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은인〉리뷰: 우연, 인연, 은인
* 관객기자단 [인디즈] 정다원 님의 글입니다.
스스로 구원하라는 말은, 절망으로 무너지는 나를 스스로 일으키라는 명령이 아니다. 언젠가는 누군가 내 손을 잡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다. 따라서 내가 세상에 발을 딛도록 해주는 일, 그것이 구원일 것이다. 삶을 이어갈 수 없다는 절망에 휩싸인 순간에도, 내 결핍을 감싸는 누군가가 나타나리라는 믿음. 그 믿음이야말로 누군가가 건네는 두 번째 삶이다.

영화 〈생명의 은인〉은 자립준비 청년 세정이 세상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을 비추며 시작한다. 인터뷰에 또박또박 답하는 모습, 꼼꼼히 집을 알아보는 모습을 담은 화면은 너무 밝은 나머지, 삶을 표백하여 희망만 남긴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삶은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관객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눈초리를 주는 상사의 모습, 부동산을 끼지 않고 거래해도 된다는 집주인의 모습에서 예정된 절망을 읽는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바란다. 이 청년의 앞에 새로운 희망이 나타날 수 있길, 다시 생명의 은인이 나타나길 빌며 정해진 절망의 텍스트를 읽어 나간다.
이런 세정 앞에, 자신이 생명의 은인이라 주장하는 은숙이 나타난다. 오랜 시간 세정이 그려왔을 ‘은인’의 이미지와는 확연히 다른 은숙은, 자립지원금 전부를 자신의 수술비로 빌려달라고 말한다. 여전히 삶의 절망과 슬픔을 예감하는 관객은 은숙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는 당사자인 세정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사진 찍던 자리에 우두커니 홀로 남겨진 나를 불러 그간 고생했다며 꽃을 건네고, 내 짜장면을 먼저 비벼주며, 학교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삶의 노하우(가령 사기꾼을 잡을 때에는 주변 사람을 압박하라는 말이더라도 말이다)를 알려주는 존재를 믿고 싶어지는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따라서 세정이 보육원을 나오는 순간부터 짊어지고 있던 제 몸집만 한 짐을 잠시라도 은숙의 곁에서 내려놓을 수 있었던 건, 당연한 일이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세정은 은숙이 자신을 구한 것이 같은 양말이라는 ‘우연’때문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그 우연이 은숙을 다시 세정의 앞으로 데려와 ‘인연’을 만들었고, 인연은 다시금 서로의 결핍을 안으며 세정과 은숙이 서로를 구원하게 했기 때문이다. 세정은 구원의 존재를 믿으며, 케이크에 초를 불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은숙이 세정에게 붙여준 작지만 아주 분명한 그 불빛이 남아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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