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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추모상영 〈재춘언니〉토크 기록: 식지 않는 국물을 대접하는 요리사

by indiespace_가람 2023. 4. 17.

 

추모상영 〈재춘언니〉토크 기록

 

 

일시 2023. 3. 30(목) 오후 7시 상영 후

참석 주인공 김경봉, 이란희 감독, 전진경 작가, 정윤희 작가, 치명타 작가

진행 이수정 감독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채운 님의 기록입니다.

 

 

경험은 정말 지나간 시간에만 머무는 것일까? 임재춘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재춘 언니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고 말한다. 지난 목요일, 우리는 너무 많이 웃고 울었다. 공간 곳곳은 스크린 밖으로 새어나온 재춘 언니의 숨결이 가득했다. 그날 우리는 재춘 언니를 호명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니었다. 정반대로 우리는 그의 커다랗고 아름다운 힘에 이끌려 마주 앉았다. 그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노동하고 예술하는 사람들은 노동과 예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전해준 가르침을 이야기한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본다. 나는 임재춘이라는 사람을 여전히 모르지만 그가 과거에만 우두커니 서있지 않다는 것을 알겠다. 그가 나눈 사랑과 우정을 함께 전하고 싶다.

 

 

 

이수정 감독(이하 이수정): 오늘 추모 상영회는 〈재춘언니〉의 극장 개봉 1주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지난 해 말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난 재춘언니를 추모하는 상영회로서, 배급사 시네마 달(Cinema Dal)과 함께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영화를 보신 분들도 오늘 이렇게 와 주셨는데요, 오늘 무대에는 저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재춘 언니와 함께한 분들도 계십니다. 13년 동안 재춘 언니의 가장 가까이서 함께 투쟁하신, 또 다른 주인공 김경봉님, 제가 농성장에서 촬영을 시작한 2012년 이전부터 인천 콜트 폐공장에 입주해서 아저씨들과 함께했던 전진경, 정윤희 작가, 그 이후에 오게 된 치명타 작가 그리고 농성장에 와서 아저씨들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단편 극영화 〈천막〉과 장편영화 〈휴가〉에 관한 모티브를 얻어 만들었던 이란희 감독과 함께 합니다. 그러면 이제 저도 앉아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김경봉 형님, 인사를 먼저 해주시죠.

 

김경봉: 어려운 발걸음 해 주셔서 다들 고맙습니다. 저는 콜트콜텍 투쟁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친구를 맺었고 아직도 잊지 못한 친구들이 많이 있는데요. 나와 같이 싸웠던 친구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다들 많은 슬픔들을 가지고 있을텐데 오늘 자리를 이렇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수정: 사실 저는 아직도 실감이 안나고요. 지금 같이 있는 것 같아요. 오늘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니까 재춘언니는 실물로 만나지 못할 뿐이지 여전히 같이 있구나 싶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우리들이 서로를 통해서 재춘 언니랑 다시 만나고 콜트콜텍 투쟁과 그간 했던 시간들을 기억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다음으로 전진경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자기 소개와 함께 소회를 말씀해주시죠.

 

전진경 작가(이하 전진경): 저는 2012년도에 콜트에 있는 빈 공장에 들어가 입주 작가로 살며 콜트콜텍의 아저씨들과 좋은 사이가 되었던 전진경이라는 작가입니다. 저는 항상 영화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매우 가까이서 이분들과 직접 대화하고 식사하고 생활했다보니 현재 직면에 있는 문제들 그리고 힘들지만 객관적인 사실들을 자세히 보려고 하지 않게 되더라구요. 반면에 지금의 좋은 상황들과 유쾌한 장면들을 더 보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그 무거움이 다시 한 번 느껴지더라고요. 객관적인 어려움, 객관적인 사실들이 이상하게 영화를 보면 잘 느껴져서 그 당시의 내가 좀 부족했구나. 관계를 맺는데에도,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는 데에도 부족했구나 싶은 반성을 영화 볼 때마다 하게 돼요.

 

 

영화 〈재춘언니〉 스틸컷

 

 

저는 누군가의 부재를 이렇게 생각해요. 얼마 전에도 옆에 있는 치명타 작가가 '언니 어떠세요' 하고 저한테 물어봤어요. 그런데 저는 그 질문을 받고나서 처음으로 들었던 생각은 '아 나 아무렇지 않은데' 이 감정이었어요. 아저씨 대전에서 계속 계시는 것 같고 나는 내 생활 하고 있는 것 같고 바로 그게 사람들이 얘기하는 '잘 모르겠다'는,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그 감각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런데 오늘 영화를 보며 또 한 번 다시 생각했던게, 누군가의 상실과 부재는 제가 어느날 문득 무언가 궁금해졌을 때, 그 사람에게만 물어볼 수 있는 질문들, 나는 그것이 궁금하고 지금의 나는 다시 그것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수 없게 된 것. 저는 그게 어떤 부재와 상실로 해석이 되더라구요. 오늘 영화보면서도 아저씨가 제일 잘하는 게 제가 보기엔 농사인 것 같아요. 농사 짓는 일. 작은 장면이었지만 되게 능숙하시고 잘 아시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요즘 그런 것에 관심을 갖다 보니까. 아마 재춘아저씨한테 '한번 여기 오셔서 봐주세요.' 라고 하면 되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랬습니다. 이 얘기를 하는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인사와 함께 저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이수정: 작년 3월 말에 극장 개봉을 하고 관객과의 대화를 열심히 다녔어요. 재춘 형님이 '언제인지만 말해줘. 일하는 시간 내서라도 꼭 함께 할게' 이렇게 얘기를 하셔서요. 그 당시에는 아파트 경비 일을 하셨거든요. 그리고 영화 개봉 당시에는 그 일에서 해고를 당하셨을 때였어요. 아파트 경비직을 3개월 단위로 자르더라고요. 그러면서 하셨던 말씀이 '한 달 정도 이참에 아예 쉬면서 전국 gv 갈테니까 미리 알려만 줘.' 라고 하셔서 좋은 봄날에 여기 저기 많이 다녔었어요. 광주, 대전, 전주 여행 하듯 다니며 그동안 못 가본 곳도 가고 그랬습니다.

 

그 때마다 항상 이 가방을 들고 다녔어요. 이 가방의 글씨는 이진경 화가가 쓴 것인데요, 콜트콜텍 마지막 끝장 투쟁하고 전시를 보러가서 재춘 아저씨가 사 주셨어요. 아저씨께서 가방을 이란희 감독한테도 전해달라 하셔서 밤중에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굉장히 자주 메서 낡았네요.

 

참 그리고 이 자리에 우리 〈재춘언니〉의 후반을 만드는데 애써주신 전유진 음악감독님과 고동석 편집 감독님이 자리 함께해 주셨고요. 콜트콜텍과 연대했던 많은 친구분들, 두물머리에서 풍물 하셨던 분들께서 멀리서 와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또 최연숙 작가님도 와 주셔도 감사합니다. 자 그 다음으로는 정윤희 작가에게 마이크를 넘겨 보겠습니다.

 

 

영화 〈재춘언니〉 스틸컷

 

 

정윤희 작가(이하 정윤희): 저는 정윤희라고 하고요. 작가기도 하고 문화 운동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예상을 하고 이 자리에 왔어요. 지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재춘언니〉를 봤는데, 영화가 흑백으로 나오다가 아저씨의 현재가 나오면서 칼라로 전환될 때 엄청 울었던 것 같아요. 12년 투쟁 끝에 비로소 일을 하는데, 그 일하는 환경이 너무 위험해 보이는 거예요. 계속 불안정한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모습이 남았어요. 우리 예술가들은 아저씨들의 투쟁을 보며 영감을 받고 작업을 하고 또 그걸 보여주며 행복감도 느끼고 영광도 누리는데, 아저씨는 여전히 불안정한 노동을 하며 살고 있는거예요. 그게 제겐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저도 일상을 살다 보니까 엄청 바빴고 또 근 4~5년 간은 예술인 권리를 찾기 위해 국가와 엄청 싸우며 지냈었거든요. 그런데 아저씨는 그런 거에 관심이 없으시다 보니 영화인들 상영회 할 때 아저씨한테 계속 문자가 계속 오는거예요. 그때 저는 우리 예술인들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중에 만나자 하고 지나갔어요. 저는 이게 마음에 너무 남아요.

 

'내가 봤던 현재가 부재한 상황을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오늘 많이 울 것 같았고 그래서 안경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성격의 사람이에요. 그래서 공장에 작업실을 차릴 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저씨들과 잘 지내 어렵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농성장과 공장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곳으로부터 쫓겨 나와서 천막, 농성장 옮길 때에도 같이 움직이고 지금까지도 드문드문, 혹은 연속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유는 재춘 아저씨나 경봉 아저씨가 항상 환대해주고 편하게 해주셨기 때문인 것 같아요. 작업을 하러 갈 때에도 어색했었는데 맛있는 밥부터 차려주시고 만나면 먹는 얘기 먼저 해주셨어요. 재춘 아저씨 옛 별명 중 하나는 임셰프라고 있었어요. 홍대 앞에서 희망 식당을 하시기도 하셨거든요.

 

제가 아저씨를 마지막으로 본 게 아저씨가 서울독립영화제 끝나고 24시간 무인 가게에서 라면을 드시고 대전으로 가시는 것을 본 거였어요. 그때엔 코로나로 식당이 9시면 문을 닫을 때였거든요. 아저씨는 제게 밥을 차려주고는 하셨는데 그날 그렇게 헤어졌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파요.

 

 

영화 〈재춘언니〉 스틸컷

 

 

그리고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영화에도 나오지만 공장이 없어지고 가스 충전소가 세워진 데에는 부평구 공무원의 비리가 있어요. 부지의 주인이 원래 박영호였는데 그가 지인으로 주인을 바꾸는 바람에 우리는 공장에 침입하는 꼴이 돼서 밖으로 쫓겨난 게 됐어요. 그리고 충전소가 세워지고 다시 찾아갔더니 주인이 다시 박영호로 바뀐 거예요. 부동산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오더라구요. 이게 일종의 협작으로 가능했던 거예요. 영화 장면 중 풍물할 때 보면, 뒷면의 아저씨가 농사 짓고 했던 공간이 정수 시설이 있는 곳이었거든요. 정수 시설 앞에 가스 충전소가 있다는 게 말이 안되잖아요. 즉 거래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죠. 실제로 부평구 공무원이 비리로 잡혀 들어갔어요. 그리고 한 장면에서 대법원 파기 환송이 등장하는데, 이 때 '주문'이라는 노래가 나와요. 이 파기환송은 국정농단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의 재판 거래로 비롯된 거예요. 그래서 부당해고임에도 불구하고 파기환송심이 나와버린거죠.

 

그러니까 이건 기업인과 힘 약한 노동자 간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 전반적인 문제, 부조리의 문제가 그대로 작동해서 12년이라는 장기 투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거예요. 물론 아저씨들은 너무 멋있게 투쟁하셨죠. 하지만 재춘 아저씨의 죽음이 복직 후 3년, 봄을 세 번 맞이하시고 가신거니까 그 장기간 가지셨던 희망이 사라져서, 그 희망을 3년동안 누렸으면 얼마나 누렸을지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났습니다.

 

아저씨한테 굉장히 감사드리고 경봉 아저씨께도 감사드려요. 말씀드렸듯 제 성격이 개인적이고 잘 어울리지 못하고 관계 감각이라는 게 없어요.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시간 동안 이렇게 마음 편하게 만나 이야기 하고 부족한 저 항상 응원해주셔서 저 스스로 굉장히 많이 성장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단지 작가 뿐 아니라 사회 문제에 관련해 운동을 할 수 있게 되고 어떠한 선택을 하는 데에도 자신감 있게 든든히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정말 감사드려요. 재춘 아저씨께, 경봉 아저씨께도요.

 

이수정: 다음은 옆에 계신 치명타 작가, 이 중에서 가장 막내격인데,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데요.

 

치명타: 감사합니다 감독님 (웃음). 저는 치명타고요. 2013년 2월에 아저씨들 갈산 콜트 공장 무너지고 나서 도로 맞은편에서 농성 하실 때부터 본격적으로 연대 했고요. 그리고 2015년, 2016년 전에는 야단법석이나 유령문화제 통해서 아저씨들과 많은 시간 보냈어요. 그 이후로는 아저씨들이 여의도로 거처를 옮기셨는데 이 때 전진경 작가님께서 '드로잉 데이'라고 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드로잉을 하는 프로그램을 하셨는데 그때 둘이서 아저씨들 그림 그리며 많은 시간 보냈던 것 같아요. 근데 아까 감독님 하신 말씀 들어보니까 떠오른건데요. 저는 드로잉데이 하면서 재춘 아저씨 얼굴을 굉장히 많이 그렸는데 저한텐 가방도 안 사주시고 파우치도 하나 안 사주셨네요. (다 같이 웃음) 저는 심지어 아저씨 생일이라고 초코파이 케이크도 해 드렸는데 서운하네요. (웃음) 아무튼 영화를 보니까 지금은 시간이 좀 지나서 제가 아저씨들 길 위에서 고생하셨던 것, 투쟁하셨던 것, 그런 일들을 마음 속에 접어놓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다시 펼쳐져서 아저씨들 고생을 많이 하셨구나, 자랑스러우면서도 가슴이 아프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수정: 드로잉 데이가 특별했어요. 전진경 작가 뿐 아니라 치명타 작가, 여기 투쟁하시던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얼굴을 매번 관찰하고 그리며 같이 공유되는 게 많았을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촬영하느라 바빠서 직접적으로 살갑게 지내지는 못했었어요. 촬영이 중요했기에. 그런데 두 분은 굉장히 많은 대화도 나누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누구 얼굴은 그리기가 쉬웠고 누구 얼굴은 밋밋해서 어땠다는 등의 대화들을 치명타 작가 같은 경우엔 텍스트로 직접 그림에 넣는 방식의 작업도 많이 하셨었죠.

 

전진경: 저는 재춘 아저씨를 많이 그렸어요. 중간에 재춘 아저씨가 오체투지 하시는 장면이 나와요. 그 세 번째 날엔 제가 했어요. 영상 속에서 아저씨가 힘들어 보이잖아요. 저보고 너가 좀 하라고. (다 같이 웃음) 그 얘기를 진심으로 하셔가지고. '아 진짜 해야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었어요. 그래서 전 진짜 했잖아요. 하루 종일. 한겨울의 날씨에. 아저씨가 그런 걸 되게 쉽게 쉽게 요청 하세요. (웃음)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돌려서 말한다거나 미안해하는 게 있을텐데, 아저씨는 항상 쉽고 당당하게 요청하셔서 듣는 사람이 그렇게 해야하나보다 하고 생각이 들게 하는 매력이 있으세요.

 

 

영화 〈재춘언니〉 스틸컷

 

 

이수정: 아저씨들과 미술 전시도 보러 갔었는데, 사실 재춘 언니는 영화에 대한 기대가 컸어요. (다 같이 웃음) 이미 저 이전에 김성균 감독의 〈기타 이야기〉나 〈꿈의 공장〉이 커다란 극장이나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것을 보시고 영화가 파급력이 큰 상업 예술이라는 것을 간파하시고, 영화 언제 나오냐고 뭐라하시면서 '이렇게 찍어, 이렇게 찍으면 대박이야.' 연출까지 하시고 그러셨어요. 이란희 감독에게도 비슷한 말을 많이 했겠죠? 이란희 감독은 극영화를 찍으셨는데, 극영화는 다큐와 달리 담고 싶은 이야기들을 담을 수 있잖아요.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거기에 픽션을 만들어서 영화를 만든 이란희 감독님. 어떤 일이 있었는지요.

 

이란희 감독(이하 이란희): 네. 그 정확히 얘기하면, 재춘 언니는 영화보다는 KBS를 더 선호하셨습니다. (다 같이 웃음) 뭐 찍기만 하면 그거 KBS 나오냐고 계속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천막〉이라는 단편 영화를 찍기 전에 아저씨들이랑 같이 단편 영화 세 개 정도를 진짜 엉망진창으로 만든 적이 있거든요. 그것들을 KBS 열린 채널에 보냈는데 그 중 한 편을 틀어 준 거예요. KBS에서. 하필 재춘 언니가 주인공인 작품을 그 쪽에서 골랐더라고요. 그래서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KBS에 나왔다고. 돌아가신 다음에 〈휴가〉가 KBS '독립영화관'에 걸렸거든요. 그래서 재춘 형이 봤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처럼 재춘 형은 영화보다도 훨씬 KBS를 더 좋아하시구요, 동창이나 친구들이 항상 KBS를 보고 피드백을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재춘 형은 영화를 찍을 때는 아저씨들 중에서 NG를 가장 많이 내는 분이셨어요. 예를 들어 경봉 형님 같은 경우엔 대사 NG가 전혀 없는 분이었어요. 반면에 재춘 형님은 대사 NG를 계속 내시고 행동이랑 대사랑 매치가 잘 안되기도 하시고 그래서 NG가 되게 많았는데 다시 찍으면 저한테 완벽주의자라고 뭐라 그러시더라고요. 내가 무슨 완벽주의자야. (웃음) 실수만 안하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었는데(웃음) 제가 그렇게 완벽주의자가 아닌데 조금 억울하기도 했어요.

 

조금 있으면 전주국제영화제 하는 기간이거든요. 〈천막〉이라는 단편을 제일 처음 틀었던 영화제가 전주국제영화제였어요. 그 때 재춘 형님도 오시고 경봉 형님도 오셨거든요. 그런데 어쨌든 관객들은 계속 재춘 형님만 본다. (다 같이 웃음) 그래서 사실 경봉 형님도 노력을 엄청 많이 하셨을텐데.

 

김경봉: 저는 우리 재춘이의 기사로 다녔어요. 광주까지도 저 혼자서 왕복으로 운전하고. 꼭 저를 데리고 갑니다. 기사로서. (다 같이 웃음)

 

이란희: (웃음) 그랬었고. 〈휴가〉라는 장편 영화를 찍을 때는 아저씨들이 연기를 하시는 게 아니라 전업적으로 연기를 하시는 분들과 작업을 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이걸 제가 분명히 재춘 형님께 말씀을 드렸다고 기억하고 있었어요. 영화 찍을 때가 되어 뭐 좀 여쭤보려고 전화를 드렸더니 아니 자기 없이 영화를 찍냐고. (다 같이 웃음) 그래서 제가 '일을 하시니까 못찍으시잖아요?' 하니까 영화 찍으면 당장 뺀다고 막 뭐라고 하시더라고요. 자기가 찍어야 된다고. 그러셨고. 그러시더니 후원금을 보내시더라고요. 제작비로 쓰라고. 작가님, 저는 제작비 후원도 받았고요. (다같이 웃음) 머그컵도 사 주셨는데. (다 같이 웃음)

 

치명타: 그림을 별로 쓸모 있는 매체라고 생각을 안하시는 것 같아. (다 같이 웃음)

 

이란희: 경봉 형님은 나오셔서 삼겹살도 사 주셨어요.

 

치명타: 〈구일만 햄릿〉 할 때, 그 때도 같이 스텝이라 현장에 있는데 아저씨들이 재춘 아저씨한테 연기 못하면 막 뭐라고 해요. 그러면 뒤에서 '그래도, 저렇게까지 뭐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싶었는데 며칠 연기하시는 걸 더 지켜보면 수긍하게 되는 거예요. (다같이 웃음) 연기 못하는 구나. 속이 다 터지다 못해 그렇게 하는구나.

 

이란희: 그런데 구일만 햄릿〉 은 관객 입장으로 뵀었는데, 또 재춘 형님만 눈에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진짜 타고난 사람은 어쩔 수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재춘 형님을 굉장히 높이 있는 분처럼 바라봤던 것 같아요. 옆에서 보면 귀엽기도 하시고 얼척없기도 하고 그러시는데. 제가 시간이 흘렀을 때 재춘 형님을 굉장히 높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을 하고 쓰게 됐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오늘 〈재춘언니〉를 두 번째인가 세 번째로 보는데 오늘은 좀 다르게 이 영화를 보게 됐습니다.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보통 우리가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으면 친한 사이더라도 거래가 진행이 되잖아요. 가령 내가 뭘 해주면 쟤가 나한테 뭘 해주는게 약간 상식처럼 통용이 되는데 재춘 언니는 이게 일절 없습니다. 저는 이게 너무 신기했어요. 그러니까 누구랑 어디 갔다가 차표를 끊어야하면 옆에 있는 사람이 끊어 주는거고.. (다같이 웃음)

 

이수정: 모바일 티켓팅을 본인이 못해서. (웃음)

 

이란희: 아니 그렇게 되면 '계좌번호 불러 내가 티켓팅을 못했으니까 내가 나중에 보내줄게' 이럴만도 한데 그런 걸 전혀 안하세요. 티켓을 끊어 주신분은 그 날 재춘 언니를 처음 만난 분이셨거든요.(다 같이 웃음) 그래서 그 분한테 제가 제 돈으로 드렸어요. 그런데 이후로도 저한테 한마디도 안 물어보시는 거예요. (다 같이 웃음) 그런데 건너 건너 들으니까 이런 게 있더라고요. 광주에 가면 누가 있잖아. 대전에 가면 누가 있잖아. 어디에 가면 누가 있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허물 없이, 거래 개념 없이 있을 때 내고 없을 때 도움 받고 하는 관계들이 전 지역에 쫙 펼쳐져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저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관계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또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고 그리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수정: 저는 티켓을 끊어 드린 적도 많은데 한편으로 재춘 언니는 밥값을 흔쾌히 먼저 계산을 하시려 하시는 분이었어요. 친구들 사이에서도 먼저 밥을 사셨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정윤희 작가님 아까 라면 이야기랑 관련해서요, 우리가 영화를 개봉 했을 때만해도 코로나 때문에 엄격해서 식당들이 9시면 문을 다 닫아야 했었잖아요. 그때 재춘 언니가 건설현장에서 힘들게 일 끝내고, 삐쩍 마른 채 대전에서 KTX 타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영화가 끝나니까 9시가 넘어서 어딜 갈수가 없었잖아요. 그래서 재춘언니가 서울극장 옆에서 24시간 무인 라면 편의점에서 라면 드시고 내려가시는 모습 보고 마음이 아팠어요. 근데 또 너무나 맛있게 드시더라고요.

 

정윤희: 셰프로서의 자부심이 있으셔서 라면 비율을 맞추시고 갖가지 채소들을 넣고 끓이셔서 맛있게 드시고 가시긴 했는데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아까 그림 얘기가 나왔는데 저는 사실 회화를 전공했지만 그림을 안 그린지 오래 됐어요. 그렇다보니 드로잉 데이를 가면 제가 그린 게 몇장이 안되는데도 보면 반 이상이 재춘 아저씨더라고요. 그만큼 재춘 아저씨가 갖고 있는 매력들은 잊혀지지 않는 것 같아요.

 

또 저는 작가들하고 이틀 동안 장례식에 가 있었어요. 장지까지 가서 계속 같이 있었는데, 아저씨 장례식에 가서 너무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난거예요. 장기 투쟁이었으니까 투쟁을 같이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각자 살면서 만나지 못하다가 그 날 장례식장에서 만나서 지금 얘기하는 것처럼 처음엔 울다가 아저씨 얘기하면서 웃다가 이렇게 되니까 '역시 아저씨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기운이 있구나, 가시면서도 그렇게 해주시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얼마전에 저희끼리 루미큐브라는 게임을 했어요. 밖에 천막을 칠 때부터 해서 현재까지 십년 정도를 했거든요. 또 같이 여행을 갔다 왔어요. 그럴 때마다 아저씨가 같이 있는 느낌이었어요. 없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나다가도 영상보고 그러면 문득문득 같이 있었던 시간이나 그 사람의 느낌이 전해져서 웃음이 나는 것 같아요.

 

이수정: 네 분의 아저씨들이 각자의 캐릭터들이 있잖아요. 치명타 작가를 비롯한 미술작가들이 이분들의 어록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명언들을 작품에서 쓰기도 했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것 이야기 해 주시죠.

 

치명타: 아저씨가 가끔, 가끔이라고 포장을 할게요. (웃음) 가끔 술을 잡수고 저녁에 오실 때가 있는데, 저희 드로잉데이 일정이 3시부터 5시 사이에 시작해서 7시 정도에 그림을 후다닥 끝내고 거의 막차 시간까지 루미큐브랑 게임을 해요. 어느 날 아저씨 늦게 들어오신 날 술을 잡수고 들어 오실거라 예상했는데, 안 잡수고 들어오신거예요. 그래서 아저씨한테 '아니 아저씨 오늘은 어떻게 술을 안 잡수고 오셨네요.' 라고 하니까 아저씨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를 알기를 띄엄띄엄 안다'고 하시더라고요. (다 같이 웃음)

 

가슴 아픈 말도 많죠. '내가 만약에 우리 아버지라면 이거(투쟁) 하라고 안했을거야.' 라고 하신 말씀도 있었고 '청년들도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한다. 노동자들도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한다.' 하는 말씀도 있었고 딸들에 대한 말씀도 있었고 재밌었던 말도 있었고 무게가 있던 말도 있었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드로잉 데이 때 4~5년치를 쫙 보니까 저는 경봉 아저씨를 제일 많이 그렸더라고요. 모두가 임재춘에 집중할 때 저는 경봉 아저씨. (다 같이 웃음) 그리고 아까 말씀 드렸지만 경봉 아저씨 저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셨고요 (웃음) 이상입니다.

 

 

영화 〈재춘언니〉 스틸컷

 

 

이수정: 저는 사실, 〈재춘언니〉라는 작품으로 콜트콜텍 8년 촬영하고 완성까지는 10년이 걸린, 이 장구한 작업을 처음부터 재춘 언니로 기획한 건 아니었어요. 모든 분들을 동등하게 기록하고 했는데, 저는 너무 중압감이 들더라고요. 콜트콜텍 다큐가 2009년, 2010년 나왔었고 그 이후에 제가 기록한 것들을 저는 그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영화가 되어야 할텐데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있었어요. 또한 투쟁이 장기적으로 이어지다보니 장기 투쟁을 주제로 삼아 기획하고 편집을 하고 했었는데, 마지막에 다 엎게 됐어요. 그러다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말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투쟁과 관련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비롯해서 모든 이야기를 다 담으려고 하지 말자. 어차피 관객들이 다 따라가지도 못해요. 그러다 보니까 인물을 한 사람으로 압축하여 구성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사실 임재춘씨가 인물들 중에서 가장 많은 장면이 촬영이 되어 있었고 많은 변화가 기록이 되어 있었기에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다만 다큐멘터리 촬영이 통상적으로 그러하듯이, 재춘언니 역시 인터뷰를 할 때에 웅얼거리거나 논리없이 이 말했다 저 말했다 하면서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러다 촌철살인 같은, 정곡을 찌르는 지혜로운 말씀도 많이 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배우로서 가장 귀여웠던 인물이 아닌가 싶었어요. 처음 볼 땐 몰랐는데 굉장히 잘생긴 인물이었어요. (다같이 웃음) 굉장히 선도 확실하고 눈에 감정이 드러나면서 참 잘생긴 얼굴이다. 그 얘기를 살아 생전에 못 해드린 것 같아서 아쉬운데요.

 

전진경: 저는 오늘 해야지 생각하고 왔던 얘기가 있어요. 아까 정윤희 작가가 장례식장의 풍경들을 이야기 했잖아요. 제가 그 장례식장을 3일동안 지켜보면서, 저도 모르게 처음 부고 소식을 듣고 처음 한 행동이 아저씨가 멋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가족분들께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해보지도 않았던 화환을 준비해서 보내기도 했는데요, 장례식에 가보니까 화환이 정말 많이 있는거예요. 이게 한줄이 안되니까 두 줄이되고 두 줄이었던 화환이 세 줄이 되고 그러다 옆집 장례 공간까지 침범이 되니까 그런 걸 보면서 '아 다들 생각이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6시부터 조문을 받아서 저는 6시 딱 맞춰서 도착을 했는데 이미 장례식 조문객들이 복도에서 식사를 할 정도로 인원이 찼고 이틀이 지나도 그 인원이 바뀌지 않으면서 계속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경봉 아저씨는 상주처럼 오시는 손님들 신발 정리도 하시고 자리 정리도 하셨어요. 그래서 현장 진행이나 무언가를 여쭤볼 때엔 경봉 아저씨 찾았어요. 그 때 경봉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는데 아주 짠하더라고요. 아주 오랜 시간 같이 한, 친구 같은 동료의 마지막 배웅을 이렇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온다면 저런 태도를 취하고 싶다고 느꼈어요.

 

다음 날엔 추도식이 열린다고 해서 갔어요. 그 날에 맞춰서 어떤 사람은 그 하룻밤만에 사진 찍을 준비를 해서 오고 현수막을 걸 수 있도록 준비해왔어요. 저는 그 시간을 쭉 지켜 보면서 우리가 콜트콜텍 투쟁을 거치며 스쳤던 많은 사람들과 알게 모르게 무언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었어요. 그리고 그 공동체가 재춘 언니를 보내면서 확 늘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마지막엔 가족분들이 인사를 하셨어요. 큰 딸 애란씨가 말씀을 해 주시는데, 사실 딸 입장에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모를 수 있잖아요. 저도 저희 부모님에 대해서 제가 딸로서만 아는 것이지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삶은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요. 마찬가지로 애란씨도 아버지에 대해서 잘 몰랐구나 하는 것을 생각했고 '아버지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사람이구나', '더 멋진 사람이었구나, 더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을 계속 감동하면서 느꼈다, 이 장례기간 동안 정말 많이 느꼈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또 재춘 언니는 집안의 맏이인데요, 막내 동생분께서 '형님이 이렇게 큰 사람인지 몰랐다. 우리도 다시 한번 형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 가족들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라는 얘기를 해 주셨을 때 저 되게 안심되고 되게 좋았었어요. '되게 노력했다, 우리 모두 노력했다'라는 생각을 되게 했어요. 가족들이 아저씨들을 다시 재해석 할 수 있고 남은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에 중요한 의미를 느낍니다.

 

 

영화 〈재춘언니〉 스틸컷

 

 

정윤희: 저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사실 장기간 투쟁 속에서 가족 관계가 파괴되는 경우도 많고 아저씨같은 경우엔 어린 딸들을 두고 농성장에서 보내는 것을, 다른 사람들 밥은 다 챙겨주는데 딸들 밥은 못챙겨주는 것을 항상 이야기 하셨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바라시던 딸들과 보내는 시간이 짧았다는 것과 전진경 작가님이 말씀 하셨던 것처럼 시골의 맏아들로서 자기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고 맏이 역할을 하다가 공장에서 부당 해고 당하면서 자기는 이제 자기 가족한테 인정받는 사람이 안 될 수도 있잖아요.

 

우리 작가들이 같이 계속 그 시간을 보내면서 아저씨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그 자리에서, 그 장례식에 오셨던 분들 모두 다 그런 것들을 가족 분들께 알려 드렸던 것 같아요. 아저씨가 떠나면서 아마 누구보다도 딸들을 남기고 가는 것이 마음에 안 좋으셨을 것 같은데 딸들도 우리 아빠가 정말 멋있고 든든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둘째 따님이 초란씨인데, 초란씨가 4월 중순에 결혼식을 해요. 아빠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고 싶었을텐데 그러지 못해서 저희는 가보려고 하고 있어요. 그렇게 아저씨의 삶 속에서 아저씨가 남기고 간 딸에 대한 사랑들을, 저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같이 하면서 보내려고 합니다.

 

이수정: 작년에 둘째 딸이 결혼한다는 얘기를 임재춘 아저씨한테 듣고 결혼식에 꼭 가야지 부조도 두둑히 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장례식을 먼저 치루고 가게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픈데, 여기 오신 분들은 또 결혼식에서 다시 모여서 축복을 해주려고 해요. 어쨌든 갑자기, 지병으로 늘 앓고 계셨던 것도 아니었고 갑자기 돌아가셔서, 왜 돌아가셨을까 생각해보면 13년 거리 생활과 마지막 단식, 그리고 그 이후에도 육체노동을 하시면서 몸이 많이 상했고 자기 몸을 잘 돌보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가셨겠구나 싶더라고요. 어려서부터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시고 동생들한테 밥 해주면서 살아왔다고 들었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공장 생활하면서 계속 가장으로서 식구들의 밥을 벌기 위해서 정말 그렇게 고생만 하다가 가신 것 같아서 가슴이 정말 아픕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사람을 기억해주고 잘 살아냈던, 열심히 살았던 한 사람의 인생을 또 같이 이야기 나누며, 그 사람과 관계되어 있는 우리들이 이런 상영회에 모일 수 있어서 한편으론 너무 잘 살다 가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은데요. 경봉 형 마무리멘트 하시고 끝내도록 할까요?

 

김경봉: 네 저는 13년이라는 세월을 같이 했기 때문에 우리 재춘이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다 같이 웃음) 지금 여기에서 비춰지는 아름다운 모습, 그보다도 아름답지 못한 일화들이 더 많거든요. 그렇지만 오늘 여기서 밝힐 순 없습니다. 아름답게 끝까지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장례식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셨듯이 저 역시 재춘이가 정말 잘 살았구나, 내가 만약에 이런 일을 당했다면 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끝까지 함께 해줬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같이 해줬고 나도 이후에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어요. 어쨌든 모든 걸 까발려봤자 소용없으니까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모든 공은 재춘이한테 돌아간다는 깊이 깨닫고 있기 때문에 별로 기분 나쁘진 않습니다. (다 같이 웃음) 그 이후에 저희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여기 계신 분들이 활력소가 되리라 생각을 하고 여기서 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수정: 오늘 이 자리는 여기서 끝내도 되겠죠?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또 다음에 또 좋은 자리에서 얼굴 뵀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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