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 리뷰: 우리는 감정 있는 ATM
*관객기자단 [인디즈] 임다연 님의 글입니다.
언젠가 인터넷을 떠돌다가 그런 우스갯소리를 보았다. 만약 2000-2010년대를 위한 ‘토토가’를 한다면 그 시절 남자 아이돌은 아무도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는 웃어 넘겼지만, 지나서 생각해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열을 하진 않겠지만, 어떠한 오점 없이 완전체로 등장할 수 있는 그룹이 몇이나 될까. 그에 반해 얼마 전 소녀시대는 데뷔 15주년을 맞아 완전체로 돌아왔다. 우리의 오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2017년 해외에서 시작한 미투 운동을 시발점으로 하나둘 터지기 시작한 성추문은 무결해 마지 않아 보였던 연예인도 피해가지 못했다. 한 시대를 풍자했던 이들이기에, 그들에게는 수많은 ‘성덕’이 있었다. ‘성덕’은 성공한 덕후의 줄임말로, 좋아하는 가수를 직접 만나고 사진을 찍거나, 친분을 가지게 된 일부 덕후들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성범죄에 관계된 연예인이 낳은 피해자는 셀 수 없을만큼 많다. 영화에 등장한 것처럼 직접적인 가해/피해 관계로 엮인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창작물에 크고 작은 희노애락을 담았던 이들이 모두 가해와 피해의 애매한 회색지대에 묶여버렸다. 성덕이었던 이들은 그 때문에 가장 불쌍한 덕후가 되어버렸고, 이내 그 불행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해질만큼 더 많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등장했다. 누구든 덕질을 하는 사람들은 범죄자가 되어버린 오빠나, 범죄자가 될 수도 있는 오빠를 가지고 있다.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인 세연은 한 때 가수 정준영의 ‘성덕’이었다. 그가 조감독을 부탁하기 위해 연락한 다은은 승리의 덕후였고, 세연의 친구들은 이제는 이름을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오빠들을 좋아했으며, 세연의 어머니는 조민기를 좋아했다. 이들은 모두 ‘다양한’ 사유로 인해 우리의 곁에서 영원히, 혹은 잠시간 사라졌다. 특이할만한 지점은 우리를 힘들게 한 대부분이 오빠, 즉 남성이었다는 것이다. 남성 연예인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덕후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덕질’이라고 불리는 팬덤 문화는 매우 여성 중심적이다. 오래전부터 ‘빠순이’라는 여성형 멸칭으로 불려왔던 것으로 알 수 있다시피, 대부분의 ‘덕후’는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예계는 이들을 타겟으로 하는 마케팅 방식을 고수해왔다. 여성이 좋아할만한 이미지의 남성 연예인을 만들어 낸다든지, 여성에게 인기있는 2차 창작의 요소를 집어넣는 식으로 이득을 취했던 연예계는 이상하게도 남자 연예인의 성범죄 문제에서만큼은 유구하게 무심한 모습을 보였다. 개별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는 커녕, 반성조차 없는 것인지 잊을만 하면 하나둘 새롭지만 비슷한 사건들이 터져나온다. 팬덤 문화와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추문은 더이상 놀랍지 않을 정도이다.
우스갯소리로 덕후들 사이에서 하는 말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우리는 감정 있는 atm’이라는 말이다. 콘서트 티켓이나 굿즈를 팔면서 소비 문화를 조장하는 소속사들에게 일면 착취 당하는 덕후들이 장난스럽게 호소하는 말인 것이다. 이 말은 연예인의 성추문으로 고통받는 덕후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수많은 여성 팬들을 두고 있음에도 이들의 연예인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계속해서 일으키고, 사건이 터지면 부인하고 발뺌하기에 급급하다. 멋있던 나의 연예인은 사라지고 비굴하고 초라한 범죄자가 남으며, 죄책감에 고통받는 사람은 사건 당사자도 아닌, 오직 그들을 좋아했다는 이유 하나로 연대 책임을 느껴야 하는 덕후들이다. 범죄자인 연예인을 옹호한 2차 가해자이자, 그의 범죄로 인해 상처받은 2차 피해자인 이들은 그야말로 생생한 감정으로 가득 차있다. 이들은 같은 여성으로서 죄책감을 느끼고, 분노하기도 하며, 슬퍼한다.
상처받은 덕후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제대로 된 처벌이다.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고 죽은 사람에게는 그래서는 안됐다고 이야기하고, 형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죗값을 달게 받을 것을, 처벌을 빗겨나간 사람에게는 눈에 띄지 말고 자숙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모두 한 때에는 누구보다 그들을 사랑해 마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모든 것을 퍼준 일방적인 사랑을 상처로 돌려 받은 이들은 모두 궁금해한다. 이 모든 일을 겪고도 과연 다시 덕질을 할 수 있을까?
영화 내내 자신들이 받은 상처를 나누던 사람들은 그럼에도 새로운 덕질 상대를 찾아 나섰다. 뮤지컬이나 영화배우 등 다양한 분야로 범위를 넓혀 나간 이들은 다시금 사랑에 빠지고, 행복해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잘라 냈어야 할 과거의 덕질이지만, 영화는 새로운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 ‘완덕’을 권한다. 완성된, 혹은 완료된 덕질이라는 의미로, 과거의 덕질을 잘 마무리하고 후회 없는 마음으로 덮는 것, 그리고 다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상처받은 덕후들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말고 덕질의 과정에서 내가 얻은 경험과 달라진 나의 모습을 소중히 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고통 받는 덕후들을 조명하던 영화는 ‘성덕’을 재정의 하기에 이른다. 연예인을 만나고 사진을 찍은 사람이 아닌 오래도록 아름답고 무탈하게 좋아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덕후’라는 것이다. 새로운 덕질을 시작한 이들이, 또는 우리 모두가 이번에는 성덕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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