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구하는 또 하나의 방식, 균열 영화를 말하다 〈메기〉 대담 기록
일시 2019년 10월 26일(토) 오후 7시 상영 후
참석 이옥섭 감독
진행 손희정 평론가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현준 님의 글입니다.
원색의 두드러진 색감과 철 지난 소품들로 가득한 영화의 미장센은 키치할 뿐더러, 어른인 척 행동하는 인물들의 언행은 겉보기에 풋풋하고 귀여울 뿐이다. 하지만 영화 〈메기〉는 이런 키치함과 귀여움이 무색할 정도로 냉정한 기운이 기저에 짙게 깔린 작품이다. 이는 “시종 재밌게 보다가 어느 순간 웃음이 뚝 끊겼다”는 어느 관객의 평으로 대신할 수 있겠다. 〈메기〉는 농담이 어느 순간 진담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를 통해 불합리한 일들이 시시각각 벌어지는 한국사회를 싸늘하게 조망한다. 아마도 영화가 유발하는 유머는 그런 부조리한 상황들로 판을 치는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누군가의 발버둥을 가리킬 것이다. 물론 그 누군가는 영화의 주인공인 ‘윤영’(이주영)으로 상징되는 여성이다. 영화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란 말도 안 되는 일들로부터 버티고 버티는, 인고와 감내의 시간임을 깨닫게 해준다. 다만 영화는 말한다. “오해를 견디는 게 어른의 삶이라지만, 이건 아니잖아요?”
〈메기〉는 노골적으로 부조리한 상황들을 방치한 사회에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간곡한 심정을 싱크홀이라는 하나의 균열 이미지로 제시한다. 참을 만큼 참아온 피해자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 그리고 쉽게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힘든 이 사회에서 결국 믿을 수 밖에 없는 건 자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누군가의 존재라는 사실. 10월 26일에 진행된 인디토크는 인고와 감내의 나날들을 보낸 수많은 피해자들의 진심이 영화 한 편을 통해서 보는 이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었음을 입증한 시간이었으며, 불신이 가득한 이 사회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음이라는 가치가 연대라는 이름으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체감한 순간이었다.
손희정 평론가(이하 손희정): 안녕하세요, 손희정입니다. 제 옆에는 영화를 만드신 이옥섭 감독님이 계십니다.
이옥섭 감독(이하 이옥섭): 안녕하세요, 저는 〈메기〉를 만든 이옥섭입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즐겁게 마음에 있는 이야기들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손희정: 저는 〈메기〉를 인디스페이스에서 관람했는데요. 보고 난 후 올해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영화가 바로 이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얘기를 관객 그리고 감독님과 편하게 나누고 싶은 마음에 ‘세계에 균열을 내는 싱크홀로서의 페미니즘’이라는 노골적인 제목을 걸고서 이번 대담을 준비했습니다. 편안하게 대화 나눌 시간이 되었으면 하고요. 일단 제목 괜찮나요?
이옥섭: 너무 멋있어요!
손희정: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옥섭: 평론가님께서 그렇게 봐주시고 관객분들이 그렇게 봐주셔서 반가웠어요. 제가 한국에서 30년 이상 살았고, 그 삶 속에서 느꼈던 게 영화에 투영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오늘은 새로운 GV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손희정: 오늘 이 영화를 처음 보신 분들도 계시니까 말씀드리자면, 크레딧으로 보신 것처럼 영화 〈메기〉는 국가인권위원회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인권위에서 감독님께 청년문제를 다뤄달라고 제안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 가운데 X-RAY 사진으로 드러나는 디지털 성범죄와 데이트폭력, 이 두 가지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 것 같습니다. 왜 청년문제와 데이트 폭력, 그리고 디지털 성범죄를 연결시킬 생각을 했는지 세부적인 주제선정 과정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이옥섭: 이때가 2017년이었고 ‘청년의 인권과 삶’이라는 키워드가 주어졌어요. 어떤 영화를 해야 할 지 고민하다가 그 당시에 저에게 와 닿는 말이 있었어요. 어떤 영화가 개봉을 하면서 “영화보다 현실이 더 영화 같다”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왔는데요. 저는 그 말을 듣고서 내가 사는 세계를 그려서 옮기면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걸 돌파구로 삼았습니다. 이 영화는 어항 속의 메기를 쪼그려 앉아서 보는 윤영의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때 윤영의 얼굴이 어두워서 ‘이 사람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을까’를 거슬러 생각하다 보니 ‘저 사람이 어디서 몰래 찍혔을지도 몰라’란 생각이 얼핏 들었습니다. 화장실을 갈 때마다 찍힐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어서 모자를 쓰거나 고개를 숙이고 일을 보는 그런 삶을 우리 모두 살았잖아요? 그게 되게 익숙한 일로 느껴졌고, 그런 상황에서는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굉장히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제가 연애를 이십 대 초반에 처음 했는데요. 첫 연애를 했을 때부터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위협을 당할지도 모르고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습니다. 뉴스에서 남편이나 남자친구, 혹은 헤어지자고 말한 상대에게 목숨을 잃게 되는 소식을 많이 접하다보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화로 찍진 않았지만 새로 만난 남자가 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대한 장편 시나리오도 썼고요. 그걸 찍지 않아서 아마 〈메기〉까지 온 것 같아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이 누군가를 때렸고, 그 사람이 나에게도 어쩌면 폭력을 행사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캐릭터를 만든 것 같습니다. 제 속에 있던 불안들이 고스란히 윤영에게 투영되어서 지금의 작품이 완성된 것 같아요.
손희정: 구교환 배우님이자 PD님과 작업을 자주 해왔기에 아무래도 처음부터 팀으로 작업 제안이 왔을 것 같습니다. 청년 문제, 그 가운데서도 데이트폭력과 디지털 성범죄를 다룬다고 이야기를 나눴을 때 구교환 PD님과의 논의 과정이 어땠나요?
이옥섭: 먼저 시놉시스 차원으로 시나리오 쓰기 전에 제 속에 있던 이야기를 다 끄집어내서 5장에서 7장 정도의 글을 제가 먼저 작성했습니다. 그 다음 시나리오로 다 같이 컨버팅하는데, 완성에 다다랐을 즈음에 구교환 선배가 “이 이야기는 네가 더 잘 알 것 같다”고 해서 제가 감독을 하게 되었어요. 보통 저희는 쓰면서 타협을 하기 때문에, 그러지 않으려는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손희정: 타협이라면 이 주제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닌, 중간에 멈추자는 식의 타협인가요?
이옥섭: 이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도 두려운 것이 없었고, 그냥 제가 더 윤영이를 잘 아는 것 같다고 구교환 선배가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좋다고 했고요. 선배도 좋은 것, 나도 좋은 것을 서로 합치다 보니까 조금 돌연변이 같은 글이 나와서 멈췄습니다.
손희정: 영화가 데이트폭력과 디지털 성범죄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잖아요. 거기다 싱크홀이라는 재난을 맞은 한국사회까지. 이것들을 되게 유쾌하게 묘사하려고 노력한 것 같습니다. 재난인데, 말하자면 코믹하게 그려내는 방식에서 약간 〈엑시트〉(2019)랑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게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고요. 이와 관련한 감독님의 고민이 궁금합니다.
이옥섭: 저의 습관이 묻어 나온 것 같아요. 심각한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너무 힘들잖아요? 어떻게든 거기에 너무 매몰되지 않으려는 제 나름의 발버둥 같아요. 진지하게 풀어낼 수도 있지만 제가 더 잘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조금 우회해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혹시나 이런 경험이 있는 분들이 영화를 보신다면, 조금 거리를 두실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했고요. X-RAY 장면도 만약 피부와 얼굴과 살이 나오는 방식으로 묘사했다면, 그런 실질적 피해들을 영화를 보면서 떠올릴 수 있잖아요. 가능한 그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으로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리고 유머를 느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머는 항상 저에게 위로가 되었기에 이 영화도 유머러스하게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손희정: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어떤 트라우마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와 비슷한 피해를 입으신 분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과거의 큰 사건이 상기되지 않는 방향을 고민하신 것 같아요. 감독님이 이 주제를 다룰 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옥섭: 제 주변에도 당연히 이런 일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이런 모습들을 많이 봤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보니 머리로는 헤어져야지, 벗어나야지 하는데 그게 안 되는 순간들이요. 저 또한 누군가와 만나온 시간들을 되짚어 보고, 이 사람에 대한 어떤 희망을 가지려고 하고, 그로 인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마음을 뿌리 뽑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이 영화를 완성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제가 영화의 결말을 보면서도 성원과 헤어지는 것이 맞지만 차마 헤어지지 못하겠다는 마음이 컸었거든요. 그래서 영화를 보신 분들께 성원과 어떻게 헤어질 수 있는지를 여쭈어보고 싶었어요. 근데 이래서 대화가 중요한가봐요. 관객 분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도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제는 내가 앞으로 이런 일을 겪고 있거나 혹은 주변에 누군가가 이런 일을 겪고 있다면 내가 강단 있게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선 것 같아요.
손희정: 저는 감독님이 대단히 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냥 빠트려버리는 구나, 아싸!”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웃음), 사실 어떻게 보면 내가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빠트려 버린 것일 수도 있겠네요?
이옥섭: 네, 무엇이라도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봐요. 내 힘으로 이 사람을 지나쳐 갈 수 없으니까. 그래서 어떤 분이 만약 싱크홀이 없었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지 질문을 주셨는데, 그때 순간 헉- 했거든요. 뭔가 들킨 기분이 들었어요. 내가 그러지 못해서 이렇게 찍은 거니까요. 이후 생각을 많이 했어요. 과거의 저는 싱크홀 없이 성원이라는 사람을 지나쳐가는 여성을 저는 아직 그릴 수 없었던 거예요. 이제는 다짐도 생기고 마음도 단단해지면서 그런 캐릭터를 얼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과거의 저에게는 싱크홀이 최선이었던 것 같아요.
손희정: 어떻게 보면 윤영과 성원,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성원이 윤영을 때리나, 안 때리나, 이런 문제에 집중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성원 뿐만 아니라 지연 씨나 부원장인 경진, 그리고 메기까지, 네 캐릭터와 윤영의 관계가 이 영화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관계를 구상하셨을 때 어떤 고민을 하셨나요?
이옥섭: 아마도 윤영이란 인물을 제가 책임지고 싶었나 봐요. 영화가 끝나도 이 사람이 살아가기에 외롭지 않고 혼자가 아닌 느낌을 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경진 부원장은… 초반에 참으로 도움이 안 되잖아요(웃음). 또 이경진 부원장과는 절대 친구가 안 될 것 같은데 결국 윤영과 친구가 되고요. 메기도 방생할지 키울지 모르고, 지연과도 계속 연락하고 지낼지 모르는 일이지만, 중요한 건 사는 도중 문득 누군가가 떠오르면 그걸로도 감사한 일이잖아요. 이 세 명의 여자들이 윤영의 곁에 있다면 아쉬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관계를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 같아요.
손희정: 영화의 주인공들이 전부 청년들인데, 이경진 부원장만 청년이 아니잖아요. 참 어른 같지 않은 어른인데, 제가 이경진 부원장에게 꽂힌 것 같아요. 이 캐릭터가 어떻게 보이길 바랐는지 궁금하고, 문소리 씨한테 너무 딱 맞는 역이기도 해서 어떻게 캐스팅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옥섭: 뭐랄까, 아예 복구가 안 되는 관계도 있잖아요? 포기하고 이제 등지고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도 살면서 많이 만났는데, 그 사람들과 조금만 가까이서 시간을 지내다 보면 ‘내가 이 사람을 참 몰랐네’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이경진 부원장이 바로 그 케이스예요. 같이 지내다 보니 이 사람도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지 알게 되고, 그걸 들어주고, 나도 무언갈 털어놓고, 그러면서 어떤 관계가 시작되기도 하잖아요? 여기에 좀 사랑스러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하하하〉(2010)였던 것 같은데요. 그 영화에서 문소리 선배님이 바람피운 애인과 헤어지기 전에 등에 업히라고 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 마음이 뭔지 모르겠으면서도 알 것 같았어요. 그 장면에서 귀여움과 사랑스러움, 그리고 의외성 같은 것들이 동시에 보였어요. 지적인 모습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는데 그런 두 가지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 문소리 선배님이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첫 번째 장편영화를 만든다면 문소리 선배님과 꼭 하고 싶다는 마음에 아예 처음부터 문소리 선배님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작성했습니다.
관객: 영화의 모티브인 류시화 시인의 시가 어떻게 보면 모순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글귀들이 영화에서 어떻게 작용하길 바라셨는지 궁금하고요. 그리고 성원이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없는데, 직설적인 폭력에 익숙한 사람들은 성원이 싱크홀에 빠질 만큼 잘못했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감독님도 그 부분을 고민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옥섭: 영화 속 류시화 시인의 말씀은 제가 위로를 받았던 말이에요. 제가 견디기 힘들었던 시기에 위로를 줬던 말들을 영화 곳곳에 배치했거든요. “어른의 삶은 오해를 견디는 일이다” 같은 말들도 그렇고요. 윤영을 가혹한 상황에 몰아넣었잖아요? 그 때 이 친구가 견딜 수 있게 그런 메시지가 위로가 되어주길 바라면서 배치했어요. 그리고 성원이라는 인물의 폭력성을 어디까지 보여줄지 고민이었는데, 폭력의 전조는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분들은 이 결말이 반전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반전을 의도하진 않았고, 우리는 계속 성원이 때리지 않는 모습에만 집중하잖아요. 이미 피해자가 있는데, ‘가해자에게 어떤 사정이 있을지 몰라’, ‘아닐지도 몰라’ 이런 식으로 가해자 입장부터 생각하는 버릇이 저에게도 있었고 제 주변에도 있었어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성원에게 굳이 어떤 이야기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손희정: 지연씨는 왜 그렇게 기묘하게 그려졌나요? 비둘기가 어디선가 날아오고(웃음). 윤영에게 지연을 쉽게 믿을 수 없는 조건이 주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옥섭: 그런 공포가 있어요. 피해자가 용기를 내서 나에게 이야기하는데 못 알아채면 어떡하나 싶은 불안이요. 피해자의 증언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계속 다른 생각을 하잖아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증언에서 이상한 지점들을 찾아내려는 모습도 있고요. 내가 진실을 외면할까봐 두려운 마음에 지연이라는 인물을 오히려 그렇게 묘사한 것 같아요. 비둘기를 머리에 올리고 있는 모습이 지연을 짧게 만난 윤영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참고로 성원의 사진을 보면 비둘기가 있거든요? 성원과 지연은 새를 좋아하고 서로를 찍어준 거고 지연을 오래 봐온 사람이라면 지연이 절대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거예요. 낯선 모습 속에 진실이 있을 수 있는데, 일방적인 시선으로 누군가를 ‘이상한 여자야’라고 재단하는 현실에서 느껴지는 어떤 불안들을 지연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관객: 이 영화를 구성하면서 언제 처음 메기라는 생명체가 떠올랐는지, 그리고 왜 메기인지 궁금합니다.
이옥섭: 처음에 어항 속을 바라보는 윤영의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제 눈길을 끌었던 건, 어항과 어울리지 않는 물고기가 들어있다는 느낌이었어요. 거기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얘는 뭐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지?'라는 의문이 들면서 제 마음 속의 이미지를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싶었고요. 그러면서 많은 상념에 잠겼는데, 실제로 제 주변에 뱀장어를 키우시는 분이 계셨어요. 그게 너무 신기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게 아마 영향을 줬을지도 몰라요. 되게 오래된 이야기예요. 제가 그 뱀장어를 보고 "얘는 뭐예요?"라고 물었는데 어항 속에 금붕어나 거북이나 열대어가 있으면 그러지 않잖아요? 익숙하니까요. 걔네들의 집은 어항이라는 생각이 제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이었어요. 그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왜 어떤 것은 어항에 어울린다고 확신하고 있었지? 어떤 것이 관상이고 어떤 것이 식용이지?' 이런 차원까지 올라가게 되었고요.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메기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어요. 윤영이가 사람으로부터 많이 치이잖아요? 성원으로 인해 혼란과 불안을 느끼고 있으니까 사람이 아닌 존재가 윤영의 곁에서 위로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 위협 받지 않을 존재. 그래서 메기처럼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존재가 우리 곁에, 적어도 내 곁에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윤영은 앞일을 잘 알려고 하지 않아요. 자신에게 중요한 말이 될 수 있는 쪽지를 버리고 지나쳐버리는 사람인데, 그런 윤영을 위해 몸으로 튀어 올라서라도 그녀가 앞일을 예측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메기라는 친구가 되게 매력적이었어요, 신비롭고. 그래서 엔딩까지도 함께 해주고요. “저를 데리고 나가 주세요”라고 하는 것도, 어항이 너무 작고 답답해서 데리고 나가 달라고 했을 수 있겠지만, 어쩌면 윤영이 헤어진 후에도 성원을 만날지 모르고 그로 인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이야기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손희정: 듣고 보니 성원이 여자친구를 때린 적 있다고 말했을 때 메기가 튀어 오르잖아요? 그러면 메기는 싱크홀을 감지하는 게 아니라, 싱크홀을 만드는 존재 아닌가요?(웃음)
이옥섭: 그 생각도 했었어요. 메기가 튀어 오르면 땅이 그렇게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요.
손희정: 신이네요?(웃음) 그런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관객: 저는 성원에 대해 질문하고 싶은데요. 엄청 찌질한 남자잖아요(웃음). 반지 때문에 동료를 의심하고요. 그런데 마지막에 사실을 얘기해서 놀랐어요. 제가 아는 성원 같은 사람들은 보통 변명하거든요. 여자가 먼저 때려서 맞서 싸웠다든지, 그 여자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든지, 항상 레퍼토리가 있잖아요. 저는 당연히 성원이 변명하고 윤영이 흔들릴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두려웠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깨끗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나온 이유는 뭔가요?
이옥섭: 저희가 보기에는 찌질하지만, 나름 성원이는 윤영이 준 반지에 엄청 진지하게 임했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성원이 마지막에 덧붙일 말을 모르잖아요. 땅이 그렇게 꺼지는 바람에요. 그 뒤에 어떤 말이 붙느냐에 따라서 성원의 마지막 말은 인정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변명의 시작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리고 차라리 변명을 하면 실망감에 이 사람을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러지 못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그 뒤에 어떤 말이 따라올지 무섭기도 했어요. 저 역시 ‘혹시 사과하면 어떡하지? 그러면 더 흔들릴 것 같은데’라는 생각에 성원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거든요. 내 눈앞에서 없어져야 이 사람을 지나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사실 “때렸어”라는 성원의 인정 자체에는 의미를 두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손희정: 제가 느낀 이 영화의 가장 큰 모순은, 엄청 통쾌한 영화라 생각했는데 엄청 곤란한 영화라는 것이었습니다. 곤란 앞에서 이걸 어떻게 해결할지 감독님께서 분투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옥섭: 그랬던 적이 있었어요. 제가 어떤 사람을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제가 지금껏 봐왔던 그 사람의 모습은 항상 변명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거든요. 근데 그 사람이 바로 인정하고 사과하니까 거기에 제가 너무 마음을 쉽게 풀었어요. 참 약하게도.
관객: 성원을 보면서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었음 좋겠다는 마음을 가졌지만, 마지막에 결국 인정하고 싱크홀에 빠지면서 단죄를 받잖아요. 근데 어떻게 보면 갱생의 여지없이 과거를 인정하자마자 사라지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어요.
이옥섭: 싱크홀을 여러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벌어진 일일 수 있고, 아니면 윤영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드는데요. 사실 명확한 단죄라고만 하긴 어려운 것이 싱크홀 안에서 성원이 살아나서 윤영을 만나지 않고도 살아갈 여지도 있을 테고요. 어떤 분은 ‘얘는 살아선 안돼’ 하고서 윤영이 신고하지 않고 사라졌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죠. 관객 분들의 선택에 따라서 이야기를 열어둘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싱크홀에 빠지게 한 이유는 윤영이 그 후에 ‘왜 때렸어?’ 혹은 ‘어떤 일이 있었어?’라고 계속 묻지 않길 바랐던 거예요. 그 다음을 이야기해봤자 달라질 것은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저는 윤영의 삶을 더 응원하기 때문에 그 이후 가해자의 삶은 윤영이 아닌 가해자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관객분께서 빠진 성원을 구해내고 그 뒤를 상상하시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손희정: 이 작품을 보고 누구의 손을 잡을지는 관객의 몫이겠죠. 제가 지난 번 객석에서 감독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쨌거나 지금 한국사회는 너무 가해자의 말만 듣지 않나, 피해자의 머리 위에 비둘기가 있다고 해서 너무 외면해오지 않았나”라고 말씀하신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수평을 맞춘다는 데에 의의가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관객: 영화 보면서 지연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연대가 되게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성원과 피부를 맞대고 살아온 일상의 시간이 있었는데도 지연이라는 낯선 인물의 말을 믿을 수 있었던 것에는 메기나 이경진 부원장처럼 윤영을 도와준 존재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일상에서는 그러기가 굉장히 어렵고, 남자친구를 더 믿고 싶어 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영화 속 모습이 되게 부럽기도 했습니다.
이옥섭: 그래서 우리가 더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할 것 같아요. 윤영과 경진, 윤영과 지연, 윤영과 메기처럼 저희의 연결이 더 많아야 되겠단 생각이 드네요.
관객: ‘세계에 균열을 내는 싱크홀로서의 페미니즘’이라는 이번 대담 주제를 보면서 싱크홀은 재난이기도 한데 어떻게 돌파구가 되었을지 생각을 해보게 되었어요. 감독님은 싱크홀이나 메기의 존재가 없었다면 윤영이 과연 그 관계를 끊을 수 있었을까 고민하셨다고 하셨는데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게 지구에 구멍이 뚫리는 모습처럼 보여서 윤영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장치가 아닌가 생각을 했습니다. 부제를 붙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옥섭: 이 제목은 평론가님이 붙여주셨죠?(웃음) 너무 훌륭한 아이디어여서 제가 먼저 알고 이야기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요.
손희정: 인디스페이스에서 〈메기〉를 처음 보자마자 써둔 제목이었거든요. 저는 이 영화가 노골적으로 페미니즘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싱크홀이 그야말로 재난이기도 하지만, 인터넷에서 그런 이야기 보셨을 거예요.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페미니즘” 부수어야 새로운 것이 나오잖아요? 부숴서 새로운 것을 쌓아가는 것으로서 페미니즘을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부수는 대신 구멍을 뚫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객: 성원의 반지 에피소드는 데이트 폭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는데, 그 이전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믿음과 의심의 관한 이야기는 데이트 폭력과는 조금 무관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믿음과 의심을 중심소재로 다룬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이옥섭: 관객 분께서 보시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과거에 제가 의심이 많은 게 고민이었고 때로는 자책을 할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 이렇게 관객 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제가 의심이 많았던 것은 결국 나를 지키기 위한 방식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영화 속 에피소드들처럼 실제로 믿음과 의심은 사실 둘 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이 이야기는 윤영이 용기를 내서 진실을 만나는 마지막 과정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관객: 영화에도 X-RAY 사진을 찍은 사람이 누군지는 관심이 없다는 언급이 나오고, 끝까지 범인은 나오지 않는데요. 실제로 범인이 받은 죗값은 없는 것 같아요. 현실을 의도적으로 이야기에 반영하신건지 궁금합니다.
이옥섭: 네, 맞아요. 제가 서있는 세계와 윤영의 세계를 그리려면 지금 처한 한국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먼저라 생각했어요.
손희정: 혹시 감독님 마음속에 있는 범인이 있나요?
이옥섭: 그냥 평범한 얼굴을 하고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저에게는 그것이 공포예요.
관객: 처음에 X-RAY 사진이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동상에 걸려 있더라고요. 하필 마리아 상에 남녀의 섹스 장면이 걸려있는 게 웃기더라고요. 관련 설정들을 어떻게 기획했는지 궁금합니다.
이옥섭: X-RAY 촬영본을 동상에 걸어놨던 건, 일련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 마치 전시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언론 기사나 불법 사이트들이 사건을 관망하게 만드는 것 같고요. 그런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사랑병원은 되게 폐쇄적인 곳이라 생각했어요. 외부의 자극이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동떨어진 공간이라는 생각을 했고요. 영화를 보시면서 ‘이 병원에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길 바랐습니다.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는 요소들을 곳곳에 심어놓았어요. 겉으로는 평화로운 것을 추구한다고 하는데 막상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점프해서 출근카드를 찍고, 아직도 간호사 캡을 쓰고 있고, 부원장은 철 지난 왕진가방을 들고 다니고, 거기다 벌레를 먹이로 주는 파리지옥까지. 그런 것들을 통해 공간을 지배하는 억압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변화될 기미는 안 보이는 후진 곳, 그런 부조리한 공간으로서 병원이라는 무대를 기획했습니다.
손희정: 영화 속 로케이션들이 정말 특이해요. 마리아사랑병원은 어디서 찾으신 거죠?
이옥섭: 예산이 한정적이어서 서울에서만 촬영이 가능했어요. 동시에 섬처럼 동떨어진 곳을 원했고요. 그런데 제작팀이 발로 뛰어서 찾아줬어요. 병원의 중앙에 마리아 동상이 있는 것도 너무 좋았습니다.
손희정: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찍은 아파트도 인상적인데, 그 곳에서 찍은 이유가 있을까요?
이옥섭: 그곳이 바람이 많이 불고 서늘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올려다보면 마치 내가 구덩이 빠진 듯한 느낌이 들고요. 구덩이 같은, 그런 특별한 느낌이 그 공간에 있었어요. 참고로 모두 서울이었습니다.
관객: 성원이도 일하는 동료를 의심을 하다가 결국 자신의 의심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잖아요. 윤영이가 자신을 의심할 때 그 이야기를 꺼내는데요. 윤영의 의심과는 차원이 다른 것인데 그렇게 말하는 성원이 우스우면서도 짜증났어요. 그런 장면은 일부러 의도하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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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섭: 성원은 그 반지를 윤영이 사줬다는 이유로 찾으려 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이 윤영에게는 되게 좋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해요. 차라리 이 사람이 윤영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어 보이면 쳐내기 쉬웠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끊어내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도 그런 식으로 성원이라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보여드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영은 앞으로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성원이 윤영에게 "메기 버린 거잖아" 그런 이야기도 하잖아요. 그게 진실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이 옳은 말을 한다고 느껴져서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걸 끊어내고 싶은 제 자신의 모습이 장면에 반영되었던 것 같습니다.
손희정: 밤이 새도록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이쯤에서 그만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감독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옥섭: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있을 때, 자신의 안전, 행복만 생각하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상대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자신을 못 지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성원이 너무 착하잖아, 걔도 사정이 있을 거야'라는 마음이 윤영의 삶에서 우선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지나 이 영화가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영화 속 한 장면이라도 떠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길 가다 도로 공사 현장을 보고서라도 〈메기〉가 떠오르면 참 좋을 것 같네요(웃음). 끝까지 남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손희정: 앞서 이 영화가 〈엑시트〉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인상적인 건, 청년이야기를 해 달라, 청년인권을 보여 달라는 제작 요청이 있을 때 대다수 영화들은 〈엑시트〉처럼 남성의 얼굴을 하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은 여성의 얼굴을 하고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눠본다는 점에서 기록에 남을 만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영화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 끝까지 자리 지켜주신 관객 분들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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