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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인디토크 기록: 남겨진 ‘애도’라는 물음

by indiespace_가람 2023. 8. 2.

 

남겨진 애도라는 물음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3. 7. 13(목) 19시 상영 후
참석 김희정 감독, 박하선 배우
진행 신형철 평론가

 

*관객기자단 [인디즈] 조영은 님의 글입니다.

 

 

 

김희정 감독은 자신이 투영된 캐릭터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 “무사히 어른이 되기 어려운 세상”이라고 이야기했다. 세상에는 정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들이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이를테면 기성세대의 절망과 아이들에 대한 희망.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도 살게 하는 것이 있다면 가야 하는 길에 손을 내밀어 주는 어른이나 동료, 그런 개개인의 존재가 아닐까. 그것이 어떤 형태의 아픔이든 위로이자 치유일 것이다. 영화에서 펼쳐놓은 세계가 윤리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지지하지 못할 수는 있어도, 분명한 것은 그 물음을 안겨주는 지금 여기의 현실과 허구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김희정 감독은 꾸준히 그런 세계를 펼쳐나간다. 일찍이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 (2011) 에 관해 실린 말을 첨언한다.

 

 “아마 나는 실패하리라.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를 하려는 자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김희정 감독(이하 김희정): 안녕하세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시나리오 쓰고 영화 연출한 김희정입니다. 반갑습니다.

 

박하선 배우(이하 박하선): 오늘 비가 와서 못 오실까 괜찮으실까 걱정 많이 했는데 이렇게 자리 채워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명지’ 역할을 맡은 박하선입니다.

 

신형철 평론가(이하 신형철): 첫 질문은 두 분이 여기 앉아 계신 이유에 관한 질문입니다. 김희정 감독님한테는 왜 박하선 배우여야 했는지 여쭤보고 싶고요. 박하선 배우님한테는 김희정 감독의 이전 작품 혹은 이번 작품과 관련한 느낀 점 같은 것이 무엇인지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김희정: 여러 매체나 인터뷰 때마다 이야기했었는데 저는 하선 씨 목소리의 굉장한 팬이고요. 영화 안에는 보이스오버나 내레이션이 좀 있어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목소리에 되게 예민하거든요. 사실 깰 수도 있고요. 그래서 목소리가 일단 너무 좋았고요. 제가 예능을 보지 않는데 어쩌다가 예능을 하나 봤어요. 거기에 하선 씨가 미술관에 가면 자기 이름 대신 동생의 이름을 적는다. 그러면 그 아이가 어딘가에 살아 있는 것 같다. 이런 말이 있었어요. 이런 게 인연인 것 같은데, 저는 그걸 보고 이미 시나리오가 나온 상태였기 때문에 이거는 명지의 마음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접근했습니다. (웃음)

 

박하선: 사실 제가 한창 바쁠 때 SNS에 감독님 전 작품인 〈프랑스여자〉(2019)가 계속 올라오는 거예요. 영화가 좋다고 해서 ‘얼마나 좋길래….’ 이러고 있다가 보았는데 너무 좋았어요. 유럽 영화 같은 느낌. 한국에서 본 적 없는 신박한 판타지 같았죠.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가감 없이 솔직하게 다루고 있다고 느껴져서 좋았어요. 몽환적이고요. 그래서 꼭 한 번 같이 작품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얼마 안 되어서 연락이 왔어요. 한 달도 안 되었을 거예요. 거의 일주일쯤 후에 갑자기 시나리오가 들어왔는데, 김희정 감독님 거라고 해서 “할게요.” 그랬더니 일단 시나리오를 보라고 하셔서, “아니요. 저는 그분하고 꼭 하고 싶어서 할게요.”라고 했죠. 그리고 역시나. 너무 좋았죠.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신형철: 우리가 많이 듣는 이야기지만 시나리오를 안 보고 결정한다는 것은 배우분들이 선택하실 때 정말 쉽지 않은 결정 같아요. 생각해 보면 그렇죠. 이전 작품에 대한 웬만한 신뢰가 아니고서는 어렵잖아요. 저는 사실 이런 내용을 모르고 여쭤본 건데 이런 대답이 나와서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작은 그야말로 명지의 이야기입니다. 단편 소설이기 때문에 분량이 책으로는 한 삼십 쪽 정도 돼요. 처음부터 끝까지 명지의 관점에서만 진행되는 이야기고, ‘남편이 죽었다. 그래서 해외로 간다. 그런데 거기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다. 그곳에서 친구 ‘현석’을 만나서 며칠을 보내다가 돌아와 극 중 ‘지은’의 편지를 받아 읽는다.’ 이게 전부입니다. 근데 영화는 세 명이 대등하게 중요한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박하선 배우가 주인공이지만 ‘대담하다’라는 말을 감히 쓰고 싶은 이유가 있는데요. 원작에서 지은은 마지막에 편지와 함께 처음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독자는 지은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거의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계속 나오죠. 그리고 ‘해수’ 같은 경우는 문장 읽으신 분도 아마 놓치기 쉬운데, 마지막에 지은의 편지에서 사모님의 주소를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볼 때 ‘지용이의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라는 표현이 있어요. ‘지용이의 친구’. 그 여섯 글자가 하나의 캐릭터로 탄생한 겁니다. 그러니까 비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지은 속에 있는 명지가 아닌 다른 두 사람을 거의 일으켜 세우다시피 해서 세 사람을 세워 놓은 각색이에요. 제가 볼 때는 주인공이 늘어났다는 문제가 아니고 원작이 암시만 한 주제를 영화가 아주 뚜렷하게 만든 것처럼 보여요.

우리가 보통 상실을 겪은 이후에 슬픔을 이겨내는 과정이 있잖아요. 보통은 주변에서 열심히 그 사람을 위로하고 도와주고 배려해야만 슬픔이 달래질 것이라는 방향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내가 누군가를 생각하는 힘만으로 슬픔이 달래지기도 한다는 것을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해수도 친구가 죽었으니까. 상실의 상처를 겪고 있는 사람이고 지은과 명지는 말할 것도 없잖아요. 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데 해수가 열심히 친구의 누나를 돌봅니다. 그리고 누나가 명지에게 연락하게끔 다리를 놔주죠. 그러니까 두 사람이 해수를 돌보는 거예요. 그럼으로써 자기도 치유하는 거죠. 남을 생각함으로써 그 힘으로 치유받는 것이고 지은도 계속 누워 있다가 사모님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결심한 순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재활 의지를 불태우는 설정이죠. 명지도 마지막에 편지를 받고 지은의 존재를 알게 되고요. ‘그 아이가 정말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을까?’ 생각하며 치유받는 거예요. 누군가를 생각하는 힘으로 자신도 일어서게 되는 구조라는 거죠. 그러니까 ‘위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른 메커니즘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세 사람이 다 각자 위로받는 그 순간, 동시에 노을을 같이 보죠. 같은 장소에 있는 건 아니지만 다른 장소에서 같은 노을을 보고 있는 것처럼 연출되어 있는데 그 노을이 어쩌면 ‘구원’의 희미한 이미지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장면이 참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스틸컷

 

 

신형철: 세 사람 각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 볼게요. 먼저 명지 이야기를 해보자면, 상실을 겪었을 때 그 상실한 대상을 떠나보내는 과정을 우리가 겪어야 하잖아요. 그걸 우리가 보통 ‘애도’라고 하죠. 그런데 애도가 잘 되는 경우가 있고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명지의 경우는 잘 안 되고 있죠. 왜냐하면 화가 나 있어요. 원작에도 있는 문장이기는 합니다만. 명지가 “저는 좀 화가 나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데 납득이 안 되는 거죠. 그 아이가 뭔데. 그 아이를 구하려고 우리가 가지기로 했던 그 아이까지. 임신 계획을 굳이 집어넣은 것도 그런 뉘앙스를 살리고 싶었던 거겠죠. 당사자라면 ‘나라는 한 명, 혹은 잠재적인 한 명까지 포함하면 두 명을 포기할 정도로 그 학생이 그렇게 중요하단 말이야?’ 생각하겠죠. 그러니까 이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남들이야 ‘숭고한 희생’이니 어쩌니 하겠지만, 본인은 화가 날 수밖에 없죠. 그래서 명지의 질문이 “인간이 뭐라고 생각하니?”예요. 어떤 상황이 되면 인간이 그렇게 죽을 수도 있는 건가. 이런 근원적인 의문을 품게 된 것이고, 현석을 만나면서 구체화하기 시작해요. 죽음에 관해서 물었던 명지에게 현석이 “죽음은 아름다운 비밀이래. 죽음은 참 알기 어려운 대상이다.”라고 대답해요. 여기엔 ‘남편 ‘도경’의 죽음은 아마 아름다운 비밀이 있을 것이다’라는 암시가 있는 거죠. 여기까지는 좀 추상적인데 시간이 지나서 둘의 대화가 선택으로 바뀌잖아요. 현석은 시간이 지난 뒤에 ‘내가 그때 이랬더라면 어땠을까’ 이야기하면서 자신과 명지와의 관계를 반추하고 있는 거예요. 현석이 던지는 화두는 선택인 거죠. 그래서 명지는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선택이 세상이 어디 있어. 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는 거지.” 이렇게 말하잖아요. 남편의 마지막 선택도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현석은 “아니. 전적으로 자율적인 선택이라는 거 있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럼으로써 명지는 남편의 선택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지은의 편지를 보는 순간 고민이 마무리되는 거예요. 지은이 ‘평생 감사할 건데 평생 궁금해하기도 할 겁니다. 선생님이 마지막에 내 동생의 손을 잡아주신 그 선택의 의미에 대해서 숙고하면서 살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명지의 고민이기도 하고, 그 편지가 그 고민에 대한 하나의 답을 주고 있기도 해서 마음이 바뀌어요. 삶이 죽음에 손을 내민 것으로 생각했는데 삶이 다른 삶에게 손을 내민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도경의 죽음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차이가 있어요. 도경은 우리를 버리고 죽은 게 아니고 지용을 살리려고 죽었다는 거죠. 같은 이야기인 것 같지만 명지한테는 전제의 의미가 달라요. 지금까지는 ‘남편이 죽어서 나는 버려졌어. 날 버리고 죽었어.’ 이게 핵심이었는데, 지용을 살리기 위해서 죽었다는 것은 ‘삶이 삶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 삶을, 저 생명을 살리려고 죽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강조점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전까지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주된 감정이었다면 현석을 만나고 사태에 대해 고민하고, 지은의 편지를 읽고 난 뒤에는 남편에 대한 감정이 희미하게나마 ‘존경’ 같은 감정이 생겼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당신이 정말 보고 싶다.”인데, 이 말은 새삼스럽게 한 번 더 나오는 대사가 아닌 거예요. 이제야말로 당신이 왜 죽었는지 알겠고, 그런 선택을 한 당신이 자랑스럽고, 그런 당신을 만나서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이야기해 주고 싶고. 이런 복합적인 마음이 담긴 대사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생각한 명지 캐릭터입니다. 제 나름의 이해인데요. 박하선 배우님이 명지 캐릭터를 연기하셨으니까 아마 저보다 캐릭터에 대한 연구를 더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면서 명지로 표현하셨는지 한 번 여쭤보겠습니다.

 

박하선: 방금 하신 말씀도 그렇고, 기사들이 나고 평가받잖아요. 감독님과 공유도 하면서 제가 늘 말씀드렸던 게, “아. 해석이 더 좋은 것 같다고…….” (일동 웃음) 지금도 말씀 들으며 복기해보니까, 사실 명지 혹은 저라면 앞에서 학생이 빠져있다고 할 때 외면하고 가만히 있기는 힘든 일 같아요. 그러니까 그 순간에는 죽을 거라고 생각 못 하잖아요. ‘내가 저기 빠지면 같이 죽을 거야.’라고 생각 못 하는 찰나에 선택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이해하는 거죠. 내 남편이라면 그랬을 거야. 나라도 그랬을 건데, 그 어딘가에서 굉장히 고민했을 것 같아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너무 사랑하고, 한창 신혼이니까 보고 싶고. 그랬던 남편이 한순간에 없어진 거니까. 그런 부분에서 많이 방황했을 거예요.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지내려고 하고, 겉으로 봤을 때도 그렇지만 어떻게 안 되는 거죠. 오히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때 그렇더라고요. 무기력해지고, 계속 잠만 자고, 눈도 안 떠졌으면 좋겠고……. 그랬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힘을 빼고 진행했습니다.

 

 

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스틸컷

 

 

신형철: 여쭤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실 이게 더 자연스러운 접근이죠. 지금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아까 이야기 해드린 것은 다소 작위적일 수 있는 해석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희정: 신형철 평론가님이 제 영화를 벌써 네 편째 GV를 해주고 계시는데, 이래서 평론가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생각을 정돈해 주시잖아요. 우리가 모르는 단어로 깊이 있게 끌어내 주셔서 제가 되게 고양되는 느낌이에요. 아까 말씀하셨을 때 ‘노을’을 바라본다고 하셨는데, 사실 그건 떠오르는 해거든요. (일동 웃음) 그런데 연기할 때도 노을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많은 분께서 그렇게 이해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해’여야 더 희망적이어서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렸는데……. 어쨌든 매직 아워니까요. 같은 매직아워로 치자고요.

 

박하선: (감독을 바라보며) 촬영도 아침에 하셨나요?

 

김희정: 네. 아침에……. 아침에 했죠. (웃음)

 

신형철: 저는 ‘잘 보낸다.’ 이렇게 해석했는데요. (일동 웃음) 생각해 보면 해수의 표정이 지나치게 맑았던 것 같기는 해요. 노을을 보면서 지을 표정이라기보다는. 일출이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아까 “인간이 뭐라고 생각해?” 이 대사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요. 이 질문을 강화하기 위해서 감독님이 각색에 개입하신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고 생각해요. 원작에서 도경의 죽음은 선생님이 학생을 구하다 죽은 것의 의미인데, 영화에서는 보셨다시피 죽음의 의미가 ‘역사화’ 되어 있다고 할까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를 배경으로 한 것과 서울-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것과 광주-폴란드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죠. 저는 광주와 폴란드를 캐스팅했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김희정 감독님이 폴란드로 유학을 갔다 오신 분이고, 광주에 살고 계신 분이니까 언젠가는 이 두 지역이 영화에서 한번 크게 의미화할 것 같다고 느꼈는데 이번에 그 카드를 쓰셨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상처의 지역’, ‘숭고한 희생의 지역’ 이러한 이미지를 보셨잖아요. 그래서 그 이미지들을 끌고 들어오면서 의미를 확대하는데, 명지가 폴란드로 갔기 때문에 원작에는 없었던 중요한 계기가 생겨요. 쇼팽의 심장인 곳을 가는 것도 원작에는 없는 설정이고요. 그다음에 나오는 장소이자 더 중요한 곳이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이죠. 1944년에 독일 치하의 폴란드에서 스스로 전쟁 종속 상태를 끝내기 위해서 봉기가 일어났는데 엄청난 학살을 당했었어요. 그러니까 이것이 5월의 광주를 떠올리게 하는 맥락이 있는 거죠. 그때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는 장소로 가잖아요. 그 대목에서 갑자기 명지가 온단 말이죠. 현석이 배경 설명을 해주면서 “참 폴란드라는 나라는 대단해.” 이런 대사를 하는데, 명지가 갑자기 오는 게 “아이부터 어른까지 나라를 구하겠다고 목숨을 바쳤단 말이야.” 이 대사를 한 직후예요. 그러니까 아이와 어른까지라고 하는 순간, 어쩌면 남편과 그 학생을 같이 떠올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확 와닿는 느낌이 있었어요.

이게 한가지 계기였고요. 이어지는 장면에서 명지가 남편의 죽음이 가족에게 몹쓸 짓을 한 죽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숭고한 죽음이라는 맥락 속에 남편의 죽음을 놔야겠다고 생각하는 과정이 그려져요. 여기서 중요한 대목이 하나 있죠. 이 영화의 제목이죠. 시리와 대화할 때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이렇게 질문을 하잖아요. 그랬더니 “어떤 경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라고 고민한 다음에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이렇게 되묻죠. 그러고 나서 “제가 질문을 잘못 이해했나 봅니다.”라고 이어지는데, 원작에는 시리가 질문하는 사람의 침묵 때문에 자신이 잘못 이해했다고 판단하는 매우 드문 순간이라는 설명이 나와요. 그 순간에 미묘하게 서로 대화를 해버린 거죠. 시리는 잘못 이해한 것 같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대화야말로 시리가 가장 제대로 이해한 대화인 거예요.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냐는 질문의 주체는 남편이니까요. ‘남편은 죽어서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으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지금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으시길래’ 나한테 그걸 묻느냐고 받아들인 거죠. 그래서 명지는 계속 남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고, 남편이 왜 죽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지금의 나를 이해하려고 하는데, 시리의 반문으로 남편의 죽음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고 느꼈어요. 그러니까 명지는 순간 흠칫하면서도 남편의 죽음이 어떻게 애도 되어야 하는지 한 걸음 더 내디딘 거죠. 그리고 마지막에 택시 타고 가는데 기사가 갑자기 오늘이 봉기 기념일이라서 잠시 정차하고 묵념하겠다고 해요. 그때 명지가 흔들리는 표정을 지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로 “제발.”이라고 하죠. 그 대사가 조금 정확하지 않게 들렸거든요. 그래서 감독님께 ‘제발’의 의미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희정: 그러니까 저는 그런 대사를 좋아해요. 정해지지 않은 말들. 뭔지 궁금한 말. ‘제발 어쨌다는 거야?’ ‘제발 부탁이야.’ ‘제발.’ ‘제발….’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 때도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나오는데, 참사 당시에 죽은 아이가 살아있는 것처럼 아이들이 만나는 장면이 있어요. 그래서 귓속말로 무언가 말한단 말이에요. 시사회 때 이세영 배우가 와서 쟤네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려달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전해지지 못한 이야기를 좋아해요. 이 영화에서는 도경의 형인 ‘준경’이 용돈 주고 가면서 “그런데 도경이는…”이러다가 말을 끊잖아요. 준경 역할을 맡은 이규회 배우가 저한테 도대체 뭐라고 얘기하려는 것이냐고 묻더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없는 것과 동시에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을 좋아해서요. 사실 ‘제발’을 쓸 때는 명지가 너무 고통스럽다고 생각해서, ‘제발, 제발 나에게서 이 고통을 좀 없애줘.’ 이런 의미였어요. 이렇게 도시의 모든 사람이 애도하는 것처럼요. 이 애도에서 이들이 기념하는 것이 아주 명확하잖아요.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그 시간만은 기억하자는 건데, 명지는 너무 괴롭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으니까 이런 것들이 너무나 명확해 보였을 것 같아요. 우리가 어떤 걸 빌 때 ‘나도 이렇게 되게 해주세요.’라고 얹혀서 빌 때가 많잖아요. 그리고 사실은 모두가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해서 관객 각자가 해석해 볼 만한 것을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신형철: 그러면 제가 ‘역사화’라고 표현한 것이 명지 입장에서는 그것도 견디기 힘든 종류의 내용이라고 봐야 할까요.

 

김희정: 아니요. 견디기 힘든 게 아니라 이들이 애도하는 게 너무 명확한 거죠. 그러니까 무엇을 애도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아는데 본인은 아직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제발”이 나왔죠. 명지의 상태가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실체적으로 옆에는 없잖아요. ‘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없다’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원작에서 인상 깊었던 문장이 ‘혼자 있으니까 자꾸 혼잣말하게 된다. 나는 혼잣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였어요. 그래서 자기도 그렇게 풀렸으면 하고 심적으로 기원한다고 생각했어요.

 

박하선: “제발”에 대한 대답은 저도 감독님과 비슷해요. ‘제발 이 고통을 끝내게 해주세요.’ 명지의 처지는 저도 조금 비슷한 게, 저는 제가 고통받을 때는 제 고통이 먼저예요. 그래서 역사적인 일이 있었고 이렇게 애도해도 사실 명지의 고통이 먼저인 거죠. ‘그 김에 제발 이 고통을 끝내게 해주세요.’ 그런 생각을 했어요. 거의 안 들리게 했던 건, 저는 대사에서 혼잣말을 되게 싫어해요. 그래서 그렇게 해야 하는 대사가 있으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장면에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처럼 하느라고 정말 안 들리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명지가 추모의 공간에 간 것은 제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려서 해석했던 것 같아요. 제도 예전에 이십 대 때 시련을 겪고 괴로운 마음이 든 적 있었죠. 작품 하나 끝내고 공허해서 뉴욕으로 여행 갔는데 저는 종교는 없지만, 꼭 묘지나 교회, 성당에 가거든요. 그런 곳이 거기서 제일 오래되었고, 그런 분위기를 좋아해요. 그래서 할렘에 있는 큰 성당에 갔는데 한 시간 동안 울었어요. 그때는 시간이 많이 지나서 괜찮을 때였거든요. 그런데 왜 우는지도 모르게 울었어요. 그러고 나니 되게 시원했고 괜찮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명지를 연기하며 그때 생각이 났어요. 명지는 자기 고통이 더 우선이지 않았을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아, 맞다. 나 남편이 죽었지.’라고 떠오르지 않았나 싶어요.

 

 

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스틸컷

 

 

신형철: 지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은데요. 원작에 없는 디테일이 보강되면서 거의 명지와 평행하게 진행되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원래 아픈 아이로 설정되어있고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사고 직후에 지은도 쓰러져서 구급차에 실려 가는 장면이 나오죠. 아마 몸에 마비가 온 것은 그 이후부터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봤는데요. 그래서 재활하는 과정이 필요한 상태가 되었고 명지가 사실상 정신적인 재활을 시도하고 있는 상황과 서로 병행이 되면서 마치 서로가 서로를 염려하고 응원하면서 같이 이겨내고 있는 과정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더 안타까움이 증폭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원작의 마지막에 지은의 편지를 서술자 명지가 설명하는 대목을 보면 ‘읽는 사람이 잘 읽을 수 있게끔 또박또박 연습한 글씨가 불안정하게 놓여있었다.’ 이런 문장이 있어요. 어쩌면 그 ‘불안정하게’라는 표현 하나에서 이런 착상이 나온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봤어요. 지금 재활하고 있기 때문에 손을 쓰기 어려워서 힘들게 한 글자씩 쓰는 이미지가 떠오른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사실 원작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는데 영화에서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지은이라는 캐릭터를 새로 만드실 때 어떤 점을 염두에 두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김희정: 일단 편지를 준 해수를 생각하면서 지은의 편지를 주는 거니까요. 지은과 지용의 백그라운드를 다 만들고 해수의 백그라운드를 만드는 작업을 했어요. 사실은 지은과 지용이 보육시설에 있잖아요. 지금은 나이가 더 늘려진 걸로 알고 있는데, 그때만 해도 만 18세가 되면 보호종료아동이 되어서 퇴소해야 했었죠. 그래서 제가 제일 기뻤던 것은 이 영화를 보고 보호종료아동에게 기부했다는 댓글이었어요. 그렇게만 되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백그라운드를 만들면서 지은이가 무엇을 하려고 했던 아이일지 생각하다가 이 아이는 제빵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김애란 작가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도 생각이 났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 작품을 저도 참 좋아하는데. 빵을 만드는 아이였으면 좋을 것 같았고 자기만의 가게를 꿈꾸는 아이였으면 좋을 것 같았어요. 왜냐하면 부모가 없고 오로지 자기 발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데 한국에서 너무 어렵잖아요. 〈프랑스 여자〉에도 출연하셨던 자우림의 이선규 기타리스트가 빵집 아저씨 역할을 연기해 주었는데, “지은이가 몸은 약해도 똑똑하지 않니?”라는 대사를 해요. 원작에서 몸이 약하다는 설정을 가져오면서 시각적인 부분에 신경을 쓰느라 구급차에 실려 가는 장면도 다 나올 수 있었고요. 그리고 사실 어린 여자아이이기 때문에 밤길 가다가 베이커리 끝나고 낭패당한다거나 하는 설정도 했고, 지용이 대사로 “너 저번처럼 우리 누나 이상한 새끼들 만나서 그러면 내가 너 죽인다.” 이런 말도 하는 것이죠. 너무 어린아이들인데 자기네들끼리만 지켜줄 수 있는 아이들. 그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아이들이라는 것에 마음이 되게 쓰였어요. 문학은 지은이라고만 하면 되고, 어떤 외모 묘사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그 온도감이나 얼굴이 주는 느낌이나 분위기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서 캐스팅이 너무 중요하거든요. 여기서 정민주 배우가 제일 어려요. 열다섯 살인가. 그런데 그 배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정민주 배우랑 비슷한 어려 보이는 남자 배우를 캐스팅 한 거예요. 그래서 사실은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얼굴로 분위기로 많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어요.

 

신형철: 저는 지은을 보면서 박하선 배우님을 생각 안 할 수가 없었어요. 명지를 연기하고 계시지만 남편이 죽은 설정이고, 지은은 남동생을 잃은 설정이란 말이죠. (제가 사전에 이 질문을 드려도 되는지 여쭤봤는데 된다고 하셔서) 그러니까 GV 초반에 감독님께서 잠깐 말씀하셨지만, 박하선 배우님이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으시기 때문에 지은을 보고 기분이 남다르셨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은과 만나는 장면은 하나도 없잖아요. 촬영장에서도 본 적은 없으시겠네요.

 

박하선: 아무래도 더 이입하면서 봤죠. 원작과 시나리오를 읽을 때 편지 장면에서 눈물이 났어요. 정말 오랜만에 시원하게 울었죠. 제 동생은 장애가 있어서 저한테 ‘고마워’, ‘사랑해’, ‘미안해’ 이런 이야기를 잘할 수는 없었어요. 우리가 일상 대화하듯 자유롭게 하기 어렵거든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심근경색으로 가게 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항상 나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동생은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남편에게 이야기하면 데리고 와서 살자고 하는데 그게 사실 쉬운 일은 아니기도 해요. 동생도 집에만 있으면 참 심심하고, 굉장히 많이 먹기도 하고, 씻기기도 해야 하니까요. 심지어 동생이 죽기 일주일 전쯤에 ‘근데 나는 언제 죽을까?’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얼마 후에 동생이 떠나게 되었죠. 나중에 부검의 분께서 편안히 갔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아마 저는 그 시간쯤에 회사 대표님과 오랜만에 만나서 밥 먹고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어떤 죄책감을 느꼈냐면요. 한동안 브런치를 못 했어요. 동생은 혼자 집에 있다가 밥도 못 먹고 갔을 텐데. 그 생각이 들어서 죄책감이 해소가 안 된 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원작이 저한테 하는 소리 같은 거예요. ‘누나 밥 잘 먹어’, ‘잘자’ 이런 표현이 너무 와 닿았어요. 그게 위로가 되었고 그 감정을 관객이 느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게 된 거고요. 연습할 때도 그 장면이 그냥 저의 눈물 버튼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배우들은 이렇게 울었는데 현장 가서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해요. 근데 그 장면만큼은 자신 있었고 현장에서도 연습 때보다 훨씬 잘 되었고 좋았어요. 저도 되게 위로받았습니다.

 

 

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스틸컷

 

 

신형철: 혹시 그 장면은 몇 번째쯤 찍으셨나요?

 

김희정: 제가 원래 테이크를 많이 안 가서요. 그렇게 많이 안 했어요. 박정훈 촬영감독께서 지금 관객석에 앉아 계시거든요. 인사 한번 하시죠.

 

(인사. 일동 박수)

 

박정훈 촬영감독: 일단 감정 씬이니까 테이크를 줄이자고 서로 협의했어요. 무엇을 먼저 찍을 것인지 고민하면서 일단 타이트한 얼굴을 찍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얼굴은 한 테이크만 갔는데 감정이 막 올라오셔서, 끊지 말고 바로 타이트하게 하나 더 가자고 했죠. NG는 없었고요. 나머지 셋업에서 표정이 잘 안 보이는 넓은 숏과 편지 클로즈업 같은 경우는 얼굴이 안 보이니까 그냥 찍어도 되는데 배우님께서 편지를 다 읽으셨어요. 그래서 다른 테이크는 얼굴 찍은 이후에 진행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박하선: 한 번 만에 오케이가 났는데 그렇게 되더라도 여러 방향에서 찍어야 해요. 한 분씩 스테디캠을 들고 있어야 하거든요. 정말 무거워요. 그 장면에서도 어깨에 이고 찍으셔야 하는데…. 굉장히 무겁다는 걸 알고 있고, 오래 들고 있기 힘들어요. 근데 제가 죄송하게도 부탁드렸죠. 그 장면에서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로 읽어야 눈물이 날 것 같은데, 그렇게 해주실 수 있냐고요. 그랬더니 흔쾌히 “아유. 그럼요.” 하셨고, 제 기억으로는 방향을 바꿔서 여섯 컷 갔어요. 너무 감사합니다.

 

김희정: 그랬던 것 같아요. 마치 피아니스트처럼 중간에 끊지 못하는 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어야만 하는 씬이었던 것 같아요. 저희가 사실 컷을 잘 안 나누고, 타이트하게 잘 안 쓰기도 하지만 편지 장면은 너무 중요했죠. 감정이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나요.

 

신형철: 이제 해수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요. 예전에 〈프랑스 여자〉 쯤이었던 것 같아요. 감독님께서 다음 영화에는 아이가 주인공인 영화라는 이야기를 지나가면서 하신 적이 있어요. 어떤 이야기인지는 전혀 몰랐죠. 근데 이번 영화 보면서 해수 캐릭터가 그렇게 창조된 건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편지를 무사히 배달하는 데 성공하는 이야기인 셈인데, 어쩌면 이 캐릭터는 감독님이 투영된 캐릭터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상실의 고통을 겪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영화일 테니까, 그런 편지를 배달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찍으셨다면 해수의 시점은 곧 감독님 시점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후반부에 보면 지은이 보육원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해수가 우리 집에 좀 데리고 있자고 이야기할 때 부모님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조금 세게 다투죠. 그 이전까지 해수는 차분한 이미지였는데 거기서 강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감독님 본인을 포함한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이나 아쉬움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엄마가 글 쓰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책에는 좋은 이야기 쓰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잖아요. 예술을 하는 기성세대 전체에 대해 자조적인 시점이 들어가 있다고 느꼈어요. 그러니까 다음 세대에 대한 희망도 포함되었을 수도 있겠어요. 해수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을 말씀해주시죠.

 

김희정: 일단 이동할 때 조금 속도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스케이트보드를 떠올렸어요. 명지와 지은은 어찌 보면 멈춰있는 상태의 육체(혹은 그런 몸)라고 생각했고, 움직이는 몸 하나가 필요했는데 그게 해수였어요. 사실 지용 입장에서 보면 해수는 너무나 좋은 집안의 행복한 아이거든요. 그래서 “너는 너희 엄마한테 고마워 해야 돼.”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죠. 사랑받고 자란 집 아이들 특유의 긍정적이고 추진력 있는 아이로 생각했고요. 해수한테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말하면 다 이루어주는 부모님이 있는데 지용과 지은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지용한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데 무사히 어른이 되는 건 정말 힘든 일인 것 같다.”라는 말도 하죠. 사실 대한민국에 살면서 그 생각은 누구나 할 거예요. 무사히 어른이 되기가 너무 어려운 세상이고,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어떤 사회적 재난 때문에 그렇게 희생당할 수밖에 없고요. 근데 그걸 살게 해주는 건 개개인들이란 말이에요. 저는 손을 내밀어서 잡아주는 어른이나 동료들에게 눈물 나는 경험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원작에 ‘손을 잡아줬다’라는 표현을 굉장히 좋아해요. 지용이 마지막에 잡은 게 ‘차가운 물’이 아니라 도경의 ‘따뜻한 손’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눈물이 난다”는 말을 지은이 하죠. 그리고 지은에게는 레지던트 의사 선생님 ‘경주’ 역할을 맡은 김보라 배우가 손내밀어주는 거고요. 이렇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개개인들의 따뜻한 손길이 있잖아요. 그런 것을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나름의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원작은 김애란 작가가 세월호 사건 이후에 영감을 받아서 쓴 소설이기도 해서 제가 너무 거리감 없이 쓴 것이 아니냐는 솔직한 말도 나눴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느껴야 하는 여러 가지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아이가 질문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에 반기를 들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또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른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이가 이길 수 있는 방식. 아이가 건방지다는 말을 듣더라도 세상을 바꿔나갔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어요.

 

 

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스틸컷

 

 

신형철: 해수의 대사 중 인상적인 부분이, “빨리 어른이 돼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였어요. 근데 마지막에 가면 “어른이 되는 일이 제일 어려운 일 같다.” 이런 이야기를 하죠. 이게 참 기성세대를 가슴 아프게 하는 말인 것 같아요. 이제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는 마무리하고 한 두 가지 정도 별도의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데요. 명지와 현석이 동침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제가 영화평 찾아보다가 어떤 분께서 ‘남편이 죽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남편 친구랑….’ 이렇게 쓰신 분이 있었어요. 그 장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 평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는지 궁금하네요.

 

박하선: 맞아요. 그분이 거의 유일하게 1점을 주셨더라고요. 감사합니다. 모든 평은 소중하니까요. ‘불호’는 있을 수밖에 없죠. 불편하신 것도 이해가 가요. 왜냐하면 기자분들이나 다른 관객분들께서도 그 부분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하더라고요. 저도 그 부분이 조심스럽다고 감독님과 상의하기도 했어요. 어쨌든 셋이서 친했다가 둘이 커플이 되면서 현석은 멀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였고 못다 이룬 호감, 내지는 그러한 관계성이 있었겠죠. 명지는 한창 신혼이니까 당연히 남녀 사이에 육체적인 면도 중요한데 그게 멀어졌고 없어져 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무언가 비어있는 부분이 있는 거죠. 그래서 현석을 만났을 때 무너져 내리고 울잖아요. 그 사이를 생각해봤어요. 바로 컷이 튀잖아요. 그 사이에 뭐가 있었을까 생각했을 때 항상 위로해주고, 집도 데려다주고, 차를 끓여주고 싶었을 거란 말이죠. 그래서 이런 것을 생각했을 때 저한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아니었어요.

 

신형철: 원작에서는 현석을 만나는 것이 하루 동안 진행돼요. 그래서 술을 마셔서 취한 상태로 다소 우발적인 일이 진행되었다는 설정이 있습니다. 근데 영화에서는 이틀로 쪼개 놨단 말이죠. 그러니까 술을 마신 건 첫째 날이고,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에서의 둘째 날 그다음쯤으로 이어져요. 혹시 그렇게 수정하신 이유가 있을 까요?

 

김희정: 명지는 다분히 연극을 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명지가 너무 불안정해 보이니까 현석이 “너네 헤어졌니?”라고 묻잖아요. “우리 헤어진 지 좀 됐어.”라고 말하면서 명지가 갖는 오묘한 감정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실 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기보다 그런 식의 연기 같은 느낌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추모 벽을 보고 눈물이 터지고, 스킨십이 있는데 저는 그게 그렇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되게 인간적이잖아요. 도덕적으로 잘못된 건 아닌 거죠. 저는 그런 부분이 상당히 흥미롭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사실 완벽히 이해할 수 없잖아요. 여러분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시나요?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게 저는 창작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엄청나게 파격적인 것을 그리지는 않지만 그런 오묘한 감정들이 있는 거죠. ‘이겁니다.’라고 답을 내릴 수 없는 인간의 희한한 행태가 있기 때문에 저희는 이야기를 계속 만들 수 있는 것이라서요. 명지의 상태가 너무나 이해가 가요.

 

박하선: 말씀 들으면서 생각이 나는데요. 예전에 이별이라고 했을 때 제일 슬픈 건, 이제 다시 그 사람과 스킨십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되게 크게 다가올 때가 있잖아요. 명지는 당장의 아픔과 슬픔을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고요. 그래서 현석이 그 감정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잠깐 생각했다가 나중에 후회하고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신형철: 어떤 도덕적인 기준으로 ‘내가 공감할 수 없으면 나쁜 작품이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고 느끼는데요. 제 생각에 ‘작품’이라는 것은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만 나오는 세계가 아니라, 공감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의 세계, 혹은 공감을 시도해볼 만한 사람들의 세계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뜻 보면 ‘왜 저러지?’라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이해할 법하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게 작품이죠. 공감할 가치가 있다는 말은 그냥 던지는 말이 아니고 이 상황에서도 의미가 있는 말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부재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에 저도 그런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리고 현석은 사실 ‘남편과의 시간’을 상징하는 인물로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원작에 보면 ‘현석과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남편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표현이 있어요. 침대 위에서의 현석은 도경의 대체물이기 때문에 바람이나 이런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 같았습니다.

 

(‘도경’역의 전석호 배우가 무대로 깜짝 등장했다. 일동 박수)

 

신형철: 전석호 배우님께서 영화 찍으시면서 소감이랄까 전체적인 이야기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전석호 배우: 네 안녕하세요. 전석호입니다. 저는 사실 공연 준비하고 있었고요. 지금 늦은 시간이지만 매번 이런 자리에 참석을 못 해서 달려왔습니다. (웃음) 사실 영화든 무엇이든 결국에는 누군가에게 위로받기도 하고,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은 이야기를 꾸준히 찾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것이 웃음의 방향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눈물의 방향이기도 하고요. 이 영화를 찍기 전에도, 찍으면서도, 찍고 난 이후에도 가장 ‘김희정다운’ 위로이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그 과정에서 박하선 배우를 처음 만났어요. 라디오나 이런 데서 몇 번 뵈었지만 카메라 앞에서 같이 연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오…. 생각보다 ‘단단’해서 놀랐어요. 사실 선택적 합의를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이게 더 좋은 것 같아요.’ 이런 것보다는 경험도 많다 보니까 훨씬 더… 되게 단단하게 본인의 생각을 말하고, 현실적으로 이것이 가능하고, 어떻게 보일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찍는 내내 좋았어요.

 

신형철: 갑자기 와주셨는데도 좋은 말씀 해주신 것 같아요. 사실 지금 시간이 지나서 마무리를 해야 합니다. 박하선 배우님하고 김희정 감독님 짧게 인사 부탁드릴게요.

 

박하선: 저도 예전에 GV를 한번 본 적이 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한 시간 넘게 자리를 지켜주시고, 궂은 날씨에도 보러 와주시고, 저희 영화에 힘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GV를 하면 힘을 항상 받고 가는 것 같아요. 늦은 시간이니까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시 좋은 모습으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희정: 저희 상영 2주차인데 극장이 많이 빠졌어요. 그래서 지금 독립영화관 위주로 하고 있거든요. 찾아가셔서 보셔야 하는데 끝난 게 아니니까 주변에 소문을 많이 내주세요. 계속 저희는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오랫동안 극장에 틀려면 입소문이 필요해서요. 신형철 평론가님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018)이라는 책도 내셨어요. 그런데 이번에 저희 영화평 중에 ‘슬픔을 공부하는 좋은 기회였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기분이 좋았어요. 저희 영화와 이만큼 어울리는 모더레이터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형철: 영화가 슬픈 이야기라서 웃을 일 있을까 하면서 왔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이 웃었네요. 근데 슬픈 이야기는 슬프게 이야기해야 하는 게 아니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면 되는 거죠. 이렇게 웃으면서 한 시간 이야기했습니다만. 한순간도 진지하지 않은 순간은 없었던 것 같아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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