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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시간을 꿈꾸는 소녀〉:무복을 입고 꾸는 꿈은 평범하다

by indiespace_한솔 2023. 1. 21.

 

 

 〈시간을 꿈꾸는 소녀  리뷰: 무복을 입고 꾸는 꿈은 평범하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현지 님의 글입니다.

 

 

 

빨강색 저고리. 이리저리 흔들리는 꽃갓. 귀에 들어차는 북 소리. 무릎을 꿇은 채 흐느끼는 사람들. 이른 아침의 안개. 잘린 돼지 머리를 등에 지고 하늘로 솟아 올랐다가 다시 꺼질지언정. 입으로 쏟아지는 구술은 멈추지 않는다. 무당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른 잔상들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25살 여성의 직업일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편협한 무지였다.

 

산 속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는 것도 예정된 운명이었을까. 수진은 타고났다. 4살 때였다. 아이에게는 묻지 말라고 써 붙인 부적은 다시 아이의 손에 무용지물이 됐다. 가슴이 너무 답답하니까 제발 부적 좀 떼달라는 어린 아이의 말은 이내 약속이 되었다. 티 없이 맑고 착한 아이는 남들을 돕고 살아간다. 수진은 남들과 다른 꿈을 꾼다. 꿈을 통해 미래를 예견해주고, 위험을 일러준다. 매일 신을 모시고, 산을 오른다. 온통 수진의 운명이었다.

 

 

수진에게도 꿈이 있다. 평범하게 자라 좋은 학교에 가서 광고 기획자가 되는 꿈. 클라이언트 앞에서 당당히 아이디어를 뽐내는 영광. 20살이 되던 해, 수진은 좋은 대학교에 합격한다. 그리고 수진은 여전히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꾼다. 안면이 없는 누군가의 앞날, 가까운 사람들의 화. 뒤엉킨 것들은 아무도 없는 밤에 나부낀다. 손녀가 산심제자에서 나라제자가 되는 할머니의 소망은 야속하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육신으로 전해지는 고통, 풀리지 않는 당장의 일들은 수진을 다시끔 법당으로 향하게 했다. 그럼에도 수진은 미소를 잃지 않는다.

 

단 한 순간도 화면으로 접해온 그들의 삶이 궁금하지 않았다. 타인 앞이 아닐 땐 어떤 일상을 사는지, 어떤 꿈을 꾸는지. 인지하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나와는 관계가 없는 삶이 자명하리라 믿었다. 그들도 결국 나와 같이 꿈을 꾸는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던 게 무색했다. 나는 내일도 수진이 꿈꾸던 광고 회사에 신입 AE로서 출근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흘렸던 근래의 눈물들이 부끄러워지던 순간이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가장 먼저 꿈을 이룰 것이라는 수진의 대답이 귓가에 맴돈다.

 

 

바다를 홀로 거니는 삼신제자. 바람이 마구 흩날린다. 용왕대신께 비나이다. 삼신제자를 아껴달라고. 용왕대신. 신을 맞이할 준비는 모두 끝났다. 대학을 졸업했고, 광고 기획자의 꿈은 잠시 접어두었다. 수진의 등 뒤에는 할머니가 있다. 흰색 두건을 머리에 두른 채 무복을 입고 꽃갓을 쓴다. 뽀얗고 앳된 스물 다섯. 춤을 추는 호랑이. 나의 삼신사. 오늘도 수진은 기꺼이 촛불에 불을 붙인다. 약해진 불씨 따위를 다시 타게 하듯, 많은 사람을 살리며 또다른 수진의 꿈이 소생된다. 결코 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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