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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기획/에세이] 처치의 함

by indiespace_가람 2023. 8. 8.

 

처치의 함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해수 님의 글입니다.

 

 

 

  서문에서 고름을 거스르고 운을 떼진 못하겠다. 원래는 발에 난 연하고 사소한 물집이었다. 당시에 왕복하며 걸을 일이 숱했기에 이해했다. 문득 생긴 입체감은 성가셔서, 차라리 긴 무사를 바랐다. 그날은 ‘하필’이 밀집해 있었다. 장마 구간에 우산을 미비했다. 안 올 거야, 설익은 믿음을 외워봤으나 기어이 왔다. 덜한 사이에 잘 끼고 싶어 몸을 비트는 일에 신중했다. 영상도서관에 가서 독립 영화를 봤다. 등을 웅크린 인물이 영화마다 있었다. 사랑의 교류를 원한 게 모두의 원인이었다. 그래서 끝내 근육이 완만해도, 평평해도 슬펐다. 나에게 홀씨처럼 붙은 활기 있고 동시에 막막한 기분이 설명되지 않았다. 상영을 끝내고 나왔는데, 그것이 터져 처음 보는 제형으로 엉기고 있었다. 검색했더니 질병의 예고로 에워졌다. 의외로 나는 이 공교로움이 좋았다. 원거리에 너와 나의 쌍이 있어서 괜찮았다. 독립 영화에서 ‘하필’을 배우면 기쁘니 상통하는 거라고, 넘겼다. 씬의 외야에서는 인과에 간섭이 가능해도, 인물은 그렇지 않다. 헤매는 마음을 유인해서 이름 붙이기. 필수인 일을 암기하기. 덧댈 타이밍을 알기. ―이는 영화의 안과 밖인 내가 예방하지 못한 목차이다― 우리는 예언을 화면으로 알기에, 그들의 앞장을 말리고 방식을 쉽게 토의한다. 안에서의 성실이 더뎌도 죄다 방어하면 안 된다. 곪음을 걸어 상냥에 체류하게 되기도 하니까. 차츰 정정하면 된다. 정시(定時)로. 그날 나는 열심히 굽어졌다. 아래 세 편의 영화로 처치될 만류를 믿는다.

 


 

이태안, 〈통로〉

 

  여기, 배분에 헐거운 세 명의 인물이 있다. 셋은 수입원을 “구지뇨”란 벌레를 팔아 충당하기로 했다. 애석하게도 구지뇨는, 몫 가르기에 능해야 잘 키울 수 있다. 영화는 서식지 앞에서 내색하는 원식으로 연다. 포획은 어렵다. 배에 랩을 칭칭 두르고, 방독면을 써도 탐탁지 않다. 몸에 일일이 경유하는 어둠에 홀로 가야 해서 그렇다. 원식은 겨우 다섯 마리를 비닐에 넣어온다. 이 구간부터 영화는 제목에 든 통로의 성질을 띠게 된다. 통로에 막 들어섰거나 치우쳐 있으면, 출구와 소원하게 된다. 그러니 나의 지금을 설명하기도 어렵다. 지금이 이곳에서 견딜 수 있는 마음과 체력인지 말이다. 〈통로〉는 이 유랑을 의도하여 앵글에 안 보이게 함으로써, 구별을 정체시킨다. 첫 숨김은 구지뇨에서 비롯된다. 잡아 온 벌레는 세탁기에 가둬져 있다. 이후에도 관객은 벌레의 신체나 기어감 등을 못 본다. 즉, 세 명의 인물이 돌봄을 맡는 양상에 의해 가늠하도록 한다.

 

“이머전시(Emergency)”

 

  비상은 금세 왔다. 구지뇨가 한 마리 외에 몽땅 없어진 사건이 생긴다. 이어서, 생존한 종의 이름은 “통로”이며, 주식으로 구지뇨를 삼는다는 사실을 듣는다. 통로가 칠천만 원에 거래된다는 소식에 셋은 호쾌하게 좋아한다. 이에 원식은 키우는 일을 다시 분담하자는 운을 뗀다. 먹이 급여, 총체적인 관리, 구지뇨를 구해오는 일로 나뉘었다. 축하하며 몸을 맞추던 그들은 즉시 해산해, 자신이 맡고 싶은 순서를 내세우며 다툰다. 이 해결 역시 우리는 육안으로 보지 못하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윽고 현철이 통로와 두 친구가 함께 사라진 “이머전시”를 목격한다. 다솜과 원식은 수신에 응하지 않는다. 현철은 천천히 ‘여기’를 파악하기 시작한다. 새 구지뇨를 받아오는 데엔 실패해도, 혼자 배에 랩을 둘러서 미끈함을 알아낸다. 다솜과 원식과 현철. 셋은 엄연한 개별이나, 꼭 하나의 기관 같이 여겨지는 일시가 있다. 네 발을 딛으며 같이 하울링을 하고, 다리로 ‘U’를 만들어 원식에게 올라탔으며, 탈의한 채 합창하던 오후의 모음이 그랬다. 말하자면 역할을 놀이처럼 해왔다. 돌연 떼어내진 현철은 도치를 써서 기관을, 나를 본다. 현철은 태연히 짖으며 빨래를 입으로 문다. 이전엔 불을 끄라는 다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지만, 이젠 나서서 창으로 간다. 서서히 알게 된다. 비스듬한 경사가 된 블라인드. 원식이 반복하던 “배려, 존중, 이해”의 막연한 진열. 놀이를 역할처럼 대하려 해도, 생긴 공란이 현철을 머뭇거리게 했을 테다.

 

  우리는 명확히 모른다. 통로의 먹성을. 먹이뿐만 아니라 셋이 집에서 삼켜냈을 마음을. 영화의 주제곡인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가 이를 완화한다. 다솜과 원식은 역할에 문득 합류한다. 현철이 미처 통로의 소감을 서술하지도 않은 때였다. 나는 마음은 말로 열거해야 더 명료할 거라 여겨왔다. 그래서 계속 기다렸다. 현철은 언제 살폈던 진격을 말할까? 그러다가 돌림 노래를 다시 톺아보았다. 미숙했던 돌봄이 있어 통로가 컸고, 하염없던 노래를 이어 “창밖의 빗물 같이” 셋은 다시 엮였다. 현철이 컹컹대던 의지 역시 옮기도록 도왔을 것이다. 통로는 통한다는 전제가 있으므로. 사랑에 적셔질 수 있다.

 


이우정, 〈애드벌룬〉

 

  기숙사에 살 때, 나는 애드벌룬을 몰아두는 용도로 썼다. 손목에 있는 점같이 언젠가 생긴 그건 참 빳빳한 인상이었다. 끌어도 내려도 계속 있을 듯이 구는 게 좋았다. 그래서 애드벌룬을 보며 나의 염증이나 경쾌를 몰래 외웠다. 이 영화는 공중에 떠 있는 소문과 안녕을 줄줄 외운다. 해설로 서슴없이 이유리, 김애숙, 서우호, 한혜정의 비밀을 말한다. 이걸 꿰고 있던 인물은 효정이다. 효정은 으레 사건이 말려드는 입구에서 친구를 지켜보았다. “JH”란 이니셜을 커터칼로 긋던 은정을, 내리지 않은 용변의 크기를, 은미의 묘연한 손짓을. 효정은 은미의 말은 잘 여과하지 못한다. 은정의 손목을 두고 “참는 거지, 좋아하니까” 말하는 은미. 다들 떨떠름하게 웃던 화장실에서, “그렇게 큰 똥 아마 죽기 전에 볼 수 없을 거야. 그치?” 서성이던 은미. 은미는 무엇이 뭉쳐 관념으로 굳는지 알아서, 귓속으로 무마되는 걸 반기지 않았다. 아마 자신의 기약도 허비되는 원료가 안 되길 바랐을 게 당연하다. 이는 효정도 확실히 알았을 참이다.

 

  허지붕. 나는 이 저장 명에 깃든 튼튼함이 좋았다. 지붕은 효정의 연락처에 있는 은미이다. 효정과 은미는 하교 후 애드벌룬에서 대면한다. 효정은 은미의 아이스크림 약속을 거절하고, 집에 당도했다는 말을 한 채였다. 하필 은미는 이 엇갈림을 다 봤다. 효정이 은미와 야외에서 흡입하던 약속마저. 복기해보면, 나 역시 친구의 야속한 마음을 발견한 즉시 서두르곤 했다. 약속이 스산해질까 봐 무서웠다. 지금의 항구성은 길었기에 금세 말하길 바랐다. 나도 똑같이 좋아해, 하고. 설령 애정이 비례해도, 마음의 작동이 다름을 이젠 납득한다. 이 원리는 친구가 전체를 이루던 나도 정확히 알긴 했다. 무릅쓰고 들어야 했다. 기약이 나를 띄운 채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친구에게서 점차 배웠다. 슬펐고 동시에 다행인 일이다. 그날의 은미는 지붕을 자원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가렸을 마음을, 진실 게임을 빌미로 여과 없이 냈다. 둘이 지은 사이는 허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들키기 미뤘던 사랑을 은미가 쥐여준 것이다. 효정은 기상 후에 두 개의 지지대가 풀썩, 엉킨 것을 확인하게 된다. 고정이 풀린 애드벌룬 속에 은미가 쓰러져 있었다. 영화는 다시 해설을 켠다.

 

     “옆 반 애가 허지연이 내 가방을 뒤지고 있는 걸 봤다고 했다.”

 

  지연이 효정의 가방에 손을 넣는 장면이 앞서 있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주는 부당한 어감에 속하는 일은 아니었다. 몇 개를 더 공표하던 효정은 이윽고 가만하다. 영화는 관여하지 않는다. 지연이 소문에 흡수되는 끝을 믿고 싶지 않아서, 한참 이 적합성을 붙들고 있었다. 마음은 아직도 편치 않다. 다만, 〈애드벌룬〉은 지연의 일대기를 과하게 소독하지 않았다. 둘을 힐난하지 않았다. 서로로 인해 주름이 졌던 일을 엮을 뿐이다. 이 겹은 애드벌룬을 이루는 필수이자, 이사 없을 둘의 집이다.

 


이랑, 〈잘 봤다는 말 대신〉

 

  나 역시 “잘 봤어요”를 전혀 반기지 않는다. 합평 강의에서 거르지 않는 안부여서 그렇다. 다음에 열거되는 게 진정이어도 막고 싶은 서두이다. 물론 매사에 구체적이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럼 서로의 열중을 대할 시점에서 운을 어떻게 연습해야 할까. 〈잘 봤다는 말 대신〉에서 감독인 새벽과 민정은 영화관에서 목도해 얼결에 옆을 공유한다. 민정이 동감일 거라 믿고 겨냥한 마음마다 공석이었다. 하필 영화를 잘 봤다는 인사로 인해 새벽은 완벽히 물러선다. 그 말이 얼마나 의연하게 나쁜지, 새벽은 힘껏 설명한다. 특히, 애매한 말이 나쁘다는 근거가 좋았다. 정확하려고 애쓴 수행은 상대에게 들통이 나기 마련이다. 즉, 단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어쨌든 우리는 찾아야 돼요. 새로운 말!”

 

  둘은 해결에 앞서 물리적인 간격을 벌린다. 새벽은 단상에서, 민정은 아래에서 GV를 마련한다. 대신을 정정하기 위해 열린 자리에서 마음은 수성(水性)이 되어 붙는다. 대체를 궁리하는 일은 번거롭기도 하다. 단, 사랑에 충실해지고 싶다면 지켜야 한다. 잘 녹아드는 유형의 보호는 어렵고 그만큼 각별하다. 새벽과 민정은 이 호위로 인해 두터워졌다. 소원한 사이여서 과장했던 민정의 일과가 둘의 포옹을 지었다.

 

  그러니 우리 흡수에 앞서 서성이다 만나기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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