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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단평] 〈오, 발렌타인〉: 기울어진 우산 밑에서

by indiespace_가람 2026. 3. 29.

*'인디즈 단평'은 개봉작을 다른 영화와 함께 엮어 생각하는 코너로,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인디즈 큐'에서 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기울어진 우산 밑에서

〈오, 발렌타인〉 그리고 〈문 앞에 두고 벨 X〉 

 

*관객기자단 [인디즈] 강신정 님의 글입니다.

 


“함께 쓴 우산, 젖어있는 쪽이 사랑에 빠진 사람.” 교토 은행의 유명한 카피다.

더 거시적으로, 덜 낭만적으로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세계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늘 비에 젖게 된다고. 그런 사람은 언제나 초라하다. 초라하지만 사랑을 멈출 순 없는 이들. 살아가는 일이 그 자체만으로 사랑 같다.

어쩌면 영화란 젖은 어깨를 말려주진 못해도 기울어진 우산을 조금이나마 고쳐 잡아주는 일일지 모른다. 스크린 속에서만큼은 그들은 관객의 관심을 온몸에 받는 주인공이 되니까.

영화 〈오, 발렌타인〉 스틸컷


영화 〈오, 발렌타인〉은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 ‘박일수’ 열사의 분신 투쟁을 중심으로 세계를 향한 두 사람의 사랑을 보여준다. 박일수의 동료 노동자였던 시인 ‘조성웅’과 노동운동가였던 민중가수 ‘우창수’가 그 둘이다. 박일수 열사의 죽음과 동지들의 분열, 노동조합의 배신, 꿈쩍하지도 않는 거대한 세상. 땀과 눈물에 젖은 수많은 패배를 거쳐 온 그들은 각각 화천과 창녕 깊숙이에 살고 있다. 산속에서도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시와 음악으로 외침은 계속되고, 인터뷰를 하는 그들의 몸은 여전히 분노로 젖어있다.

영화 대부분이 두 프레임으로 나뉜 분할 이미지로 재생된다. 스크린을 가른 선이 벽 같다. 세계에 곧잘 닿지 못하는 그들의 시와 노래가 그럼에도 계속된다. 고립된 곳에서조차 각자의 투쟁을 멈출 수 없다. 그 끈질긴 삶을 가리켜 홍진훤 감독은 “이 세계에 대한 처절한 짝사랑”이라고 말했다. 비단 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더 나은 세계를 외치는 모든 목소리는 일종의 사랑 고백이다.

영화 〈문 앞에 두고 벨 X〉 스틸컷


그런가 하면, 어떤 어깨는 아무도 모르게 젖어 들기도 한다. 아주 고요하고 개인적인 방식으로도 사랑은 가능하다. 영화 〈문 앞에 두고 벨 X〉는 자전거로 배달 일을 하는 ‘지호’의 하루를 비춘다. 순탄치 않다. 공동 현관은 잠겨있고 비밀번호는 모르겠고 손님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건물을 헤매다 배달이 꼬이고 배달이 늦어져 음식이 식는다. 손님의 요청에 재배달을 한다. 배달 플랫폼에서는 컴플레인 관련 전화가, 식당에서는 피해 보상할 거냐는 불만이 지호에게 날아온다. 그 사이에 장대비가 쏟아진다.

비가 와도 집은 가야 한다. 택시를 부르고, 동생과 먹을 치킨을 포장한다. 집 앞에서 마주친 배달 라이더에게 괜히 따뜻한 인사도 건넨다. 노동자 개인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구조 앞에서도 지호는 삶을 계속 사랑한다. 머리띠를 조여 매고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는 일도 필요하지만, 때론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 세상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은 충분히 치열하다.

사랑이 아름답기만 하진 않듯이 약자의 삶은 낭만화될 수 없다. 우산은 고쳐 들면 되지만 세상은 기울어진 채로 굳어버리기 쉬우니까. 짝사랑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조성웅-우창수가 바라는 세상은 쉽게 오지 않고 지호는 또 ‘문 앞에 두고 벨 X’라는 요청 사항을 받을 것이다. 기울어진 탓에 미끄러지면서도 내게 주어진 이 세계와 삶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디서 올까. 알 수 없으니 또 하루 살아낼 수밖에. 홀딱 젖어버린 몸으로도 삶은 이어지니.

 

* 영화 보러 가기: 〈문 앞에 두고 벨 X〉 (감독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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