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중첩을 확인하기
〈오, 발렌타인〉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6년 3월 14일(토) 오후 1시 상영 후
참석 홍진훤 감독
진행 김예솔비 영화평론가
* 관객기자단 [인디즈] 남홍석 님의 기록입니다.
2026년에 혁명을 말하기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혁명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우리의 삶 곁에 존재하지 않는 가치처럼 보인다. 그러나 단일해 보이는 세계의 이면을 파헤치고, 그곳에 자리한 중첩을 확인하려 드는 창작자가 있기에 우리는 다시금 혁명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홍진훤 감독의 〈오, 발렌타인〉은 바로 그 배후를 파고드는 작품이다. 어느 때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언어가 빈번했던 초봄 주말의 인디토크 현장을 기록해 보았다.

김예솔비 영화평론가(이하 김예솔비): 안녕하세요. 〈오, 발렌타인〉 상영 후 토크 진행을 맡은 김예솔비라고 합니다.
홍진훤 감독(이하 홍진훤): 네, 안녕하세요. 이번 영상 연출한 홍진훤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김예솔비: 우선 〈멜팅 아이스크림〉 개봉 후에 저희가 대화를 나눴던 자리에서 설악산 흔들바위가 나오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한 등산객이 흔들바위를 밀고 있고, 그가 전력을 다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이죠. 그리고 어딘가에서 거대하다고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흔들바위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그것이 추락했다는 가짜 뉴스나 농담 등은 만우절마다 돌아오는 레퍼토리 중 하나로 알고 있는데요. 찾아보니 2022년에는 ‘설악산 흔들바위를 떨어뜨린 미국인 관광객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입건’이라는 제목의 가짜 뉴스가 있었더라고요. 이 가짜 뉴스를 보도한 신문 기사를 보면 작성자는 평균 체중 89kg인 미국인 유학생 11명이 힘껏 밀어낸 끝에 바위를 추락시켰다며, 흔들바위가 떨어질 때 엄청난 굉음을 냈는데 그 굉음이 실은 ‘뻥이요’였다고 적었다고 해요. 되게 썰렁한 농담인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글이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려고 동원된 요소들이 재밌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바위를 추락시킨 자가 미국인 유학생들로 상정된 점, 그리고 떨어질 때 엄청난 굉음을 냈다는 대목이 그렇습니다.
물론 이 글에서는 농담의 기승전결을 완성하기 위한 장치이지만, 사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바위가 추락할 때 굉음이 날 거라고 상상하게 되는 것 같아요. 바위의 형상 자체가 그런 상상을 부추기고, 심지어는 그 천지가 울리는 굉음을 들어본 적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영화 또한 가상의 굉음, 거대한 상상적 굉음을 들려주려는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중적으로 성공한 농담이나 음모론일수록 실제 현실의 공포와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에 그런 섬찟한 생각이 얼핏 들었는데요. 이 거대한 것이 추락했는데 아무도 그 개념을 믿거나 믿으려고 하지 않을 때, 심지어는 그것이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할 때 그 추락은 망명 비슷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미술 혹은 영화는 바로 이 거대한 것, 밀어 넘어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존재 너머의 상상적 굉음 같은 것을 들려줄 수 있는 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간략하게 해보았고요.
그렇다면 무엇이 추락한 것일까? 감독님의 전작인 〈멜팅 아이스크림〉에 1987년 민주화 운동 세대의 기억이 있었다면 오늘 보신 〈오, 발렌타인〉에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그 이후에 형성되었던 노동운동의 기억들이 있는데요. 이 투쟁은 한때 승리의 이미지로 여겨졌던 것이죠. 1989년에 있었던 128일 파업과 골리앗 투쟁 같은 사건들에 대한 구술 기록을 보면 일생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회상하시는 경우가 많고요. 그러나 민주노총이 합법화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탄압하는 악법이 통과되었고, 현대중공업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점차 관료화되었다는 사실은 극 중 증언에서도 드러납니다. 극 중 등장하는 노동자의 작업복을 입었지만 이미 자본화된 자본 인격적 표현이라는 말이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상상적 굉음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승리의 목소리가 아닌 그러한 패배의 목소리라는 생각을 해봤는데요.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 들었던 생각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아 보았습니다. 감독님께서 해주실 말씀이 있을까요?
홍진훤: 그렇게까지 깊은 뜻이 있는지 제가 잘 몰랐는데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웃음) 흔들바위 관련해서는 저도 그 미국인이라는 말이 어떤 신뢰를 가져다주는 것일지 궁금하네요. 실제로 TV 프로그램에서 씨름부를 전부 데려와서 밀어보려는 방송도 할 정도로 예전부터 내려오는 신화 같은 말들도 많아요. 어떤 고서에는 이 바위는 한 사람이 흔들면 흔들리는데 몇천 명이 와서 흔들면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고요. 신화화된 돌이 현대로 오면서 전시라는 행위와 이어지게 되며 또 다른 맥락으로 모두에게 너무 중요해진 슬픈 바위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리가 다 미는 거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모두 그것을 흔들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사회가 용인한 안전의 선을 넘어서지 않는 정도에서 각자 최대한의 위험을 만들어 내고 공중에 전시하는 행위의 시작과 끝이 지금의 운동, 또 지금의 예술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기에 흔들바위는 이 영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제가 관심 있게 봐왔던 돌이고요. 전시라는 것도 제게 중요하고 지금의 운동도 위험을 생산하기보다는 전시하는 행위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있어서 넣어보았습니다.

김예솔비: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영화가 보이지 않는 추락의 감각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말씀하셨듯이 흔들바위가 실제로 떨어질 수는 없기에 추락을 직접 보여줄 수는 없죠. 대신 제가 영화에서 자주 봤다고 느껴지는 것은 탑의 이미지들인데요. 〈멜팅 아이스크림〉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상을 클로즈업했던 것도 떠오르고, 오늘 본 〈오, 발렌타인〉에서는 일종의 기념비적 상징물로서 탑의 이미지가 종종 등장한다고 생각했어요. 다양한 형태의 탑 혹은 현장의 크레인들을 보며 지시성 보다는 탑의 형상 자체가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골리앗 투쟁은 1990년 선박 건조용 크레인을 점거한 고공 농성이었는데요. 크레인의 거대한 형상 때문에 붙은 골리앗이라는 무섭고 큰 이름은 〈멜팅 아이스크림〉에 등장하는 노동자 대투쟁의 현장을 두고서 그것이 노동자라는 계급이 자신을 드러내고 물리력으로 압도하던 광경이었다는 증언에 대응하는 상징적 이미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직적인 것을 어떻게 보여줄까 하는 문제는 사실 영화라는 매체가 직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영화가 세로 방향, 즉 수직으로 움직이는 운동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력하다고 말한 바 있죠. 물론 카메라를 틸팅하는 방식으로 종적 운동을 따라갈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운동에서 그려지는 것은 높다는 감각보다는 멀다는 감각에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영화는 이런 한계 때문에 다른 어떤 예술 표현 장르보다도 더 추락이나 실추 같은 것을 주제화하려는 경향을 띤다고 이야기하는데요. 그러니까 크레인이라는 장치를 쓰지 않는 한 영화는 수직적인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어렵고, 사용한다 해도 어색한 움직임이 될 때가 많습니다. 다시 하스미를 인용하자면 영화는 이 수직 운동의 부자연스러움을 안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이어져 왔다고 말하는데요. 영화 현장에서 크레인이라는 것은 현장을 통찰하는 감독의 상징적 이미지로 존재했지만, 한편으로는 수직 샷의 부자연스러움을 폭로하는 영화들과 크레인을 사용하지 못해서 가난한 상태로 거리를 헤매는 수많은 수평의 영화들을 통해 권위가 실추되었다고 합니다. 영화사적으로 이 실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밀고 나간 것은 누벨바그일 텐데 이를테면 고다르에게 크레인 촬영은 미국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상징과 다름없었던 거죠. 그래서 고다르는 크레인을 빌려서 그것 자체를 카메라가 찍어야 할 피사체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데요. 저는 〈오, 발렌타인〉에서 추락을 감각하게 하는 방식이 고다르의 방식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수직으로 뻗어 있는 것을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과시적인 형태로 만들면서 크레인 혹은 탑이 가진 권위를 공개시키는 방식이 이 영화에도 사용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인데요. 결정적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크레인 농성 장면이 골리앗의 실추를 표상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관련해서 찾아보니 2009년에 노조 대표가 골리앗 투쟁이 있었던 바로 그 크레인에 올라가 노사 화합을 선언하는 상징적 행사가 있었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2009년이면 사내 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었을 시기거든요. 민주노동 운동의 어떤 상징적 골리앗들과는 반대로 이들은 크레인을 더 이상 무기로 사용할 수 없었던 거죠. 오히려 또 다른 권위의 상징이 되어 버린 그 구조물에 맞서기 위해서 크레인에 올라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두서없이 이야기했는데 감독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홍진훤: 재미있네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사실 고다르와 누벨바그를 잘 모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확실히 제 영화에서 수직성은 당연히 중요하고 〈멜팅 아이스크림〉 때는 동상을 카메라로 훑으면서 추락하는 듯한 연출을 직접적으로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기념비나 탑 같은 것들이 어떤 에너지를 이미지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건들이 갖는 총체적인 에너지를 한순간에 중단시키고, 박제하고, 과거화시키고, 끝내 이미지화하는 그런 과정들이 남근을 세우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저는 영화의 중간쯤에 슬라이드 쇼처럼 넘어가는 128일 파업의 사진을 노동자 계급의 영웅적인 투쟁의 상징 같은 것으로 배우고 자랐는데, 사진에 등장하는 이 일이 박일수 열사 투쟁 때는 다른 위치에 서 있었던 과정을 보게 된 것이죠. 저에게는 그 사진 또한 거대한 기념비 같은 것이었기에 어떻게 그런 상징을 걷어내고 현재성을 더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사진을 중심에 놓고 공격해 보는 영화 속 구조가 나왔던 것 같고요.
그리고 저에게는 아까 말씀하셨던 고공 농성이라는 키워드가 되게 중요하거든요. 왜냐하면 저는 어쨌든 시각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보니까, 그리고 아시다시피 제가 또 집회 덕후로 오랫동안 살아왔잖아요. 몇십 년 동안 집회 구경을 하다 보니 투쟁의 수많은 방법론이 있을 텐데 고공 농성만큼 무력한 방법이 있나 싶은 거예요. 도대체 노동자들은 저기 가서 어떤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인지, 예전처럼 공장을 점거하지도, 그렇다고 시민들을 붙잡고 선전을 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저 하늘에 왜 끝도 없이 노동자들이 올라가는 것인지가 저의 큰 고민 중 하나였습니다. 물론 그분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보이는 것, 즉 가시성을 획득하는 것이 이 세계에서 생존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아가고 계시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이 세계는 시각 권력을 중심으로 권력이 재편되고 있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투쟁들도 사실 무엇을 보이게 하고 무엇을 가릴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투쟁의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직접 가시화하는 고공 농성이라는 방법을 택하는 건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제가 갖고 있는 두 가지 정도의 큰 고민이 영화 여기저기 박혀 있는 것 같습니다.

김예솔비: 말씀해 주신 걸 들어보니까 〈멜팅 아이스크림〉에서도 고공 농성을 하는 남성이 등장하는 장면이 후반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최후이자 가장 무력한 방법으로서 고공 농성을 말씀해 주시는 게 영화의 형식에도 좀 반영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수직을 보여주는 영화의 한계에 대응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이 영화가 화면에 수평을 도입하고 있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관점에서 영화의 분할 화면을 이야기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의 전신이 된 〈더블 슬릿〉이라는 작업은 2024년 부산 비엔날레, 2025년 북서울시립미술관 ‘타이틀 매치’에서 먼저 소개된 바가 있는데요. 부산 비엔날레 공식 아카이브에 있는 작업 설명을 참고하면 이렇습니다. ‘컬러, 5.1채널의 오디오, 60분 분량의 단채널 비디오’. 저는 사실 단순하게 이 작업이 2채널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채널 비디오라고 소개가 되어 있어서 이 지점에 대해 이야기가 되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전시장에서 멀티 채널로 선보인 작업을 극장 상영을 위해서 다시 편집할 때는 보통 싱글 채널로 재편집하기도 하고, 정여름 작가의 〈조용한 선박들〉처럼 본래 투 채널 영상으로 상영했던 것을 영화제에서는 2채널 프로젝션 버전으로 상영했던 사례들도 있는데요.
그런데 〈더블 슬릿〉이라는 작품은 애초에 단채널 영상으로 제작이 되었고, 화면이 두 개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상 안에 균열이 내포되어 있는 방식으로 말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분할 화면은 사실 언뜻 보았을 때는 우창수 씨와 조성웅 씨라는 두 인물의 삶의 궤적을 그리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은 산으로, 또 한 사람은 늪으로 가서 한 사람은 시를 쓰고, 또 한 사람은 노래를 부르죠. 그런데 이 두 세계는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인과로 엮여 있는 것도 아닌데요. 둘로 나뉜 화면의 구도는 영화 안에 등장하는 노조와 사내 하청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과 균열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박일수 열사의 죽음과 그 이후라는 분기점으로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박일수 열사의 생전 자료들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예를 들면 우창수 선생님의 증언에 따르면 박일수 열사가 자기 딸을 찾기 위해 방송에 출연했다는 말도 있었는데 그냥 그 증언으로만 등장할 뿐이고, 사실 영화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그의 영정 사진과 이후에 있었던 추모 집회에서 그 사진을 들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 같은 이미지들인데요. 사실 〈멜팅 아이스크림〉도 그랬지만 〈오, 발렌타인〉이라는 영화 역시 현장성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는 아닌 거죠. 물론 부분적으로는 현장의 기록 영상이 사용되지만 그것은 현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와는 또 다른 것이고요. 예를 들면 박일수 열사와 관련된 영화로는 박세연 감독이 연출하고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 노동조합 노동자 뉴스 제작단에서 제작을 맡은 〈유언〉이라는 작품도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보지는 못했지만 설명에 따르면 영화는 박일수 열사의 죽음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그가 땅에 묻히기까지의 56일을 다룬다고 되어 있네요. 이 설명과 비교해서 보자면 〈오, 발렌타인〉은 어쨌든 박일수 열사의 죽음 이후 시간을 일대기적으로 재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비선형적으로 시간을 감각하게 하는 방식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더블 슬릿, 분할 화면이라는 구도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더블 슬릿은 양자 역학 실험에서 나온 개념이고 대상이 파동인지 입자인지를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두 개의 좁은 틈을 의미한다고 해요. 흔히 이제 이중 슬릿 실험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를테면 하나의 광원과 그것이 통과하게 되는 두 개의 틈이 있고, 그 뒤에 스크린이 있습니다. 빛이나 입자를 쏘았을 때 두 개의 틈을 통과했으니 스크린에 두 개의 흔적이 맺힐 것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일 텐데, 이 실험의 결과는 각 틈에서 파동이 퍼져 나오면서 서로 간섭을 일으켜 간섭무늬가 형성된다고 해요. 그러니까 이 실험은 물질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하는 이분법적 결과를 넘어서 고정되지 않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더블 슬릿〉이라는 작업은 〈오, 발렌타인〉 개봉 전 영상자료원이 기획한 ‘틈: Film in the Gap’이라는 이름의 기획전에서 상영했었는데, 이때 설명에서는 중앙에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을 일종의 틈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중앙의 선이 아니라 이 두 개의 화면 자체를 두 개의 틈으로 이해했던 것 같아요. 말하자면 두 개의 틈과 하나의 스크린이 있는 것인데 산과 늪, 과거와 현재 같은 식으로 갈라져 있는 두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간섭하며 모순되는 현실을 보여주는 형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이것은 두 개의 스크린이 아닌 하나의 스크린인데요. 유운성 평론가는 ‘현장감 없는 현장의 웅변’이라는 글에서 홍진훤 감독님의 작업은 현장 사진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긍하지도,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는다면서 사진이 계속해서 다른 무언가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면 엄청난 비극조차도 지극히 미적으로 추상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따라서 그런 관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전략들을 모색해온 작가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홍진훤 감독님의 작업은 어떤 현장 비극이나 사건이 일어난 현장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내적으로는 현장감이 완전히 빠져나간 상태이지만 그 사진이 사건적 장소를 계속해서 현재화할 수 있도록 특정한 담론적 배치안에 두는 일이라고 묘사하고 있는데요. 저는 여기서 담론적 배치안에 사진을 두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고 그것이 〈오, 발렌타인〉의 분할화면 효과를 설명하는 말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조금 더 인용을 해보면, 홍진훤 감독님이 안소연 기획자님과 주고받은 서신을 묶은 『사진에 관한 대화』라는 책에서 ‘인덱스’에 대해 설명하신 구절을 유운성 평론가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덱스가 어떤 대상을 직접 가리키기보다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가깝다는 비유가 나오는데요. 곧 날이 밝으면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하는 걱정이 든다고 말하는데, 인덱스라는 것은 전적으로 상황과 맥락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고유한 의미나 속성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죠. 대부분의 현장 사진가가 지금 이곳을 증언하면서 기념비가 되려고 하지만 감독님의 현장 사진은 사진이 더 이상 현재와 물리적으로 연결될 수 없음을, 그런 깨진 링크라는 것을 가시화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비유를 보면서 제가 연상했던 다른 작업이 베트남 작가 응우옌 트린 티의 〈Landscape Series〉라는 사진 슬라이드쇼 연작입니다. 이 연작은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이 아니라 신문 기사나 보도 사진에서 발췌한 사진들인데 사람들이 사건이 일어났던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실 지금 그 사림이 가리키고 있는 것에는 아무것도 없죠. 그냥 텅 빈 산이 있고 텅 빈 논이 있고 그냥 텅 빈 거리가 있는 사진들을 모아놓고 있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이 풍경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아놓게 되면 풍경과 그곳을 가리키는 손가락, 그리고 풍경과 그곳에서 있었던 사건 사이의 물리적 관계가 깨져 있다는 사실이 가시화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사진들이 홍진훤 감독님이 설명해 주신 인덱스로서의 사진과 깨진 링크를 이미지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언급해 보았습니다.
다시 〈오, 발렌타인〉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면 영화가 현장을 다루는 방식은 박일수 열사의 죽음을 그때 일어났던 사건, 혹은 그때 거기의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링크가 깨진 사진 혹은 시간의 지지체를 잃어버린 이미지로 만드는 것에 있다는 시간이 들었어요. 예를 들면 박일수 열사의 죽음이라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담론적 배치안에 놓아두고 계속해서 다른 이미지, 증언, 목소리들과 관계 맺게끔 하는 방식으로 현장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은 이미지 간의 몽타주죠. 우창수, 조성웅 씨의 증언과 구술, 비정규직 노조 투쟁을 담은 아카이브 영상, 기념비적인 노동자들의 투쟁 기록들, 그리고 이 이미지 간의 관계는 선험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의 동시에 발생해야 하고, 풍경과 손가락이 동시에 보여야 하는 것이죠. 박일수 열사의 죽음을 기념비로 보존하거나 추모로서만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불확정적인 의미의 형성 속에 열어두기 위한 형식으로서의 분할 화면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말이 좀 길어졌는데 감독님께서는 어떠신가요.

홍진훤: 오랜만에 비평 언어들을 이렇게 마구마구 들으니 반갑고 좋습니다. 저는 너무 재밌고요. 거의 다 제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지만 제 말로 조금 바꿔보겠습니다. 저는 중첩이라는 단어를 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더블 슬릿도 결국은 입자성과 파동성이 중첩되어 있다는 상태인 것이 사실 모든 물질의 본질적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세계의 모든 것은 근본으로 가면 중첩 상태에 있다는 거죠. 말씀하신 대로 다들 2채널이라고 부르는 작품을 저는 일부러 계속 단채널이라고 얘기하고 있는데요. 2채널은 다른 세계를 하나로 결합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데, 분열이라고 표현하셨지만 저는 하나의 스크린, 하나의 세계가 어떻게 중첩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결합보다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다음에 이제 사진이나 영상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저는 거의 비슷한 비평적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인덱스 같은 이야기들을 자꾸 하게 되는 것도 이미지의 힘을 신뢰하기 때문이거든요. 저는 예전에 포토저널리즘의 삶을 살아보기도 했고, 여러 사진들을 계속 찍어오면서 이미지 환경과 이미지를 수용하는 사람들의 태도 변화를 통해 사진과 이미지의 무력을 계속해서 경험했던 개인적 역사가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사진이든 영상이든 아까 말씀하신 프레임 너머의 대상에 자꾸 집중을 해왔기 때문에 이 세계가 더 이상 그렇게 작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리킴의 대상에 대한 집착을 통해 이미지의 무력을 경험한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담아 〈언다큐먼티드 모나리자〉라는 작업을 발표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이미지가 현재의 힘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맥락, 환경, 조건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들이 이미지와 만났을 때 이미지 생산자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어떠한 방향성의 힘으로 우리 세계 앞에 드러났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고요. 사진으로는 그것들을 조합해서 환경을 만드는 작업도 하고, 스크린으로 오면 이런 식의 몽타주 작업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저는 이미지들의 관계에 있는 어떤 힘이 실제로 이 세계에 작동하길 원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미지를 붙잡고 있어요.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매체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게 되고 새로운 연결, 혹은 경험해 보지 못한 이미지 조성 환경 같은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멜팅 아이스크림〉 때는 푸티지가 우리를 끌고 가려는 시간대로 수렴하지 않고 현재에 계속 각성 상태로 머물기 위해 화질이 어떻게 변하고 어떤 순서로 충돌하는지에 집중했고요. 〈오, 발렌타인〉은 두 개의 구멍에서 이미지들이 어떻게 만나는지, 그것에 소리가 어떻게 더해지는지, 그리고 사진과 영상의 시간성 사이의 정반대 성향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 중간에 등장하는 스톡 푸티지들은 ‘혁명’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한 것들인데, 저에게는 어떠한 맥락도 없는 무시간적 이미지들이에요. 그래서 복잡한 시간의 방향이 한 화면에서 싹틀 때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도 가게 하지 못하게 현재에 머무르게 하는 기대들을 만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김예솔비: 궁금했던 것들을 다 짚어주셔서 감사하고요.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썼는데 관객분들의 질문을 받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객석에서 손을 들어 주시면 마이크를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관객: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왜 지금 이 시기에 낯선 ‘혁명’, ‘사회주의자’ 같은 것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만드셨는지 궁금하고요. 두 번째는 영화에 고래의 이미지가 많이 나오는데 그건 어떤 의미로 넣으셨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홍진훤: 자꾸 혁명 이야기를 하는 것은 혁명을 꿈꿀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이 너무 슬프기 때문입니다. 제게 혁명이라는 것은 이데아가 아니라 이 세계를 극복한 다음에 어떠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희망 같은 거였거든요. 물론 그렇게 도래한 세계도 또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기에 어떤 운동은 절대로 완성될 수도, 종료될 수도 없기도 합니다. 그런 에너지 자체가 제게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는데 오늘날 혁명은 공상 과학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치부되고 있는 상황이 슬퍼서 거리낌없이 사용하려고 했고요. 지금의 세계가 적어도 제가 봐왔던 세계에서는 가장 탈출구를 상상하기 힘든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우리가 혁명을 꿈꿀 수 없다면, 그들처럼 노동자 계급이라는 운동의 주체를 신뢰할 수 없고, 어떠한 이념도 우리가 믿고 의지할 곳이 없다면 도대체 우리의 새로운 세계는 어디서부터 다시 사유해야 하는가. 어떠한 실천들이 지금 우리에게 가능한가. 이제 이런 것들을 점검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저번 영화부터 계속해서 이런 류의 영화를 만들고 있고요.
두 번째로 고래는 큰 의미는 없지만 흔들바위와 거의 비슷한 맥락으로 들어가 있어요. 울산에 가면 고래 박물관이 있거든요. 거기서 돌고래 쇼를 하는데 이제 유리로 된 밑 공간에 들어가서 위를 올려다보면 엄청 무섭습니다. 흔들바위와 마찬가지로 어떤 위험을 체험하러 가는 곳이고요. 고래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영화는 조성웅 씨가 살고 있는 화천과 우창수 씨가 살고 있는 창녕, 그리고 박일수 씨가 살았던 울산의 풍경들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물고기 잡는 이미지들이 화천의 산천어 축제거든요. 그런데 저는 사진을 할 때부터 어떤 사람에 대해 이미지로 서술해야 할 때 사람 자체를 이미지로 다루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 사람이 보고 있는 세계가 그를 규정한다고 믿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지금 어떤 풍경 앞에 놓여 있는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여기에 나오는 얼굴들, 환경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고래도 그중 하나였고요. 우리가 산이나 늪으로 들어갔다고 하면 평화롭고 한적한 전원생활을 할 것 같지만 그곳도 엄청난 전쟁터이고, 수많은 사건과 풍경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더라고요. 그래서 환경의 복잡성, 그러니까 그들이 새로운 사유를 시작하게 된 근거가 되는 풍경이라고 생각해서 세 곳의 풍경을 많이 넣었습니다.

관객: 저는 이 다큐멘터리가 비정규직을 다룬다는 것만 알고 보러 왔는데요. 그래서 방식도 내용도 굉장히 새로웠고, 민주노총이 불법인 시절이 있었다는 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질문은 〈오, 발렌타인〉이라는 제목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홍진훤: 그 말씀을 하시니까 〈멜팅 아이스크림〉을 보고 비정규직이라는 단어 뒤에 철폐라는 단어가 붙을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는 피드백이 기억나네요. 저는 그런 무언가가 균열되는 상황이 너무 반갑고 감사합니다. 지금 이 세계가 자연스럽게 그냥 온 세계는 아니라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싶어요. 분명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목숨을 건 투쟁도 너무나 많았으며, 지옥을 막기 위해서 애쓰신 분들이 너무 많았지만 우리는 많이 패배했고요. 그런 패배들의 누적과 축적으로 지금 이 세계가 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어요.
〈오, 발렌타인〉이라는 제목에 대해서는, 처음에 이 영화가 기획될 때는 되게 아름다운 제목이 있었어요. ‘한마음’이라는 제목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박일수 열사가 처음에 만든 하청 노동자의 모임도 ‘한마음회’라는 것이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하나 되는 세상, 참 불가능한 세계를 꿈꾸셨구나 하는 슬픈 마음도 있어서 이념적인 맥락으로 프로젝트 이름을 그렇게 정했고요. 그런데 이분들은 뜨겁게 투쟁을 하시다 당신들의 말대로는 싸움에서 졌고, 어떤 연유 때문에 숲과 늪으로 들어가셨잖아요. 그러면 저는 거기서 농사도 짓고 건강도 챙기면서 사시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왜 들어가서까지도 저렇게 사시나 싶었죠. 왜 저기 가서도 혁명을, 세상을 바꾸는 법을, 공동체를, 센터를 종일 고민하고 계시는지를 이념으로는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게 뭘까 고민해 보았을 때 세계에 대한 처절한 짝사랑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 영화는 사랑 영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잘 느껴지진 않지만 필터도 뽀샤시한 것들을 많이 썼고요. 후반 작업을 할 때도 나름 일본 청춘물의 느낌도 참고하면서 어떻게 하면 처절한 사랑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거의 엔딩이 나올 때쯤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컷이 딱 한 번 나오는데요. 사실 그것도 영화 찍기 전에 우연히 두 분이 같이 계신 장소에 가게 되어서 찍어놓은 것이었는데 한 화면에 담을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분리해서 고립 상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같은 세계를 정말 끊임없이 동경하며 바라보시는 장면을 보면서 이건 정말 엄청난 짝사랑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리고 박일수 열사가 돌아가신 날이 2월 14일이기도 해서 발렌타인 데이가 되면 저는 늘 박일수 열사가 떠오르기 때문에 그러한 복잡다단한 것이 섞여서 지금의 말랑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김예솔비: 그럼 오늘 자리 슬슬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끝까지 들어주셔서 너무 감사한 마음이고요. 오늘 자리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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