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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 Review] 〈물꽃의 전설〉리뷰: 소멸된 아름다움을 찾아서

by indiespace_가람 2023. 9. 12.

 

〈물꽃의 전설〉 리뷰: 소멸된 아름다움을 찾아서

 

*관객기자단 [인디즈] 조영은 님의 글입니다. 

 

 


해녀는 용궁에서 태어나서 용궁으로 돌아간다. 〈물꽃의 전설〉은 바다는 말이 없지만,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아름다운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녀는 그들이 꿈꾸는 고통 없는 섬인 이어도를 반복적으로 부르며 물질의 고달픔을 노래한다. 영화에는 바다의 신, 바람의 신, 용왕할머니를 담은 영등굿을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물꽃의 전설〉은 이 신화적인 대상을 주체가 세상 속에 자신을 고정시키는 근원적인 서사로 뒷받침한다. 현실 세계에 카메라는 향하고 있지만, 그 현실을 감싸는 허구의 픽션적 세계관이 있는 셈이다. 이들이 숭배하는 것은 현실에 필요로 하는 환상의 버팀목이며, 이는 다큐멘터리에서 기록된 현실의 순간들, 특정한 서사의 생산이 명확히 밝혀지는 고전적인 성찰의 순간들과 대면하게 한다.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아름다움의 이미지가 있지만, 말 그대로 전설일 뿐, 눈으로 볼 수 없고 더 이상 만질 수도 없다. 아름다운 바다를 되살리고 보존하는 해녀 문화와 어업 노동도 마찬가지다. 세대 간의 전승이 되어야 하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영화 〈물꽃의 전설〉 스틸컷



삶의 터전이 된 바다를 이어 나가게 하는 것은 달이 이끄는 힘이다. 영화가 그려내는 ‘아름다운’ 풍경에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이미지와 사운드가 개입된다. 첫 장면에 해질녘 바다의 자글거리는 이미지가 프레임을 한가득 채운다. 밤하늘의 달이 클로즈업 되고, 불투명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달을 바라보는 현순직 해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카메라는 전경부터 후경을 가르는 바다의 모습을 다양한 구도에서 담는다. 제주 해녀들은 그곳으로 들어가고, 현순직 해녀와 채지애 해녀의 하루하루를 시간순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적극적으로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들의 시점이나 동선을 가만히 따르지 않고, 이미 다음 숏에서 인물들은 바뀐 공간에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거나, 어딘가에 도착해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 삶의 터전인 바다를 비추는 달빛은 해녀의 삶이 달의 시간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카메라는 현순직 해녀와 채지애 해녀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한다. 특히 현순직 해녀가 가는 어디든 그곳에는 카메라가 있다. 그러나 카메라가 그를 가만히 따르거나 지켜보는 일은 드물다. 영화는 적극적으로 카메라의 위치를 드러내며 픽션적 요소를 만들어내어 현실에 변형을 가한다. 여기서 영화가 설정한 현실 세계에 어떤 간극을 느끼게 되는데, 지나치게 아름다운 이미지를 제시하는 영화의 풍경은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에 더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화면으로 보이는 것 너머로 근원적으로 무엇을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영화가 바다의 환경오염과 어업 노동의 현재를 고발하는 다이렉트 시네마적인 성격의 영화였다면 간극을 느낄 수 있겠지만, 바다에 보내는 헌사와도 같은 다큐멘터리이고, 이에 픽션적 요소를 더했다면 우리는 그 아름답고 광활한 풍경 너머의 메시지를 읽어내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출자가 만들어 낸 아름다움의 이미지는 진실된 아름다움에 가깝다기보다 아름다움이 소멸되어가는 현실의 중요한 이미지에 닿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앞서 언급했던 영화의 첫 장면은 아름다움보다 소멸의 이미지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숏에서 밤하늘의 안개 낀 달빛이 비춰진 후, 창문 바깥으로 불투명한 달을 바라보는 현순직 해녀의 뒷모습이 등장한다. 이러한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반복은 이미 소멸해 버린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물꽃의 전설〉을 통해 보아야 할 것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라면, 이에 대한 반복을 통해 우리는 소멸하여 가는 진실된 풍경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 너머의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은 소멸된 아름다움이고, 영화는 그것을 상실한 풍경을 그리기보다는 더욱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물꽃의 전설〉 스틸컷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설정숏을 사용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때때로 드론 카메라에 담긴 광활한 바다의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이전에 핸드헬드로 이들 곁에 머무르며 인물과 공간을 동시에 담던 카메라는 노동으로서의 몸짓에 대한 감각을 확장시킨다. 카메라의 불안정한 움직임은 우리에게 보다 자유로운 촉각적 감각을 준다. 출연자들의 움직임 또한 카메라의 운동에 의해 화면 안에서 체현된다. 영화는 매 시퀀스의 처음이나 마지막에 드론숏으로 바다를 보여준다. 이러한 항공 시점의 경관은 우리가 쉽게 볼 수 없는 시점이므로, 당장 바다의 광활함과의 마주를 통해 어떤 경이를 느껴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보는 이에게 어떤 시각적 경험으로 연장될 수 있을까. 수중과 수면에 걸친 카메라에는 작은 물결의 움직임도 마치 요동치는 것처럼 불안정하게 진동한다. 그러나 카메라가 수면에서 갑자기 공중으로 향할 때 수직적 거리감을 더할 뿐, 육안으로 감지할 수 없는 자연적 세계에 대한 관객의 체현적 감각까지는 제공하지 못하게 된다. 

 


소라나 전복은 이끼를 먹고 살아가기에 노르스름한 이끼가 돌에 붙어있어야 하지만, 희끗희끗해서 돌마저도 전부 하얗게 변해버린다. 물꽃은커녕 감태도 없고, 건져낼 수 있는 것은 고작 소라 한 방울뿐이다. 바다가 오염되어서 물꽃도 시들어 버린다. 그가 한평생 보았던 것을 우리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땅에서 (정확히는 현순직 해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앙각 쇼트는 영화의 처음에 마주했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그가 바라보는 먼 대상과 그가 밟고 있는 땅은 평생 살아가는 시간, 유영하는 공간 그 자체인 셈이다. 바다를 보면 아깝지만, 바다가 밉지가 않은 마음은 그런 것이다. 그는 달이 높게 뜬 밤바다의 풍경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오며 프레임 바깥으로 천천히 빠져나간다. 영화는 페이드아웃 되며 전설 속 들물여의 물꽃이 피어난 풍경을 이리저리 떠도는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끝난다. 그곳에는 나무처럼 뻗어 올라있는 빨갛고 푸르스름한 물꽃이 있다. 우리는 앞으로 이 아름다움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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