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아닌 너를 이해하는 일
〈성적표의 김민영〉 인디토크 기록
일시 9월 5일(월) 오후 7시 상영 후
진행 이동진 평론가
참석 감독 임지선 | 배우 윤아정
*관객기자단 [인디즈] 은다강 님의 글입니다.
태풍 힌남노가 제주도에 상륙한 그날 밤, 쏟아지는 비를 뚫고 나타난 사람들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극장이 데려다준 스크린 속 세계에는 스무 살 동갑내기, 각기 다른 진로를 선택한 네 사람의 삶이 잔잔하게 흐른다. 비슷한 속도로 나란히 걷던 친구들은 이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거나 혹은 자리에 머물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을 보낸다. 각자의 선택은 관계에 변화를 만들어내고, 변화는 아주 작고 불편한 감정을 싹 틔운다. 감정 무게를 견디는 건 둘 중 더 사랑하는 쪽일까. <성적표의 김민영> 인디토크 뒤에 마주한 현실은 앞이 뿌옇게 보일 정도로 퍼붓는 장대비였다. 빗속을 걷노라니 극장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이 꿈같다. 민영의 무심함도, 정희의 서운함도. 스무 살에 맞닥뜨린 껄끄러운 감정도 꿈결에 녹아 사라질 수 있을까.
이동진 평론가(이하 이동진): 안녕하세요. 〈성적표의 김민영〉 인디토크를 진행할 이동진입니다. 오늘 감독님, 배우님 모시고 굉장히 즐거운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 분 먼저 인사 말씀 부탁드리면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감독 임지선(이하 임지선): 안녕하세요. 〈성적표의 김민영〉을 공동 연출한 임지선입니다. 같이 연출한 이재은 감독님이 코로나로 격리되어서 함께하지 못했어요. 어려운 질문은 서로 미뤄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서 좀 더 떨리네요.(웃음) 재은 감독님 생각까지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배우 윤아정(이하 윤아정): 안녕하세요. 〈성적표의 김민영〉에서 김민영 역을 맡은 윤아정입니다. 날씨가 많이 안 좋아서 이렇게 많은 관객분이 계실 줄 몰랐는데 들어와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즐겁게 이야기하다가 가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동진: 방금 감독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두 분이 공동 연출을 하셨는데 이재은 감독님은 코로나 격리 중이고요. 〈성적표의 김민영〉 주연 배우 중 한 명이신 김주아 배우님이 고3이세요.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오늘 못 오셨습니다. 그런 만큼 오늘 두 분께서 큰 역할을 해 주시지 않을까 특별한 기대를 하겠습니다. 이 영화를 촬영한 지 조금 된 것 같아요.
임지선: 2019년도에 촬영했습니다.
이동진: 한 편의 영화를 개봉할 때 감독의 마음을 상상하면 부담스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그럴 것 같아요. 오늘이 사실상 첫 GV라고 그랬죠. 어떤 심정이신지요. 사실 올 추석 양강 구도 중 하나지 않습니까? 〈공조 2〉하고 〈성적표의 김민영〉하고.(웃음)
임지선: 정말 많이 떨리고 걱정되고 부담되는 마음이 가장 큰 것 같고요. 작년에 영화제를 통해서 관객분들을 미리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후기에 영화에 대한 평가보다는 이 영화를 보고 떠올랐던 기억들을 많이 남겨주셨어요. 그게 되게 감동이었고 인상에 남았는데 개봉을 하면 그런 좋은 글들을 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이동진: 지금은 개봉 실감 안 나시죠? 혹시 예매 스코어 확인하지 않으세요?
임지선: 합니다.(웃음) 태풍 때문에 못 오신 분도 계시지만 오늘 거의 매진이라 되게 놀랐어요.
이동진: 저는 다 가셨으면 어떡하나, 한 너덧분 정도 앉아 계시면 어떡하나, 이런 공포에 떨면서 걱정했는데 객석이 꽉 차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윤아정 배우님께도 질문드리겠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한 2년 정도 되셨다고 들었고요. 이 영화가 사실상 첫 번째 영화이지 않습니까, 어떠세요.
윤아정: 진짜 하루하루 너무 꿈같고 지금도 개봉이 믿기지 않아요. 이렇게 많은 관객분들을 뵙는 건 처음이고 이제 조금씩 실감이 나는 것 같습니다.
이동진: 영화를 아무 사전 지식 없이 봤을 때는 임지선 감독님과 이재은 감독님 두 분이 굉장히 오랜 친구였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두 분은 말 그대로 비즈니스 관계로 학교에서 만나신 거죠?
임지선: 영화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영화 제작 워크숍에서 합류하게 됐습니다.
이동진: 처음 두 분이 만나셨을 때만 해도 영화를 배우는 시기였을 테고요. 2017년도쯤에 각각 단편을 만든, 나이도 비슷하고 경력도 비슷한 상황에서 장편 영화를 만드는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두 사람이 같이 공동 연출한다는 것은 큰 열정처럼 저한테 느껴지거든요. 그런 결정을 하신 계기가 있으실까요.
임지선: 영화를 한 편씩 찍어보는 과정에서 동기들이 서로 품앗이를 하지만, 자기 작품을 하는 과정은 오롯이 홀로 준비하는 거라 아무래도 외롭고 힘이 많이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이재은 감독이 다음 작품을 할 때 저한테 같이 하자고 제안을 했어요. 처음에는 2회차 촬영 정도의 작은 규모로 생각을 하고 결정한 건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렇게 늘어나게 된 것 같아요.
이동진: 그럼 처음에 작게 만드시려고 했을 때 영화의 핵심적인 내용은 뭐였습니까?
임지선: 이재은 감독님이 초고를 썼는데 본인 경험이 많이 녹아 있었어요. 재은 감독님이 정말 좋아하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러 간 날, 들뜬 마음이 무색하게 서로 말이 잘 안 통하고 뭔가 다르다는 기분을 느낀 하루였다고 해요. 거기서 서운한 감정을 느꼈는데 이 서운함이 사실은 자기가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감정이 되게 소중하다고 느껴서 그걸 얘기하고 싶었다고 해요.
이동진: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 공동 연출 방식에 관한 질문일 텐데요. 교수님한테 성적 정정 요청 메일을 쓸 때 민영이 답답하게 쓰니까 정희가 키보드를 잡고 모니터 연결을 해서 타자 치는 장면이 영화에 나와요. 실제로 제가 읽은 이야기에 따르면 감독님 두 분이 노트북 한 대를 놓고 작업하셨다고요
임지선: 공동 연출이라는 말에 부합하게 모든 사소한 것들까지 같이 결정해서 했고 각본이나 편집할 때도 컴퓨터 한 대를 두고 옆에서 상의하면서 좋은 내용을 취합하려고 했어요. 저희가 경험이 많이 없어서, 그렇게 다 얘기하는 것이 비효율적이고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소통의 오류나 오해가 없어서 어떻게 보면 시간을 아꼈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어요. 모든 걸 다 상의하는 방식을 기본으로, 아무래도 두 인물이 나오니까 조금 더 이입되는 인물을 골라서 상황극도 해보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하루 동안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많고 대화로만 이야기가 진행이 되다 보니까 그런 점들을 신경을 많이 써서 서로 녹음도 해보고 서로 상처되는 말도 던져도 보고. 이런 식으로 작업했습니다.
이동진: 각각 한 인물씩 맡아서 이야기하셨을 텐데, 역할을 어떻게 나누셨나요.
임지선: 재은 감독님이 정희를 많이 맡았고, 제가 민영이를 맡았습니다.
이동진: 실제 성격 반영인가요?
임지선: 구체적인 목표가 생겼을 때 그것만 생각하는 부분이 저는 공감이 되어서.
이동진: 김민영과 감독님의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네요. 윤아정 배우님께 질문드립니다. 웹드라마에 출연하신 걸 보고 감독님들께서 캐스팅 연락을 하신 것 같은데 굉장히 기분 좋고 떨리기도 하고 그런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그날을 한번 떠올려보시면 어떻습니까.
윤아정: 웹드라마는 아니고 당뇨 인식 개선 캠페인으로 만들어진 짧은 단편영화였는데 그걸 보시고 인스타그램으로 장문의 연락을 주셨어요. 처음에 사기인 줄 알았어요. 세상이 너무 흉흉하잖아요. 감독님 계정에 들어가서 염탐을 좀 해봤어요. 영화 관련된 게시물도 많고 또 굉장히 신뢰가 가는 미모라서 ‘모르겠다, 한번 가보자!’(웃음)
이동진: 그렇게 해서 감독님들을 만나셨는데 심지어 무려 주연이지 않습니까. 처음 만났을 때 시나리오를 받으셨나요.
윤아정: 네, 한번 읽어보는 식으로 진행을 했는데 두 분이 계속 말씀이 없으신 거예요. 표정도 없이 계속 듣고 계시는 거예요. 그 뒤 한참 연락이 안 왔어요. 그래서 안 됐나 보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잊어버렸을 때쯤 연락을 주시더라고요. 정희 역할 배우분을 찾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셨다고.
이동진: 시간이 오래 걸렸던 건 다른 배우들 만나신 건가요.(웃음)
임지선: 그건 아니고 정희 캐릭터가 굉장히 까다로웠어요. 아무래도 정희라는 인물이 순한 인상이었으면 좋겠지만 그러면서도 물렁하지 않고 단단한 모습이었으면 좋겠고 엉뚱했으면 좋겠고 다면적인 모습을 원하다 보니까 찾는데 좀 오래 걸렸어요. 다행히 주아 배우를 만나게 됐어요. 그 과정 때문에 그렇지 저는 정말 (아정 배우님께) 첫눈에 반해서 연락드렸어요.
이동진: 제가 일부러 짓궂게 말씀을 드렸고요.(웃음) 사전에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그렸던 민영의 모습과 윤아정 배우가 너무 똑같아서 컨택했다는 말을 사실 이미 들었습니다. 어떤 건지 좀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임지선: 민영은 정희와는 다르게 어느 때는 한없이 가벼웠다가 어느 때는 되게 고민이 많고 무거운 면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면을 다 갖고 있었고, 저희가 본 영상 속에서 친구한테 무심하게 툭툭 뱉는 말들이나 표현들이 되게 민영이랑 닮아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동진: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혼자 키득거리기도 했는데, 오늘 여러분들도 아마 그러셨을 텐데요. 굉장히 엉뚱하지 않습니까. 영화만의 어떤 리듬이 있다는 게 너무 좋았는데, 뭐라 그럴까요. 영화 흐름 자체가 ‘액션, 컷!’을 하지 않고 찍어서 나오는 굉장히 독특한 느낌들이 있는데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이 들었고요. 초반에 특수한 유머 감각이라고 할까요. 그냥 상상만으로 나올 것 같지는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굉장히 좋았던 건, 보통 배달 음식을 기다리는 장면은 경제적인 부분이 아니니까 빨리 던지고 받을 것 같은데, 한참 기다렸다가 ‘저 사람이 뭐 하는 거야?’ 할 때쯤 음식을 던져서 캐치하는 장면이었거든요. 제일 웃겼던 것은 밖에 누가 버린 상 같은 걸 들고 와서 모서리 깨진 부분을 펜으로 색칠하고 있잖아요. 이런 굉장히 엉뚱하면서도 재미있는 디테일과 유머는 어떤 데서 나온 건지 한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임지선: 일단 막 웃기려고 넣은 장면은 사실 없는 것 같고. 그냥 자연스럽게 기숙사를 떠올렸을 때 그런 식으로 치킨 배달을 받지 않을까 싶고 정희라면 상을 주워왔을 때 까진 부분을 메워주는 캐릭터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저희가 시간이 없어서 그림 콘티를 그리지 않고 그대로 찍기 위해 사진 콘티를 준비했는데, 그 과정에서 저랑 재은 감독님이 연기를 직접 해보면서 좋은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이동진: 윤아정 배우님은 영화 속에 친구가 와서 노는 장면을 포함해서 짧게 붙는 장면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장면들에서 다양한 연기를 하셨는데 어떤 장면을 찍을 때가 가장 인상적이었는지.
윤아정: 저희가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지 몰랐을 때 담긴 장면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요. 그중에서 게임을 하다가 둘이 동시에 실수해서 깔깔거리면서 웃는 장면이 사실 리허설이에요. 진짜로 웃음이 터져서 그 부분 안 쓰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좋다고 하시면서 쓰셨어요. 그런 자연스러움 속에서도 조금 색다른 부분들을 많이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이동진: 〈성적표의 김민영〉이라는 제목이 너무 독특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이 ‘김민영의 성적표’로 잘못 알고 있을 것도 같고. ‘성적표의 김민영’이라는 제목은 초점이 김민영 캐릭터에 있는 것이고 김민영의 성적표라고 한다면 ‘그래서 무슨 성적표를 받았대?’라는 생각이 들면서 성적표에 초점이 갈 것 같아요. 워낙 강한 제목이고 심지어 영어 제목도 그대로더라고요. 이 제목은 누구 아이디어였고, 제목을 붙이게 된 의도 같은 게 있으시다면 어떤 건지요.
임지선: 단편 과정에서는 평범하게 '민영의 성적표'였는데 장편을 하게 되고 조금 더 이야기의 깊이가 생기면서 그에 걸맞은 제목을 찾고 싶어서 정말 많은 걸 시도해봤어요. 이 영화가 결국에는 민영에 대한 정희의 마음을 담은 영화여서 정희한테 민영이가 얼마나 큰 존재이고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지 제목에서도 바로 보였으면 좋겠고, 김민영이라는 이름, 소중함에 방점이 찍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나왔습니다.
이동진: 그 점에서 질문을 하나 더 드리고 싶은데, 이 이야기는 두 사람 사이의 우정과 그 우정이 예전 같지 않은, 굉장히 다루기 어려운 감정을 정말 훌륭하게 다룬 영화처럼 보입니다. 보통 그렇게 했을 때 두 사람은 제각각의 생각이 있으니까 김민영은 김민영대로 묘사를 하고 정희는 정희대로 묘사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시종일관 정희의 시각을 통해서 김민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영화가 짜여져 있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을 다루는데 왜 이렇게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셨는지. 사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정희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민영의 경우에는 정확하게 왜 그랬는지 알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거든요. 두 사람의 우정이나 어긋남이나 차이, 이런 걸 다루는 흥미로운 영화에서 왜 한쪽 사람이 다른 한쪽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초점을 잡으셨는지가 궁금해집니다.
임지선: 단편 때는 정희가 놀러 가는 씬부터 시작하는 하루의 이야기였고, 그래서 두 사람의 비중이 비슷하게 다뤄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장편에서는 아무래도 한 인물을 따라가는 게 조금 더 보기 쉽고 이입이 잘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리고 모든 과정을 겪은 뒤 정희의 성장 이야기로 풀어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아무래도 한 인물을 따라가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인물의 편에 서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촬영도 어떤 인물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민영이도 마냥 나쁜 게 아니라 민영이만의 사정이 있고, 정희도 민영이 입장에서는 답답해 보일 수 있는 인물이고요. 각자 20살 이후의 선택에 대한 고충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너무 치우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동진: 보통 주인공 중 화자의 입장에 이입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좀 민영이 좀 이기적이고 야박하게 보이는 느낌이 있는데, 영화는 그런 쪽으로 균형이 굉장히 잘 잡혀 있습니다. 클로즈업을 생각보다 많이 안 쓰신 것 같고요. 또 얼핏 이기적으로 보이는 민영도 이웃집 여자와의 관계에서는 굉장히 배려심이 깊은 사람으로 나오고 반대로 정희는 친구 수산나에게 배려가 없다고 직접 통보를 받잖아요. 그런 면을 보면 다른 각도에서는 민영과 정희도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지선: 둘을 중점적으로 다루지만 수산나라는 인물을 넣은 이유도 말씀해 주신 것처럼 민영이한테 서운함을 느끼는 정희가 있듯이 수산나도 정희한테 서운함을 느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리적인 거리가 생기면서 더 큰 노력을 해야 이어지는 우정에 대해서도 얘기해보고 싶었고, 세 명간의 어떤 미묘한 양상도 좀 그려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동진: 수산나의 분량을 보면서 제가 무릎을 쳤던 게 ‘이야, 하버드 대학교 깃발 두 개를 가지고 촬영을 하나!’ 그게 너무 웃긴 거예요. 더군다나 외국인 보조 출연자가 들어와서.(웃음) 그 장면에 대해서 한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임지선: 편집할 때 보니까 한국 특유의 체리 몰딩이.(웃음) 그래도 세련되지 않고 약간 정제되지 않은 편이 오히려 어울리겠다 싶어서 크게 문제는 안 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이동진: 저도 영화에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쭤봤습니다. 윤아정 배우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캐릭터를 만들 때 윤아정 배우가 김민영이 어떤 캐릭터인지를 생각해서 연기한 게 영화에 큰 영향을 줬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김민영은 상대적으로 덜 설명되는 인물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연기하실 때 이 독특한 인물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셨는지.
윤아정: 처음에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민영이 역할을 맡아야 하지만 민영이가 너무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연기하다 보니까 조금씩 안쓰러운 거예요. 나중에는 나라도 민영이를 미워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영화가 언젠가 세상에 공개가 된다면 아무래도 정희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관객분들이 더 많을 것이고 민영이가 좀 얄밉고 서운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제가 민영이를 연기하면서 민영이를 미워하지 않고 연기하면 그런 안쓰러움이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에 초점을 맞추면서 해석을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이동진: 사실 이 두 친구는 뭐라고 할까요. 삶이나 시간을 대하는 태도가 반대인 게 두 사람 사이에서의 미끄러짐의 핵심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영화에서 보면 제일 인상적인 삼행시는 시작하면서 나온 김민영의 삼행시인데요. 김 씨가 너무 많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쓸모없는 한 명을 골라내는 우화적인 상황 속에서 지목된 사람은 자기가 흔한 사람이 아니다,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해야 하기 때문에 민영이 ‘영원히 이대로 있지는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이 인물은 대구에 가서도 서울에 편입하려고 하고, 앞을 보면서 나아가려고 하는 스타일의 인물인 것 같아요. 반면에 정희는 대학 진학은 보류한 상태인 것 같고 테니스장에서 아르바이트하는데 별로 조급해하는 것 같지 않고요. 떡볶이를 살 때 보면 자기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을 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이 인물은 제일 중요한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앞으로 무엇을 하든, 그때의 우리 같았으면 좋겠어’라고 말을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민영은 미래로 나아가는 사람이고 정희는 과거에 남아 있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이런 구도를 영화 속에서 활용하고 계신 것에 대해서 감독님의 생각을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임지선: 말씀해 주신 것처럼 민영이는 꿈을 좇는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정희는 기다리는 인물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둘 중 어떤 것이 맞다고 얘기하고 싶진 않았고요. 수산나도 마찬가지로 20살이 되고 다양한 선택을 내리는 인물들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정희는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말하는데 이 친구가 결정에 대해서 확신이 있고 되게 단단해서가 아니라 확신을 갖고 싶어 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에 대사를 넣었던 것 같아요.
이동진: 또 영화의 전체적인 화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영화는 김민영을 바라보는 정희의 시선인데 이 영화의 첫 번째 쇼트는 김민영이 바라보는 나머지 두 친구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영화의 전체적인 것은 김민영을 바라보는 정희입니다. 그런 면에서 첫 번째 씬 자체가 굉장히 독특하게 전체적인 흐름과 달리 잡혀 있는데, 첫 장면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김민영으로 설정한 이유, 그리고 세 사람이 찍을 때 민영이 가운데 가서 찍고 또 셋 중에서 혼자만 웃지 않습니까? 이런 부분에 대해서 감독님의 생각을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임지선: 첫 장면을 구성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암시 같은 느낌이 들었으면 했어요. 첫 대사가 ‘이거 백프로 흑역사 생성이다’하는 것도 앞으로의 얘기를 많이 담고 있고, 민영이가 되게 자조적인 삼행시를 읽는 것, 삼행시 클럽 해체하는 부분도 마찬가지고. 시크한 멘트를 날리다가도 친구들 사이로 가면은 짓궂게 웃는 민영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고. 그런 게 다 녹아 있는 첫 장면인 것 같아요.
이동진: 그 장면을 찍었을 때 어떠셨어요?
윤아정: 그 장면을 찍었을 때는 앞으로의 내용을 암시한다는 해석은 못했어요. 감독님께서 좀 더 웃었으면 좋겠다, 계속 좀 더 웃었으면 좋겠다 하셔서 내가 지을 수 있는 최고로 바보 같은 웃음을 지었는데 그걸 너무 마음에 들어하셨고 그때부터 좀 포기했던 것 같아요.(웃음) 내려놓고 그다음부터는 저와 다른 생각의 디렉션을 주셔도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됐어요.
이동진: 그 장면과 또 다른 측면에서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지는 게 오디션 동영상 장면입니다. 춤이나 노래하는 장면, 특히 노래하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손만 보이더라고요. 주먹을 쥔 상태로 간절하게 노래를 부른 부분인데, 이 장면은 디렉션이 없었다면서요?
윤아정: 처음 리허설할 때 그냥 살짝 주먹을 들어서 했는데 재은 감독님이 그 주먹을 꼭 해줬으면 좋겠다고. 연습할 시간도 실제로 매우 적었고 저는 첫 영화니까 잘하고 싶은 욕심이 컸는데 재은 감독님이 열심히는 하지만 못하는 게 좋겠다고 그래서.(웃음)
이동진: 훨씬 더 잘하실 수 있는데!
윤아정: 아니요, 글쎄요.(웃음)
임지선: 선곡만 하고 정말 간절하게 불러 달라고, 열심히 불러 달라고 했는데 저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민영이스럽게 표현을 해줘서 만족합니다.
이동진: 우리가 이런 얘기하지 않습니까. 덜 사랑하는 쪽이 권력자다. 김민영과 유정희의 관계를 보면 사실 민영이가 더 이기적이라기보다는 그냥 민영이가 관계에서 덜 좋아하는 거잖아요, 정희를. 어떻게 보면 정희가 훨씬 더 착하고 현실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 관계가 본인에게 더 소중하기도 하고 정희가 더 민영이를 좋아해서 그런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사실은 저렇게까지 쌀쌀맞게 행동하는 것들도 민영이가 자기가 권력자라는 걸 알아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거든요. 두 사람 사이의 어떤 감정의 차이, 이런 것들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임지선: 아무래도 민영이한테 지금 최대 관심사는 편입이고, 또 대학에서 더 중요한 사람들이 생기고 더 중요한 일들이 생기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정희가 중요하지 않은 거지, 정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안 했고요. 하필이면 성적이 뜨는 날이라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그린 것이기도 하고. 또 재은 감독님이 초고를 썼을 때 좋아하는 마음의 양의 차이가 분명함에도 그래도 난 널 좋아한다고 용기 내서 고백하는 인물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해요.
이동진: 민영은 영화 속에서 처음 대학 성적표를 받았는데, 그 성적표가 우리가 보기에는 제대로 받은 것처럼 보이잖아요.(웃음)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마찬가지로 정희가 민영이한테 준 성적표도 보고 나면 사실은 감동적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용기도 있고 솔직함도 있고 친구에 대한 배려도 있고. 배우 입장에서 민영이 정희의 성적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납득할 것 같습니까?
윤아정: 다른 부분들은 ‘그럴 수 있지. 그래, 내가 너무한 부분도 있지’ 하겠지만 ‘한국인의 삶’에 F를 준 것은 정정하고 싶었을 것 같아요. 왜냐면 민영은 누구보다 한국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아이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 싫은 친구이고 그걸 알기 때문에 더욱 자신은 한국인스러운 사람들이 싫다고 말하는 친구거든요. 정희는 F를 준 이유로 ‘너는 혼혈이었으면 좋겠어’라고 했지만 민영은 혼혈이 될 수 없잖아요. 어떻게 보면 ‘넌 한국인으로서의 자격이 없어. 네가 원하는 대로 됐지? 넌 한국인스럽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민영은 결국 ‘‘그래 봤자 나는 한국인인데?’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이동진: 굉장히 흥미로운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마찬가지로 감독께도 성적표의 내용을 여쭤봅니다. 나머지 부분들은 다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됩니다. 왜 배려가 C마이너스인지.(웃음) ‘한국인의 삶’이라는 과목은 민영이 대구 대학에서 만난 사람들을 한국인에 빗대서 말을 했기 때문에 들어갔을 거거든요. 본인이 규정되고 싶지 않은 부분을 굳이 두고 F를 준다는 말이죠. 굉장히 다루기 어려운 미묘하고 개인적인 감정을 이렇게 한 편의 훌륭하고 풍부한 영화로 만들어냈다는 게 너무 좋은 영화처럼 느껴지는데요. 그 연장선상에서 성적표를 줄 때 한국인의 삶을 얘기함으로 인해서 사실은 가장 사적이고 개인적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보편적으로 확대해버리는 느낌이 있습니다. 왜냐면 한국 사회에 대한 어떤 코멘트가 되어 버리니까요. 그런 면에서 한국인의 삶이라는 항목에서 친구한테 F를 주는 게, 더군다나 ‘혼혈이었으면 좋겠어’라는 말 자체가 굉장히 논쟁적인 부분이 될 수도 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감독님의 생각을 더 듣고 싶습니다.
임지선: 누구나 불평을 얘기할 때는 그 안에 자기 모습도 반영이 된다고 생각을 했고. 민영이가 동기들이나 대학 사람들을 욕할 때 되게 가식적이고 눈치 많이 본다, 답답하다는 얘기를 하는데 분명 자기 자신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정희도 그렇게 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민영의 예민함이 정점에 가 있을 때 가장 한국인스럽지 않은 영삼이 시트콤 얘기도 해주고, 마지막에 이런 스트레스에서 네가 좀 해방됐으면 좋겠다는 의미를 담은 정희 식의 위로라고 생각했어요.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 영화가 굉장히 사적인 친구 간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런 키워드를 통해서 거창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확장됐으면 좋겠다는 의도도 있었어요.
이동진: 또 이 영화에서 저한테 흥미롭게 느껴진 건 엔딩입니다. 정희는 어떻게 보면 몽상적인 성격이 있지 않습니까. 정희의 몽상 중에 두 가지가 나오는데 하나는 실제로는 다 만난 적도 없는 네 사람이 모여서 제주도에 다녀오는 아주 이상한 여행인데요. 그 장면은 환상적이고 코믹하면서도 굉장히 만족감이 들도록 그렇게 찍혔잖아요. 또 하나 더 우리한테 긴 여운을 남긴 장면은 엔딩으로 나온 숲 속에서 약초를 캐는 사람에 관한 장면이었습니다. 두 장면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정희가 상상하는 것인데도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집어넣은 감독님의 생각이 첫 번째로 궁금하고요. 이 두 장면이 극명하게 대조가 되는 감정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을 또 여쭤보고 싶습니다.
임지선: 제주도 장면은 정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친구들의 모습이라고 생각을 했고. 제주도에 잠깐 있다가 오지만 되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친구들끼리 뭘 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이 한다는 게 중요한 거라는 생각을 민영에게 말해주고 싶었다고 생각하고요. 숲 장면의 경우에는 정희에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외로움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르바이트하는 곳도 또래가 없는 공간이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항상 둘러싸여 있는데 수산나와의 일이 생기고 나서 일을 할 때 숲 속을 보면서 떠오르는 먹먹한 감정들을 그런 식으로 상상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과연 나를 찾아올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요.
이동진: 그 두 장면은 다른 장면 찍을 때와 느낌이 다르셨겠죠. 실제 일어난 일도 아니고, 특히 약초 캐는 연기할 때는 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못 캐는 척하셔야 되잖아요.
윤아정: 제주도 장면은 실제로 한 3시간 정도 있다가 다시 돌아왔어요. 비가 오는 날 캠코더 하나 들고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서 공항을 막 뛰어다니면서 ‘와, 이렇게 부끄러울 수 있구나!’(웃음) 사람들이 쳐다보니까 저희끼리 부끄러움을 이겨내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자 했는데, 그렇게 하고 나니까 그다음부터는 촬영할 때 좀 덜 의식하게 되고 좀 더 자신 있게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약초 캐는 장면은 열심히 캐다가 소리가 들리면 ‘누가 왔나?’ 하고 돌아보는 정도까지만 설명을 해 주셨어요.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보다는. 정말 그냥 누가 왔나? 누가 왔으면 좋겠다, 이 정도의 감정으로 연기를 했습니다.
이동진: 제가 비범하다고 생각하는 게 뭔가 하면, 작은 사건이나 감정이 큰 파장으로 가는 일반적인 영화의 화법이 있을 텐데, 이 영화는 인물이 느꼈던 서운함이 영화에 나오는 감정의 핵심이고 영화의 마무리 짓는 방식이 굉장히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그 감정이 어마어마하다고 영화 스스로가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또 마지막 장면을 보면 두 사람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더 이상 전처럼 어울리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러고 나서 정희가 민영의 이름을 빌려서 제출한 그림이 전시되는 것을 보여주는데, 두 장의 그림 중에서 영화가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건 본인의 이름으로 쓴 정희의 그림이 아니라 김민영의 이름으로 쓴 정희의 그림이죠. 그러고 나서 실제로 약초 캐는 사람이 사실은 김민영이었다는 걸 보여주면서 영화가 뒷모습으로 끝나게 되는데 그것을 보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전시에 들른 김민영이 그림을 보면서 그 장면을 상상했다고 나오는 게 아니라 그림 전시회에 놓여 있는 그림을 비추는데 그게 김민영이었다고 보여주는 거란 말입니다. 숲 속에서 약초를 캐는 인물이 김민영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궁금증이 드는데, 일단 저게 김민영이라고 상상한 것이 누구일까라는 생각이 들죠. 정희 입장에서 ‘까탈스럽게 굴더니 정말 숲 속에 들어가서 나중에는 사람을 그리워하게 될 거야’라고 생각해 버렸을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일기를 다 보고 상대적으로 김민영의 처지를 이해하고 난 뒤의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마지막 그 장면을 어떻게 보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 마지막 장면에 대한 감독님의 이야기를 꼭 들어보고 싶습니다.
임지선: 서운함이라는 감정만큼 비중 있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이었는데, 외로움을 갖고 사는 정희가 결국에는 이 하룻밤의 일들을 통해서 민영이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도 생각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친구가 없는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잖아요. 그 시간 동안 떨어져 있는 동안 이 친구가 무얼 했고 어떤 감정이 있고 어떤 고충이 있었구나 느끼면서 ‘이 친구도 어쩌면 나와 같이 외로운 애구나’라는 생각에 도달했을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성적표도 남길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정희가 그림을 완성시킬 때 되게 자연스럽게 여인의 얼굴에 민영이 얼굴을 대입했을 것 같았어요. 재은 감독님이랑 둘 중에 누가 더 외로운 사람일까 질문도 했는데 그에 대한 답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동진: 어떻게 생각하면, 김민영에 대한 정희의 이해의 결과가 마지막 장면인가요.
임지선: 네, 관객분들도 마지막 얼굴을 보면서 정희가 느꼈던 감정들을 같이 느끼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있었던 것 같아요.
관객: 마지막에 그림 두 장을 비추는데 정희가 그린 그림의 제목이 ‘약초’더라고요. 그 옆에 민영의 이름으로 그린 그림은 어떤 여인이 약초를 캐는 건데 캐는 사람은 민영이었고요. 그래서 민영이가 약초를 캔다는 거는 민영이가 정희를 계속 파악하고 더 알아가는 과정을 그림으로 그린 걸까 생각했습니다.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정희는 민영이가 없는 공간에서 민영이를 계속 알아갔던 거잖아요. 그래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림이 그려진 건지, 반대로 생각해서 그런 경로가 혹시 영화에 있었던 건지 궁금합니다.
임지선: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말씀해 주신 것 들어보니까 훨씬 더 풍부한 해석이네요. 사실 약초는 자연스럽게 그냥 숲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약초학 박사가 될 때까지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생각에서 온 아이디어였어요.
관객: 영화에서 어쩔 수 없는 설정 같은데요. 수능 시험장이 원래 남자 학교, 여자 학교 분리하잖아요. 그리고 감독관도 1교시하고 5교시하고 같고요.(웃음)
임지선: 저도 그 점이 좀 걸렸는데, 실제로 시골의 경우에는 같이 시험을 본다고 해서. 그것보다도 정일이라는 인물과 정희를 만나게 하는 게 더 우선이라 저희도 아쉽지만 그런 설정을 했고 감독관이 교시마다 다르다는 거는 인지를 못했던 것 같아요.
이동진: 시험 볼 때 보면 할머니 응시자도 있던데 왜 그런 설정을 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임지선: 둘이 수능 시험장을 구상했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령의 수험생을 떠올렸어요. 그런 분이 계심으로써 뭔가 따뜻한 이미지를 풍기고, 정희는 관찰하기를 좋아하고 편견 없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인물인데 정희가 그분을 바라보는 시선도 전달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넣었습니다.
관객: 초반부에서 좀 궁금했던 장면이 있었는데, 정희가 앞에 있는 남학생한테 시계를 주는 장면이 있잖아요. 정희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려고 넣은 장면인지 궁금하고 또 정희가 그 시계를 계속 차고 나오는데 이유가 궁금합니다.
임지선: 정희는 대학에 가지 않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걸 오랫동안 고민하고 결심한 인물이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고요. 정희라는 캐릭터가 되게 따뜻하고 정이 많은 친구인데 자신이 베푼 것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도 조금은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시계 빌려준 것을 계기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됐잖아요. 그렇게 돌아오는 느낌도 보여주고 싶었고, 정희가 성격상 물건들을 소중히 다루기 때문에 시계는 자연스럽게 계속 차고 나왔던 것 같아요.
이동진: 사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좀 튀어나와 보이는 에피소드가 테니스장과 관련된 이야기일 텐데요. 이것은 어떻게 구성이 되었는지가 궁금하고 특히 남학생과의 이야기도 전체적인 흐름에서는 약간 덧대어져 있는 감정이지 않습니까. 거기에 관한 감독님한테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임지선: 이 친구가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때 조금 평온하고 건강한 곳에서 일을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고 숲의 이미지와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서 테니스장을 택했습니다. 정일이는 독학 재수를 하면서 또 다른 길을 가는 20살 중 한 인물인데 정희의 유일한 또래고 동질감을 느끼는 인물이라서 이 친구한테도 되게 정을 많이 줬어요. 그래서 제주도 씬을 상상할 때 정일이도 같이 포함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러브라인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소중한 친구 중 하나로 생각을 했습니다.
관객: 성적표라는 게 뭔가 끝났을 때 주는 거니까 정희가 민영에 대한 서운함 같은 감정이 끝이 나서 성적표를 줬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민영이는 정희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니까 둘의 관계가 진전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 둘의 이후의 관계에 대해서 좀 생각하신 게 있으신지 궁금해요
임지선: 사실 저희도 답을 못 내서 열어둔 부분이기도 한데 개인적으로 제가 생각했을 때는 정희가 하룻밤 동안 민영이만을 생각했잖아요. 그게 계기가 돼서 좋아한다는 고백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반대로 민영이도 그만큼의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요. 또 이게 하루 만의 일이 아니라 둘이 안 본 사이에 쌓여온 거니까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어떻게 보면 되게 쉽게 풀릴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정말 풀리지 못할 관계 같습니다.
관객: 아정 배우님께 질문드리고 싶은데 민영이 입장에서 정희에게 어떤 항목에 어떤 성적을 주고 싶으신지요.
윤아정: 용기 부분에서는 A를 주고 싶어요. 어쨌든 쉽지 않은 얘기들을 담아서 솔직하게 전해줬으니까요. 또 서운하다는 걸 서운하다고 말하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참다가 터져서 한 말이라도 서운하다고 말하는 용기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현실성 측면에서는 C마이너스.(웃음) 아까 ‘한국인의 삶’에서 F를 받은 걸 인정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게, 민영이는 정희의 시답잖은 얘기들을 끝까지 경청해주긴 하지만 사실 100% 공감하지는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혼혈이 될 수 없고 결국 나는 결국 한국인인 게 현실인데 이런 내 삶을 F로 규정을 하는 것에 대해서 기왕 줄 거면 A를 주지 그랬냐,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해서, 정희의 따뜻한 위로를 민영이 의도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 것도 그 측면에서 말씀드렸던 겁니다.
이동진: 인간관계는 몇 점 줄 것 같아요?
윤아정: 민영이보다는 낫지 않을까요?(웃음)
관객: 단편에서 시작했다는 얘기를 흥미롭게 들었는데 단편에서 어느 정도까지 기획이 되어 있었고 촬영하는 과정에서 바뀐 게 있다면 어떤 것인지, 장편을 제안한 사람이라든가 어려운 부분 같은 에피소드가 궁금합니다.
임지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정희가 짐을 싸고 놀러 가는 부분부터 시작하는 이야기였어요. 재은 감독님이 쓰신 이야기인데 그 당시에 대학 졸업반이었어요. 그래서 20대 중반의 이야기였는데 아무래도 발전하는 과정에서 친구한테 서운함을 느끼는 감정이 조금 더 와닿으려면 변화가 많은 20살 무렵이 적합하겠다 싶어서 연령을 좀 낮췄고요. 제 기억으로는 정희가 지금보다는 서운함을 잘 표현하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 얘기를 했는데 어떻게 보면 비호감적인 면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더 따뜻하고 매력 있게 만들려고 노력을 했고. 단편을 만들고 나서 제작 지원을 받아야 되는데 계속 떨어졌어요. 그러다가 영화진흥위원회 단편 제작지원 면접을 보러 갔는데 ‘너무 길고 장편 같은데 혹시 안 나온 이야기가 있냐. 그래서 점수를 짜게 줬다’라고 말씀을 해주셨어요. 저희는 거기서 장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신나서 작업을 했고 두 사람의 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지려면 둘의 전사들이 많이 그려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앞부분을 많이 채워 넣으려고 했어요.
관객: 민영이가 정희를 믿기 때문에 정희만 집에 혼자 두고 대구에 내려갔다고 생각하는데요. 정희는 그런 민영이의 믿음을 깨고 민영이의 사생활을 몰래 본 거잖아요. 이런 부분에서 정희의 인성 논란이 생길 수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런 식으로 연출하신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임지선: 아무래도 잘못된 게 맞지만. 그래서 일기장을 보기 전에 주기도문을 외우고 펼칠 때도 헛기침을 엄청 하죠. 저희도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 보니까.(웃음)
이동진: 상상을 초월하는 재밌는 답변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삼행시 시킬 거라고 생각하셨죠? 저도 이런 질문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인데, 오늘은 해야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5초 드립니다. 생각하세요.(웃음)
임지선: 삼행시 클럽을 만든 이유도 이런 게 너무 싫어서 이재은 감독님이 대비를 위해 실제로 만들려고 했다가 실패한 클럽이라고 들었거든요. 노잼이지만, 이름으로 생각해 본 것 있습니다. 이동진 평론가님 이름으로.
이동진: 벌써 재밌어요. 이.
임지선: 이동진 평론가님께 상식 청진기 리포터처럼 질문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평론계의 유재석이라는 별명을 갖고 계신데요.
이동진: 동.
임지선: 동의하십니까?
이동진: 동의합니다. 농담이고요, 동의하지 않습니다.(웃음) 진.
임지선: 진단 실패!(웃음)
이동진: 이건 심지어 마음을 읽는 거 아닙니까. 제가 동의 안 할 거라는 걸 계산해서 만든 거잖아요.
임지선: 맞다고 하시면, 진솔한 답변 감사합니다.(웃음)
이동진: 이 영화의 엉뚱한 센스가 어디서 나왔나 했는데 확인한 것 같습니다. 특별한 자리에서 특별한 개그 센스까지 보여주셨는데 오늘 어떠셨는지 감독님 배우님 인사 말씀 나누고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임지선: 궂은 날씨에 여기까지 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요. 영화 보실 때 많은 분이 정희나 민영이 혹은 수산나에 이입해서 봐주시는 것 같아요. 정말 재미있게 봐주셨다면 한 번 더 보시면서 다른 인물도 한번 따라가 보시면 어떨까 생각하고(웃음) 이 영화를 통해서 따뜻함이나 온기, 소소한 위로를 드리고 싶었는데 한 번씩 생각이 났으면 좋겠고 오늘 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윤아정: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고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간 줄도 몰랐어요. 더 많은 분과 대화 나누지 못한 건 조금 아쉽지만, 저희가 항상 후기 같은 거 다 찾아보거든요. 어딘가에 남겨주시면 꼭 가서 하트 누르고 도망가겠습니다. 많이 남겨주셨으면 좋겠고 또 주변에 오늘 영화가 좋으셨다면 많이 소문도 내주셨으면 좋겠고요. 이렇게 보러 와주시고 또 오랜 시간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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