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즈 단평'은 개봉작을 다른 영화와 함께 엮어 생각하는 코너로,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인디즈 큐'에서 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흐르는 삶의 끝
〈흐르는 여정〉 그리고 〈우주의 끝〉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주연 님의 글입니다.

한 남자의 영어 내레이션으로 춘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신을 소개하는 춘희의 문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젊은 남성의 목소리와 언어. 그 속에서 춘희가 움직인다. 집을 나서고, 차를 타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풍경을 바라보며 이동한다. 조수석에는 춘희가, 운전석에는 화분이 앉아 있다. 화분이 운전하는 황당한 장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건 창밖을 내다보는 춘희의 표정이 평화롭기 때문이리라.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기 위해서는 나무를 잘라내야 합니다.
아니 어떻게 피아노 들이겠다고 나무를 잘라요.
그럼 15층에 있는 우리 집으로 들이자.
…아는 분이세요?
건물 하나에 몇십 세대가 같이 사는 아파트에는 완전한 고독도, 사생활도 없다. 주차장에서 마음껏 세차도 할 수 없고, 내 집 앞이지만 들이치는 빗물을 굳이 청소하고 싶지는 않은 미묘한 공간. 얼마든지 남의 집에 참견할 수 있는 곳에서, 이름만 겨우 아는 사이에, 남편의 그랜드 피아노를 민준의 집으로 들인다.

춘희의 하루는 단조롭고 분주하다. 매일 집을 청소하고 남편의 차를 닦는다. 피아노 위에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도 빠뜨리지 않는다. 먼지를 걷어내면 그 아래 감춰져 있던 광택이 드러나고, 춘희의 얼굴도 한결 가벼워진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남편의 이야기는 빠지는 법이 없다. 들을 수 없는 목소리에도 남편의 존재감은 빛나고, 춘희는 그 속에서만 살아 숨 쉰다. 민준의 집에서 춘희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피아노는 물로 청소하면 안 된다는 것. 평생을 이렇게 해왔다는 춘희에게 민준은 새로운 도구를 쥐여준다. 닦지 말고 털어내기.
민준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 관객들은 그가 내레이션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형식은 춘희의 삶을 바라보는 단서가 된다. 춘희는 먼지를 걷어내고 남편의 흔적을 돌보는 일에서 하루의 의미를 찾는다. 그녀의 하루에는 춘희 자신이 없다. 하지만 민준을 만나면서 새로운 움직임이 생긴다. 피아노 연주를 듣고, 엄마를 찾으러 함께 길을 나서고, 지친 사람을 일으켜 함께 먹을 밥을 차린다. 남편의 흔적을 돌보는 데 머물렀던 춘희의 일상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들어온다. 그 속에서 춘희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붙기도 한다. 떠난 이를 살리기 위해 멈추어 있던 하루가, 민준을 만나면서 비로소 ‘흐르기’ 시작한다.

“삶이란 무엇일까?”
〈우주의 끝〉은 하나의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토끼는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삶의 끝을 마주한 상황에서 자식들에게 남길 말을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속 시원히 욕을 하기도, 전혀 모르는 이에게 응원과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한다.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은 토끼가 남은 시간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다. 나의 앞날을 걱정하는 데만 머무르지 않고, 주변의 삶에도 눈을 돌린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토끼는 절망하기보다, 일찍 희망을 버리려 하는 이를 지키려 한다. 자신의 삶조차 붙들기 어려운 순간에 다른 존재의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것이다. 삭막하게 서 있는 건물과 옥죄어 오던 세상의 규칙들도 이제는 토끼를 답답하게 하지 않는다. 끝을 앞둔 토끼에게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기에, 오히려 지금 곁에 있는 이에게 건넬 수 있는 말과 행동이 선명해진다.

춘희와 토끼의 삶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하지만, 타인을 만나고 관계를 맺으며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삶은 언제나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뒤 한자리에 머물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만남으로 새로운 길에 들어서기도 한다. 때로는 끝을 앞두고서야 주변을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각자의 삶은 저마다의 궤적을 그리면서도 다른 사람의 삶과 맞닿는다. 누군가에게 건넨 말 한마디와 함께 보낸 시간이 또 다른 하루를 움직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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