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즈 기획 〈도망친 여자〉 : 대단한 여자들
- 홍상수 영화 속 여성캐릭터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보라 님의 글입니다.
홍상수 감독의 스물네 번째 장편영화 〈도망친 여자〉를 고대했다. 그의 영화들 속 계절이 자주 청량한 여름 아니면 포근한 겨울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그 둘 사이에 놓인 이 가을 초입이야말로 어쩐지 그의 영화들을 다시 돌아보기에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변변찮은 생각을 한다. 매번 새로운 그의 작품들을 단일한 카테고리로 뭉뚱그리는 것만큼 우둔한 감상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한번 거칠게 묶어보고 싶다. 적어도 내게 그의 여름은 밝아 보이지만 어딘가 서글픈 이야기들이다. 겨울은 괴로운 와중에 꿋꿋하게 낙관하는 이야기들이다. (물론 이 두 계절은 결국 홍상수의 필모그래피라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 서로의 이면을 보완한다.) 아직 〈도망친 여자〉의 예고편만 일별해본 바, 본편의 배경은 혹서와 혹한 중 어느 것도 앓고 있지 않는 듯 보인다. 다만 홍상수 영화에서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환절기의 공기가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낼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어 기대가 된다.
동시에 지난번 ‘여캐소‘ 특집(클릭시 이동합니다)에서 각각의 필자들이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들을 읽었다. 면면들이 모두 흥미로웠는데, 아주 사적이지만 어떤 중요한 리스트가 누락된 것 같다는 생각에 괜히 뒷덜미가 간지러웠다. 바로 홍상수 영화의 여성들 말이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그가 그리는 여성들은 진심으로 훌륭하다. 이곳의 여성들은 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채로 존재하며, 절대적이거나 단일한 언어로 절대 짓누를 수 없는 진정한 영화적 인물들이다. 가장 최근의 예시들은 그 심증을 더더욱 확증하게 만든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도플갱어로, 또는 쌍둥이로 치열하게 존재하는 민정(이유영),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언어의 장벽 안에서도 낙담한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소통하는 만희(김민희)와 클레어(이자벨 위페르), 말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봉완(권해효)이 겪는 망각의 서슬에서 총총히 벗어나는 아름(김민희), 망실과 죽음을 긍휼하며 위무하는 자들의 위치에 서는 〈강변호텔〉 속 상희(김민희)와 연주(송선미)까지.
이들은 유유하게 거리를 활보하면서도 시공을 뚫으며 존재한다. 천연하게 제 자리를 지키면서도 존재성을 무한정 확장해버리는 그들이야말로 진정 히어로를 보는 쾌감을 준다. 과연 이번 〈도망친 여자〉에서는 어떤 여자들의 모습이 그려질지 궁금증을 떨칠 수 없다. 부쿠레슈티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여하며 전한 심사평(“여성 중심 서사의 우아한 구조 속에 녹아있는 극소량의 미묘함”)은 좀처럼 의미가 잡히지 않는 문장이지만, 또 그만큼 호기심을 자극한다. 여자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는지, 왜 도망쳐야 했는지,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궁금하다. 수정과 해원과 옥희와 선희와 클레어가 아니라, 오랜만에 다시 ‘여자’(〈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혹은 ‘여인’(〈해변의 여인〉)으로 돌아온 그의 영화는 또 어떤 새로운 결을 품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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