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미투〉 리뷰: 계속되는 삶, 끝난 적 없는 이야기들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이빈 님의 글입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크고 넓은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닿고, 또 어떤 이야기들은 누군가에게 닿기도 전에 아주 작은 것이 되어 묻히고 만다. 이때 닿거나 닿지 않는 것은 이야기가 가진 경중의 정도와는 무관하고 그 지점에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할 때가 많았다. 우리 더 크게, 힘 주어 얘기하자. 앞으로 나아가자.
〈애프터 미투〉는 ‘우리 더 크게’ 말했던 #Metoo 운동(미투 운동)과 그 이후에도 남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영화는 회고적이면서 동시에 현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어 마치 과거와 현재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은 인상을 주고, 이 인상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돼 있는 〈애프터 미투〉는 박소현, 이솜이, 강유가람, 소람 감독의 작품으로 각각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조명하고 있다. 박소현 감독의 〈여고괴담〉은 스쿨미투 운동이 처음 시작되었던 학교의 재학생 증언을 바탕으로 한다. 흑백 처리 된 이미지들 아래 학교 종소리가 울리고,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공포의 기운이 도사리는 학교에서 과연 ‘학생 때’를 제일 좋은 시절이라 할 수 있을까. 흔히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학교가 만들어 놓은 규율은 선생과 학생 간의 위계를 전제하고, 이로 인해 피해 사실은 쉽게 사실이 아닌 것이 된다. 몇 년도 졸업 앨범을 펼쳐도 선생님의 얼굴은 계속 같은 자리에 있다. 〈여고괴담〉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영화가 끝나도 끝나지 않는 사실들이 있다는 것을 환기한다.
이솜이 감독의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는 매일매일 노트에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라는 문장을 적는 행복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다. 분식집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하얀 운동화를 세탁하는 행복 선생님은 건강해지려 하고, 건강해지려 하는 스스로를 안아 주려 한다. 행복 선생님에게는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못한(가시화되지 못한) 피해 사실들이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시간을 거슬러 아주 깊은 곳으로부터 온 고백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선생님의 커다란 도전이 모두 담겨 있다. 바다에, 밭에, 들에 놓인 스피커들과 선생님의 고백들은 내 안의 스피커와 목소리를 동시에 두드린다.
강유가람 감독의 〈이후의 시간〉은 다양한 위치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 예술가도 함께 등장하고 있는 점은 이 단편의 주목되는 부분이다. 이들은 문화예술계 내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예술계를 떠난 동료들을 기억하며 활동한다. 계속되는 삶 아래에는 끝난 적 없는 이야기들이 있고 창작 활동과 여권 운동의 중요성을 따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게 여성 예술가들의 몫이 된다. 〈이후의 시간〉에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이 흐름에서 잠시 반문해 볼 시간을 제공한다. 정말 그럴까? 이 몫을 어떻게, 누구와 나눌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제 이런 고민들을 해 보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소람 감독의 〈그레이섹스〉는 이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단편이다. 이 애니메이션 단편에서는 내밀해서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내밀해서 더 중요했던 여성들의 성 경험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그 말들을 전부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이래서 말 못 하고 저래서 말 못 하는 것들. 그렇게 가지치기하다 보면 남는 문장들이 없고, 제대로 된 경험의 공유라는 것은 더욱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그레이섹스〉는 경험들을 하나하나 가시화하기 위해 ‘듣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 무엇보다 잘 맞아떨어졌던 단편이다.
각 단편들에는 담고 있는 이야기뿐 아니라 이를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묻어 있다. 〈그레이섹스〉에서의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만이 가질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자유자재로 활용해 메시지가 더 와닿게 하고, 〈이후의 시간〉에서 인터뷰와 이산 마임 배우의 연기가 연달아 등장하는 구성에선 현실적 고민과 창작 활동을 동시에 생각해 보게 된다.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는 따뜻한 톤으로 행복 선생님을 진득하게 바라보면서 선생님의 이야기에 고요히, 깊게 들어갈 수 있도록 유도하고 〈여고괴담〉은 사진과 pc 화면 등 기록된 자료들을 흑백으로 등장시키며 현실과 괴담 그 사이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눈앞에 보이는 길이란 것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이들에게 너무도 중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시화와 계보화는 더 중요하다. 어떤 것도 ‘우리 이제 어디로 갈까?’ 묻는 질문에 대한 정답이 돼 줄 순 없겠지만 〈애프터 미투〉가 담고 있는 이야기처럼 방향 제시는 할 수 있다. 아직 할 말이 너-무 많으니, 어떤 방향으로든 일단 가보는 것이다.
'Community > 관객기자단 [인디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디즈 Review] 〈수프와 이데올로기〉: 할 수 있는 말을 고민하는 일, 편지 쓰기와 영화 만들기 (1) | 2022.11.01 |
---|---|
[인디즈] 〈2차 송환〉 인디토크 기록: 여전히, 희망은 필요하다 (0) | 2022.10.25 |
[인디즈] 〈달이 지는 밤〉인디토크 기록: 죽은 자들의 흔적이 머무는 두 가지의 이야기 (0) | 2022.10.20 |
[인디즈 Review] 〈성덕〉: 우리는 감정 있는 ATM (0) | 2022.10.18 |
[인디즈 Review] 〈말하는 건축가〉, 말하는 얼굴의 의지와 존엄을 지키는 영화들 (0) | 2022.10.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