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레슨〉: 몽유병자의 초상

by indiespace_가람 2025. 7. 8.

〈레슨〉리뷰: 몽유병자의 초상

* 관객기자단 [인디즈] 남홍석 님의 글입니다.

 

 

영화 〈레슨〉 스틸컷

 

꿈을 기억하는 방식

 

꿈은 이미지로 기억된다. 자고 일어나면 아무리 떠올리려 애써도 꿈의 서사나 세부 사항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고민을 이어갈수록 특정 이미지는 점점 선명해지고, 나머지는 무서우리만치 빠르게 흩어져 더 이상 손에 쥘 수 없는 모래알로 변한다.

 

영화를 기억하는 방식은 꿈의 그것과 비슷하게 작동한다. 시간이 지나면 줄거리와 대사 대신 뇌리에 박힌 이미지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한편, 영화 전반에서 꿈같은 몽롱함이 느껴지는 작품들이 있다. 이런 영화들에서 강렬한 꿈의 이미지는 작품 전체를 추동하는 힘으로 기능하게 된다.

 

영화의 오프닝, 공원을 거닐던 영어 과외 강사 경민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듯 눈을 감고 잔디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본다. 경민 역시 옆으로 다가가 사람들 곁에 눕지만, 동시에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떠나버린다. 결국 잔디 위에는 경민 혼자 남는다. 잠시 후, 이 비현실적인 이미지는 경민의 꿈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레슨은 꿈과 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의 초상을 그린다. 경민은 남들이 꿈꿀 때 깨어있고, 남들이 깨어있을 때 꿈꾸는 인물이다. 그는 늘 쉽게 잠들지 못하고, 연인 선희와 함께할 때조차 초점 없는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오프닝의 꿈을 꾸고 구매한 로또는 당연히 당첨되지 않는다. 이런 경민 곁에 비현실적 기운이 감도는 피아노 과외 강사 영원이 나타난다. 남자는 여자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여자는 남자에게 피아노를 가르친다. 레슨을 이어가며 경민은 영원과 함께하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다.

 

영화 〈레슨〉 스틸컷

 

피아노 연주하기

 

영화의 핵심 소재 중 하나는 영원이 경민에게 가르치는 피아노. 따라서 영화의 서사 역시 피아노 연주처럼 반복과 변주의 흐름을 따른다. 경민과 선희의 연애에서 있었던 일들은 영원을 만날 때 다시 일어난다. 변주는 본래 같은 주제에 기반해 선율과 리듬을 변형하는 연주를 말한다. 영화는 피아노 강사인 영원의 손을 빌려 관계의 반복을 능숙하게 변주한다.

 

선희는 경민에게, 경민은 영원에게 자고 가라는 말을 꺼내지만 모두 거절당한다. 경민은 다음 날 아침부터 과외가 있다고, 영원은 집이 아닌 곳에서 잠들지 못한다고 말한다. 선희는 경민에게 먼저 여행 가자는 이야기를 꺼내지만, 영원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경민의 제안을 거절한다. 경민은 향수를 선물해 주겠다는 선희의 제안을 사양하지만, 영원의 향수 선물에 반가워한다. 무수한 제안과 거절이 교차한다.

 

선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경민이 자전거를 타는 장면이 있다. 선희가 돌아온 이후에도 경민은 신난 듯 원을 그리며 멈추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는 선희의 모습이 롱테이크로 카메라에 담긴다. 이후 비슷한 상황이 경민과 영원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이번에는 경민이 자전거 타는 영원의 모습을 바라본다. 선희와 경민은 각자의 상대에게 끌려다니는 존재다. 자전거를 따라 이동하는 카메라는 타자에 종속된 그들의 시선을 대변하고 있다.

 

영화 〈레슨〉 스틸컷

 

잠에서 깨어나

 

경민은 선희 대신 영원에게 끌리기 시작하지만, 둘의 관계에는 별다른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영원은 점차 경민과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이고, 급기야 수업 외에는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까지 한다. 영원의 집 앞까지 찾아갔음에도 그들의 관계를 부정당하자, 화가 난 경민은 그녀에게 선물 받은 향수병을 집어던진다. 이때 카메라는 차 안에 머물며 사건을 직접적으로 담지 않는다. 대신 강조되는 것은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경민의 꿈도 산산이 조각난다.

 

이제는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 그런데 영화는 느닷없이 우리를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데려간다. 관객은 이 시퀀스를 통해 경민이 결코 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다는 말도, 자막 없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말도 결국 꿈과 맞닿아있다. 잠에서 깨어난 경민은 꿈 안에 갇혀 여전히 헤맨다. 어쩌면, 영화도 일종의 꿈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