 같으면 어떻게 되느냐, 참사 현장을 제일 많이 경험해 본 사람이 일단 나섭니다. 그다음에 현장을 죽어라 뛰어다닐 젊은 기자들, 청와대를 맡을 기자, 해경을 맡을 기자, 경찰청, 검찰청,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습니다마는 행정안전부, 이걸 맡을 기자들이 다 집결하죠. 그래서 경험이 한 30년, 40년 된 기자가 젊은 기자들이랑 에디터를 데리고 현장에 갑니다. 에디터가 변호사랑 연락하고 교수들이랑 연락하면서 기자한테 사인을 보내주죠. 이 문제는 이렇게 하는 게 맞고 이 문제는 이러면 명예훼손에 걸리기 때문에 이건 빼야 하고. 이런 것들을 쭉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경력이 많은 기자는 청와대, 국무총리실, 행정안전부에 있는 자기 기자들한테 연락하고 젊은 기자들은 유가족이랑 잠수부를 만나서 들은 정보를 가져오고. 마지막에 기사를 작성하는 거는 경력이 많은 기자가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사를 가장 많이 써본 사람만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이런 일들과 막 밀려 들어오는 정보를 빨리 취합해서 버릴 거 버리고 요점만 잡아서 쓸 수 있거든요. 그렇게 해야 하는데, 대한민국 시스템은 가서 밤새우기 좋은 제일 젊은 기자들한테 빨리 가라고. 가보면 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거든요. 도대체 누구한테 전화를 걸어야 할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옆에 유가족이 있고 경찰도 왔다 갔다 하고. 몇 마디 그냥 얻어들은 거 가지고 그냥 바로 기사를 쓸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고참이 가면 행정안전부, 청와대에 있는 기자들도 다 자기 후배니까 기사 쓰는데 뭐가 좀 부족한 거 같으면 ‘야 뭐 좀 알아봐라. 그거는 검찰에서 네가 물어봐라.’ 이렇게 다 취합을 하는 거거든요. 그걸 옆에서 에디터가 도와주고. 이렇게 기사를 써야 오보가 없고 크로스 체크가 돼서 틀린 것들을 잡아내고 하는 건데, 젊은 기자 몇 명이 가서 전에 엿들은 거 가지고서 기사를 쓰니까 ‘무전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대.’ 그러면 쓰는 거죠. 더군다나 또 위에서는 ‘야 기삿거리 없냐. 지금 세월호 때문에 기사가 많이 필요한데 왜 이렇게 글을 안 보내냐.’고 재촉하고. 그러면 그냥 주워들은 거 아무거나 빨리 보낼 수밖에 없고. 속보 경쟁에 베껴 쓰기에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압박 속에서 쓰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합쳐지면서 결국 전원 구조 오보를 비롯한 숱한 오보들이 막 등장하는 거죠.

그러면서도 제일 아프게 기억에 남는 것은 지금도 검색하면 아마 그렇게 나올 것 같습니다만, 세월호랑 진상 규명을 검색하면요, 뭐가 나오냐면 종북 좌파, 그다음에 김정일, 김정은 이런 단어들이 뜹니다. 왜냐면 정부는 어디에선가 세월호에 관한 얘기를 잘라버리고 싶은데, 뭔가 자를 만한 명분과 희석할 어떤 핑계가 필요하거든요. 맨 처음에 잡은 게 여러분들 기억하시는 구원파입니다. 그때는 구원파 유병언 씨만 잡으면 국민들은 모든 게 다 해결되는 줄 알았던 거죠. 정부가 그렇게 몰고 가고 언론들이 그렇게 받아 쓰니까. 흔히 말하는 프레임의 전환, 물타기 수법이 있었고, 그다음에 거기에 계속 종북 좌파와 북한을 끌어들입니다. 제가 SBS의 기억나는 멘트를 하나 소개할까요? “오늘 드디어 세월호 진상 규명에 대한 조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이렇게 하고 내용을 소개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뭐라고 하냐면, “오늘 드디어 북한의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한 것이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이 소식이 상당히 큰 소식인데 빨리 전해드려야 되겠습니다마는, 세월호 관련해서 오늘 발표가 있었기 때문에 세월호 소식을 먼저 전해드리고 가겠습니다.” 앞에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세월호 소식이 있으면 세월호 소식을 전하면 되는데 그 앞에다가 오늘 김정일, 김정은, 북한 이야기 한참 한 다음에 그 뒤에다가, “그런데 세월호 잠깐 먼저 하고 가겠습니다.” 이러니까 연관 검색어에 그런 게 같이 뜨는 거죠. 그나마 이거는 세월호를 맨 앞에 올려놨다는 거죠. TV조선 같은 경우는 17번째로 나왔을 겁니다. 그 앞에 여러 소식 다 집어넣고 17번째로 세월호 소식이 나갔던 거죠. 언론이 참사를 대하는 태도는 이렇습니다. 절대 고쳐지지 않는 태도죠.

 

 

영화 〈바람의 세월〉 스틸컷

 

 

관객: 10년이라는 이 분기점이 길고 힘든 시간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이제 이렇게 됐다.’라고 이야기 들을 수도 있는 시간인데요, 이러한 시점에 이러한 영상들, 기록을 정리해 내놓으시고 오늘을 맞는 마음과 오늘 이후의 시간을 맞으실 마음이 어떠실지, 혹시 들을 수 있을까요?

 

문종택: 주신 질문에 엉뚱한 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씀드릴게요. 세월호 관련해서 10년 동안 지금까지 도시마다 한 달에 한 번씩 세월호 리본 나눔을 하고 촛불을 켜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순간까지 매주 월화수목금토일 중에 하루를 잡아서 세월호 촛불을 들고 계신 곳도 아직 대한민국에 일곱 군데가 있어요. 그분들은 늘 말씀하십니다. “우리 부모님들, 우리 아버님, 마음의 짐 갖지 마세요.”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아버지인 저는, 그분들이 촛불을 들고 있는 과정들의 삶이 녹록지 않다는 걸 가까이서 늘 뵙거든요. 조금 전에 질문 주신 분도 문화예술을 하시면서 대학로 마로니에에 매주 토요일마다 7시 30분부터 2시간가량 아직까지 촛불을 들고 계십니다. 저와 함께 그곳에서 매주 촛불 드시는 그분들한테 미안해서라도 어떻게든 버티고 가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대답을 드립니다.

 

관객: 안녕하세요. 지성이 아버님께 여쭤보고 싶은데요. 이제 유가족분들이 10주기, 아니면 1주기와 2주기를 지나면서 원하는 것들이 약간씩 달라졌을 텐데, 현재 유가족들이 10주기를 맞이하며 정부에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듣고 싶고요. 두 번째로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 협의회에서 매일 분향소를 라이브로 방송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도 매일 출근하면 인터넷 접속해서 분향소를 그냥 화면에 켜놓으면서 기억하고 있는데요. 혹시나 세월호도 분향소든, 아니면 어느 한 곳을 쭉 방송으로 송출을 해 놓는 인터넷 상의 공간이 있다면 그곳에서 계속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말씀을 한번 드려봅니다.

 

문종택: 질문 감사드리고요. 1주기, 2주기 지나면서 요구하는 것들이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하는 거는 외람되지만 조금 질문이 빗나갔고요. 저희는 2014년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진상 규명입니다. 달라진 요구도 없고요, 더 원하는 것도 없고요. 오로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통한 안전한 사회’입니다. 개인적으로 말씀을 드릴게요. 그냥 솔직하게. 절대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지성이 아빠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릴게요. 기억하지 말아 주세요. 잊지 않겠다고 하는 그 말씀, 하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진실 규명 하나 제대로 하면은요, 부사적으로 따라올 일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냐, 기억한다는 게 여차하면 앨범이 됩니다. 혹시 추억으로 10년을 보내신 분들은 이곳에 안 계시겠지만, 저는 그런 분들을 많이 만나요.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건 ‘나는 아니겠지’가 아니고 여러분들 집에서 중고등학교, 초등학교 때 앨범 1년에 몇 번 보십니까? 먼지 케케 묻어 있지 않나요? 세월호가 추억이 될까 봐. 그래서 제가 기억하고 잊지 말자, 그렇게 하지 말자는 겁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린 전국 일곱 군데에서 켜는 촛불이, 그게 꼭 거기에 가서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고. 내 몸에 붙어 있는 리본 하나가, 밴드 하나가, 차량의 스티커 하나가 다시 이걸 끄집어내서 어떤 사람을 다시 상기시켜 줄 겁니다. 4시 16분에 제 핸드폰에는 벨이 울립니다. 오후 4시 16분, 가장 어떻게 보면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른하기 좋은 그 시간에 가족분들이나 지인들이나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저희처럼 사랑한다는 말 미처 못 하고 떠나보내기 전에, 벨을 지정해서 그 시간에 꼭 세월호가 아니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합니다.’하고 전화 한 통 하는 게 참 좋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진실 규명을 하는데요, 지금 저희가 실질적으로 1기라고 이야기하는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 그다음에 선체조사위원회(이하 선체조사위)가 있을 거예요. 얼마 전에 제일 마지막으로 했던 사회적 참사 가습기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 이렇게 크게 세 가지를 움직였습니다. 1기 특조위에서는 1, 2, 3차 청문회까지 했고요. 선체조사위와 사참위는 청문회 하나도 못 했습니다. 그 사참위의 모든 특조위 위원장님은 급수로 따지면 장관급입니다. 특별조사위원장 하면 특별한 장관이 되는데, 지난 정부에서는 이 특별한 장관을 단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마지막 조사 발표 기자회견을 하는데 하도 질문이 우습길래 제가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위원장님, 청와대에서 한번 만나자고 찾아와 주신 적이 있습니까?” 단 한 번도 불러준 일도, 찾아준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1년 넘도록 청와대에서 창문만 열면 들리는 분수대에 저희 부모님들이 계셨거든요. 그러면서 민정수석, 사회수석을 내려보내면서 저녁에 ‘춥지 않냐’고. 겨울에 눈이 쌓여서 지금 핫팩을 바닥에 깔고 있는데 ‘춥지 않느냐.’ 약 올리는 거죠. 피해 당사자들은 ‘부모 죽어봐라.’ 이 소리로밖에 안 들립니다.

제가 봤을 때 사회가 변화된다는 것은, 크게 움직이고 이런 것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이 움직이면 자연스레 바뀔 텐데 말이에요. 제 막내아들이 군대에 가 있거든요. ‘우리 아들이 군대 안 가면 누가 지키냐.’ 이 말이죠. 서로가 ‘나도 안 지켜. 나도 안 지켜.’하면. 그러니까 군대 가 있는 제 아들이 최고 애국자라는 이 말이죠. 제가 이때까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이유도, 정부도 안 해, 그리고 어떤 단체도 다 끝나고 어떤 특조위도 끝났어, 그러면 어떻게 해요? 말로만 진상규명? 저는 가족들한테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도대체 진상 규명을 끝까지 한다는데, 어머님, 아버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방법을 묻습니다. 기자들은 그걸 물을 수가 없어요. 근데 저는 계속 기자들보고 가족들한테 물으라고 했습니다. 마이크만 갖다 대고 카메라만 갖다 대면 우리는 끝까지 진상 규명을 할 건데, ‘진상 규명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입니까?’라고 물으라고. 근데 그 질문을 안 합니다. 근데 해야 돼요. 왜? 끝까지 진상 규명한다고 하시니.

일반 시민이 동사무소 하나 들어가는 것조차 너무 힘들어요. 카메라들은 뒤에 이름이 있기 때문에 관공서 들어가는데 좀 수월하지요. 왜 왔는지, 취재원인지 아니까. 저는 절차 하나 밟을 때마다 ‘저 이런 사람입니다. 저 이렇게 해서 이분 좀 만나러 왔습니다.’ 해야 돼요. 들어가는 것조차가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 그걸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결국 지고 있던 10년의 카메라와 주변의 감독님들 도움으로 이렇게 영화가 탄생됐다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대기자님 덧붙이실 말씀 있으신가요?

 

변상욱: 세월호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영상에서 보셨던 게 기준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아까 공권력이라는 건 다 허상이라고 말씀드렸는데 프랑스 같은 경우 대형 참사가 생기면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가 제일 먼저 하는 건 호텔을 예약하는 겁니다. 왜 호텔을 예약하는 거냐, 대형 참사에 많은 희생자와 실종자가 생기는데 그 가족들은 그 시내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전국 곳곳에서 몰려들 거기 때문에 그들이 묵어야 되거든요. 실종자나 유가족들이 어떻게 그 자리를 떠나겠습니까? 못 떠나거든요. 장기간 투숙하면서 실종된 가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거나 거기서 유류품 하나라도 건지려고 하고. 또 사태가 해결되는 걸 그 자리에서 보고 싶어 하거든요. 그러니까 호텔과 모텔 예약하는 게 제일 먼저 하는 일입니다.

그다음에 먼 곳에서 생계를 놓고 떠나와야 되니까 바로 생활지원비부터 책정합니다. 근데 우리나라 같으면 그렇게 안 하죠. 법적 근거가 없는데 생활지원비를 막 줄 수도 없고요. 그러나 국가가 이 문제에 대해서 진짜 관심이 있으면, 일단 생업을 놓고 참사 현장을 오셨으니까 ‘가족들의 생계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하면서 생활지원비부터 나간다는 거죠. 그 이후에 정산은 다 국가적으로 할 수 있어요.

이태원 참사 같은 경우에는 이야기해봤자 안 먹히긴 하던데, 저 같으면 해밀톤 호텔을 국가가 사서 거기다가 그냥 추모 성당을 지으면 되는 겁니다. 이래야 하는데 호텔은 가만히 두고 골목길을 갖다가 어떻게 살짝 해보려고.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거든요. 참사 현장에 있으면 참사 현장이 추모 성당이 되건 추모 교회가 되건 거기에 사찰을 짓든 간에, 그 자리에서 해결하면 되는데 그럴 만한 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해밀톤 호텔 살 돈도 국가가 있고 단원고 같으면 아예 단원고 옆에다가 학교를 짓고 단원고 전체를 성지로 만들든지,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안 나서는 거죠. 그러니까 기준이 다른 겁니다. 아까 보셨죠? 맨 첫 장면에 해경이 조그마한 텐트 쳐주고 거기에 유가족들 지내게 하라고. 경찰이 텐트를 치는 게 아닙니다. 텐트는 경찰한테 맡길 게 아니고 행정안전부가 제일 먼저 나서서 임시 가설물 세워서 난방과 냉방, 수도, 샤워실까지 다 갖춰서 유가족들이 거기에 묵게 해야 하는 겁니다. 시내에서 벌어졌으면 호텔을 예약하지만 진도 팽목항은 그런 게 없으니까. 기준이 벌써 다른 거예요. 세월호 때 벌어진, 진짜 관공서 한번 들어가기도 힘들었던 경험이 기준이 되면 안 됩니다. 재난과 재난 이후의 대처 기준은 실제로는 엄청나게 높습니다. 그리고 그게 너무나 당연한 거고. 근데 우리의 기준은 너무 낮게 책정돼 있고 그것조차도 마치 엄청나게 베풀어주는 것처럼 돌아가는 이런 상황은 기필코 바뀌어야 하는 거죠.

 

문종택: 아까 질문 주신 분한테 한 가지 좀 빠뜨린 게 있어서요.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위에서는 젊은 미디어팀들이 꾸려져 있어서 그걸 계속 방송하는 거고요. 세월호 관련해서도 지금 10년 동안 꾸준히 방송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방송도 처음에는 노숙도 하면서 광화문이고 국회고 특별법 시행을 위해서 한창 달렸었는데, 세월이 지나다 보니 요즘은 영상이 틈틈이 올라가 있습니다. 한 방송에서 계속하고 있어요. 그 방송에서 10년 동안 기록했던 영상을 압축해서 만든 게 오늘의 다큐멘터리이고 그 방송이 ‘세월호 유가족방송 416 TV’입니다.

 

 

영화 〈바람의 세월〉 스틸컷

 

 

관객: 안녕하세요. 제가 여쭤보고 싶은 부분은 장면에 관한 부분인데요. 좌우로 기우는 여러 순간을 담은 장면들이 엔딩 크레딧 포함해서 여러 부분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장면들을 그런 식으로 연출하신 이유가 따로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김환태: 한 5번 정도 나온 것 같습니다. 퀴즈 같은데요, 느끼셨겠지만 움직이는 장면은 아버님의 요구였던 것 같아요. 저는 다큐를 만들었던 사람으로서는 그런 장면들을 배치하는 게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처음에 말씀하실 때 당혹감이 좀 있었습니다. ‘가만히 있는 화면에서 느낄 수 있는 게 더 많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버님이 말씀하시길, ‘우리가 모두 세월호에 타고 있다.’라는 것들을 표현하고 싶으셨다고 해요. 좀 자의적이라도 그런 아버님의 마음이 담긴 장면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버님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그런 요구였던 것 같고 나중에 그런 방식을 모니터링하면서는 이 영화의 특색으로서 좀 자리 잡은 것 같아서 나름대로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전체를 다 돌리자.’, 또 언제는 ‘빙글빙글 돌리자.’고 하셔서 말렸던 기억이 나는데요. 어떤 지점들을 좀 통해서 세월호 가족분들의 마음, 우리가 이 세월호에 타고 있다, 대한민국이 세월호다, 아직도 운행 중이다. 이런 마음을 담아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벚꽃 장면에서 한 번 움직였고요, 교실과 팽목에서 한 번, 그다음에 목포 신항에서 한 번, 아이의 방과 세월호 내 외부에서 또 한 번, 마지막으로 엔딩 크레딧에서 한 번 움직였습니다. 한 5번 정도 움직였는데 아버님의 마음입니다. 유가족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종택: 제가 중간에 가편집 할 때 흔들어 달라고 그랬는데 안 흔들어 줘서 한태 감독님한테 삐진 적이 있었습니다. 혹시 변상욱 기자님, 시간이 지금 거의 다 돼서요, 대기자님이 영화 보신 소감을 간략하게 정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변상욱: 언론에서 이런 다큐멘터리가 매년 4월이 되면 쏟아져 나왔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점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얘기한다면 2027년인가요? 대통령 선거가 있을 거니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리 작업을 해서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뭐를 내놓을 거냐, 이런 식으로 한 번 따져 묻는, 재난 참사의 모든 유가족들의 공동의 어떤 움직임 같은 것, 그리고 시민들이 거기에 동참하면서 더 멀리 보면서 일을 크게 가져가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종택: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었던 말씀을 이렇게 고급지게 잘 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요. 한 가지 좀 이렇게 당부를 좀 드리겠습니다. 10년 동안 저희가 해놓은 거는 진실 규명에 대한 게 별로 없지만, 그래도 광장에서 그 추웠던, 더웠던 우리 촛불 시민들의 힘으로 어찌 됐든 탄핵이라는 그런 강도 건넜고요. 저희 4월 3일에 개봉했는데요, 극장이 하나둘씩 꺼지고 있습니다. 하나둘씩 지켜야 하는데요, 시간대가 도통 맞지 않아 지금은 도대체 영화를 보려야 볼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제가 하루에 평균 30통의 문자나 전화를 받거든요. “아버님, 영화를 도대체 어디서 보는 거예요?” 저도 대답을 못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 죄송하지만, 많은 예매를 통해서 이 영화가 오래 극장에 걸려 있도록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릴게요. 안산의 단원고 아이들이 250명이 쓰러졌는데 안산에 영화관 하나를 안 열어줘서 제가 시네마달 배급사의 우리 김일권 대표님한테 전화했어요. 울었습니다. “이게 이렇게 되면 되냐. 빚을 내더라도 극장을 며칠이라도 사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정말 여러모로 노력해 주셔서 우리 시네마달이 결국 안산에서 지금 세 군데인가 열었지만 지금은 한 군데 정도만 남아 있습니다. 또 아이들이 도착할 세월호의 목적지가 어디였죠? 제주였잖아요. 제주에는 아직 한 군데도 극장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실이 참담하지만, 그걸 참담하다고 계속 그렇게 할 수만은 없기에 예매를 통해서 좀 함께 가주셨으면 하는 그런 간절한 바람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대기자님, 더불어 저와 그리고 이곳에 귀한 시간 내신 옆지기분들을 위해서 큰 박수를 치고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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