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다섯 번째 흉추〉: 보존과 영원

by indiespace_가람 2023. 8. 21.

〈다섯 번째 흉추〉 리뷰: 보존과 영원

 

*관객기자단 [인디즈] 진연우 님의 글입니다.

 

 

나는 이불 빨 시기를 감정으로 가늠한다. 침대에 누워 너무 많은 생각을 했을 때,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렸을 때,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을 때. 심지어는 감지 않은 머리도 눅진한 감정의 척도가 된다. 권장되는 세탁 주기와는 무관하게 그곳에 누워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침구를 세탁해야 한다는 생각에 강박적으로 빠져들고, 그 때문에 내가 사용하는 침구는 세탁 주기를 넘긴 적이 거의 없다. 정신이 망가질수록 이불을 세탁기에 넣고 돌려 버려야겠다는 충동은 침대와 내 상태를 동일시하는 데에서부터 기인했다. 이불에 들러붙은 감정들을 살균해 버리기 전까지 부정한 것들이 유령처럼 남아 내 위에 눌러앉을 것만 같은 착각 안에 산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그러한 와중에 매트리스에 핀 곰팡이가 몸을 얻게 되는 영화를 보았다. 이런 상상 안에 사는 사람이 이 징그럽고 아름다운 영화에 동질감을 느끼게 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때로 각자에게 침대는 어떤 공간인지 묻고 싶다. 아마 포근함이 가장 우세할 테지만, 나는 한편으로 침대가 각자에게 가장 은밀한 공간임을 알고 있다. 사람이 마음 놓고 허물어지는 지대에는 결코 새털 같은 아늑함만 존재하지 않는다. 연인도, 거리의 사람도, 병상 위의 환자도 모두 필요로 하는 게 침대라면, 그곳에는 지저분한 애증과, 찌르는 고독과, 슬픈 회한도 있다. 우리가 전쟁 같은 하루를 치러 내고 침대에 누웠을 때 위로받는 기분이 드는 건, 아마 침대는 설명하지 않아도 나를 가장 잘 아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적인 슬픔과 편안함이 너무 익숙해서 가장 무력한 달콤함이 느껴지는 장소. 알고 보면 침대는 많은 것들을 받아 내고 있다.

 

 

영화 〈다섯 번째 흉추〉 스틸컷

 

 

그렇다면 ‘그것’은 왜 사람이 되고 싶어 했을까? 아마 많은 크리처물이 그렇듯이 ‘되고 싶다’라는 명확한 동기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탄생했고, 탄생한 이상 본위의 욕망만을 추동할 뿐. 하지만 ‘그것’이 끈질기게 사람들의 척추뼈를 탐하고, 뽑은 것을 우악스럽게 등 뒤에 쑤셔 넣는 일련의 행위들을 보고 있다 보면 마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영화는 곰팡이가 구체적인 사람의 몸을 갖춰 가는 과정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척추뼈를 강탈당한 이들의 서사는 주변부로 밀려나고, 관객들은 매트리스에 등을 보인 이들의 척추뼈-구체적으로 감정-로 하여금 ‘그것’에 근육 조직이 붙고, 외피 위로 각질층이 덮이고, 미세한 솜털이 자라나는 과정을 아주 자세히 봐야만 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 시청각적 자극들은 직관적으로 소름 끼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어떤 경외감마저 느껴진다. 혐오스러운 것과 아름다운 것은 얼마간 닮아 있다고 했던가. 곰팡이가 꽃과 닮은 것처럼, 부패가 생명을 낳고 관계에 켜켜이 쌓인 상처들이 생을 향한 끈질긴 욕망을 꽃피운 것처럼 우리는 ‘그것’이 아무런 이유 없이 행하는 무위의 질주 앞에서 생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며, 어떤 이유가 있는 게 아님에도 아름답고 징그럽다는 건 분명히 그 존재 자체로 무언가를 은유하고 있다.

 

 

영화 〈다섯 번째 흉추〉 스틸컷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단순한 생명체가 아닌 교감하는 인격체였다는 점에 대해 생각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이 지점은 특히나 중요해진다. 몸을 갖고자 하는 욕망에는 이유가 없었으나, 그는 감정으로 태어나 감정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생명체다. 그가 인간과 닮아 가면서 자신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해 준 이와 행했던 첫 교감과, 몸을 가진 뒤 처음으로 인간과 손을 맞잡았을 때 지었던 표정을 오래 기억하고 있다. 그 수많은 감정을 받아 낸 이가 끝끝내 그것을 이해해 버렸다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어리둥절 실패하는 것만이 인간의 조건이므로. 모든 것을 이해해 버렸기 때문에 완성의 순간에 매트리스는 다시 강물에 버려진다.

 

 

영화 〈다섯 번째 흉추〉 스틸컷

 

 

시간이 지나면 기억과 감정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미화되고 흐려지지만 우리의 몸은 흔적을 남긴다. 한강의 하류에 쌓였다던 뼈들처럼, 영화의 마지막 매트리스에 피어난 버섯들도 우리가 흘려보낸 수많은 기억들을 이미지화한 것일 테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징그럽게 살아남아 죽지 않고 아름다운 마음을 속삭인다. 우리가 한때 함께 바라봤던 것들, 사실은 실패하고 싶지 않았던 내 진심이라거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베개 밑에만 묻어 놨던 나만 아는 고백들. 버려진 것들이 영원을 불러들이는 충돌이 다시금 오래오래 이어진다.

 

나는 누군가가 죽고 난 뒤 그가 못다 전한 말이 꽃으로 피어났다는 설화를 좋아한다. 그러니 곰팡이의 꽃말은 영원. 실패의 무덤에 피어난 꽃들과 쇳소리로 끊어질 듯이 읊어 나가는 편지가 알 수 없는 긴 여운을 남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