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혜 평론가 인터뷰]
물처럼 흐르는 평론가
– 유연한 비평의 지도를 만들기 위하여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소정, 박이빈 님의 글입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여름날,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동료로서 정지혜 평론가를 만났다. 매일 자유로운 물속에서 유영하고 흐르는 영화의 리듬감을 따라 글을 쓰는 평론가의 삶을 들으며 어쩐지 무더운 더위가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정지혜 평론가와의 인터뷰를 읽는 모두가 고요하지만 유연한, 그래서 자유로운 글쓰기의 세계로 풍덩 빠져들 수 있기를 바라본다.
먼저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통 평론가분들은 인터뷰의 대상이 되시기보다 작성한 글이나 참여한 영화제 등으로 잘 알려지는 것 같은데요, 혹시 오늘 인터뷰에 응해주신 이유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일단은 인디스페이스에서 활동하고 계신 인디즈 분들 활동을 오랫동안 저도 관객 입장에서 보면서 굉장히 긍정적인 에너지를 많이 받았는데 저에게 부탁을 해주셔서 인디즈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전에도 비슷한 시도는 있었던 것 같지만 새로운 세대의 영화인들 혹은 관객 분들 중 비평을 통해서 영화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분들이 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인디즈 분들도 비평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제 입장에서는 비평가에게 어떤 걸 궁금해하실까 하는 마음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같이 이야기하는 자리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퍼플레이가 운영하는 ‘퍼줌’에서 연재하셨던 ‘정지혜의 영화 산책’을 읽으며 평론가님께 궁금한 것들이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또 〈워터 릴리스〉에 대해 쓰며 물비린내가 난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평론가님께서도 물의 물성에 줄곧 관심을 갖고 계신 것 같아 관심사들을 공유해 보고 싶었어요.
제가 해왔던 활동들, 그러니까 제가 쓰는 글이나 제가 해왔던 말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게 해주는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이럴 때 뿌듯함을 느끼고 같은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아무래도 비평가는 글로써 말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글을 쓰면서 겪는 고민에 대해서는 들을 기회가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요즘 그런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 시기라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중입니다. 최근에 문학 평론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전까지는 평론가를 어렵고 닿을 수 없는 사람처럼 생각한 측면이 있었다면 이후에는 이 분도 같이 글을 쓰는 동료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경험이 있어요. 그래서 영화 쪽에 종사하고 계시는 평론가님께서는 어떻게 느끼시는지 궁금했습니다.
말씀해 주신 ‘동료’라는 말이 제가 오늘 인터뷰에 응한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비평가들이 사실 거의 대부분 혼자 작업하는 사람들이잖아요. 물론 같이 잡지를 만들 수도 있고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세미나를 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글쓰기는 1인 창작이고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그러다 보니까 저도 늘 이제 나의 동료 혹은 나의 독자는 어디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쓰면서도 내 글이 읽을 만한 건가 어딘가에서 읽히고 있는 건가에 대한 늘 답답함과 불안함 같은 게 있기 마련인데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긴 하지만 항상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동료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특히 글을 쓰는 동료들을 만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고 기존에 아는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동료, 글을 쓰고자 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인디즈 분들이 대부분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작업에 관심이 있으실 거라는 생각에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제안에 흔쾌히 응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그럼 이어지는 질문인데요, 지금 함께 글을 쓰며 돌아보고 피드백하는 합평 공동체가 있으시다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주로 활동을 하고 계시나요?
네, 사실 필드에서 공동체들이 있기는 하지만 프로젝트마다 뭉쳤다가 흩어졌다를 반복하는 것 같긴 해요. 어떤 이슈가 있을 때 같이 논의하고 잘 마무리한 뒤에 각자 작업하고 또 다시 만나는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방식이 영화 작업이나 비평가들에게 잘 맞는 것 같아요. 특히나 글 쓰는 분들은 혼자 작업을 하고 있고 발행된 글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영화제에서 물론 만나긴 하지만 영화를 만들 듯이 같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니까 상대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매번 하는 이야기인데 영화는 창작물이라고 많이들 생각을 하지만 비평에 대해서는 창작물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조금 나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비평 역시도 창작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렇다면 창작의 시간은 얼마간의 자기 분투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고 글 작업은 특히나 더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하는 작업이 이제 평론가님께는 잘 맞으셨나요? 혹시 MBTI 성향이 I이신지? (웃음)
네, 그런 것 같아요. (웃음) 제가 하는 일이 글로 하는 것도 있고 말로 하는 것도 있어요. 이렇게 다양한 활동들을 하면서 모더레이터이기도 했다가 프로그래머이기도 했다가 하면서 다양한 이름들을 갖게 되거든요. 글 쓰는 작업은 혼자 하지만 사실 영화제에 가서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야 되기도 해요. 모더레이터의 역할이라는 게 중재자인 거잖아요. 현장 상황과 게스트 분들의 상황에 맞게끔 약속된 시간 안에 얼마간의 질문을 받고 관객 분들과 피드백을 나누는 역할들을 소화해야 될 때는 조금 더 외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그때그때마다 다르긴 하지만 굳이 MBTI 성향으로 말하자면 E와 I를 오고갈 때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기본적인 제가 활동하는 뿌리라고 해야 될까요? 중심에는 글을 쓴다는 정체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이 일을 하게 된 시작점이 되었고 그래서 계속해서 그 생각을 가져갈 수 있는 활동들을 되도록이면 더 많이 하고 싶어요. 글을 쓰지 않는 활동이더라도 글 작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조금 더 해보는 쪽이에요. 말로 할 수 있는 평론이 있을 수 있고 그 외에도 다양한 방식의 평론이 있을 수 있는 거잖아요. 여러 활동 속에서 제가 제 나름의 어떤 지도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매번 인식하면서 가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활동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글쓰기를 중심으로 하신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렇다면 평론가님께서는 어떻게 글쓰기를 주로 하는 활동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아무래도 가장 관심이 많은 부분일 것 같은데 저의 경우는 학생 때부터도 글쓰기에 관심이 있었고 어떤 형태로든 창작을 계속하고 싶었어요. 영화를 전공하거나 영화 비평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다른 쪽의 전공이 저는 저의 글쓰기에 더 좋은 영향을 줬다고 생각을 해요. TV 평론가 공모를 통해 처음 매체 글쓰기를 시작을 했고 그때는 저에게 매체가 주어졌다는 것에 굉장히 기뻤던 것 같아요. 꾸준히 지면을 통해서 내 글을 소개할 수 있다는 안정감을 느꼈어요. 씨네21에 입사해서 활동을 하다가 퇴사를 한 이후에는 프리랜서로 본격적으로 평론가로 활동을 해보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영화 평론가가 공모를 통해서도 되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루트가 있는 것 같아요. 영화제나 다른 활동들을 하면서 자신의 경력을 쌓아가면서 정체성을 확립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작가라는 타이틀도 과거에는 문단 데뷔를 통해서만 주어졌다면 최근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작가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러한 지점에서 저널리스트, 평론가, 작가 등 도대체 어떤 이름을 써야 하는 거지 하는 고민의 시기도 있었는데 저는 그냥 제 스스로 어디에 내가 무게 중심을 둘 것이냐 생각하다 글 쓰는 사람에 방점을 찍은 거죠.
오전에는 수영인 정지혜, 오후에는 글쓰는 정지혜로 모습을 바꿔가면서 유연하게 지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까 잠시 얘기를 해주신 것처럼 글을 중심으로 두고 활동을 하고 계신데 혹시 글로 이야기하는 것과 말로 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편하신지요? 의뢰받는 일들 중에서 어떤 것에 흥미를 느끼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뭐가 더 편하냐 하는 질문은 조금 어려운 것 같아요. 어떤 것이 더 불편하다는 말은 아닌데 모더레이터는 더 많은 것들을 신경 써야 하잖아요. 현장의 변수들 같은 부분에서 관객 분들도 있고 배우 분들도 있고. 글은 나만 잘하면 되잖아요. 결과물의 만족도와는 별개로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잘 준비해서 하면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재미와 매력, 작업의 의미가 다 조금씩 다른 것 같아요. 글 작업은 어떤 지면에 쓰는 글이냐, 어떤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는가에 따라서 동일한 영화도 다 다르게 써야 하죠. 그럼에도 1차적으로 글은 제 욕망에 충실한 작업인 것 같아요. 말을 하는 자리, 예를 들어 관객과의 대화는 영화제에서와 극장에서 개봉할 때와 또 대담의 형식일 때가 모두 성격이 다르거든요. 영화제도 첫 번째 상영이냐 두 번째 상영이냐에 따라서 바뀌기 때문에 현장성과 같이 달라지는 것들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재미가 있는 것 같고요. 글은 다른 의미로 훨씬 밀도가 있는 것 같아요. 현장은 휘발되는 즐거움이 있어요. 코로나 상황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당시 영화제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고민스러웠던 부분 중에 줌이나 녹화로 GV를 진행하는 게 있었어요. 사전녹화해서 일정기간 동안 온라인에 공개하는 부분에 대해서 모더레이터들에게 조금 저항감이 있었어요. 날것 그대로 검열 없이 조금 더 편안하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고 대화하다 보면 생기는 뉘앙스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지금은 많이들 익숙해졌지만 초기에는 그런 것에 대한 저항이 있었죠. 하여튼 각자의 재미와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웃음)
오랜 시간 동안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시고 글을 쓰시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계신 듯합니다. 언제 처음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며 살아갈 수 있겠다’고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느낀 순간이나 계기가 있으셨나요?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조금 어려운 질문인 것 같긴 한데요. (웃음) 프리랜서로서는 어떤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작업을 계속 할 수 있게 되는 기회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들어오는 일을 최대한 마다하지 않고 해야 다음에 또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무리를 하거나 번아웃이 오는 상황들이 굉장히 많아요. 저 역시 그런 과정들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고민 속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조금은 덜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주변에 좋은 동료들이 조금 더 생긴 것 같고 제가 해왔던 작업도 많은 분들이 읽고 봐주신다는 피드백을 받고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돼요. 어떤 하나의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아요.
사실 마법 같은 계기는 일상에 찾아오지 않고 한 발짝씩 나아가다가 또 뒤로 가는 것의 연속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요. 저도 매번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제 물리적인 나이도 있고 계속해서 나의 쓰임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나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있죠. 그래서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자’라는 생각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글쓰기를 하실 때 어떤 준비과정을 거치시나요? 본인만의 루틴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직장인들처럼 정해진 일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니 어떻게 일상을 꾸려가시는지 궁금했습니다. 또 스스로 평론을 쓰게 하는 원동력 또는 추진력 등이 있다면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딱히 나만의 글쓰기 루틴이 있지는 않는 것 같아요. (웃음) 물론 글을 쓰기에 앞서 기본적인 자료조사를 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영화에 따라, 청탁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감독이나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쓸 때 가장 신나는 것 같아요. 가능하다면 한정된 에너지로 더 좋아하는 것을 하는 쪽으로 하자라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최근에 마음에 들었던 영화나 꾸준히 좋아해왔던 감독이 있을까요? 개인적인 취향이 있으시다면 알려주세요.
9월에 개봉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신작 〈어파이어〉라는 작품에 눈길이 가더라고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 수상을 했는데요, 전작인 〈운디네〉에서도 물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셨고 〈트랜짓〉이라는 영화도 항구를 기반으로 전개가 되거든요. 이번에는 불도 등장하는데 이런 감독님의 관심사에 저도 어느 정도 관심이 닿아있어서 흥미롭게 보고 있어요.
이번 무주산골영화제에서 미야케 쇼 감독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와 같은 작품을 연출하셨어요. 한국에서 아직 개봉하지는 않았지만 〈와일드 투어〉라는 영화를 봤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청춘의 빛나는 부분들을 잘 보여주는 것 같고 감독님이 굉장히 유머러스하셔서 대화도 즐거웠어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도 그렇고요. 그래서 동시대 일본영화들에 관심이 가게 되는 것 같아요. 한동안 일본 영화가 장르적이고 멜로적인 부분에 집중하는 시기가 있었고 침체기였는데 방금 말씀드린 감독님들이 등장하면서 활발하게 활동이 이어지고 있고 비평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부분들이 많이 생기고 있는 것 같아요. 또 동시대 한국독립영화 감독들에게도 영향을 많이 주는 것 같아요. 제가 2021년에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동시대 일본 영화 섹션을 기획하며 상영한 미야케 쇼의 〈플레이백〉, 마리코 테츠야의 〈미야모토〉, 이가라시 고헤이의 〈연인처럼 숨을 멈춰〉 등도 흥미로운 작품으로 기억에 남네요.
앞서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관련해서 직접 기획해서 쓰고 싶은 기사가 있으실까요?
올해 과업 중 하나는 개인 책을 내는 것인데요, 생각보다 잘 안 되네요. (웃음) 새로운 글로 다 채우면 좋겠지만 그건 무리일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쓴 글들을 모아서 비평만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사는 삶에 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책을 잘 마무리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물에 관한 제 관심을, 물과 영화의 연관성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긴 호흡으로 해보고 싶어요. 물이라고 하면 너무 넓은 개념이긴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본 여성 영화에서 수영장과 같은 물속에 들어가는 여성들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유독 여성서사와 물이 연결이 잘 되는 것 같았어요. 여성들이 물을 가까이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증이 생겼고 저 역시도 물을 가까이 하고 있고 물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가는 것 같아요. 영화에서 물이 꼭 편안한 소재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 감독과 주인공들에게 물이라는 것이 효력이나 기능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가보고 싶어요.
또 물이 갖는 물성이 영화와도 닮아있기도 한 것 같아요. 흐르는 영화의 시간성이 물의 흐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지는 물의 특성이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과 비슷해요. 말로 하기엔 추상적일 수 있는데 정확하게 똑 떨어지는 영화보다 뭔가 조금 어긋나거나 엇나가 있는 영화들이요. 그렇지만 그 안을 잘 들여다보면 흐름이 만들어지고 리듬감이 느껴지는 것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아요. 그렇게 움직이고 흘러가는 영화들에 제가 많이 이끌리는 것 같아요. 물이나 그런 성질을 닮아있는 영화를 제가 좋아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수영장에 매일 가시는 것처럼 영화와 물에 관한 평론가님의 경험을 엮어서 에세이를 써보시면 어떠실지 제안을 한 번 드려봅니다. 물과 관한 경험이 많지 않고 물속에 들어가는 것을 번거로워 하는 사람으로서 수영하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는데 평론가님이 관련해서 글을 써주시면 정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2020년에 상영했던 손모아·안정연 감독의 〈가만한〉이 떠올랐어요. 이 영화를 소개하셨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그러면 역시 〈가만한〉도 앞서 말씀해주신 것과 비슷한 이유로 선정하셨던 걸까요?
〈가만한〉은 뭔가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이의 가만한 마음의 상태를 기다려 주고 지켜봐 주는 영화인데요. 느리지만 제 속도로 길을 내려는 시도가 엿보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흐름이 기억에 남는 영화입니다.
영화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 보면 좋을 듯해요.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 혹은 모더레이터로 활동하고 계신데요. 영화제에서 일한다는 것에 대한 희로애락에 대해 이야기해 주신다면요?
우선 프로그래머는 여러 일들을 해야만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작품 선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 소개하고 창작자와 영화 산업의 종사자들을 연결시키는 중재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하고. 그래서 전반적인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어야 하기도 해요. 재미있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내가 이런 부분은 좀 더 보완해야 되겠구나.’, ‘이런 부분은 재미있게 여기는구나’ 하고 알아가게 되었던 현장이었어요. 그럼에도 매번 좋은 기획으로 관객 분들이 많이 오시고, 참여한 분들의 만족도가 높으면 그것만큼 뿌듯한 것도 없죠.
비평가들이나 심사위원들끼리의 격론 끝에 어떤 작품을 선보이게 되었을 때, 관객 분들이나 같은 창작자 분들이 동료의 작품을 어떻게 볼까 하는 것에 대해선 저도 기대하고 긴장하면서 현장을 지켜보거든요. 그럴 때 반응들을 보면서 그간의 제 판단이 어떠했는지를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 모든 반응들이 다 나오는 곳이 영화제인 것 같고요. 플랫폼이기도 하고, 페스티벌이기도 하니까요. 완전히 다른 영화인들이 서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 아닐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제’라는 장소에서 현장 반응을 눈으로 확인하는 게 좀 중요한 것 같아요. 코로나 이후에는 줌으로 GV를 진행하거나 온라인 상영이라는 옵션이 생기기도 했지만, 특정 장소가 만들어 주는 기억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변수들도 생기고요.
아까 이야기하신 것처럼 GV 같은 것을 하는 즐거움 중에 그 장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현장성이라는 것이 참 큰 것 같아요. ‘우리가 같이 오늘 이 영화를 처음 본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을 좀 더 환대해 주면 좋겠다.’ 이런 느낌이 있죠. 그리고 대화가 잘 진행되면 서로가 그 순간에 웃을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잖아요. 그런 것도 영화제가 주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해요.
영화제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하시며 애착을 갖게 되신 영화제가 있으실까요? 혹은 관객으로 참여했을 때 즐거웠다든가 하는 일화가 있으시다면요.
서울독립영화제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영화제다 보니, 그 영화제에 가면 ‘올해가 다 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많은 영화인들이 한 해를 돌아보며 갈무리를 하는듯한 장소인 것 같아요. 서로 응원을 하고 내년에도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공간 같아서 독립영화를 사랑하는 관객 분들, 영화인들에게는 좋은 영화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저도 관객으로서나 활동하는 한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찾았던 영화제라 애정하는 곳이기도 해요.
부산이나 전주 같은 경우도 다양한 국가들, 방식들의 영화를 집중해서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즐겁게 다녀왔던 기억이 있어요. 무주산골영화제도 좋아하는 영화제 중 하나인데요, 6월의 공기 아래에 굉장히 알찬 프로그램들이 많고 부대 행사들의 짜임새가 좋아서 즐겁게 다녀오는 것 같아요. 디아스포라 영화제도 아주 좋았어요. 환대의 영화제잖아요. 영화제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그것만으로 환대받고 돌아오는 것 같다고 느껴요. 이렇게 하면 너무 특정 영화제들만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요. (웃음)
이건 정말 가벼운 질문인데요. 저는 연달아 영화를 보거나 해야 하는 경우에는 너무 잠이 오더라고요.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시나요?
잠 깨는 법이요? 졸음 앞에는 장사 없습니다. (웃음) 다른 이야기지만, 임철민 감독님의 〈야광〉이라는 영화 아시나요? 2018년에 공개된 영화인데, 되게 여러 레이어를 가지고 있어요. 더 이상 운영되지 않는 아주 오래된 극장, 그 공간에서 성소수자들이 만남을 이어간 역사가 어렴풋이 감지되는 영화에요. 감독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어요. 본인이 항상 극장에 가면 언제부턴가 잠을 그렇게 자게 됐다고. 영화를 못 볼 정도로 잠이 온다는 거예요. 그런 개인적 경험을 은유하고 실험하는 게 〈야광〉에 들어가 있고, 극장, 영화, 소수자의 사랑의 공간으로서의 이야기가 여러 레이어로 되어 있는 흥미로운 실험 다큐예요. 갑자기 추천해 드립니다. 잠을 쫓을 만한 방법을 말씀 드리지는 못했지만요. (웃음)
마지막으로, ‘인디스페이스’라는 극장에서의 기억들 중 공유하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다면요?
인디스페이스는 독립영화인들의 든든한 만남과 후원의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인디스페이스에서 많은 독립 영화들을 보았고, 또 많은 독립영화인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이사를 하기도 했고, 잠시 문을 닫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꿋꿋하게 매번 좋은 기획들을 고민하시면서 영화를 만나게 해 주셔서 고맙고 중요한 공간인 것 같아요.
어떤 기억들이 있었나 생각을 해 보니, ‘인디돌잔치’에서 변규리 감독님의 〈너에게 가는 길〉을 상영했을 때 나비님, 비비안님, 감독님과 이야기 나눴는데 그때가 굉장히 즐거웠어요. 퀴어 당사자뿐 아니라 부모님들까지 조명한 한국 퀴어영화사의 기념비적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 영화가 처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을 때부터 GV를 하게 되었는데, 개봉 일 년 후에 인디스페이스에서 다시 이야기를 나눠서 기뻤어요. 놀라운 지점은 나비님과 비비안님이 물론 영화의 주인공들이시기도 하지만 이분들이 수많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셨잖아요. 그렇게 해 오시면서 본인들 스스로가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라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활동가로서의 스스로의 정체성을 공고히 만들어가고 계시다는 것이 제 눈에도 보이더라고요. 그런 것이 이 영화가 가진 힘이고, 영화가 만들어진 이유이자 계속 상영되는 이유인 것 같아요.
특히 그날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눠 주신 관객 분들 덕분에 그 자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극장의 분위기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내가 나의 사적인 이야기를 해도 위협받지 않는다는 분위기요. 이런 이야기를 해도 환대받을 수 있다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게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의 중요한 역할인데, 인디스페이스에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것 같아서 제 기억에 남는 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매일매일은 사방으로 흐르고, 특별한 계기 같은 건 없다. 고요와 유연의 세계를 오갔던 정지혜 평론가와의 만남은 또다시 사방으로 흐른다. 맘놓고 빠져들었다면 이제 물결을 만들어 볼 시간이다. 어떤 컵을 들고 무엇을 담아낼 것인가 골몰할 때, 모두의 지면 위에 활자가 스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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