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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단평] 〈봄밤〉: 막다른 길에서 붙잡은 사람에게

by indiespace_가람 2025. 7. 22.

*'인디즈 단평'은 개봉작을 다른 영화와 함께 엮어 생각하는 코너로,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인디즈 큐'에서 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막다른 길에서 붙잡은 사람에게

〈봄밤〉 그리고 〈절해고도 

 

*관객기자단 [인디즈] 문충원 님의 글입니다.

 

 

인생에서 한 번쯤은 막다른 길과 맞닥뜨리는 순간이 온다. 미래는 모든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지만 어떤 새벽은 너무 아득해 상상하는 법을 망각하고 만다. 더는 스스로 잘 살아낼 자신이 없고 방법도 모르겠을 때,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안에서 벗어나는 일. 주변으로 눈을 돌려 무엇이든 붙잡아야 한다. 외부와의 연결만이 망가진 내면을 바꾸거나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생의 막다른 길, 그 끝에서 만난 관계는 새로운 시작을 열어줄 만큼 찬란한 동시에, 그대로 대미를 장식할 만큼 강렬하다. 영화 〈봄밤〉의 두 사람도 무명의 끝을 향해 동행한다. 어차피 끝날 거라면, 서로를 끌어안고 최선을 다해 웃거나 울어보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말없이 약속한 채로.

 

영화 〈봄밤〉 스틸컷

 

〈봄밤〉은 시나리오보다 시처럼, 때로는 영상보다 사진처럼 흘러간다. 대사 하나, 구도 하나, 음악 하나처럼 한 번에 하나의 요소만 구동하려는 태도는 정적인 동시에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서정적 분위기 아래서 강렬하게 다가온다. 알코올중독자 영경은 결혼 1년 후 아이를 낳고 바로 이혼한다. 주말마다 아이를 보러 가기로 했지만, 전남편의 식구들은 영경 몰래 아이를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 간다. 생이별의 아픔을 술로 견디다 중독에 빠진 영경은 그 상태로 학생들을 상대하기 어려워 학교를 그만둔다. 류머티즘 환자 ‘수환’은 운영하던 철공소가 부도 맞고 위장 이혼을 권유한 배우자가 종적을 감추는 등 힘겨운 시절을 보낸다. 신용불량자가 되니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어 치료를 제때 받지 못했다. 그 사이에 온갖 합병증이 발병하는 지경에 이르며 입원한다.

 

그런 둘이 만나서 사랑을 한다. 서로의 결점을 적극적으로 꺼내고 응시하고 만져본 끝에 서로의 얼굴을 얼싸안는다. 결핍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도로부터 출발한 관계는 사랑을 미신적으로 기대하는 일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다. ‘사랑하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고, 사랑으로 삶의 폐허를 새로 지어 올릴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우리를 두고 〈봄밤〉은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는다. 다만 폐허 속에도 함께 드러누울 자리는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쪽으로 용감히 전진한다. 병원 앞 오솔길을 기고 나뒹구는 둘은 낙화 후 짓이겨진 목련 꽃잎들 같다. 다 낡아버린 생명은 만개할 일만 남은 목련 봉우리들을 올려다보며 목 놓아 운다. 바닥에 떨어진 그 모습 그대로 끌어안는 두 사람의 처연한 비극은 생의 마지막 장면으로 충분할 만큼 아름답다.

 

영화 〈절해고도〉 스틸컷

 

막다른 길에서 만난 관계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 말하는 영화도 있다. 〈절해고도〉는 누군가를 그 자체로 이해하는 일이 곧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한때 촉망받는 조각가였던 ‘윤철’은 아내와 이혼한 후 생계를 위해 인테리어 작업을 납품하고 이따금 공사 일을 다닌다. 딸 ‘지나’를 어수룩하게 대하면서 좀처럼 마음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인문학 강사인 ‘영지’와 새롭게 사랑을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불화를 겪고 떠나보낸다. 모두가 떠나간 자리에서 막다른 길을 마주하고 산속에서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하지만 이후 장면은 전환된다.

 

멀끔한 모습으로 돌아온 윤철이 지나가 출가한 절에서 잔업을 돕고 있다. 부녀 관계가 모습을 감추고 불현듯 서로 존칭과 존댓말을 쓰는 수평적 관계가 되어 있다. 혈연관계에서 벗어나 조금 멀찍이 서서 서로를 바라볼 때 역설적으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전보다 마음 깊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오랜만에 만난 영지는 다시 투병을 시작했다. 윤철은 그녀의 투병 생활을 사려 깊게 살피며 어디로 떠나든,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해준다. 오갈 데 없는 처지임을 알고 자신의 집을 선뜻 내어주기도 한다. 윤철이 감내하는 부성애와 사랑, 그리고 〈봄밤〉의 영경과 수환 모두 깜깜한 세상에서 작게나마 점멸하고 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만이 어쩌면 진정한 관계의 전부일 수 있다고 말하며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 영화 보러 가기: 〈절해고도〉(김미영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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