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과 벽 사이 〈바다로 가자〉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0년 6월 21일(일) 오후 2시
참석 김량 감독|김귀옥 교수, 한가선 남북하나재단 자문위원, 루나 평화교욱 강사
*관객기자단 [인디즈] 정유선 님의 글입니다.
얼마 전 남북 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다. 불과 전 평화롭고 훈훈한 뉴스가 가득했는데. 평양 가서 냉면 먹고 대동강 맥주 마시는 거냐는 기대가 곳곳에서 옥시글옥시글했는데. 남북 관계는 또 다시 갈지자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술 취해 휘청거리는 사람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듯, 남북 관계의 휘청거리는 걸음에 지쳐가는 시선도 점점 날카로워진다. 마음의 벽이 점점 두께를 더한다. 그 벽과 벽 사이에서 집을 잃은 자들이 있다. 현대 사회가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 ‘실향민’이다. 자반 뒤집기 하는 현대사에서 고향을 잃고 공허한 바람 부는 가슴 안고 살아온 사람들. 자신의 아버지에서 시작해 다양한 실향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김량 감독의 <바다로 가자>가 개봉했다. 김량 감독의 진행으로 한성대학교 김귀옥 교수, 루나 평화교육 강사, 한가선 남북하나재단 자문위원이 만났다. 벽과 벽 사이에 단호하게 서서 평화와 인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만남이었는데, 실향민을 비롯해 이산가족, 탈북민, 디아스포라(정치적 난민, 이민자, 소수 인종 등 거주지를 떠나 사는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담론이 오가는 자리였다. 풍성한 이야기를 즐거운 결론으로 마무리한 자리였다.
김량 감독(이하 김량): 반갑습니다, 여러분. 와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오늘은 ‘실향민 3세와 2030 세대’를 주제로 토크를 하게 됐어요. 영화 잘 보셨기 바라고, 이 영화는 저희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여러 실향민 1세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적인, 아주 내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처음부터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만들었고요. 왜냐하면 국내 많은 방송과 다큐멘터리가 이산가족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굉장히 표면적인 이야기를 많이 다루었어요. 사회적 무관심 속에서 가족들이 감당해야 할 부분들이 많았는데, 가족 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고요. 인식의 전환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영화 속에서도 제가 오빠랑 얘기할 때 이건 가족 내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고 했거든요. 오늘 오신 분들 중에서도 분단으로 인해 남쪽으로 오신 분들도 계시고,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를 둔 분도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소개부터 할게요.
루나 평화교욱 강사(이하 루나): 안녕하세요. 귀한 시간 내어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많이 울었어요.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북한에서 태어났고 남한에 온지는 10년이 조금 넘었어요. 저희 부모님께서 아직 북한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움이 컸는데, 저는 저만 혼자 힘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 실향민 분들도 저와 같은 아픔을 겪었다는 걸 보고, 어떻게 보면 저도 실향민이란 걸 깨달았어요. 나도 시간이 흘러 50-60년이 지나 나도 저런 모습으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간다면 참 슬프겠단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김귀옥 교수(이하 김귀옥): 안녕하세요. 한성대학교 김귀옥입니다. 이 영화 소재는 제 박사 논문의 중요한 소재였어요. 99년도에 박사 학위를 받고 이산가족 문제, 디아스포라 문제를 계속 연구하고 있어요. 저는 그들의 생생한 모습, 기억에 접근을 하려고 해요. 그러려면 기록 자료만으로는 모자랍니다. 그래서 강원도 속초 아바이 마을에 가서 6개월을 살면서 실향민분들의 생애를 조사했고, 그 다음 해에는 한 달 동안 전북 김제의 황해도 분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조사를 한 바 있습니다. 제가 통일부 정책자문위원도 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정부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반도는 여전히 평화롭지 않은 상태고, 분단은 70년 동안 이산가족을 만들어온 것인데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죠. 사실 지금 루나 씨가 본인 이야기를 짧게 하셨지만, 짧은 이야기에서도 많은 생각이 들잖아요. 저는 제가 박사 논문 쓸 때까지만 해도 제가 이산가족인지 몰랐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제 논문 주제를 아셨지만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박사 논문 쓰고 어느 날 제사 때문에 가족들이 모여있을 때였어요. 저희 아버지 가족은 일제 해방 후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환했거든요. 그전까지는 일본에서 가족들이 다 나왔다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몇 십 년이 지나서야 말씀하시는 거예요. 일본에 아버지의 사촌이 남아 있었는데 아마 북으로 갔을 것 같다고. 그럼 2차, 3차의 이산이 되는 거잖아요. 1945년 8월 15일에 이산이 시작된 게 아니라 이미 식민지 역사와 함께 이산가족이 광범위하게 생겼고, 분단의 고착화는 계속해서 디아스포라를 만들어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머니 쪽에도 있었더라고요. 어머니의 삼촌께서 월북을 하셨대요. 그리고 가족들이 입을 닫아버린 거죠. 알고 보니 다 이산가족인 거예요. 이렇게 평화롭지 못한 상태가 계속되는 한 앞으로도 디아스포라 문제는 계속 발생할 거예요. 인간의 기본권 중 가족 구성권, 또 상봉할 권리가 있거든요. 그게 인권인데 우린 그걸 지켜내지 못하는 겁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가 여럿 있지만 국민을 행복하게 할 책무가 있죠. 그런데 이렇게 이산가족이 남아있고 앞으로도 생길 거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인권이 부족한 사회가 계속될 거라는 점에서, 우리는 평화를 넘어서 통일로 가야 합니다. 통일되어 가족도 만나면 무조건 행복하지는 않겠지요. 가족이 가장 큰 고통의 원천인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나 있는 가족 때문에 고통 받는 것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것하고는 다른 거잖아요.
한가선 남북하나재단 자문위원(이하 한가선): 안녕하세요. 한가선입니다. 저는 남북하나재단 자문위원으로 소개됐지만, 굉장히 잡다한 일을 하는 사람인데.(웃음) 그 중 메인으로 하는 것이 북한 이탈 청년들과 남한 청년들이 문화 교류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주변에 탈북민 친구들이 굉장히 많고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가장 크게 와닿은 건 ‘내가 실향민 3세구나’라는 정체성을 깨달았다는 거예요. 감독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나와달라고 전화하셨을 때 제가 “전 탈북민 아닌데요.” 그랬어요. 제 주변 탈북민 친구들이 워낙 많으니까 탈북민 게스트 섭외할 때 저한테 연락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실향민 3세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했을 때 제가 그 질문을 한 번에 못 알아들었어요. 그만큼 저한테 그런 정체성이 없었던 거죠. 감독님이 “할아버지가 이북에서 오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하고 되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깨달은 거죠. 제가 이런 활동을 하면서 엄마한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기억이 많지 않은데, “엄마, 할아버지가 흥남 출신인데 왜 나한테 할아버지 고향 얘기 안 해줬어?” 물어보니까, “할아버지가 우리한테 얘기를 해줬어야 너한테 얘길 해주지” 하시더라고요. 단절이 있었고, 그 단절조차 나에게 내려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영화를 보면서 제가 실향민 3세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김량: 우리가 이렇게 다 디아스포라와 연관이 있습니다. 직접적인 아픔이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 어느 정도는 물려받지 않았나 싶어요. 우리의 뿌리가 어디 있나 고민을 항상 해왔고요. 아픔만 얘기하면 안 되겠죠, 희망도 얘기할 수 있겠죠. 그저께는 실향민 2세 분들과 함께 시간을 가졌는데, 실향민 3세로 올해 서른 살이 되신 분이 오셨어요. “어떻게 우리 세대가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냐”고 묻더라고요. 저도 30대 초반까지는 아무 생각 없었어요. 30대 들어서면서 정체성에 대한 생각이 시작됐어요. 그래서 제가 그 분께 “이제 조금씩 생각하게 되실 거예요”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오빠가 둘인데, 오빠들은 항상 의문점이 있었지만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치열한 사회에서 살아남는 게 더 급하니까, 그런 사회 구조도 안타까운 일이고요. 실향민 2세, 3세들의 의식전환이 조금만 더 이루어진다면 북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것이고 보다 평화로운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서히 인식의 전환이 될 거라는 희망을 품어 봅니다. 오늘은 편안하게 얘기해 봅시다. 루나 씨는 북한에 계신 가족 이야기도 해주셨는데, 지금 어머니와 어떻게 소통하고 계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루나: 한 4개월 전에 연락을 드렸어요. 목소리를 듣는데 잘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제가 북한 말을 못 하고 있었고요. (웃음) 서로 대화는 하는데 나도 엄마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엄마도 “너 말투가 왜 그러니” 하셨어요. 나도 북한말 하고 싶은데 잘 안 나왔어요. 이게 참 슬픈 게, 북한 출신으로 남한에서 살아간다는 게... 처음에는 희망을 갖고 왔는데 “북한에서 왔다”고 말하는 순간 사회에서 그 사람을 알아가기도 전에 차별이 생기는 것 같아 숨기고 살았어요. 말투도 많이 고치려고 했고, 많이 외로웠어요. 나만 혼자인 느낌, 다른 사람들은 다 누군가가 옆에 있는데 나만 혼자인 느낌이 너무 싫어서 저는 해외를 많이 돌아다녔어요. 해외에 가면 주변 친구들이 다들 혼자인데 그 중에서도 제가 제일 강하더라고요. 그게 위로가 됐던 것 같아요. 자존감도 많이 올라갔고요. 그런데 그런 삶을 계속 살다 보니까 뭔가 잃은 느낌이었어요. 제 고향이 북한인데 그걸 무시하고 산다는 건, 보기에는 화려해 보여도 뭔가 빠진 느낌이었어요. 그냥 놓아버리고 살 수 없는 마음의 짐 같은 게 있어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온 후에 부모님부터 찾았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들도 나이가 들잖아요.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통일될 때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한계가 느껴져서요. 열심히 일해서 얼마라도 보내드리자 생각했어요. 백 프로 전달되지 못하더라도 아르바이트해서 얼마씩 모아서 연락 드렸는데 감사하게도 살아계셨어요. 아버지께서는 제가 나오고 한 6-7년 후에 돌아가셨더라고요. 너무 가슴 아팠던 게, 내가 북한에 있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싶었어요. 부모님께 드린 상처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저는 슬플 때가 많아요. 사는 게 팍팍하다 보니 북한에 대한 그리움이나 아픔을 안고 살기엔 너무 무거운 거예요. 저뿐 아니라 여기 앉아있는 북한 친구들도 다 각자 나름대로의 아픔이 있겠지만, 두 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부모가 있는데, 10년이 흘렀는데도 아직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편지도 쓸 수 없다는 게 참 가슴 아픈 일인 것 같아요.
김량: 네, 이건 심각한 인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70년 동안 생사도 알 수 없고 편지도 교환할 수 없다는 건 굉장히 비인간적인 상황이에요. 국제사회에서도 이 일을 몰라서, 저도 조금씩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산가족 문제는 남북간의 정치적인 게임에 계속 휘말렸고, 정치 판에서 쟁점으로 이용당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정말 정치적인 계산에서 독립해서 인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이 질문을 주셨는데요. “김귀옥 교수님께 묻고 싶습니다. 실향민들 가족의 권리, 인권을 남한에서만 중요하게 보는 것 같고 북한에서는 중요하지 않게 보는 것 같습니다. 남한에서 교류를 계속 하고 싶어하지만 북한에서 받아주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김귀옥: 모든 인도주의적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정치를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인도주의적으로 갈 수 있고, 어떤 정치 상황은 인도적인 문제를 반인도적으로 만들기도 하죠. 그래서 저는 정치를 잘 풀어갈 수 있는 민주적인 환경을 잘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우리가 독일 통일에서 배워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서독 기본 조약을 맺은 후 독일이 제일 꾸준히 한 행동이 이산가족 2세대, 특히 청소년들이 동서독 서로를 계속 방문하게 한 것입니다. 청년들에게는 일정 정도 체류할 수 있는 권리도 주었어요. 정부가 사민당에서 기민당으로 바뀌더라도 큰 틀에서는 그 약속을 계속 지켜나간 것이죠. 90년에 통일이 됐는데, 30년 전에는 많은 연구자들이 ‘이 상태에서 통일하는 건 재앙’이라며 통일이 더 천천히 와야 한다고 주장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보면, 여러 내부적인 문제들은 있겠지만 어쨌든 유럽이 평화의 공동체로 있게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독일이거든요. 독일이 현대사에서 계속 악의 축이었잖아요,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 그래서 동서독이 통일할 때 주변국들이 세계대전을 일으킬까 봐 의심하는 시선을 보냈거든요. 그래서 통일 과정에서 동서독의 통일만을 약속하는 게 아니라 그와 함께 유럽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그걸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실향민 2세대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게 이 영화에 나와있습니다. 계속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귀를 닫아버립니다. 부정적인 얘기 오래 하기 싫어하거든요. 영화에도 반공 시대 얘기 나오지만 저도 7080년대에 반공소년으로 자랐던 세대예요. 그래서 북한이란 존재가 너무 싫었고요. 그런데 인식을 전환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북한의 악행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북한에도 우리가 봐야 할 역사가 있었던 것이죠. 항일 운동이라든가, 복지 정책이라든가, 그들도 나름의 문제 의식을 가졌거든요. 특히 과거 여성 복지는 우리보다 훨씬 앞선 부분도 있었고요. 그때 이산가족 연구를 하다 보니까 알게 된 사실이 뭐냐면, 70년대까지는 이산가족 문제를 우리 정부가 나 몰라라 했습니다. 덮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북에서는 이산가족 만남을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계속 주장했습니다. 80년대에 북한의 경제가 악화되고 90년대 최정점을 찍는 과정에서 이산가족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이산가족 문제도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제대로 보지 않으면 안 보입니다. 우리 정부는 90년대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이산가족 문제를 얘기하는 상황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2000년 6.15공동선언에 이산가족 문제가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실 남과 북이 골고루 잘 살 필요도 있고. 또 동족이니까 형제라고도 볼 수 있잖아요. 같이 잘 살 수 있도록 힘을 내고 서로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저는 현 정부가 좀 더 조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강산에 갔을 때 북측 학자들이 저희에게 많은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족쇄를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어봤을 때 너무 미안했습니다. 더 연구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풀어줬으면 좋겠고요. 사실 우리는 할 능력이 있잖아요. 정부가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을 갖고 관계를 잘 만들어가게끔 만드는 것도 청년들, 학생들, 실향민 2세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량: 좋은 말씀 감사드리고요. 평화교육을 잘 시행해야 한다고 절실하게 느낍니다. 기존에 가진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선 자문위원님은 북한이탈주민들의 탈북 경로를 직접 체험하고 영상으로 기록도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한가선: <메콩 강에 악어가 산다>라고, 친구들과 같이 영화를 기획했거든요. 북 출신 친구 두 명, 저와 남 출신 친구 이렇게 넷이서 맥주 마시다가 갑작스럽게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하게 된 건데요. 두만강부터 태국 방콕 이민국 수용소까지 한 6천 킬로미터 됩니다. 예전에는 탈북민들이 몽골 거쳐서도 많이 왔는데 지금은 70퍼센트 이상이 태국을 거쳐 온대요. 주요 루트 있잖아요. 강 건너고 중국 들어가서 라오스나 미얀마 거쳐서 오는, 그 루트를 여행하면서 저희끼리 촬영하고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습니다. 부끄럽지만 북한인권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올랐고 많은 분들이 도움 주셔서 하게 됐습니다. 찾아보시면 나와요. 유튜브에도 있고요.
김량: 관련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 한 가지 있을까요?
한가선: 저희가 여행하면서 엄청 싸웠어요. 한 명은 중간에 다른 루트로 가겠다고 하기도 하고. 15일간 여행하면서 루트 자체보다는 삶의 기억을 밟아가자는 취지였는데, 4명인데도 통합이 안 되더라고요. 엄청 싸우고.(웃음)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싸우고 봉합하고 그런 과정이 마음에 남았어요.
김량: 어떤 분이 질문 주셨는데요. “분단과 사회적 갈등이 많은 상황에서, 다음 세대가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근본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루나: 질문 감사합니다. 제가 평화통일 강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저도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 같아요. 내가 살기도 힘든데 내가 언제까지 이 나라를 걱정해야 하나, 이런 얘기를 많이 듣고요. 통일 교육을 하면 친구들도 반응이 똑같아요. “선생님은 어디서 온 것 같아? 선생님은 북한에서 왔어.” 하면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말투도 생긴 것도 똑같은데 선생님이 왜 북한 사람이냐고 해요. 처음 시작할 때는 아이들도 관심이 없어요. 통일은 너무 먼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북한을 언론에서 보여주는 가난하고 핵 보유한 안 좋은 이미지로 떠올리지만, 저는 북한에 좋은 추억들이 있거든요. 그 시절이 그립기도 했어요. 봄이면 하얀 살구 꽃 피고, 동네 사람들이 서로 음식도 나눠 먹고. 정이 많은 동네였고, 잘 뛰어놀고, 건강하게 유기농만 먹고 자랐잖아요.(웃음) 그래서 건강한가 봐요. 그런 추억도 많고, 밝게 살았어요. 그러다가 바깥 세상이 너무 궁금해서 어쩌다 나오게 됐는데.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잖아요. 명품 가방 가져야만 행복한 게 아니라 그냥 가방만 있어도 행복하듯이, 그냥 봐주면 좋겠는데 그 이질감을 해소한다는 게 어렵더라고요. 저는 다른 얘기도 안 해요. 제가 북한에 대해서 알면 또 얼마나 알겠어요. 각자 겪은 게 다르니까요. 제가 배운 것, 제가 겪은 삶을 가지고 “난 이렇게 살았어” 얘기하면 아이들이 느끼는 게 “똑같다”는 거예요. “우리 같은 민족이네”라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어요.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아이들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면, “선생님 빨리 통일이 됐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이 부모님을 만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라고 물어봐요. 그럼 저는 그렇게 말해요. 그냥 관심만 가져달라고. 어떻게 보면 너의 문제가 아닐지 몰라도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고. 그냥 언론에 나오는 안 좋은 면만 보지 말고, 북한에 사는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고 우리는 통일을 희망하는 사람이라고요.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엄마도 꿈이 통일이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저는 남한이 북한보다 가난한 줄 알았어요. 가끔 엄마한테 “엄마는 통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물어보면 엄마는 “야, 엄마 어렸을 때부터 통일된다고 했는데 아직도 안 됐어. 내가 죽기 전에는 통일되는 게 소원이다.” 이러셨거든요. 근데 남한에 오니까 분위기가 다르더라고요. 저는 남한의 많은 사람들이 동질감을 갖고, 관심 가져주면 좋겠어요. 누구를 사랑할 때도 관심이 가는 게 시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조금 더 알아보고, 북한에 사는 사람들도 한 번 생각해 보고… 통일은 너무 거창한 것 같고 최소한 교류라도 할 방법이 없을까, 이 영화를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주시면 좋겠어요.
김량: 근본적으로 관심이라는 단어가 중요할 것 같아요. 사람과 사람에 대한 관심. 한국 사회는 굉장히 치열하고, 타인에게 관심을 갖기가 너무 어려운데요. 그러나 우리는 호기심도 많고 가능성을 품은 민족이잖아요. 숨어있는 관심을 일깨워 사회를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또 질문을 주셨는데, “통일은 구체적인 가족의 문제,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느낍니다.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가족과 우리의 더 필연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더 적극적으로 행할 방법이 있을까요?” 지금 질문 주신 분은 새터민 청소년을 돌보시는 분이라서 이런 질문을 주신 것 같습니다.
김귀옥: 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예전에는 저도 학교에서 ‘통일 교육’만 하다가 20년 전부터는 ‘평화 교육’으로 바꿨거든요. 평화 교육 없는 통일 교육은 자칫하면 적개심으로 갈 수도 있고 서로 타자화시키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요. 관심을 갖는 자체가 인식의 전환이고, 여러 가지 감수성이 필요한 것 같아요. DMZ나 임진강을 바라보면서 청소년들이 분단의 현실을 인식하는 경험도 필요하겠지만, 반드시 저는 역사 교육을 같이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교육을 하지 않으면 어떤 가상의 적을 하나 만들고 그 적을 원망하면서 끝나기 쉽거든요. 청소년들에게는 분단 감수성을 키워주는 것, 역사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분단이 되었고 그 분단으로 지금까지 어떤 고통이 있는지 알려줘야 하는 것 같아요.
한가선: 관심이 필요하다, 분단 감수성이 필요하다 하셨는데요. 그걸 어떻게 이끌어내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사람을 만난다는 느낌’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보통 통일 관련 강의를 할 때 북에서 오신 분들이 전시되듯이 일방향적인 교류로 끝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이 자리에 제 초대로 온 ‘남북 청년 독서 모임’ 친구들도 있거든요. 이런 독서 모임도 있고, 북한식 카드 게임 동호회도 있고요. 청년들이 만나서 함께 몸으로 부대끼고 밥 먹고 놀고… 강의나 토론도 중요하겠지만 저는 이런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자연스럽게 삶의 스토리를 듣게 되면 단순하고 모호한 ‘북한’의 이미지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으로 다가오고, 스토리가 있으면 그 개인을 쉽게 단절하지 않잖아요. 그런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교류하는 것.
김귀옥: 제가 그 다음에 얘기하려던 것이 바로 이거였는데.(웃음) 6.15정상회담 이후 많은 교류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우리 청소년들이 수학여행을 많이 떠났잖아요. 청년 대학생들도 모임이 많아서 저도 강사로 자주 갔는데, 그때 정말 대학생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놀랐어요. 헤어질 때 엉엉 우는 학생들도 있었어요. 며칠 사이에 이렇게 쉽게 정이 들 수 있을까 놀랐어요. 일본과 같은 다른 나라 학생들과 교류 사업 했을 때는 못 봤던 모습이거든요.
김량: “어떻게 관심을 가져야 할까”라는 질문에는 대답이 어느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왜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하는 질문에는, 여기에 우리 젊은 분들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 잘 살고 있지만, 청년 실업도 심각하고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시장 전쟁 틈새에 있게 됐죠. 살아남으려면 북한과 같이 가야 합니다. 감수성도 중요하지만 여러분의 미래가 달려있기 때문에,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루나: 추가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제가 하는 활동 중에 축구를 통한 평화 교육도 있어요. 저도 북한에 있을 때 꿈이 축구선수였는데, 좀 잘 살았으면 저를 TV에서 보셨을 거예요.(웃음) 가난해서 못 나갔지만. 축구는, 스포츠는 전 세계적으로 룰이 하나잖아요. 그 하나의 룰을 가지고 함께 한다는 게 저는 너무 좋았어요. 남북한이 같이 뛰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게 너무 좋았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참여해주시면 좋겠는데 잘 모르시더라고요. 즐겁게 서로 알아갈 수 있다는 것, 땀 흘리면서 알아간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거든요.
김량: 좀 더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시간이 부족해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바다로 가자>를 관람해주시면 평화 감수성, 아까 말씀해 주신 분단에 대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너무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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