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독립영화, 그리고 인디스페이스.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태현 님의 글입니다.
1. 이 글의 마감을 앞두고,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반짝다큐페스티발를 찾았다. 관람한 섹션에는 다큐인에서 제작한 <아침 출근 지하철에 문이 열리면…>(이하 <아침 출근…>)이 있었다. 보통의 ‘영화’라고 불리는 영상은 아니었다. 극장의 스크린보다는 유튜브 재생창 속에서 자주 볼법한 커다란 네임태그와 자막이 눈앞을 채웠고, 영상 속에 등장하는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의 연설은 이미 유튜브와 트위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아침 출근…>의 전편은 이미 유튜브에 게시되어 있다). 관련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면, 상영을 찾아 새로이 알게 되는 정보는 없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미적 경향성이나, 유일무이한 이야기의 존재 여부가 ‘영화’라는 매체를 규정하는 것은 아닐 테다. <아침 출근…>이 상영되는 스크린에 눈을 주시한 채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마음과 결정들이 이 영상을 인디스페이스의 스크린 위에 띄워놓았을까. 그리고 나에게 이 영상을 극장에서 보는 일은 왜 이렇게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침 출근…>에는 사회로부터 기본권을 오롯이 보장받지 못한, 그래서 함께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행위가 그네들의 ‘정시성’을 위협하는 사건이 되어버린 이들의 치욕스러움을 견디는 얼굴이 있다. 피사체를 실제보다 더 크게 만드는 극장의 커다란 스크린이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의 무게를 다시금 떠오르게 하지만, 그것이 극장에서 느낀 감흥의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극장을 채우고 있는 나와 다른 관객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에 대한 온라인 공간의 댓글들을 떠올렸다. 다른 이의 행위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불편만을 떠올리며 혐오 표현을 쏟아내는 이의 얼굴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가 이 공간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만약 댓글의 작성자가 다른 관객들과 살을 부딪쳐가며, 그들의 작은 숨소리와 눈물 흘리는 소리와 함께 스크린에 띄워진 시위 현장을 바라본다면, 그는 아마 자신이 댓글에 사용했던 단어들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 일은 스크린 속의 세계에 빠져보는 일이기도 하지만, 타인들과 시공간을 공유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치 혼자만의 일기를 적을 때 조차, 노트를 보게 될 타인과 미래의 자신이라는 존재를 전재하는 문장이 자연스레 등장하는 것처럼, 각자의 공간에서 영화를 본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다른 관객의 존재가 전제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런 전제가 현실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극장에 앉아 같은 영화를 보는 과거와 미래의 나의 감상을 상상하고, 다른 좌석에 앉아있는 타인의 감상을 궁금해한다. 극장에서 재미없는 영화를 만난 순간을 떠올려본다. 스크린에 집중하지 못한 사람은 앞좌석에 앉아있는 타인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질문한다. ‘저 사람은 이 영화가 재밌나?’. 영화만이 이런 감각을 전달해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TV와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또한 비슷한 도덕관과 취향을 가진 타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매체가 될 수 있겠지만, 영화가 시작되면 꼼짝없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 극장이라는 장소에 관람료를 내고 입장한, 적극적으로 수동성을 택한 극장의 관객들에게 느끼는 동료 의식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스크린에 띄워진 <아침 출근…>을 보며, 토요일 저녁 인디스페이스에 다른 이들과 함께 앉아 있기를 결심한 관객들의 마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삼각지역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던 이들과, 편집실에 앉아 이미지를 여러 번 마주한 이들의 마음, 관객들이 <아침 출근…>을 찾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찾아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영화를 초청한 반짝다큐페스티발의 준비위원들을 떠올렸다. 커다란 숫자들로 굴러가는 영화산업 안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관람되는 일은 크게 연관된 것 같지 않고, 실제로 대기업의 독과점 속에서 공급이 수요를 만들어내는 일이 자주 관찰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한 편의 영화가 극장의 스크린에 띄워지는 일은 실로 기적이다. 그 기적은 누군가 이 영화를 봐줄 것이라는 각자의 믿음에서 비롯된다.
당연하게도 극장에서 <아침 출근…>을 보는 것만으로 장애인 기본권을 신장시킬 수 없다. 직접 행동에 나서는 일은 영화를 보는 일과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같은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몇 사람을 극장과 그 주변에서 만날 수 있다. 그 사실이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목소리를 내는데 필요한 힘을 나에게 준다. 모두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극장을 찾은 것은 아닐 테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 또한 스크린에 띄워진 얼굴과 그에 집중하는 다른 관객들을 바라보며,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이는 냉소에서 비롯된 도덕적 위안이나 가짜 승리감이 아니다. 여기에 <아침 출근…>을 함께 본 50명의 관객이 있다면, 51번째 관객이, 52번째 관객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나쁜 세상의 벽이 너무 굳건해서 어디에 돌을 던져야 할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극장을 찾는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떠올리고,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스크린 뒤편의 창작자들을 떠올린다. 한 편의 영화가 상영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영화를 보는 일은 그 자체로 타인과 함께하는 일이고, 나는 혼자가 아니다.
흑백의 세상, 주인공이 상자를 열면 각양각색의 도형들이 튀어나온다. 그는 놀란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본다. 도형들은 흑백의 세상을 색으로 채워내고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움직임을 따라가는 주인공을 따라, 우리는 하얀 종이 위에 적히는 검은 글씨, 애정과 관심을 나누는 사람들과 색으로 가득한 도시의 풍경, 그리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주인공은 풀잎들로 만들어진 커튼을 걷어내고 암실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영사기가 있다. 주인공의 상자에서 튀어나왔던 도형들은 영사기 안을 채운다. 영사기에서 쏘아진 하얀 빛은 색으로 가득한 세상을 그려낸다. 우리가 지나온 세상이 스크린 위에 담겨있다. 놀란 눈으로 화면을 올려다보는 주인공 옆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2.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영화에 대한 각자의 정의를 찾아 헤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인디스페이스의 리더필름은 언제나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떠오르게 한다. 충분한 이론적 바탕과 성실한 고민에서 비롯된 범상치 않은 답변을 내놓을 능력은 없다. 다만 주인공의 뒤로 펼쳐진 세계에 색을 더하고, 다른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도형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엇이라도 말하고 싶어진다. 나는 리더필름을 설명한 문단의 행간을 채워보는 과정을 통해, 저 도형들이 ‘마음’을 의미한다고 말해보고 싶다.
상자 속에 꼭꼭 숨겨져 있던 주인공의 마음은 그가 경험하는 세상을 흑백으로 만든다. 누구에게도 쉽게 이야기하지 못할 고민을 혼자만의 공간 속에 꼭꼭 숨겨둔 흑백의 세상. 하지만 마음이 담긴 상자를 열기로 결심하고 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놀란 눈으로 움직이는 마음을 따라가게 되는 것뿐이다.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타인들이 존재하는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상자 바깥으로 나온 마음은 세상에 색을 돌려준다. 강아지를 쓰다듬는 아이들, 포옹을 나누는 사람들, 교복을 입는 학생들이 보인다. 그들은 각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색을 품고 있고, 마음을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주인공은 그들의 색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카메라를 쥔 사람들은 그 풍경을 담는다. 모니터 속의 풍경은 색으로 가득하다. 도형으로 대표되는 마음들은 암실에서 더욱 빛난다. 마음들은 영사기 속으로 차곡차곡 들어가 하얀 빛을 색으로 채운다. 모두가 함께 스크린을 바라본다. 도시의 풍경과 주인공이 만난 모든 인물이 스크린을 채운다.
영화의 스태프로 보이는 이들이 등장하는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고 싶다. 프레임의 전경에 위치한 스태프와 후경에 위치한 주인공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아 보여서인지, 혹은 언제나 무엇이라도 변형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인지, 영화의 창작자와 관객, 촬영자와 피사체 사이의 벽은 희미해 보인다. 도시를 거닐며 카메라 속에 담겼던 주인공은 어느새 영사기 옆에 서 있다. 그는 언젠가 카메라의 뒤편에 서 있을 수도 있다. 리더필름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자리를 바꿔도 어색하지 않다. 카메라에 담긴 세계는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와 다르지 않고, 카메라를 든 사람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영화는 우리의 삶과 같은 조건 위에 서 있고, 우리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영화와 함께 있다.
리더필름 속 다양한 색은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홀로 된 공간에서 세상 바깥으로 나온 도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마음은 내가 아닌 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지만, 자신의 마음을 충실히 따라갈 때만이 세계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리더필름이 말하는 것, 그리고 나에게 분명한 것은, 영화는 각자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따라 바라보게 된 세계를 스크린 위에 옮겨내고, 영화를 보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세계에 입혀낸 색을 카메라 - 타인의 눈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며 자신이 이해하는 색의 스펙트럼을 조금씩 넓혀 나간다.
가끔 영화의 가치를 따져 물을 때, 영화를 보는 관객 한 명의 입장을 경시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영화를 보며 바쁘게 문화적, 철학적 레퍼런스를 읽어내는 사람들. 주제 의식과 텍스트의 빽빽한 두께가 영화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믿는 사람들. 그렇게 영화를 ‘읽어내야’ 하는 것이라면, 관객 각자의 감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된다. 하지만 모두는 영화를 바라보는 마음이 같을 수 없고, 모두에게 다르게 남아있는 삶의 기억에서 비롯된 한 명의 감상은 언제나 중요하다. 그걸 빼면 영화는 와르르 무너진다. 인디스페이스의 리더필름은 영화와 개인 사이의 거리를 좁히며 영화의 감흥을 관객 한 명에게 오롯이 돌려준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3. 영화를 함께 보는 일의 의미를 되짚고, 인디스페이스 리더필름을 경유해 영화와 관객 사이의 거리를 좁혀보고 싶었다. 창작자는 자신의 마음을 영화에 담고, 관객은 각자의 마음과 창작자의 마음을 이어본다. 영화는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내는 매체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는 일에서 관객 한 명의 자리는 중요하고, 영화 속 세계와 우리의 세계가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언제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 창작자의 마음을 따라가 보는 방법을 이야기할 차례다. 그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영화를 보는 행위를 통해 어떻게 수행될 수 있을까. 물론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법으로 영화를 보면 되겠지만, 나의 방식을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다.
인디즈로 활동하며 윤리라는 단어를 여러 번 썼다. 그 의미를 정확히 하고 싶다. 영화에 대한 글들에서 ‘윤리적이다’라는 표현은 자주 쓰이고, 마치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를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쓰이지만, 실은 아무런 의미를 품지 못한다. 윤리라는 단어는 결국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라는 질문일 뿐이다. 윤리는 절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고, 그렇기에 가치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윤리적’이라는 표현이 영화를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영화를 만드는 일은 결국 인물을, 사건을, 세계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고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플롯을 가진 극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영상을 이루는 물리적인, 혹은 디지털적인 질료를 다루는 특정 범주의 실험영화라고 해도, 영화는 무한한 세계 속에서 특정한 시공간을 잘라내는 일이기에, 모든 개별 영화는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윤리의 문제를 다룰 수 밖에 없다.
카메라가 바라보는 시선 하나에, 쇼트를 이어낸 편집점 하나에 카메라와 편집기 뒤에 서 있는 창작자의 ‘윤리적’ 판단이 담겨있을 것이다. 관객은 한 편의 영화의 모든 순간들로부터 영화 뒤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해볼 수 있다. 창작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모든 영화에서 카메라가 그 자리에 놓여 있는 이유, 쇼트가 이 순간 전환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다면, 흥미롭게 감상하지 못할 영화는 없다. 대단한 이유가 아니라도 좋다. 인물들의 움직임이 끝나고도 빈 공간을 응시하고 있는 장면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장면이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이유는, 영화 전체에서 지켜나가는 규칙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공간에 묻어나는 배경음에 집중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일 수도 있고, 그저 프레임 구석에서 지나가는 고양이 한 마리의 움직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눈앞에 보이고, 들리는 것들로부터 장면을 결정하게 만든 마음을 상상해 본다. 각자는 다른 이유들을 떠올려볼테고, 그렇기에 모든 영화는 유일무이해지고, 모든 감상 또한 유일무이한 것이 된다.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나는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세계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배운다. 영화는 말 그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다.
독립영화와 인디스페이스를 소개하는 글에 영화 전반에 대한, 일반론에 가까운 생각들을 주저리 꺼낸 이유는, 그런 생각들을 가진 지금의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이 한국의 독립영화이기 때문이다. 모든 영화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다루고 있고, 그렇기에 영화를 보는 일에 영화 바깥에서 알게 된 의미를 읽어내는 것보다 개별 영화가 세계를 바라보는 마음을 상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다면, 한국의 땅에 얽혀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다루는 한국의 독립영화는 어떤 영화보다 특별한 감상을 남긴다. 몇 가지 영화를 불러내어 말해보자면, 한국 사회 속에서 빚에 허덕이는 젊은 부부가 바깥의 커다란 세계 앞에서 초라해지지 않도록,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두 명의 얼굴에 집중하는 마음에 대해(<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박송열, 2021), 한국 여성 영화감독의 흔적이라는 충분한 토양을 부여받지 못한 것들에 목소리를 달고 빛을 비추는 발걸음에 대해(<오마주>, 신수원, 2021), 내 눈앞에 있는 4.3 생존자이자 재일교포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그보다 앞서 나가지 않는 카메라를 견지하는 마음에 대해(<수프와 이데올로기>, 양영희, 2021) 말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다.
“우리를 만나는 영화관”은 인디스페이스의 소개 글이다. ‘우리’라는 단어는 가끔씩 사람 사이의 선을 긋는 배타적인 ‘우리’가 되기도 한다. 인디스페이스의 소개 글 속의 ‘우리’는 그런 의미를 띄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인디스페이스의 스크린 위에는 멀티플렉스의 스크린보다 더욱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이 걸린다. 어떤 치욕들을 이겨낸 사람들을 떠올린다. 세상으로부터 쓸모를 의심받는 사람들, 주류가 아니라는 이유로 쉽게 목소리가 묻히고 마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 또한 이곳 인디스페이스의 스크린에 띄워진다. 모두는 스크린 위에서 평등하다. 영화 속에 담길 수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의 범위는 언제나 넓어질 수 있고, 영화는 연대의 방식이 될 수 있다. 영화를 보기로 결심한 우리의 마음이 모두의 얼굴을 스크린 위에 띄운다. 그래서 독립영화를 보는 한 사람의 존재는 중요하다. 그들이 모여 독립영화산업의 존립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경제적 맥락뿐만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존재할 것이라 믿는 창작자에게 중요하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 관객 모두에게 중요하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한,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얼굴은 더욱 다양해질 것이고, 다양한 얼굴을 마주하는 우리 또한 스스로를 스크린에 띄워질 만한 존재라며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영화와 함께하며 가능한 연대의 방식을 경험했고, 타인을 바라보는 윤리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순간을 이 글을 통해 나눠보고 싶었다. 조금 길고, 돌아가는 길을 많이 선택한 탓에, 마음이 잘 전달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인디스페이스와 독립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당신의 자리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영화를 통해 느끼는 감흥, 누구도 아닌 당신만이 이야기해줄 수 있는 감상이 언제나 궁금하다. 인디스페이스에서 당신을 자주 만나고 싶다. 당신의 자리는 언제나 이곳에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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