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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기억의 전쟁〉 인디토크 기록: 역사에서 소외된 기억들의 교차점에 관한 진솔하고 담대한 성찰, 베트남 전쟁 속 여성과 소수자의 기억에 집중하기

by indiespace_한솔 2020. 4. 20.




 역사에서 소외된 기억들의 교차점에 관한 진솔하고 담대한 성찰

베트남 전쟁 속 여성과 소수자의 기억에 집중하기

 〈기억의 전쟁〉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0년 3월 22(일오후 2

참석 이길보라 감독, 조소나 PD, 서새롬 PD, 곽소진 촬영감독

진행 이슬아 작가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유진 님의 글입니다. 




베트남 퐁니·퐁넛 마을에는 매년 음력 2월이 되면 큰 위령제가 열린다. 1968212,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로 인해 한날한시에 70여 명이 사망해 마을 단위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기억의 전쟁은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마을과 생존자들, 그리고 50년 전 희생당한 자들의 묘지를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 영화는 전쟁과 학살의 잔혹함을 강조하던 기존의 많은 전쟁 영화들과는 다르게, 전쟁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던 주변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여성, 노약자, 소수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당시의 기억을 긴 호흡으로 그려낸 이 영화는 극장가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관객들의 꾸준한 응원과 지지를 받고 있다. 322일에 진행된 기억의 전쟁인디토크에는 이슬아 작가, 이길보라 감독, 조소나 PD, 곽소진 촬영감독, 서새롬 PD가 함께했다.





 

이슬아 작가(이하 이슬아): 안녕하세요. 영화 기억의 전쟁인디토크 진행을 맡은 작가 이슬아입니다. 코로나19 때문에 극장가가 정말 어려운 시기에 이렇게 자리 채워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특별히 기억의 전쟁을 만든 제작진들이 총출동한 자리인데요. 영화 바깥의 이야기, 그리고 내부의 협업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감독님부터 한 분씩 성함과 영화에서 맡은 역할을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길보라 감독(이하 이길보라): 안녕하세요. 저는 이 영화를 연출한 이길보라라고 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극장 건강히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소나 프로듀서(이하 조소나): 안녕하세요. 저는 기억의 전쟁프로듀서인 조소나 PD라고 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곽소진 촬영감독(이하 곽소진): 안녕하세요. 저는 촬영을 한 곽소진입니다. 감사합니다.

 

서새롬 프로듀서(이하 서새롬): 안녕하세요. 저는 이 영화의 프로듀서인 서새롬입니다. 반갑습니다.

 

이슬아: 이길보라 감독님께서는 여러 GV에 다니셨지만 이렇게 두 PD님과 촬영감독님까지 함께하시는 자리는 처음이라 오늘은 영화를 좀 더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초반부에 제사를 드리는 장면에서 이 자리에 와 있는 한국 아이들(기억의 전쟁제작진)을 지켜달라고 하는 기도가 담긴 부분이 있는데요. 그 장면을 보면서 이 영화의 제작진과 영화의 인터뷰이들이 맺고 있는 관계가 실감이 났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친밀해지는 과정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 감독님이 말씀하시길 그 분들에게 제삿밥을 수차례 얻어먹어서 이 영화는 제삿밥심으로 만든 영화라고 하셨어요.(웃음) 이 과정이 어떠셨는지 모두 한 말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조소나: 밥에 관련해서는 서새롬 PD님과 곽소진 감독님을 따라갈 분이 없기 때문에 두 분이 이야기하시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웃음)

 

이슬아: 밥을 많이 드셨을 뿐 아니라 설거지도 정말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곽소진: 가서 밥을 정말 많이 먹었고요. 먹고 난 뒤 설거지 담당이었습니다. 저희가 매해 제사에 참여했는데, 식욕이 왕성했던 20대 초반에 이 영화를 시작해서 맛있는 밥을 열심히 먹었던 것 같고요. 해가 거듭되면서 먹는 양이 점점 줄기는 했습니다. 마을에서 수많은 혼인 의뢰가 들어왔던(웃음) 서새롬 PD님께서도 한 마디 해 주세요.

 

이슬아: 며느리 삼고 싶어 하셨다고, 탄 아주머니께서.

 

서새롬: 결혼 안 한 아들만 있다면 며느리 삼고 싶다고 하셨죠.(웃음) 저희가 영화를 2015년에 만들기 시작했는데, 베트남에 가기 전에 공부를 많이 했는데도 실제로 그 곳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밥을 잘 먹는 것 밖에는 없었어요. 아주머니, 아저씨들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어린 애들이 와서 50년도 더 된,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를 청하는 거잖아요. 이 애들이 왜 이걸 궁금해 할까 싶으면서도 계속 밥은 챙겨주시는 거예요. 밥 먹고 나면 커피 마실래? 혹은 낮잠 잘래? 하면서요. 네가 여기 있을 수 있는 만큼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많이 해주셨고. 첫 해는 정말 밥을 먹는 일 외의 별다른 일을 할 수가 없어서 더 열심히 밥을 먹었고, 소진 감독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해가 거듭될수록 밥 양이 줄었어요.



 


이슬아: 기억의 전쟁제작진에 관한 증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베평화재단의 구수정 선생님께서 쓰신 글이었는데요.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묵념의 시간 때 다른 카메라들이 우당탕탕 뛰어다니는 와중에 기억의 전쟁제작진만이 카메라를 모두 내려놓고 묵념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장면이 잊히지 않습니다.” 함께 생활을 하고 동시에 인터뷰를 진행하며 어떤 장면을 찍고, 또 어떤 장면을 찍지 않을지에 대한 합의가 네 분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졌을 것 같은데요. 이 과정이 어떠셨는지 감독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길보라: 사실 베트남과 한국의 촬영현장은 굉장히 달라요. 우선 베트남은 사회주의 공화국이잖아요. 사회주의 국가 안에서 촬영을 하려면 허가가 필요해요. 공식적으로 허가를 받고 공안 입회 하에 촬영을 해야 하는데, 저희는 그런 방식으로는 민간인 분들이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지 못할 것 같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도둑 촬영을 선택했어요. 베트남 전쟁과 학살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논의 진행 중인 사안이고, 양국의 정부 모두 어떤 입장표명도 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간다는 것 자체가 죄송스럽고 어려운 일이었어요. 사실 카메라는 그 자체로 충분히 폭력적인 매체가 될 수 있잖아요. 한국인의 입장으로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간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죠. 그래서 1, 2년 동안은 마을 분들께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밥도 열심히 먹고 술도 열심히 얻어 마셨어요. 이 과정에서 제작진들이 역할을 잘 해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조소나: 어떤 걸 찍고 어떤 걸 찍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일은 현장에서 빠르게 판단해야 하는 부분이 절대적으로 많아요. 예를 들어 시민평화법정에서 탄 아주머니가 증언을 하신 뒤 중압감에 굉장히 지쳐 계셨는데, 돌아오신 뒤의 피곤한 모습까지 다 찍을 것인지 같은 것들이요. 그때그때 제작진분들과 이야기하며 선택하는 과정이 있었죠.

 

곽소진현장에서는 계속 찍자, 그만 찍자는 싸인 두 가지가 있었어요. 같이 작업하면서 느낀 이길보라 감독의 훌륭한 점은 인터뷰하는 사람을 절대 착취하지 않는다는 본인의 명확한 선이 있었다는 점이에요. 이길보라 감독은 창작의 대상이 되는 영화 속의 역사적 장면만을 생각하지 않고, 카메라가 꺼진 뒤에도 마을 사람들에게는 다음 날의 일상이 계속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인터뷰를 진행했죠. 카메라를 들고 작업을 진행하다 보면 사람들이 더 울었으면 좋겠고 더 강렬한 장면을 찍고 싶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항상 그것을 멈추는 선이 있었어요.

 

이슬아: 촬영장 안에서 이런 일들이 있었다면 조소나 PD님께서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셨을 텐데요. 다큐멘터리 PD 치고는 촬영장에 자주 가지 않는 편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조소나: 사실 촬영장이 굉장히 힘들어요. 인터뷰를 하시던 분이 갑자기 뛰시면 같이 달려야 할 때도 있고. 무거운 촬영 장비를 부랴부랴 챙겨서요.(웃음) 그 분들은 본인의 삶을 살고 계신 거니까요. 웃자고 하는 얘기고, 사실 그것보다도 저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물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표현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인물의 감정선과 거리를 둬야 그것을 더 잘 다룰 수 있는 때가 있어서. 모든 촬영에 다 참여하는 방식은 개인적으로 지양해요.

 




이슬아: 이번에는 이길보라 감독의 행보에 대해 같이 이야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10여년 전 감독님께서는 제도권 밖의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인 로드스쿨러(2008)로 데뷔하셨고, 5년 전에는 반짝이는 박수 소리(2014)로 청각장애를 가진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기억의 전쟁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기억들을 다뤘는데요. 나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가족으로, 국가로, 주제가 확장되는 걸 지켜보았는데 이렇게 화두가 움직이는 게 감독님께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기억의 전쟁이라는 어렵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게 부담스럽진 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길보라항상 제가 재밌어하는 것들은 제 주변에서 질문과 이야기들을 발견하고, 그 질문을 더 크게 엮어내는 것이에요. 제가 기억의 전쟁작업을 시작했던 이유는, 정말로 베트남전에 관한 저의 기억들이 부딪혔기 때문이거든요. 참전군인이었던 할아버지가 월남에서 벌어왔던 돈으로 부유하게 먹고 살 수 있었고, 할아버지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는 우리 집이 가지고 있는 팩트. 그리고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 경부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등 막대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는 팩트. 그리고 할머니께 전쟁에 대해 물었을 때 전쟁? 나는 그런 거 잘 몰라, 전쟁이라면 돌아가신 네 할아버지나 남자들이 더 잘 알지.” 라고 하셨던 것. 제가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에 이 자리에도 와 계신 저의 스승님인 김현아 선생님의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그리고 전쟁과 여성이라는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다룬 책을 읽었을 때 저에게 있는 여러 기억들이 충돌했어요. 우리 집은 그 돈으로 먹고살 수 있었고, 한국도 그 돈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 가운데 민간인 학살이 있었네? 그 돈은 거기서 나온 거였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러면 그 곳을 직접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작업이 시작됐던 것 같아요. 저는 항상 저와 제 주변의 이야기가 온전히 저와 제 주변만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것들은 항상 사회, 국가와 연결되어 있죠. 나의 이야기, 내 주변의 이야기, 내 가족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해서 그것들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살펴보며 어떤 지점들을 찾아가는 게 저에게는 흥미로운 일인 것 같아요.

 

이슬아: 그런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건 제가 제작진 분들과 오랜 친구여서 그렇기도 할 텐데요. 사실 제작자 분들 중 세 분은 10년 전부터 저와 글쓰기 모임을 함께했던 동료들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같은 선생님 아래에서 꽤 가열차게 글을 쓰며 창작자로서의 훈련을, 태동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의 합평이 영화 제작에 영향을 주었을 것도 같아요. 이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새롬 씨부터 이야기 들을 수 있을까요?

 

서새롬저에게는 글쓰기 수업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고, 창작 외의 많은 부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아요. 기억의 전쟁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보라라는 사람이 가진 맥락과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작업이 기대가 된다,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고요. 그런 토대 덕분에 이 작업을 함께하게 된 것 같아요.

 

곽소진저한테는 합평이 굉장히 중요했던 것 같아요. 서로 피드백을 해줄 수 있는 관계가 협업에는 정말 중요한 것 같고, 피드백을 통해 제가 얻게 된 좋은 태도는 주체가 이동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에요. 내가 뱉은 말이나 작업한 것들을 누군가 믿을 수 있는 상대에게 보여줬을 때 그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 참 좋았고. 그것이 오가며 어떤 결정을 하게 될 때, 이를테면 나에게 옳은 선택을 하는 것을 넘어 영화에게 옳은 선택이 뭘까? 이 이미지에게 옳은 선택이 뭘까? 다른 사람에게 옳은 선택이 뭘까?’ 이렇게 주체를 이동하는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게 깊은 배움이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조소나: 저는 글쓰기 모임과는 관련이 없었고, 나중에 결합했거든요. 흥미로웠던 점은 제작진분들이 공용으로 쓰는 구글 드라이브에 셋이 글을 쓴 자료가 너무 많았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민간인 학살 자체의 증거가 있는지, 아닌지. 어떤 점들을 이야기해야 할지. 이런 것들을 다 글로 써 뒀어요. 그래서 저는 초기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는 같이 있던 사람이 아닌데 함께했던 것 같았어요.(웃음) 글을 쓰는 사람들의 좋은 습관이 모든 생각들을 기록해둔다는 것인데, 뒤늦게 합류한 저한테는 세 분의 그런 습관이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이길보라: 저희가 같이 글을 썼던 글방은 일주일에 한 번씩 어떤 글감을 주제로 글을 써 오면 다 같이 돌려 읽으면서 합평을 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돌아가면서 서로에게 위계 없이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했다는 점이에요. 이렇게 서로의 생각을 꾸준히 지켜봤기 때문에 이 작업을 시작할 때 그럼 우리가 현대사도 잘 모르고, 베트남 전쟁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잘 모르니까 그 주제에 대해 공부해보자.’ 해서 책을 선정해서 돌려 읽으며 발제를 하고 글을 쓰며 디벨롭을 같이 해 나갔죠. 이런 합평의 경험은 촬영 현장에도 이어져서, 촬영이 끝나면 밤마다 그날 촬영분을 같이 봤어요. 느낌과 생각을 주고받고 매번 정리를 했죠. 대안학교에서 하듯이 정리 모임, 받기 모임, 열기 모임을 저희 스스로 해냈는데. 글방에서 훈련했던 것들을 촬영현장에 적용해서 기억의 전쟁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이슬아저는 합평 시간을 서로 굉장히 사랑하지만 절대 못 쓴 것을 잘 썼다고 하지 않는, 서로에게 굉장히 엄격했던 수업으로 기억하거든요. 서로를 위해서 더 냉정해지는 것이죠. 이 과정이 분명 영화한테도 좋은 영향을 미쳤을 거라 생각합니다. 촬영감독님께 질문하고 싶은데요. 거의 혼자서 모든 장면을 다 찍으셨기 때문에 챙길 것도 많고 어려운 점도 많으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나요. 한 번은 촬영하다가 떨어지셨다고.

 

곽소진기억의 전쟁은 제 첫 작품이거든요. 제작 기간이 거의 5년 정도 걸려 늦게 나왔지만. 이길보라 감독이 처음 저한테 촬영을 권유하셨을 땐 미쳤나? 왜지?’하는 의문이 있었어요.(웃음) 감독님이 5년 동안 너무나 큰 신뢰를 보이면서 촬영을 맡겼기 때문에 힘이 되면서도 두려웠죠. 지금은 이 작업이 끝나고 여러 작업들을 하면서 촬영 과정이 객관화가 되었는데, 굉장히 특별한 촬영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첫 촬영에서 굉장히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작업한다는 것이 사실 쉽지 않잖아요. 촬영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우선은 기온이 너무 높았고, 쉬운 촬영지는 아니었어요.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힘들었죠. 제가 촬영 초반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너무 충격을 받아서 뎅기열을 앓은 적이 있어요.(웃음) 그런데 새벽에 뎅기열로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하다 허리를 삐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된 거예요. 감독님이랑 새롬 PD님이 월남쌈을 싸서 바닥에 놓고 나가시면 제가 기어서 그걸 먹고 연명을 했던 기억이 있네요. 카메라와 함께 넘어진 일은.

  

조소나: 시민평화법정을 할 때 저희 카메라랑 현장에 있는 기록용 카메라 두 대만 찍게 해 줬거든요. 나머지는 다 못 찍게 했어요. 저희가 유일한 촬영팀이었는데, 카메라가 워낙 무겁기도 하고. 많이 무거웠나요?

 

곽소진턱이 되게 높았어요. 보통 촬영할 때는 촬영하는 사람의 뒤 봐주는 사람이 있고, 뒤 봐주는 사람의 뒤 봐주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뒤 봐주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무대에서 떨어졌고 저는 다치지 않았는데 카메라가 다쳤죠.(웃음)

 

이슬아: 그렇게 찍힌 장면의 노력을 알아주셔야겠습니다. 영화 중간 껌 아저씨와의 소통 과정도 인상 깊었는데요. 이길보라 감독님 같은 경우는 수어를 하시기 때문에 수어로 소통을 하셨을 것이지만 수어와 베트남어 모두 알지 못하는 서새롬 PD님과 곽소진 촬영감독님 또한 굉장히 많은 대화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는지 새롬 PD님께서 말해주시겠어요?

 

서새롬일단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뭔가를 얘기하려고 하면 다 되는 것 같아요. 해외여행 가서도 내가 필요하면 어떻게든 통하게 되어 있잖아요. 껌 아저씨와 마주 앉아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마찬가지로 별다른 무리가 없었던 것 같아요.

 

이슬아함께 이발소에 가신 경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서새롬: 영화를 보시면 껌 아저씨가 미용실에서 앞머리를 일자로 잘라달라고 하시잖아요. 사실은 그게 아저씨의 트레이드마크거든요. 어느 날은 저희랑 촬영하고 차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하시다 갑자기 시계를 보시더니 머리 자르러 가야 한다는 거예요. 길만 건너면 된다고 같이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같이 가서 아저씨 이발 기다리는 동안 아저씨가 잡지에서 어떤 사진을 보시더니 너는 이 머리 하면 좋겠다고 직접 권해 주셔서 저도 그때 그렇게 머리를 잘랐던 기억이 있고. 그때 이발비는 제가 냈던 것 같네요.(웃음)

 

이길보라: 이런 일들이 인물과의 거리를 가깝게 했던 것 같아요. 가령 껌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부모님이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이고, 1차 언어가 수어기는 하지만 수어도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베트남 수어로 바로 소통할 수 있는 건 아니예요. 그런데 이 분은 베트남 수어가 아니라 자기만의 홈 사인(home sign)을 사용하시는 분이었어요. 제가 저희 부모님의 수어를 보며 자랐던 것처럼 이분도 수어를 배워야만 수어를 할 수 있는데, 전쟁 상황에서 홀로 농인으로 태어난 이 분은 자기만의 홈 사인 체계를 만들어서 주변과 소통을 하며 자랐던 거예요. 너무 신기했던 점은 이 분의 언어를 저희가 큰 어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저는 부모님이 농인이고 수어를 알기 때문에 유연하게 받아들인 것도 있었지만, 서새롬 PD랑 곽소진 촬영감독도 소통을 너무 잘 하는 거예요. 또 제가 살갑지는 못한 성격이거든요. 사람들을 책임감 있게 리드하는 건 잘 하지만. 그런데 곽소진 촬영감독이 촬영 끝났다는 말이 떨어지면 바로 축구공 들고 가서 아이들이랑 축구하고 노는 거예요. 이렇게 촬영과 관련된 일이 끝나면 더 필요한 것들, 관계를 쌓는다거나 좁힌다거나 하는, 감독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스텝이 알아서 만들어내고 해냈던 부분이 많아요.





이슬아: 제가 준비한 질문도 많은데 관객 분들 질문이 많아 몇 가지를 옮겨 보겠습니다. 제작진들 역시 베트남전쟁 참전군인들의 손자 세대이기도 하신데요, 촬영을 시작할 때, 촬영을 하면서,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 이 사건과 피해 당사자분들에 대한 생각이 변화했는지, 또 참전군인분들에 대한 생각이 변화했는지, 변화했다면 어떤 것이 변화했는지 궁금합니다.

 

조소나: 우선은 질문을 많이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픈채팅으로 보고 있는데 너무 열렬히 질문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네요. 저는 기억에 남는 게, 사실 저희가 시민평화법정 때 참전군인 분을 인터뷰한 촬영분이 있었는데 그 분의 말씀이 굉장히 속상했어요. 주변에 참전했던 많은 전우들 대다수가 암이나 다른 지병을 앓고 계시고, 또 계속 돌아가시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기억의 전쟁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본인의 명예나 삶을 훼손하는 것 같이 느껴지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그냥 수류탄을 하나 가지고 와서 터뜨려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기도 했고. 저희는 여러 기억들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기억해 나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만들었지만 참전군인분이 그렇게 이야기하셨을 땐 고민이 많았죠. 사실 기억의 전쟁에는 하나의 역할이 빠져 있는데, 저는 결국 그 당시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에서 정확하게 누가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를 명명백백히 밝혀야 하는 주체는 국가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국가의 역할이 명확하게 서지 않았을 때 이렇게 많은 개인들이 고통 받으며 산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이 사건을 과연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말해가야 하는가, 이런 부분에 대한 혼란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곽소진처음에 작업을 함께 하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베트남 전쟁에 대해 모르고 있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민간인 희생자 제사에 갔을 때 그 규모를 보고 깜짝 놀랐거든요. 한날한시에 그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죽었기 때문에 가족 단위가 아닌 마을 단위로밖에 열리지 못하는 큰 제사가 된 거죠. 첫 해는 이렇게 큰 학살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단계였고, 그 다음은 이 이야기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마을 사람, 혹은 전체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탄 아주머니가 증언을 하시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는 단계였어요. 사실 탄 아주머니께서 첫 해에 한국을 방문하셨을 땐 한국인 남성의 형상을 보는 것조차 굉장히 두려워 하셨어요.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하셨는데, 그 다음해에 오셨을 때의 아주머니의 태도가 굉장히 다르고, 또 그 다음 해에는 또 다르고, 최종적으로 모의법정에 서셨을 때도 계속 변화하는 얼굴이 있던 거예요. 그 얼굴을 보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존엄과 긍지가 가득한 얼굴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경외심을 가지고 지켜봤던 것 같아요. 그리고 참전군인과도 5년 동안 만난 셈이 되는데, 처음에는 그 분들이 무서웠지만 마지막 시민평화법정 때 찾아오셔서 이야기를 듣던 그 분들의 얼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긴 제작기간 동안 제가 느낀 것은, 증언을 하는 생존자도, 참전군인들도 고정된 포지션에 있지 않다는 점이에요. 고정된 역사의 텍스트는 없다는 거죠.

 

이슬아: 탄 아주머니에 대해 연민의 마음보다는 우러러보는 마음이 훨씬 압도적이었다는 말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다른 질문을 드리자면, 한국과 베트남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입장이 없었다고 하는데요, 이것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더불어 탄 아주머니께서 대한민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 소송을 준비하고 계신데 이것이 어떻게 진행될 것 같은지도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길보라: 영화 말미에 응 우 옌 티탄을 비롯한 학살 생존자들이 청원을 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대해 90일 이내에 답변을 내놓았어야 했는데, 90일이 지난 이후에야 굉장히 미온한 답변을 제시했다는 내용이 나오죠. 사실 저는 그 답변을 받았을 때, 떨리는 손으로 청원서를 작성했던 분들의 얼굴이 먼저 스쳐지나갔어요. 그 때 저희는 구수정 선생님과 청원 작업을 잠깐 같이 했었는데요. 우선 베트남의 당은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자라는 정책 기조를 가지고 있어요. 그 말은 민간인 학살, 전쟁, 이런 일들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니 닫아두고 우리는 미래로 나아가자는 정책을 펼친다는 뜻이죠. 이 상황에서 민간인 학살 피해를 받으신 분들이 우리는 보상을 받고 싶고 진상규명을 원한다고 발언하는 것은 당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셈이에요. 이는 한국에서 연대 서명하는 것, 혹은 국민청원에 동의하는 것 등의 행위보다 훨씬 큰 의미와 무게를 가지고 있어요.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니까요. 그런데 지금까지 퐁디·퐁넛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한마을에 살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우리가 이렇게 서명 작업을 한다고 하니까 학살 당시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전화를 하셨어요. 서명을 하겠다며 모든 일을 다 내팽개치고, 하루 동안 오토바이를 타고 오신 거예요. 간절한 마음으로 영상 녹음을 하고 서명을 하고 다시 하루 걸려 집으로 돌아가서 90일을 기다리셨죠. 그렇게 90일을 기다리신 분들에게 한국 정부는 90일을 넘긴 뒤 우리는 아무런 자료가 없고 이를 위해서는 베트남 정부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내놓은 답변서를 줬죠. 저는 그 답변을 봤을 때 그 얼굴들과 손들이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것 같아요. 어떻게 그 얼굴들과 손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지? 우리는 단순히 청원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았구나 하고 넘길 수 있지만, 사실 그 안에는 얼굴들이 있고. 그 청원을 떨리는 마음으로 해낸 사람들이 있는데. 여전히 우리 대신 희생자들에게 향을 올리는 사람들이 그 마을에는 지금도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그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손을 기억하는 게 먼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이슬아: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더 뻗어나가야 할 텐데요, 소나 PD님께서는 어떤 노력들을 더 하고 싶으신가요?

 

조소나: 우선은 여기 계신 분들이 SNS나 주변 지인 분들에게 괜찮은 영화가 개봉을 했다고 알려주시면 좋겠고요. 어려운 시기지만 저희도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보여드리려 하고 있으니 더 많이 주변 분들에게 소문 내주시고 와서 봐주시면 제일 감사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슬아기억의 전쟁〉팀은 모두 여성 제작진들로 이루어진 팀인데요, 다른 현장도 경험해보셨기 때문에 어떻게 다른지 실감하셨을 것 같습니다. 여성 제작진들로만 이루어진 촬영 현장, 어떠셨나요? 새롬 PD님부터 설명을 들어 볼까요?

 

서새롬저는 다른 현장 경험이 많지 않아요. 이게 저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이자 마지막 장편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웃음) 모든 게 자연스럽고 평평한 관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가장 좋았던 것 같아요. 굳이 이름 붙이자면 여성의 힘이고, 여성 제작진과 함께 작업을 할 때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곽소진여성 촬영감독으로서 여성의 시선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데요. 중요한 부분이니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해 보자면, 요즘 여러 가지 작업을 하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있어요. 첫 번째로는 체격 차이요. 여성감독에게는 기존의 남성 촬영감독의 시선의 레벨이나 장비를 운용하는 방식에 있어 시각적인 차이가 생기고요. 촬영 스타일의 차이 역시 생기게 돼요. 이렇게 여성으로서 촬영을 계속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표준 산업 체형과의 불화가 있는 거거든요. 조끼가 안 맞고, 팔을 뻗는데 팔이 안 닿고.(웃음) 그래서 저는 장비를 팔이 아닌 배에 걸친다던가 하는 독창적인 방법을 쓰게 돼요. 그게 촬영의 표면에 많이 담기게 됩니다. 내부적인 차이도 물론 있어요. 특히 다큐멘터리 촬영의 경우에는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과 앞에 있는 사람 사이에 어떤 무대적인 공간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 사이에서 맺어지는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카메라 뒤의 사람들이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관계는 어떤 흐름으로 만들어지는지가 카메라 안의 내용에 담기게 되는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트라우마에 빠진 인물이나 남성주의 체제에서 밀려난 인물들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등에 자주 선택되고는 하는데요. 그럴 때에 제가 갖는 장점은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이죠.(웃음) 저의 등장이 인물들에게 긴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요. 더불어 굉장히 위압적인 남성을 제가 촬영을 하게 될 때는 제가 느끼는 위압감이 카메라에 투명하게 담기죠. 이런 것들이 내용에 은밀하고 또한 굉장히 전면적으로 담기게 되는 것 같아요.

이 작업에 있어서도 두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하나는 저희가 몰래 촬영을 했어야 했잖아요. 그런데 제가 카메라를 잡으면 아무도 제가 중요한 촬영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여행객 중 한 명이 자기 일상을 담는다고 생각해서 저를 제지하지 않았어요.(웃음) 제가 옷을 전문적으로 입지만 않으면 주요인물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많은 곳에서 오케이가 됐어요. 몰래 촬영에 굉장히 특화된 인물이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곳들에서 걸리지 않고 촬영할 수가 있었고. 주인공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도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 그게 영화 안에 잘 드러났던 것 같고요. 여기 계신 여성 제작진분들과 함께 일했을 때 영화의 서사가 흘러가는 부분에서의 차이가 분명 있었던 것 같아요. 무엇을 더 믿을 것이냐, 어디에 더 시선이 가느냐. 그런 부분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고, 그 믿음이 비슷하다는 점이 좋았어요. 감독이 어딘가를 보고 있으면 저도 그걸 보고 있고, PD들도 같은 걸 보고 있는 경험을 자주 했어요.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모여서 어떤 하나의 형태를 가진 시선이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슬아: 다시 오픈채팅방에서 질문을 받아 보겠습니다. 이 분은 두 번이나 영화를 관람하신 것 같은데요. (조소나: 감사합니다.) 작년에 봤던 영화와 오늘 봤던 영화의 편집이 바뀌었는데, 오늘 영화가 나오기까지 어떤 부분을 중심으로 재편집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조소나: 기억의 전쟁같은 경우 편집본이 5~60개는 되는 것 같아요. 탄 아주머니께서 시민평화법정에 가겠다고 하셔서 기존 편집본에 새로 촬영한 것을 붙이게 되니까 스타일이나 톤의 차이가 좀 있었어요. 이전 편집본은 피해자 세 분의 증언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였는데, 탄 아주머니가 갑작스럽게 모의법정에 가신 거여서 처음에는 두 영화를 하나로 붙이는 것처럼 편집할 수밖에 없었어요. 사건이 막 발생하고 있었으니까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붙일지가 관건이었는데요. 개봉을 준비하면서 목표 관객층이 베트남전쟁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저희 또래의 젊은 세대가 되었고, 경제 성장과 경부고속도로 정도의 이야기만 알고 있는 분들에게 70년도에 일어난 전쟁이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 사건이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끔 하고 싶었어요. 그런 점들을 고민하며 영화를 편집했던 것 같아요.

 




이슬아마지막 질문으로는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이 영화는 저희 글쓰기 선생님이신 김현아 작가님의 책으로부터 출발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에게 전쟁,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으셨을 텐데요. 기억의 전쟁의 영어 제목은 Untold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정하게 된 건지 감독님께 여쭤봐도 될까요?

 

이길보라기억의 전쟁이라는 한글 제목은 처음 영화 시작할 때부터 정해뒀던 것이고, 중간에 잠깐 제목을 바꾸려고 했다가 역시 안 맞는 것 같아 기억의 전쟁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거쳤어요. 사실 저희가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작업할 때 봤던 기억들이 정말 많았어요. 이 영화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시작되었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는데 그 사이에서 저희가 봤던 다양한 주체들의 이야기를 이 영화에 담았다고 생각하고, 또한 우리는 계속해서 기억의 전쟁을 해 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제목 안에 담았고요Untold라는 영어 제목은, 말 그대로 이 영화에서 말해지지 않은 부분이 정말 많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에요. 소재 자체에 대한 질문도, 태도에 대한 질문도 아직 많이 남아 있죠. 그래서인지 영문 제목이 굉장히 인상적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꽤 많았어요. 소재, 언어, 태도, 기억, 이런 측면을 아우르는 제목으로 Untold를 선택하게 된 거죠.

 

이슬아: 긴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억의 전쟁에 이렇게 직접 오셔서 힘 실어주셔서 다시 한 번 정말 감사드린다는 말씀과 함께 저희는 인사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더레이터 이슬아 작가와 네 제작진의 훌륭한 언어로 영화를 한층 더 풍부하게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게 된 시간이었다.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의 시간 때 기록을 위해 뛰어다니는 촬영진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카메라를 모두 내려놓고 함께 묵념했다던 기억의 전쟁제작진의 진심과 진중함은 영화 전반에 묻어나 있었다. 이길보라 감독의 말처럼, 우리는 계속해서 기억의 전쟁을 해 나가야 한다. 다섯 명의 여성 창작자가 앞으로 펼쳐나갈 용기 있는 행보를 기대해 본다.










〈기억의 전쟁〉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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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베트남 다낭에 가본 적 있나요? 🇻🇳

vol.1 기억의 전쟁 (감독 이길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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