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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단평] 〈피아노 프리즘〉: 이름만 불러 주면 계속

by indiespace_가람 2023. 9. 26.

*'인디즈 단평'은 개봉작을 다른 영화와 함께 엮어 생각하는 코너로,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인디즈 큐'에서 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영화 〈피아노 프리즘〉 스틸컷

 

이름만 불러 주면 계속

〈피아노 프리즘〉〈춤, 바람입니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이빈 님의 글입니다.

 

 

조금씩, 천천히, 계속. 그렇게 해나가면 무언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격언을 몇 번을 마주쳤는지 모른다. 머리로 이해했고 각막엔 문신처럼 새겨지고도 남았을 말은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다. 눈앞에는 마모되는 스스로를 느끼며 열정을 담보로 전진하는 것이 체화된 사람들이 보인다. 요새 번아웃 온 것 같다는 말을 들을 때면 조금씩, 천천히, 계속의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을 같이 고민하는 척했다. 다음날이 되면 깊이 몰두하는 상태가 되지 못한 것에 지루해하고 손 놓기를 반복했다. 여기, 〈피아노 프리즘〉에는 손 놓는 많은 사람들 틈에 계속 계속 건반 위에 손을 얹는 사람이 있다. 주인공 오재형은 아침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고 피아노 학원에 간다. 그 스스로 말하길 밥 먹고 피아노만 치고 있다. 저 사람 피아노가 너무 좋은가 보다 할 수 있겠지만 그는 피아노 치게 된 특별한 사건을 늘어놓지 않고, 좋아하는 이유를 덕지덕지 붙이지 않는다. 대신에 두 대의 피아노가 놓여 있는 방에서 잠을 자고, 피아노 앞에서 운동을 한다.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불 다 꺼진 방에서 밤낮 따지지 않고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다시 조금씩과 계속, 마모와 열정을 떠올린다. 그는 둘 중 무엇인가 하면 마모와 열정, 둘 다이다. 양자택일 아닌 둘 사이를 오가는 방식이라면 바라던 세계에 접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사할 때 여느 피아니스트들처럼 피아노에 손 얹어 볼 수도 있는 거고, '피아니스트 오재형입니다.' 하고 소개 인사를 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오재형은 '잘'은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하고 있고, 벽이 느껴지는 세계라는 것을 한껏 실감하면서 인정한다. 선생님에게 이런저런 질문과 제안을 하며 피아노를 배우는 그를 보고 있으면 그동안 내가 참지 못했던 것은 애매함과 어설픔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다른 세계로의 접속 시도는 꽤 오랜 시간 지루하다는 것을 실감할 뿐,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한편 그는 피아노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단편들을 카메라로 담고 있는데, ‘피아노 학원을 오가며 본 것들에 관하여’가 그랬다. 피아노는 삶이 되었고 동시에 삶들을 선명히 보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피아노와 살고 있다기보다 피아노로 살고 있는 듯 보이는 그는 예술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자문한다. 그 목적은 스스로가 즐거워하는 방식으로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을 붙잡고, 부르는 데 있었다. 

 

 

출처: EBS 다큐프라임 <예술의 쓸모 1부 춤, 바람입니다>

 


그가 피아노 학원을 오가며 본 것들을 따라가다 작년 이맘때쯤 보았던 〈춤, 바람입니다〉를 떠올렸다.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춤을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아홉 명의 지하철 노동자들이다. 이때의 춤은 지하철 청소노동자 또는 경비원으로 일하는 나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들여다 보기 위한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 청소하고 있는 나를 알아볼까 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며 일했던 배남이 씨는 언젠가 수치스러워했던 순간의 몸동작을 안무로 만들어 본다. 아홉 명 모두에게는 각자의 사연과 몸동작들이 있다. 아홉 명으로 한정했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몸으로 기억하는 제각각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지하철 경비로 일하고 있는 공상만 씨는 몸이 따라 주지 않으니 당장 그만둬야겠다 생각해 놓고 나름대로 연구하면 몸동작이 된다고 말한다. 이들은 몸에서 몸을 덧입히는 방식으로 춤의 세계에 접속했고 스스로 이름을 찾았다. 무대에서 내려온 배남이 씨는 그동안 내가 배남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고 말한다. 춤추는 동안에 몸은 배남이 세 글자를 그 누구보다 알고 있었고, 부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지난 기억들을 몸으로 되짚어 보고 함께 춤추는 과정은 그들이 계속해서 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마침 〈춤, 바람입니다〉의 시리즈 제목은 ‘예술의 쓸모’다. 무언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여전히 하지 않지만 이름 정도 찾고 싶다는 마음으로, 몇 가닥 잡히는 쓸모를 쥐고-그게 무엇이든 간에-계속 한다. 

 

 

* 작품 보러가기: EBS 다큐프라임 〈예술의 쓸모 1부 춤,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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