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언덕〉 리뷰: 조금 더 넓어지고 깊어진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관객기자단 [인디즈] 서지원 님의 글입니다.
두 모녀가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상봉한다. 더 정확히 풀어 말하자면, 엄마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딸을 마주하고 딸은 ‘엄마’라는 정체를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이 중년 여성을 맞이한다. 추운 겨울밤 정적만이 흐르는 필라테스 학원 건물에서 그 둘은 어색하게 상봉한다. 이것이 〈재꽃〉(2016)과 〈스틸 플라워〉(2015)를 거쳐 온 박석영 감독의 신작 〈바람의 언덕〉, 두 주인공의 첫 장면이다. 영화는 그 이전의 전작들이 그러했듯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몇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자리한다. 그 둘은 과연 어떻게 될까. 서로의 정체를 드러내고 알고 난 이후 관계는 어떻게 치닫을 것인가. 사실 영화 안에서 이 질문의 존재감 자체는 그리 격렬하지 않다. 영화가 시작부터 모든 것을 지나쳐온 뒤 눈밭을 거니는 딸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까. 어쩌면 영화는 관계의 결과에 큰 관심을 두지는 않는 것 같다. 부모자식 간이라 크다면 크고, 그러나 여태껏 마주치치 않았음에 작다면 작은 인연. 그 두 사람이 ‘만났음’에 줄곧 초점을 둘 뿐이다.
운을 떼기에 앞서,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뗄 수 없는 두 전작들을 언급하는 것이 〈바람의 언덕〉 리뷰에 필연적인 일일까 묻고 싶다. 여태 혼자였고 지금도 혼자인 두 사람이 어둠 속에서 각자의 고독을 견뎌내는 방식들은 전작들에서 그림자를 드리운 여자 주인공이 삶을 어떻게 견뎌냈는가의 장면들과 비슷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엔, 그리고 이번만큼은 아닌 샷도 있음에 힘을 주어 말하고 싶다. 그 두 고독자들이 마주했을 때, 그리고 서로의 몸을 관찰하기 시작했을 때 영화가 이 둘을 포착하는 방식에 있어서 만큼은 말이다.
엄마이자 수강생인 영분, 딸이자 선생인 한희가 마주한 필라테스 강의실에선 무작정 몸을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 숨을 고르고, 자신의 일상의 습관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몸 구석구석을 살핀다. “평소 왼쪽으로 가방을 메고 다니시나요?” 족집게 같은 진단에 긴장이 풀려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엄마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게 된다. 몸을 들여다보며 서로를 알게 되는 과정에서 딸 또한 자기 고백을 쏟는다. 〈스틸 플라워〉에서 역시 몸을 움직여 춤추는 ‘탭댄스’라는 소재가 주인공의 외로움에 깊게 자리 잡았다면 〈바람의 언덕〉에서는 두 여성이 서로 호흡을 맞추는 필라테스로 고독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을 들춰내어 사람과 사람이 공유하는 과정까지 나아간다. 들이쉬고 내쉬는, 어쩌면 아주 당연한 삶의 순환. 그러나 그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던 사람들. 이때 영화는 사람들에게 클로즈업으로 바짝 다가가거나 굳이 먼 거리를 유지하여 영화적인 풍경을 자아내려 들지 않는다. 가장 보통의 크기. 둘의 대화를 적당한 거리에서 포착하는 미디움샷은 그들 주인공에게 숨 쉴 틈을, 살고 지낼 거리를 만들어준다. ‘박석영의 영화’라 불리는 공간은 그렇기에 전보다 한 층 더 삶의 가능성을 움틔우고자 한다. 그 계기와 시작점엔 결국 사람, 그리고 그와의 마주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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