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우리 서로 함께라는 사실만으로도,
〈영하의 바람〉 김유리 감독 인터뷰
*관객기자단 [인디즈] 송유진 님의 글입니다.
거리에 겨울냄새가 나는 건 김유리 감독의 첫 장편인 〈영하의 바람〉이 극장을 찾아왔기 때문일까. 영화의 주인공 영하의 계절은 7년 내내 겨울이다. 가장 따뜻해야 할 집, 그리고 가족 안에서도 찬 바람을 느끼는 영하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친구인 미진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존재만으로 힘이 되는 대상이 있고, 또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일 테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영하의 바람〉을 연출한 김유리 감독을 만났다.
영화제뿐 아니라 극장가에서도 여성 영화인들의 활약이 연일 들려오는 요즘입니다. 〈영하의 바람〉 또한 이 반가운 파도에 힘을 싣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개봉 소감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영하의 바람〉은 가정이라는 미명 아래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침묵하는 한편, 경청하면서 자신에게 따뜻한 바람이 불기를 바라는 영하의 성장을 담은 이야기 입니다. 촬영을 끝내고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개봉하게 되어 너무 감격스럽네요. 관객분들이 영화를 어떻게 봐주실 지 생각하면 긴장되고 떨립니다.
마침 겨울의 초입에 개봉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영화의 배경도 모두 겨울인데요, 촬영 기간은 얼마나 되었나요?
촬영은 2017년 12월 한달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한참 추울 때 서울 분량을 먼저 찍고 나머지 부산 분량을 찍었어요.
감독님의 전작인 〈자위전쟁〉(2008)이나 〈상실의 기억〉(2010), 〈저 문은 언제부터 열려있었던 거지?〉(2013)를 살피면 비참한 현실의 도전과 이에 대한 여성인물의 응전에서 다양한 부조리가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에 특히 주목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우리가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제 마음 속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성장하면서 좋고 나쁨의 뚜렷한 구분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썩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이 명확한 목적이나 명백한 선악을 가지고 모습을 드러내기 보다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방식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생각해요. 영화를 찍을 때 자전적인 이야기든 그렇지 않은 이야기든 제가 살면서 경험한, 명확하게 선악을 구분짓지 않는 사회의 부조리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저를 지배하는 감수성들이 영화에 드러나는 게 아닐까요.
단편인 〈저 문은 언제부터 열려있었던 거지?〉와 〈영화의 바람〉을 나란히 보면 익숙한 공간을 떠나옴으로써 느끼는 감정들이 복잡하게 담겨있는 것 같아요. 비슷한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부산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이사를 굉장히 많이 다녔어요. 성인이 되고 나서도 익숙한 공간을 떠나 서울로 오게 됐고요. 어딘가로 떠나고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것이 저에겐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경험 중 하나인데, 서울에서 태어나고 정착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지 않은 정서가 제게 있는 거겠죠.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영하의 바람〉 속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영진의 친딸인 은영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그려지지는 않지만 영진이 그를 소중히 여겼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영진에게 은영의 존재를 설정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영진의 고향 혹은 원래 살던 곳은 부산이었지만 어떤 계기로 서울로 올라오면서 은숙을 만나게 되었어요. 은숙과 영하가 그를 가족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본인도 소속감이나 마음의 안정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영진이 두고 온 가족이 없었다면 은숙과 빨리 결혼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두고 온 가족’이라는 맥락이 생기면서 영진에게 양가적인 감정이 생기는데, 이건 단순히 영진 뿐만 아니라 은숙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은숙이 영진의 아이에게 가지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은숙은 열두 살이던 자기 딸을 남편에게 보내버리기도 하고, 열다섯 살의 미진도 책임지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영진의 아이에게 책임감을 느껴요. 그걸 영하에게 말하기도 하고요. 은영의 존재는 은숙의 모순적인 상태를 보여주면서 영하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열두 살 때 버려질 뻔하고 열다섯 살 때에는 미진과 헤어질 수 밖에 없었는데, 은영을 책임지려고 하는 엄마를 보는 아이의 마음은 어떻게 분열될까? 그런 마음으로 연출했습니다.
대사가 아니라 장면을 통한 암시가 곳곳에 보였습니다. 특히 엄마인 은숙이 실종되기 전 불이 다 꺼진 부엌에서 묵묵히 서서 음식을 먹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이런 연출들을 사용하신 의도가 궁금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장면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 지 관객은 알지 못하잖아요. 은숙이 집을 나가는 매우 큰 사건인데 인과적으로 ‘왜 집을 나가는지’에 대한 답을 대사로 전달하기는 어려웠어요. 복잡한 감정인데, 말하면 할수록 꼬일 것 같고. 그렇다고 어떠한 장면도 없이 가버리면 은숙이 좀 서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가 떠나는 것에 대한, 머릿속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감정적으로는 헤아릴 수 있는 장면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관객은 그 장면 이후에 은숙이 집을 나갔다는 걸 알게 되잖아요. 그 때 다시 이 장면으로 돌아와서 곱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은숙하고 영진은 항상 영하와 미진의 시선을 통해서 나오는데, 이 장면과 영진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독립적으로 가지는 장면이거든요. 그 두 장면은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가만히 지켜보고 나서 사건이 일어난 후에 다시 그 장면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게 내가 이 두 캐릭터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속에서 쉽게 말할 수 없고 쉽게 정리될 수 없는 그런 감정들. 그 주체인 인물들조차도 지금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확실히 알 지 못하는 그런 감정들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 장면들은 어떤 감정으로만 느껴질 뿐이지 말로 형용하기가 어렵더라고요.
배우들도 ‘은숙이 왜 집을 나가는 거야?’ 그런 식의 질문은 아예 안 했어요. 집을 나가기 전에도 밥을 차려놓는 이 여자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 이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영하의 방문을 열고 들어갈 땐 서성거리다 들어갈까, 아니면 바로 훅 들어갈까. 그런 식으로 겉도는 질문들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연기를 하는 배우도, 찍고 있는 저도 그 감정을 확실히 알지 못하죠. 확실히 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요. 안다면 그 감정의 묘미가 사라질 것 같았어요.
영화 속 대부분의 사건들이 집에서 일어나고, 마지막에는 집이 텅 비어있는 모습을 통해 영하 가족의 해체를 은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영하의 바람〉에서 집은 특히 더 복잡한 느낌을 담고 있는 것 같아요. 집이라는 공간을 담아낼 때 가장 고민하신 부분이 궁금합니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최고로 필요하고 중요한 게 집이잖아요. 영화 속 인물들이 결국은 최소한의 것도 갖지 못한 채 계속 떠돌아다니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고 슬픈 일인 것 같아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누는 게 집이잖아요. 화장실이나 거실을 같이 쓰면서 동시에 내 방처럼 개인적인 공간들도 있고. 그 개인적인 공간과 공동의 공간을 오가면서 문을 통과하고요. 그 문이 가진 것들을 최대한 많이 보여주고 싶었어요. 열려있는 문을 통해서 서로를 보는 것과 살짝 열려있는 문틈을 들여다 보는 것은 다르잖아요. 그런 디테일한 차이를 느끼면서 문을 사이에 둔 시선들을 통해서 감정이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문틈으로 보는 장면이 많죠. 후반으로 가면서 그들의 관계가 더 단절되면 대부분 문은 닫혀있고, 닫힌 문 너머로 소리를 듣고, 방어하고, 예민하게 구는 장면들이 있어요. 인물을 나누고 통과시키는 문을 가족들 사이에서의 연결로 드러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목사가 되고자 하는 은숙을 그리면서 조심스러운 부분들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종교적인 부분이 서사에 크게 개입되지 않았다고 느꼈는데, 교회라는 키워드는 서사에서 중요했을 것 같아요. 교회와 관련된 부분들을 연출하면서 고민하신 점이 있을까요?
저는 종교가 없고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전혀 없어요. 다만 영화가 하나의 중심 사건에서 전개되기보단 긴 시간 동안 인물들이 새로운 환경에 던져지며 여러 가지 일들을 겪는데 그 중 하나의 테마가 교회라고 생각해요. 주안점을 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잖아요. 사실 종교를 믿는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종교가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가령 미진이만의 기독교가 있고 은숙만의 기독교가 있는 거죠. 그런데 종교를 믿는 방식에 따라서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일을 하거나 모순적인 행동을 하기도 해요. 그런 일들은 종교 자체보다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한 부분에서 종교를 믿는 은숙의 부조리함이 살아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종교는 미진과 은숙의 연결점이기도 해요. 미진이는 은숙이 목회자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동경하는데, 나중에는 종교를 버려요. 그게 어쩌면 이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리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했어요. 여러 테마 중 하나인 종교 또한 어떤 부조리함으로 수렴되는 부분에 대해 말하려고 했어요.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조심스럽게 접근했고 여러 곳에 자문을 구했어요.
'영하의 바람'을 견디는 것은 영하뿐만 아니라 미진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두 캐릭터는 어떻게 구상하게 되셨나요?
제가 자매가 있고, 여고를 나왔어요. 또래 여성들과 뭔가를 나누는 것이 익숙하고요. 그래서 미성년의 시기를 이야기하면서 두 소녀의 이야기로 나아간 것 같은데요. 영화가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었다면 단지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제가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를 보고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 많이 울었는데, 결국 그렇게 어떤 갈등의 원인, 상처를 주는 사람으로부터 치유를 받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영하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좋겠다, 그런데 그것이 엄마나 영진이 아닌, 같이 바람을 맞으면서도 함께 존재하는 누군가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짰어요. 그러면서 미진과 영하가 구체화되기 시작했고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명확히 어떤 사람이라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미진만은 변하지 않고 영하의 곁에 있어줄 것만 같은데, 영화의 후반부로 가면 또 관계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떻게 생각하면서 찍으셨는지, 영하를 불러 세운 미진이의 마음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영하는 미진이가 돈을 가지고 가버린 상황을 모르고, 미진이는 영하가 새아빠 때문에 화가 난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다시 만나잖아요. 사실 미진이는 영하보다 조금 더 빨리 시련에 내던져졌고, 영하보다는 이런 상황에서 조금 더 마음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죠. 그렇지만 미진 역시 모두 이해하는 마음으로 영하를 찾아간 것이라기 보단, 결국은 미진이 옆에도 아무도 없었던 거예요. 영하마저 놓아버리면 자기 옆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아요. 영하를 위해서라기 보단, 우선 첫 번째로 자신을 위한 일이죠. ‘겪어보니까 내가 영하 옆에 있어주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일 거야’라고 생각하고 가지 않았을까요?
영화의 엔딩에 ‘7년간의 사랑’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 영화는 어떤 한 사건을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라 아이들의 성장을 따라가는 영화이고 그것이 회상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으로 펼쳐져요. 그렇게 다음 장이 시작되는 순간 어떤 것은 과거가 되어버리잖아요. 그렇게 영화가 끝나면 모두 지나가버린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고 생각했는데, 먼 훗날 영하는 이때 일을 생각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했어요. 과거를 털어버리고 보란 듯이 잘 산다고 하더라도 과거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7년간의 사랑’은 굉장히 담담하게 회상의 방식으로 7년간의 시간을 노래하는 곡인데, 영화에 담긴 부분의 가사가 영하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어요. 이 노래가 영하 목소리로 나온다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이야기가 확장되는 느낌이 들 것이라는 바람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영하의 바람’을 뚫고 영화를 보러 오실 관객 분들께 영화가 어떤 의미로 다가왔으면 하시나요?
결국 영화가 서로 마주 선 두 소녀의 모습으로 끝이 나잖아요. 다들 경중은 있겠지만 가정에서 겪은 개인적인 사정이나 아픔, 비밀은 하나씩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를 보시고 과거에 있었던 힘들었던 일, 옆에 있어줬던 사람들, 또 누군가 힘들었을 때 옆에 있어줬던 경험.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상처 난 가슴을 어루만져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기대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감수성으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목표로 작업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요즘 감독님 안에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는 이야기는 어떤 건가요?
〈영하의 바람〉도 비슷한데요, 결국 영하와 미진이가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어른들이 하지 않은 일들을 대신 했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휩쓸리는 인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을 닮아가지 않고 그들이 걸어간 길을 따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 그런 것들이 제 마음을 언제나 설레게 하는 것 같습니다.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어떤 장르의 누군가의 이야기이든 간에 계속이요.
마지막으로 인디스페이스에서 영화를 관람하실 관객분들께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영하의 바람〉이 11월 14일에 개봉합니다. 영화의 배경도 겨울인데 겨울의 문턱에서 개봉을 하게 됐습니다. 몰아치는 찬바람에 몸도 마음도 추우실 텐데 극장에서 〈영하의 바람〉 보시면서 조금이라도 따뜻함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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