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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절해고도〉인디토크 기록: 두 번의 삶

by indiespace_가람 2023. 10. 13.

두 번의 삶

〈절해고도〉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3. 9. 20(수) 오후 7시 30분 상영 후

참석 김미영 감독, 박종환 배우, 이연 배우

진행 정성일 평론가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태현 님의 기록입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절해고도〉 의 인물들은 두 번의 삶을 살아본다. 변화하는 인물들에 발 맞춰 영화의 여정 또한 새로이 변한다. 창문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기만의 공간에 머무르던 윤철은 문밖에 놓인 사람들의 시선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영화를 만드는 일은 타인의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일 테다. 서로가 연루되던 순간에 대한, 만든 이들의 솔직한 회고와 함께 〈절해고도〉 의 믿음직한 시간을 떠올려 본다. 

 


정성일 평론가 (이하 정성일): 아무래도 김미영 감독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며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미영 감독과 영화 잡지 편집실에서, 편집장과 기자로 처음 만났습니다. 김미영 감독은 편집실에서 1년 정도 머물렀었고, 그런 다음 영화를 만들기 위해 키노를 떠났습니다. 2016년 〈일어서는 인간〉, 2018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를 만들었고, 방금 보신 〈절해고도〉가 그의 세 번째 영화입니다. 〈절해고도〉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환기하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요약해 보겠습니다. 조각가 윤철은 잘 나가고 있지는 않지만, 이혼 이후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지나를 가끔 만납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영지를 알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이야기가 소소하게 진행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가 스님이 되겠다는 문자를 보낸 다음 입산합니다. 충격을 받고 말없이 베트남으로 떠난 윤철이 다시 돌아왔을 때, 이번에는 영지가 떠납니다. 외롭게 떨어져 나온 느낌을 받은 윤철은 자살을 시도합니다. 여기서부터 영화가 다시 시작됩니다. 윤철은 조각 작업을 그만두고 암자를 오르내리며, 도맹이라는 법명을 얻은 딸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영지가 되돌아옵니다. 암이 재발한 영지는 죽음을 기다립니다. 윤철은 지켜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절해고도〉라는 제목처럼 이 영화는 담담하기는 하지만, 점점 외로운 섬이 되어가는 윤철을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영화도 변해갑니다. 영화의 장면을 잘 음미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작할 때의 몇몇 장면은 굉장히 긴 롱테이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영화의 시작, 재훈이 윤철의 컨테이너 작업실에 찾아옵니다. 이 장면을 3분 가까운 롱테이크 무빙 카메라로 쫓아갑니다. 또 카페에서 윤철이 지나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패닝으로 연결되는 롱테이크로 찍혀 있습니다. 하지만 윤철이 자살을 시도한 이후로, 롱테이크가 사라집니다. 완전히 다른 영화처럼 진행됩니다. 이 영화는 고전적 진행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상한 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자살 시도 이후 새로이 시작되는 영화는 앞선 서사 구조를 다시 반복합니다. 〈절해고도〉는 식당에서 시작했습니다. 이야기가 다시 시작하고 난 후, 윤철은 식당 주인이 되어있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윤철이 학교로 찾아가 지나를 만나려 했을 때, 그는 지나의 친구 연희를 먼저 만납니다. 이후 도맹을 만나기 위해 암자를 찾아갔다가, 친구를 찾아온 연희를 만납니다. 윤철은 강의실에서 영지를 만납니다. 다시 영화가 시작된 이후, 수녀원에서 휠체어에 앉아있는 영지를 만납니다. 식당에서 시작된 영화는 식당에서 끝납니다. 그렇게 〈절해고도〉에는 느슨한 형식적 반복 구조가 있습니다. 이를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왜 윤철은 식당으로 돌아왔나요?’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영화에는 윤철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모두 6번 나옵니다. 보이스 오버는 통상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거나 내면을 전달하는데, 〈절해고도〉의 보이스오버는 그런 것보다는 시를 낭송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절해고도〉의 까다로운 점 중 하나는 인물들이 그들의 내심을 잘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유심히 지켜본 사람만이 인물들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윤철이 자살을 결심하고 외딴곳에 차를 끌고 갑니다.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어 삶이 끝나려는 순간, 밤낚시를 하러 가던 낚시꾼이 그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윤철을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영화가 한참 진행된 다음, 지나/도맹의 생일 케이크를 먹는 자리에서 금우 스님이 이야기합니다. “애 낳느라 고생하셨어. 이만큼 키우고”. 그러자 윤철이 대답합니다. “제가 뭘요”. 그러자 도맹이 지나가듯 대답합니다. “포기하지 않으셨잖아요. 옆에서 지켜봐 주셔서 저는 고맙죠”. 그러자 윤철이 의아해하며  묻습니다. “제가 행자님을 버릴 수도 있는 겁니까?”. 그때 도맹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합니다. “그때 거사님 죽을 뻔하셨잖아요”. 그 순간 문득 윤철은 지나가 자살 시도를 지켜보고 있었고, 죽으려고 했던 아버지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화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윤철의 클로즈업을 찍습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두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장면을 따로 본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행간이 읽히지 않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행간을 읽는 영화입니다. 행간으로 영화를 쫓아온 사람들은 마음을 읽어내셨을 것이고, 장면을 본 사람들은 장면만 보셨을 것입니다. 〈절해고도〉는 이런 방식으로 인물 사이의 마음을 설명하기 때문에 유심히 보지 않으면 마음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각자의 인물들의 각자의 마음을 연기한 배우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 안으로 들어와야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김미영 감독과 배우들이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을 것입니다. 저도 많이 궁금합니다. 극장으로 들어오기 전, 이야기를 나눴는데 여러분들의 질문이 많이 궁금하답니다. 김미영 감독과 박종환 배우, 이연 배우를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김미영 감독 (이하 김미영): 안녕하세요. 〈절해고도〉 연출한 김미영입니다. 

이연 배우 (이하 이연): 안녕하세요. 〈절해고도〉에서 지나/도맹 역을 맡은 이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박종환 배우 (이하 박종환): 안녕하세요. 〈절해고도〉에서 윤철 역을 맡은 박종환입니다. 반갑습니다.

정성일: 배우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연 배우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영화와 처음 인사를 나눈 것은 시나리오였을 것입니다. 지나에서 도맹이 되는, 일종의 1인 2역을 연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을 것입니다. 〈절해고도〉는 1인 2역이 믿어지지 않으면, 안 받아들여지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시나리오를 읽고 나면 배우도 감독을 테스트해야 하지 않습니까. 서로 낙점하는 거죠. (웃음) 1인 2역을 연기해야 하는 이 영화를 위해서, 감독을 만나면 질문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있으셨습니까?

이연: 시나리오를 보기 전에, 이미 감독님의 전작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라는 영화를 봤었어요. 아버지와 딸에 대한 이야기를 또 한 번 하시는 이유가 있으시겠다고, 분명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느꼈어요. 그래서 다른 것보다는 제목에 대해 여쭤봤었어요. 그게 2020년 정도였어서, 제가 했던 말과 답이 기억나지는 않는데요. (웃음) 저는 촉과 감을 믿는 사람인데, PD님과 감독님이 주는 에너지가 좋았어요. 그리고 저는 제 선택을 믿는 편이라 감독님을 낙점하기 위해 (웃음) 뭘 묻기보다는, 이분들과 영화를 만들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정성일: 이 영화의 특징은 이연 배우, 박종환 배우, 이 자리에는 없으시지만 강경헌 배우까지 모두 일종의 1인 2역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연 배우는 지나에서 도맹이 되고, 박종환 배우는 자유분방하게 살던 예술가 윤철로부터, 딸을 보기 위해 암자를 오르내리고 수녀원에 있는 영지를 보기 위해 드나드는 또 다른 윤철이 됩니다. 윤철은 새로운 윤철로 변하게 되는데, 심지어 영화 안에서 외모 또한 1인 2역으로 보입니다. 윤철이 머리를 자르고 나왔을 때, 새로운 사람을 보는 기분을 받기도 했습니다. 〈절해고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윤철을 따라가는 영화입니다. 윤철의 동선이 끊어지면 영화 전체가 끊어지는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윤철의 큰 변화가 일어나는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박종환 배우께 똑같은 질문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시나리오를 받아 들고 감독을 만났을 때, 어떤 질문을 던지셨는지 궁금합니다.

박종환: 저는 시나리오를 다 읽고 나서 인물들이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심어져 그때부터 감독님을 낙점하고 만나 뵙게 됐어요. (웃음) 그래서 스케줄이나 촬영 일자를 가장 먼저 여쭤봤었습니다. 꼭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성일: 딸과 아버지가 마음을 교환하는 영화이기에, 딸로 어떤 배우가 출연하게 될지 굉장히 궁금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연 배우를 처음 만나셨을 때 어떤 인상을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좋은 이야기이겠지만,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보고 싶습니다.

박종환: 자기최면을 시도했던 것 같습니다. 나에게 딸이 있다면 저런 모습에 가까울 것이라는 상상과 최면을 계속했어요. 이연 배우를 처음 만난 이후로, 저를 볼 때면 아빠라고 부르겠다고 해주어서 그때부터 상상에 날개가 달렸던 것 같아요. 딸과의 관계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정확하게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이연 배우와 친밀함을 느끼며 촬영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정성일: 이 자리를 준비하면서 잠시 배우분들을 만났는데, 이연 배우가 박종환 배우에게 “거사님”이라고 부르시더라고요. 똑같은 질문을 이연 배우님께 드려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내 아버지를 연기할 사람이구나’ 생각하셨을 테고, 연기자로서 마주하게 되는 믿음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맥락에서도 신뢰가 매우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박종환 배우를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이연: 시나리오를 받을 때부터 박종환 배우가 윤철 역을 맡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주변 동료들이 종환 선배를 너무너무 좋아해요. 저는 종환 선배를 만난 적도 없었을 때였는데, 동료들이 저한테 선배를 만나봤냐고 물으며 “종환 선배 너무 좋다고” 항상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시나리오에 있는 종환 선배의 이름을 보고 기대를 많이 했어요. ‘얼마나 좋은 사람이길래?’ 생각하면서요. (웃음) 실제로 만나보니, 뭐라고 해야 할까… 리스너의 자세라고 해야 할까요? 항상 타인의 말을 들을 자세가 되어 있는 분 같았어요. 감독님의 주선으로 망원동에서 처음 뵙게 되었는데, 헤어질 때쯤 다음번에 만났을 때는 아빠라고 부르겠다고 말했어요. 좀 편해지자고, 반말도 하자고 말했었는데요. 며칠 뒤에 정동진독립영화제에 놀러 가 맥주를 사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나타났어요. 화들짝 놀라서 “아빠!”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날부터 마치 제가 딸인 것처럼 많이 챙겨주셨는데요. 거사님께서 많이 노력해 주신 것 같아요. 그 후로 편하게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정성일: 영화 속에서 두 분은 카페에서 대화하는 장면으로 처음 만납니다. 실제 촬영 현장에서 두 분이 처음 만난 것은 어떤 장면이었나요?

이연: 시간 순서대로 촬영해서, 그 장면이 처음입니다.

정성일: 그 장면이 꽤 길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몇 번 정도의 촬영이 진행되었나요?

김미영: 저희는 평균 세 테이크 정도 촬영했는데요. 영화 속에 롱테이크가 7~8개 정도 있었는데, 그런 장면들은 반 나절 동안 그 장면만 촬영한다고 계획하고 찍었습니다. 15번의 테이크 정도 촬영했던 것 같습니다.

정성일: 15번의 테이크 만에 OK가 났다면, 그 OK의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김미영: 두 배우의 표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성일: 그 표정을 보면서 두 배우가 윤철 / 지나로 들어왔다는 느낌을 받으신 건가요?

김미영: 충분히 미워하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감정이 보이는 테이크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영화 〈절해고도〉 스틸컷

 


정성일: 시나리오 이야기를 나눴으니, 김미영 감독에게 질문을 이어보겠습니다. 〈절해고도〉가 어디서 시작된 이야기인지 궁금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시나리오가 단숨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계속 고쳐나가며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시나리오의 첫 출발은 어디였습니까?

김미영: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너무 사는 게 힘들어서 삶을 리셋하고 싶은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만약에 삶을 다시 살게 되면, 그건 지금의 제가 아닌 거잖아요. 그런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연 배우가 말한 것처럼 아버지와 딸에 대한 영화를 찍어봤었는데, 다 못한 부분이 있다고 느껴 다른 방식으로 해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정성일: 김미영 감독의 전작을 보지 못하신 분들은 궁금하실 수 있을 것 같아 간략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전작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다루지만, 아버지와 딸 이야기라는 교집합이 있습니다. 또 둘 사이에 어머니가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절해고도〉는 같은 설정을 반대 방향에서 다시 그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김미영 감독에게 여쭤보자면, 아버지와 딸의 관계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십니까?

김미영: 내가 살아가게 될 타인의 세상을 대표하는 사람 같습니다.

정성일: 조금 풀어주실 수 있을까요.

김미영: 엄마처럼 제가 일방적으로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분명 뭔가를 저에게 준 사람. 제가 앞으로 살아가게 될 세상을 대표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정성일: 같은 질문을 이연 배우께 드려봐도 될까요. 아마도 지나/도맹을 이해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읽으며 수없이 질문하셨을 것 같습니다. 지나/도맹에게 아버지 윤철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연: 많이 고민했어요. 몽글몽글하게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 의미였어요. 그래도 찾아낸 의미가 있다면, 미치게 닮고 싶었지만, 닮아버리기엔 세상을 살아가기 무척 어려워질 것 같아 닮기 싫은 사람? 닮기가 싫어서 나 스스로를 때리게 만드는 사람, 그러다 못해 아버지를 때리고 싶게 하는 사람. 무척 사랑하는데, 무척 미운 사람.

 

정성일: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합니다. 강경헌 배우께 질문을 드리고 싶었는데, 감독님께서 대신 답변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윤철과 지나/도맹 이외에도, 아버지와 딸 관계가 영화에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우리는 수녀원에서 알게 되는데, 영지와 아버지는 불화 관계입니다. 단지 불화 정도가 아니라 연을 끊은 것 같습니다. 영화가 영지와 아버지 사이의 역사를 알려주지 않지만, 아마도 이 둘의 불화는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온 영지에게 윤철과 지나를 바라보는 감정은 특별했을 것입니다. 영지는 아버지로서의 윤철을 어떤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설정하셨나요?

김미영: 영지가 세상을 떠도는 사람이라면, 그 이유는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일 것이라 생각어요.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영지는, 윤철이 지나를 독립적인 존재로 생각하기를, 그래야 딸이 살아날 것이라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영화 〈절해고도〉 스틸컷

 


정성일: 전작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와 〈절해고도〉는 모두 실패한 예술가에 대해 다룹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두 편 모두 인물들의 실패가 그들의 심리상태와 이야기 진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사업에 실패하는 것과 예술가로서 실패한다는 것에 완전히 다른 뉘앙스를 읽습니다. 이 모티브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미영: 매일매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작에서 딸이 아버지의 공연이 실패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는데, 그 공연을 실패로 규정하고 제가 영화를 찍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어요.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거든요. 평이하고 듣기 좋은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의 성취는 널리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다른 이유일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요. 인간으로 태어나 삶을 살면서 떠올리는 질문들이 있는데,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과정을 성공이나 실패로 규정지을 수 없지 않나 생각해요. 그래서 〈절해고도〉에서는 예술가의 실패를 다르게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정성일: 박종환 배우에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 대사로만 미루어 짐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대사로 나오는 윤철의 삶은 좀 기구합니다. 어머니는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러자 산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윤철은 아버지와 살았습니다. 윤철은 신부님이나 승려가 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예술 중 미술, 미술 중에서는 조각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의 말이 돌아오는 듯, 딸 지나가 귀의합니다. 자신의 결심이 긴 세월을 지나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마치 업보처럼요. 그래서 윤철이 수녀원에서 영지를 바라보는 감회, 입산한 지나를 바라보는 감회는 남다를 것 같습니다. 윤철은 아버지로서 실패했습니다. 딸이 곁을 떠났죠. 남편으로서 실패했고, 이혼했습니다. 연인으로서 실패했고, 영지가 떠나 죽을 때 돌아왔습니다. 예술가로서도 실패했습니다. 〈절해고도〉는 윤철의 실패에 대한 기록의 영화입니다. 윤철은 왜 이렇게 실패하는 것일까요. 그의 실패가 부모의 반복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도식적이긴 하지만,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를 읽으시면서 윤철의 기구한 삶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실패를 반복하는 윤철의 삶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종환: 분명히 어린 시절 기억들이 윤철의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을 경험했을 때, 그 경험을 통해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런 해석을 잘하지 못해 했던 것들을 다시 해야 하는 일이 잦았을 것 같고요. 그래서 윤철의 여러 실패들에 대해 제가 받는 인상은, 윤철이 예방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실패로부터 발전해야 하는데, 주로 그러지 못했던 것 같고요. 기억 속의 것들이 공포심으로 발현됐는데, 그런 순간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을 것 같고요. 주변 또래들보다는 미진하게 나아갔을 것 같습니다. 

정성일: 갑자기 고해성사를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네요. 김미영 감독에게 질문드리겠습니다. 〈절해고도〉는 동네 식당에서 시작해서, 동네 식당에서 끝납니다. 첫 장면에서 윤철은 식당의 손님으로 등장했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식당의 주인으로 끝납니다. 수미상관의 구조인데, 그렇다고 해서 식당이 영화 안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거나, 서사 진행의 모티브가 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지나는 식당에 방문한 적이 없고, 영지도 그렇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은 친구 경수뿐입니다. 하지만 경수가 영화의 서사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영화을 열고 닫는 식당에서 관객이 어떤 감흥을 느끼길 기대하셨나요?

김미영: 세속적인 공간 한복판에서 영화를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장소에서 시작하는 예술가의 동선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음식을 먹고, 계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서 음식을 남기기도 하고요. 우리가 어떤 사건을 겪고 나면, 세상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그 전과 너무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낯선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장소로서의 식당을 마지막에 그리고 싶었습니다. 처음으로부터 무엇인가 변해 있는 모습을 담고 싶었습니다.

정성일: 영화가 앞으로 진행되고는 있지만, 인물들 사이의 시간이 뭔가 기괴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나/도맹으로만 이야기를 따라가면, 〈절해고도〉는 둘로 나눠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절해고도〉는 윤철을 따라가는 영화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윤철은 지나가 입산한 다음 베트남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기간만큼 다녀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다녀왔습니다. 베트남에서의 시간을 건너뛰었습니다. 영지가 떠납니다. 영지가 떠나고 난 다음, 공사판에서 발을 다친 다음 컨테이너 집으로 돌아옵니다. 얼만큼 입원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후 자살을 시도합니다. 시도 이후 일상생활로 복귀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을 텐데, 그냥 시간을 건너뜁니다. 윤철은 암자에 찾아와 도맹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고 있자면, 윤철은 도맹을 처음 만난 것이 아니라 이미 몇 차례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고 나서 윤철이 머리를 깎았습니다. 심경의 변화가 있는거죠. 그러고 국수 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영화는 역시 그런 순간을 건너뛰고 있습니다. 영화를 반복해서 보면서도, 이런 기간 동안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런 영화들이 있죠. 모든 시간을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윤철을 바라보고 있으면 영화 속 시간이 엄청나게 흘러간 것 같은데, 지나/도맹과 친구 연희를 바라보고 있으면 몇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같이 대학교에 가자고 연희가 도맹을 찾아옵니다. 영화의 앞부분에서 틀림없이 둘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저는 윤철과 지나/도맹의 시간이 분리되어 진행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의 시간 진행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미영: 일단 연희는 재수생이고요. 1년의 시간은 벌었습니다. (웃음)

이연: 사복을 입고 찾아오거든요. (웃음)

김미영: 영화가 정확하게 설명을 해주면, 인물의 행동과 이유를 마치 알 것 같잖아요. 그런 느낌을 없애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추측할 수밖에 없고, 추측은 결코 맞지 않을 것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윤철이 마음을 추스른 이후의 장면들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윤철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지나도 학교를 그만두고 중국도 다녀오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고 설정했는데요. 지나가 머리를 깎기까지의 모든 시간을 우리는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나 또한 마음을 추스르고 결정을 내린 이후에 관객 앞에 나타난다고 생각했고요. 그게 두 인물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정성일: 이제 관객분들의 질문을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관객: 영화에 등장하는 대사를 경유해 세 분께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삶에서 원해서 가지게 된 것이 있는지, 또 원하지 않았지만 갖게 된 것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지 궁금합니다. 

김미영: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니까 원하는 것을 얻어야겠죠. 그런데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고, 원해서 먹으면 뒤끝이 안 좋을 때가 많더라고요. 오히려 계획하지 않은 순간에 더 중요한 것들을 얻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영화를 찍기 위해 지금의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만나 여기까지 오는 과정은, 원해서 얻어진 것이라기보단, 예상치 못한 순간들에서 비롯된 것 같거든요.

이연: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참 없더라고요. 시간도 없고, 휴가도 마음대로 갈 수 없고, 이게 내 인생인지 세상의 인생인지 알 수 없는데요. 자잘한 것들을 떠올려 보면, 이 옷은 제가 원해서 가진 거고요. 헤어스타일도 제가 원해서 한 헤어스타일이고요. 인생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 거의 태반이니까, 하루 24시간 안에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사소한 것들을 제가 원하는 것들로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작은 선택들을 통해 제가 원하는 인간상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원하지 않아도 갖게 되는 것은… 인연의 시작은 제가 원해서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노력의 시절이 지나고도 제 곁에 남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제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에, 제 곁에 남아주신 모든 분께 요즘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박종환: 이 작업을 함께 하는 것은 제가 원했던 것이고요. 작업을 통해 이렇게 여러분들을 만날 것이라는 건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지점인 것 같아요. 개봉이라는 게 항상 원하지만,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모든 영화가 개봉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서요. 이런 순간들은 저에게 선물 같습니다.

관객: 영화를 보기 전 예고편을 봤을 때, 지나/도맹과 윤철의 관계가 저와 아버지와의 관계와 닮아있다고 느꼈습니다. 지나는 도맹이 되는 과정에서 아버지를 용서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연기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연: 도맹이 됐다고 해서 윤철을 용서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제 곁을 계속해서 머무르는 아버지의 모습에 감동했던 것 같아요. 이전에 구슬 아이스크림처럼 몽글몽글하게 쌓여있는 미움에 관해 이야기 했는데, 그런 것들이 하나씩 톡톡 터진다고 해야 할까요. 윤철의 행동들로 감동받고, 눈물을 흘리고, 감탄하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도맹이 얼마나 멋진 스님이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수행의 과정에서 윤철에 대한 미움의 이유가 전부 윤철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내 안에서 미움이 일어났기 때문에, 내 마음을 잘 공부하고, 윤철을 바라보는 시선을 정결하게 만드는 시간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관객: 윤철이 노래방에서 저스디스의 노래를 부르시더라고요. 노래 선택에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박종환: 작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가 들었던 노래를 감독님께서 시나리오에 넣어주신 거고요.

김미영: 저희 시집을 가져와 주신 관객분들이 보이는데요. 저와 이연, 박종환, 강경현 배우가 ‘나의 절해고도에게’라는 제목으로 쓴 네 편의 글과, 고명재, 안미옥, 안희연, 오은, 유진목, 이혜미 시인 분들께서 써주신 글이 담겨있습니다. 각자 다른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보고 너무 귀한 글들을 써주셨어요.

이연: 많은 분이 들고 계셔요!

정성일: 훌륭한 관객이십니다. (웃음)

관객: 〈절해고도〉를 통해 영향받거나 변화한 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박종환: 제가 이해하는 윤철의 특징, 혹은 단점에 대해 이야기 했었는데, 그런 부분이 저에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영화의 시간이 흐르며 윤철이 가지게 되는 의지를 저 또한 가지고 싶었습니다. 

이연: 사람 앞에 붙는 프레임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우리의 이름 앞에 역할들이 부여되잖아요. 딸이면 딸, 아빠면 아빠, 학생이면 학생, 이런 것이 저는 너무 답답하고, 세상을 흥미롭지 않게 만드는 것 같은데요. 좀 다 빼버리고, 나 자신으로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 타인을 바라볼 때 프레임을 걷어내고 그의 삶을 이해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개인에게는 고독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시간을 소화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영화 〈절해고도〉 스틸컷

 


관객: 영화에 케이크가 자주 나온 것 같아요. 윤철의 꿈에서는 꺼지지 않는 촛불이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습니다. 

김미영: 저희 영화가 종교영화는 아니지만, 불교에서 번뇌가 소멸하는 순간을 초가 꺼지는 순간이라고 한다고 해요. 우리가 세속을 떠나지 못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도맹의 흰색 케이크는 그가 선택한 길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관객: 윤철이 미술의 길을 걷지 못한다면 종교에 귀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결국 지나가 그 길을 걷게 되잖아요. 배우님들도 지나가 윤철을 닮았다고 생각하시나요? 감독님도 그렇게 의도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이연: 저는 두 명이 정말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박종환: 저는 종교가 예술을 하는 사람이 그걸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선택지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다른 곳으로 가게 되는데, 조금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곳으로 갈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도 지나의 현재가, 과거의 자신이 그렸던 미래이기 때문에 윤철은 신기하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정성일: 자리를 끝내기에 앞서, 질문 조금만 더 해보려고 합니다. 지나에게는 많은 선택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지나는 중국 여행을 갔다가 죽을 뻔합니다. 그리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납니다. 여기서 얻은 깨달음이 지나가 불교에 귀의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습니다. 저는 영화에서 찍지 않은 장면이 궁금합니다. 과정이 궁금하달까요. 때로 이렇게 말하는 배우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머리를 깎을 수 없습니다. 그 정도로 설명하면 못 깎습니다”. 아마도 설득이 되었기 때문에 이연 배우께서 결심하고 받아들였을 겁니다. 지나가 입산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깨달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연: 사실 저는 입산이 깨달음의 결과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어떤 길이 정답인 줄 알고 가는 것은 없으니까요. 저는 지나가 도맹이 된 과정이… 씨가 땅에 묻혀 있을 때 어떻게든 뚫고 발아하려고 하잖아요. 생각을 피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 더 부딪힐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어요. 온전히 모든 기억을 끄집어내서, 거름으로 바꿔 잘 살 수 있는 힘으로 바꾸려고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관계도 아닌 사람들이 나를 구해준 순간, 찢어질 듯한 본인의 세상에서 빛을 본 것 같아요. 누군가가 날 도와줄 수 있고, 그러니 나는 나의 경험만으로 모든 사람을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까지는 정리가 됐으니, 이야기의 끝을 잘 씹고 씹어서 마무리해 보자는 생각으로 절에 들어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절에서 그렇게 울고 뛰고 웃고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성일: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승려가 될 수 있었는데 미술은 선택한 사람입니다. 지나는 미술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승려의 길을 택했습니다. 아버지와의 결별이나 저항의 뉘앙스로 보이기도 합니다. 지나의 선택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이연: 지나는 자기에게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 거죠. 오늘 첫 질문으로 감독님에게 뭘 여쭤봤냐고 물어봐 주셨잖아요. 지금 생각이 난 건데, 감독님께 “지나는 승려가 되어 그곳에 계속 있었을까요?”라고 여쭤봤어요. 저는 시나리오를 보고 지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왔을 것 같았거든요. 감독님도 그 말에 동의 해주셨어요. 지나는 자신의 미래가 유동적이고,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기에 승려가 되는 것도 선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정성일: 박종환 배우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윤철은 지나의 문자를 받고 감정이 굉장히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베트남으로 떠났고 영지와도 연락을 끊었을 겁니다. 그리고 베트남으로 돌아오는데, 윤철은 지나가 아니라 영지를 찾아갑니다. 보이스오버에 따르면 이게 마지막 사랑이라고 합니다. 아마 윤철은 지나에게 버림받았고, 자기에게 남은 사람은 영지밖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영지를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지가 떠나갑니다. 아시다시피 베트남은 비자가 보름동안 나오죠. 그러니 길게 가봐야 보름 갔을 겁니다. 보름동안 고민하고 돌아와서 딸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윤철은 영지가 떠나가자, 자살을 결심합니다. 김미영 감독은 이런 고민의 순간을 차례차례 찍는 대신 건너뛰면서 찍었기 때문에, 쫓아가는 관객 또한 건너뛰면서 쫓아가게 됩니다. 이럴 때 배우가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감독은 연결이 다 되죠. 머릿속에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감정선을 ‘썼다 치고’ 이해해 버리기 때문이죠. 저는 수없이 그런 예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미영 감독의 스승도 그렇게 영화를 찍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배우에게 생기죠. 이런 이야기를 안성기 배우님에게 들었습니다. 임권택 감독이랑 영화를 찍을 때 어려운 것은, 감독은 다 알고 있고 막 건너가는데, 자기는 이걸 쫓아갈 수 없다는 겁니다. 연기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야단을 무지 맞았다고 합니다. 저는 박종환 배우가 비슷한 곤경에 처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윤철이 머리를 깎고 도맹의 암자에 도착하게 되는 과정에서, 감정선을 어떻게 연결하셨는지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종환: 시간을 건너뛰긴 하지만, 어떤 일들을 맞고 다음 상황을 맞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연기를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예로 들면 외딴곳으로 차를 몰고 가 스스로를 방치시키는 장면에 대해서, 그 앞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는지는 명확하게 정하고 가진 않았지만, 그럴 만큼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지나와 암자에서 마주하는 장면들에서는 이전의 관계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기보다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 집중했어요. 서로의 기억 속에 잊히지 않는 모습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한 것 같아서, 사이의 시간을 얼마나 건너뛰었는지는 어려움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정성일: 구체적으로 질문드려 보겠습니다. 모든 감독이 배우에게 감사할 때는, “이 장면에서 저 장면으로 넘어갈 때 감정이 어떻게 되는 거예요?”라며 토론하듯이 질문을 요청할 때가 가장 감사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배우가 드디어 인물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죠. 〈절해고도〉를 찍으며 잘 모르겠는 부분을 김미영 감독에게 질문했었던 장면은 어디입니까? 내내 화기애애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김미영: 화기애애했습니다. (웃음)

박종환: 처음부터 전체의 이야기를 같이 짚어가며 궁금한 것들을 질문했던 시간이 있었고요. 거의 모든 장면마다 그랬습니다. 그중에서도 도맹이 암자로 들어가고, 윤철도 암자에 머무르는 장면을 찍다가 중간에 명절이 껴 있어서 촬영을 쉬었고요. 그때 머리를 자르고, 쉬는 시간 동안 감독님과 대화를 나눴는데요. 그때까지 촬영하면서, 감독님께서도 응당 모든 순간들에 대한 답을 가지고 계신 건 아니라는 걸 눈치챘고요. (일동 웃음) 감독님께 윤철의 새로운 모습들을 이것저것 제시했었는데, 다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 해주셨어요. 그래서 감독님께서 전체적으로 생각하시는 부분은 뚜렷하게 있지만, 자잘한 부분에서 꼭 어떻게 해야 한다는 지점들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정성일: 시간만 있었다면 숏 바이 숏으로 영화에 대해 질문하고 싶지만, 두 가지 질문만 던지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왜 아무도 이 장면에 대한 질문이 없는지 조금 궁금합니다. 멧돼지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윤철이 영지를 찾아 달려갑니다. 그러다 어미 멧돼지와 마주칩니다. 놀라서 자빠졌는데 지나/도맹이 나타납니다. 둘은 함께 산길을 내려옵니다. 암자에 들어온 이후 유일하게 여기서 윤철을 아빠라고 부릅니다. 그러고는 굉장히 이상한 대화를 나눕니다. 윤철이 대학교에 가라고 말하자, 지나가 “생각해 봐. 진짜 뭐가 더 나은지”라고 답합니다. 윤철이 모르겠다고 답하자, 지나가 “알 수 있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 봐”. 윤철이 “안 죽어. 안 죽었잖아”, 그러고 지나가 대답합니다. “한 번만 해봐. 나도 해봤어” 그러자 윤철이 “행자님, 같이 가죠”라고 말하는 대신, “지나야, 같이 가자”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윤철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나옵니다. 집 나간 엄마를 떠올립니다. 그런 다음, 이 영화의 유일한 드론 촬영이 나옵니다. 하늘에서 누군가 내려다보는 것 같습니다. 내려다볼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죠. 윤철의 엄마입니다. 이 장면이 결정적인 장면 같은데, 저에게는 쉽게 이해가 안 됐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 조금 더 설명 듣고 싶습니다.

김미영: 이 영화가 여태껏 해왔던 여러 이야기들을 한 번 압축해서 보여준 것에 가깝습니다. 이 두 사람이 살아왔고, 살아갈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산 너머에 있는 마을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잘 보이지 않은 것 같아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호칭들이 주는 의미를 남기고 싶었어요. 자기 자신이, 자기 머릿속에 있는 자아뿐만이 아니라, 피에서 피로, 땅에서 땅으로 연결되는 부인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존재를 환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영화 〈절해고도〉 스틸컷

 


정성일: 김미영 감독이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시나리오를 쓸 무렵 저에게 차기작의 제목이 떠올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에게 이야기한 제목은 ‘절해고도’가 아니었습니다. ‘숲길’이었습니다. 금방 떠오르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마르틴 하이데거가 예술 철학에 대해 쓴 글을 모은 책입니다. 김미영 감독이 존재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맥락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절해고도’가 나은 제목 같습니다. (웃음) 

마지막 질문입니다. 〈절해고도〉는 드라마투르기로서의 사건이 벌어지지는 않습니다만, 수상할 정도로 오싹한 엔딩으로 끝납니다. 영지는 곧 세상을 떠나거나, 어쩌면 이미 세상을 떠났던가, 여하튼 죽음을 맞이할 겁니다. 지나는 도맹으로 살아갈 겁니다. 정확히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소승불교의 길을 택했다면 아버지와의 연을 끊어버릴 겁니다. 그래야만 용맹정진을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윤철도 알 겁니다. 자기 딸의 각성에 방해가 될 것이기에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윤철은 더 이상 작업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기 도구들을 다 정리해 버리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더 이상 예술은 윤철에게 어떤 도구도 아니며, 의지처도 아닙니다. 영화에서 만났던 유일한 친구 재훈과 경수도 드문드문 찾아오고, 더 이상 윤철을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영화의 제목이 ‘절해고도’입니다. 영어 제목으로는 망망대해의 외로운 섬입니다. 아마 그것이 윤철의 앞날일 것입니다. 저는 첫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윤철이 행성에 놓인 사람 한 명을 조각합니다. 그걸 부숴버리면서 영화가 시작됩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윤철이 한 번 더 자살을 시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당 부분 제 소설입니다만, 이 영화의 많은 제스쳐들은 불길하게 보입니다. 김미영 감독께서는 극장을 떠나는 관객들이 어떤 감흥을 가졌으면 좋겠습니까?

김미영: 음…. 우리가 진실에 대해 말하지만, 진실은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근데 어쨌든 여러분 현재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을 저는 진실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오늘 영화를 보시고 내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일어난 자기 자신이 친숙하고 예뻐 보였으면 좋겠어요.

정성일:  오늘 좋은 답변을 들려주신 김미영 감독님, 이연 배우님, 박종환 배우님께 감사드리고, 긴 시간 이 자리를 지켜주신 여러분에게도 감사합니다. 응원의 뜻을 담은 박수로 이 자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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