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말하지 않고 기억하는 방식으로
SIDOF 발견과 주목 〈섹션 2: 당사자성 너머의 역사, 영화적 재현〉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19년 10월 12일(토) 오후 4시 30분 상영 후
참석 권아람, 임철민 감독
진행 정지혜 평론가
*관객기자단 [인디즈] 오윤주 님의 글입니다.
SIDOF의 섹션 3은 ‘당사자성 너머의 역사, 영화적 재현’이라는 주제로 권아람 감독의 〈463 poem of the lost〉와 임철민 감독의 〈야광〉을 엮었습니다. 〈463 poem of the lost〉은 잘 알려지지 않은 태국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기록입니다. 감독은 한국인 463명을 포함한 일본군 ‘위안부’들의 기억을 찾아 태국으로 떠납니다. 〈야광〉은 6~90년대 남성 성소수자들의 ‘크루징 스팟’으로 기능하던 극장들을 찾아갑니다. 극장에 대한 관심이 영화라는 매체 자체로 확장되고, 기억을 영화적으로 재현해낸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정지혜 평론가(이하 정지혜): SIDOF 발견과 주목은 최근의 독립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관객 분들께 소개드리고 싶은 영화들을 묶어서 기획전의 형태로 상영을 하는 자리입니다. 오늘 마지막 섹션이고요, 권아람 감독님의 단편 〈463 poem of the lost〉와 임철민 감독님의 장편 〈야광〉 두 편을 엮어봤습니다. 아마 독립 다큐멘터리를 챙겨봤던 관객 분들이라면 생소한 조합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텐데요. 올해 3월 인디다큐페스티발 영화제에서 하나의 포럼을 열었습니다. ‘당사자성 너머의 역사적 재현’이라는 주제, 이른바 후속세대라고 할까요? 역사적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그 이후 세대 창작자들이 자신들의 영화적 관심인 역사적 사건을 지금 시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기록하고 재현하고 있는가, 라는 주제로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네 편의 한국 영화 〈김군〉, 〈리틀보이 12725〉, 〈나의 노래 메아리〉, 〈기억의 전쟁〉을 중심으로 포럼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상영한 두 편의 영화도 이 포럼의 연장선상에서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는 기획 의도가 있었구요. 오늘은 그 기획 의도 하에 초점을 맞춰 시작하되 이 영화들이 갖고 있는 큰 장점과 궁금한 점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두 분의 감독님 먼저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권아람 감독(이하 권아람): 안녕하세요, 〈463 poem of the lost〉를 연출한 권아람이라고 합니다.
임철민 감독(이하 임철민): 안녕하세요, 〈야광〉을 연출한 임철민입니다.
정지혜: 앞서 들어보니 두 분이 실제로 만난 적이 처음이라면서요. 이 조합이 신선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그렇지만 권아람 감독님은 〈야광〉을 이미 3번 정도 봤다고 하셨고요, 임철민 감독님도 〈463 poem of the lost〉는 오늘 처음 보았지만 권아람 감독님의 전작을 보셨다고요. 두 분 인사 좀 나누세요.(웃음)
권아람: 안녕하세요.
임철민: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뵀지만 권아람 감독님 전작 〈퀴어의 방〉(2018)을 재미있게 보았고, 새로운 영화가 나왔다고 해서 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하고 있었어요. 오늘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영화를 보러 왔습니다.
정지혜: 〈야광〉의 경우는 극장에 얽힌 개인적인 경험과 감각을 시작으로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안에 있었을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인데요. 저는 〈야광〉이 그야말로 극장에서 꼭 봐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했고, 굉장히 시네마틱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떤 SF나 3D 영화 못지않은 시네마틱한 순간들을 준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지점들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권아람 감독님의 작품은 역사적인 공간과 집단적인 기억에 대한 영화입니다. 현장에 직접 가서 기록하고, 인터뷰를 비롯해 다양한 인물들이 들어왔다 나가고, 그 과정에서 감독님의 시적 나레이션이 들어가면서 다양한 구성을 하나로 엮어내는 방식입니다. 그런 면에서 두 영화가 굉장히 다른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대담이기도 하니, 두 분이 서로의 작품을 어떻게 봤는지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권아람: 제가 〈야광〉을 세 번 봤다는 것을 앞서 이야기해주셨는데(웃음) 좋아하는 작품이고요. 제가 특히 좋아하는 부분이 있어요. 화면이 엔딩 크레딧으로 바뀌며 음악이 나올 때의 경쾌함이 좋고, 제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저한테는 중요한 레퍼런스이기도 해서 반복적으로 관람했어요. 저는 어떤 시공간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터뷰라는 방식으로 1차 재료를 모으고, 그것들을 구성하고 살을 붙이는 작업을 해왔던 것 같아요. 지금 하고 있는 작업도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임철민 감독님의 작업을 보면서는 그 공간에 얽힌(크루징 스팟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가 없지만, 감각적으로 그 공간의 이야기를 느끼고 감각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 재미있었어요. 특히 음악으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경쾌해지면서, 말로 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확 다가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임철민: 오늘 영화가 붙어서 상영이 되었잖아요.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 작품이 굉장히 다른 방법으로 대상이나 사건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맞닿아 있는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굉장히 구체적인 진술이나 목소리들이 쌓이면서 영화가 진행되고, 화면은 바깥을 비추기도 하고 인물들을 비추기도 하는데 굉장히 구체적인 진술임에도 불구하고 시적으로 다가오는 부분들이 좋았어요.
정지혜: 인터뷰라는 방식에 대해 얘기해주셔서. 〈463 poem of the lost〉의 경우는 직접 역사적 경험이 있는 당사자 혹은 주변인, 목격자를 찾아가서 인터뷰를 하는 익숙한 방식으로 기본 소스를 만들어 주셨잖아요. 반면 〈야광〉에서는 단 한 번의 인터뷰도 나오지 않고, 짐작하건대 임철민 감독님은 인터뷰에 큰 관심도 없으셨을 것 같아요. 이 영화에서 인터뷰라는 방식을 볼 수 없었던 이유가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임철민: 처음에 영화를 기획할 때 출발은 극장에 대한 관심이었어요. 예를 들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주된 공간 중 하나인 파고다 극장은 당시에 일반 극장으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그 위에 다른 층위로 남성 성소수자들이 크루징을 하고 있던 거였으니 하나의 공간이 다양한 차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공간을 경험했던 일반 관객들의 경험 및 체험과 크루징을 하기 위해 그 공간을 찾았던 성소수자들의 경험은 다를 수밖에 없고, 그 사실은 아는 사람들만 알죠. 워낙 비밀스럽고 은밀했으니까.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성소수자들이 어느 정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야만 했던 상황들, 거기서 선택하게 되는 정치적인 어떤 것들. 이런 공간의 속성에 대한 생각을 더 하게 됐어요. 인터뷰를 하긴 했었고, 그것들을 직조해서 분명한 어떤 것들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한편으로는 있었지만, 마냥 서사나 인터뷰를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사실 인터뷰를 진행할 때 당사자 분들이나 극장 관계자 분들이 굉장히 협조적이었어요. 그런데, 굉장히 말하고 싶은 게 많고 크레딧에도 남기고 싶지만, 드러나고 싶지는 않다, 어떤 식으로든 영화에 도움을 주고 싶지만 드러나는 건 또 다른 문제라는 말씀들을 해주셨던 게 기억에 남아 영화도 공간이나 이 공간을 점유했던 당사자들의 속성에 맞춰서 가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인터뷰를 진행하긴 했지만 사전 자료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었던 부분들을 가이드로 따라가되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정지혜: 반면 권아람 감독님의 경우에는 인터뷰 대상자가 전하는 말들이 비슷하고 공통된 지점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다르게 들리기도 했어요. 각자의 입장에 따라 상황을 다르게 인식하고 있고, 그런 지점들을 의도적으로 더 넣으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감독님의 전작 〈퀴어의 방〉을 보셨다면 인터뷰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들어가 있고, 다음 작품에서도 인터뷰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고 하셨어요. 감독님이 이번 영화에서 구현했던 인터뷰의 확장된 관심에 대해 들어보고 싶어요.
권아람: 우선 태국에 남아있는 위안소 공간들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여러 얽힌 이야기나 태국에 남아있는 여성의 증언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중국이나 다른 국가에는 증언이나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반면, 태국에는 남아있는 것들이 많이 없어서 굉장히 제한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작업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위안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연구를 통해 증빙된 장소들을 찾아가고 그 장소와 얽힌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간이 담고 있는 분위기나 그 공간이 현재 맥락에서 달라진 모습, 단편적이거나 퇴색된 이야기일지라도 그 시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야겠다고 느꼈어요. 인터뷰를 진행하며 느낀 것은, 대부분 그렇게 디테일한 기억이 아니고 그들은 한국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심각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한국과 태국은 온도차가 굉장히 커요. 전쟁 당시에도 태국은 중립국에 가까웠지만 일본 치하에 가까운 입장이었고, 멜로 드라마에 일본군이 멋있는 주인공으로 등장할 정도로 그 시절에 대한 감각이 우리와는 굉장히 다르거든요. 그런 사회적 맥락 위에서 인터뷰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퇴색된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죠. 그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인터뷰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어요. 전통적으로 인터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구성되지 않은 것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아주 오래된 책을 읽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기억이라는 것은 계속 변화하는 사회에 따라 갱신되어야 하고 새롭게 해석되고 변화하면서 생동감을 얻게 되는 것인데, 그 기억을 직접 갖지 않은 후속 세대로서는 사회의 맥락에 따라 기억이 점점 다르게 만들어져가는 것을 목도하면서 또 다른 감각들을 할 수 있게 되잖아요. 그런데 인터뷰 대상자들은 사실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에요. 그래서 구성도 책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구성했어요.
정지혜: 아까 임철민 감독님께서 다른 방식이지만 그럼에도 공통된 면도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혹시 어떤 건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임철민: 방금 말씀을 듣고 보니, 단순히 인터뷰를 녹취하고 구성에 따라 배치를 하는 식으로 되어있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인터뷰나 사건을 접하고 한 번 더 아웃풋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 부분이 닮아있지 않나, 감각적인 부분에서 닿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지혜: 권아람 감독님도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으셨을까요?
권아람: 특히나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맞이하게 되는 조건인데, 이 이야기를 드러내서 어떤 영화적인 결과물로써 관객들과 공유하고 그 시대에 있던 일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창작자로서 들지만, 그 안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등장하는 사람들은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영화를 도와주고 싶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도 드러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저의 전작 〈퀴어의 방〉 또한 비슷한 조건들이 있어서 그러한 형식이 나온 것이고,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업도 여성 퀴어들의 공간들을 담는 작업이라 이 역시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거든요. 얼굴이 나오고 싶진 않다는 인터뷰 대상자들이 있고, 필연적으로 인터뷰를 어떤 방식으로 가공을 하거나 인터뷰 소스에 기반에서 아예 다른 화면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비슷한 점을 느꼈어요. 임철민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서 감춰지고 그렇지만 드러나고, 전면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감각적으로는 다가오고, 밀면서 당기기도 하는, 그런 시각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고 그런 감독님의 태도가 저한테는 편안하게 느껴졌어요.
정지혜: 〈야광〉의 경우에는 다양한 레이어가 있는 것 같아요. 감독님의 전략이 ‘잘 떼어내기’라는 생각이 드는데, 영화라는 것이 배우의 목소리, 화면, 이런 요소들이 결합돼서 하나의 장면으로 구현되고 우리는 합쳐진 장면을 보지만, 〈야광〉에서는 그 요소들을 하나하나 떼어내서 그 요소들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하나의 장면으로 만들어지는가를 보여주거든요. 요소들을 하나하나 잘 떼어낸 이후에 다시 잘 붙여서 충돌하는 방식이라서 흥미롭게 봤습니다. 반면에 〈463 poem of the lost〉의 경우는 그 요소들을 ‘잘 붙여보기’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붙이는 과정에서의 시적인 나레이션이 그것들을 꿰어내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대한 두 분의 생각을 좀 들어보고 싶습니다.
임철민: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자료 조사, 극장을 찾아가면서 이 영화의 형식이 만들어졌고요. 영화에서 어떻게 공간이나 극장을 재현하고 또 영화를 매개로, 시간이나 공간을 매개로 그 모습을 어떻게 펼칠 수 있을 것인지가 중요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갈래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영화를 썰어서 요소들이 좀 더 드러나게 배치를 하고 그 과정을 가져갈 수 있게끔 하는 방식이었어요. 범위를 좀 더 확장해볼 수 있도록 피디님, 스탭들과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던 ‘떼어내기’의 방식이 중요했습니다.
정지혜: 특히 인물에게 같은 구간을 반복하게 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나중에는 대사와 목소리, 화면, 이런 것들이 다 따로따로 떨어지고,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니까 이상한 느낌을 받는 상태까지 가면서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다 보이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권아람: 저는 조각들을 모아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기억들을 모아보고, 내가 그 기억을 직접적으로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기억을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뭘까 고민했어요. 일단 재료들을 모으고 붙여서 한 방향으로 가져가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기억을 기억한다는 게 뭘까.’라는 게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로드 무비를 촬영하며 느꼈던 마음을 나레이션으로 표현했어요. 기억을 기억하는 입장에서, 기억한다는 걸 우리가 너무 쉽게 말하는 건 아닐까. 기억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해지는 걸까. 이런 질문들로 귀결되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에 질문들이 텍스트로 제시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은 자료가 너무 제한적이었고, 그 경험을 직접적으로 가진 분들은 대부분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기억을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 많았어요. 저는 작업을 하는 길을 걸어왔지만, 다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의 말과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증언을 딛고 기억을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그렇게 배치를 했던 것 같습니다.
정지혜: 감독님뿐 아니라 다른 현지인들의 나레이션도 들어가 있잖아요. 그 선택도 독특하고, 또 자막처리의 방식이 독특하다고 생각했어요. ‘~라고 했다.’ 이런 자막 처리가 나오면 몰입해있는 감독님의 위치에서 한 발 떨어져 나오면서, 화면과 거리감을 확 줘버리는 급작스러운 온도차가 느껴졌거든요. 그런 방식으로 얻고자 하는 효과가 있으셨나요?
권아람: 각 요소들을 모아서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붙여나가는 방식은 맞지만 계속 질문은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이것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것이 당연히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저의 뜨거운 마음은 나레이션으로 드러났지만, 후세대 여성으로서 그 경험을 바라본다고 했을 때 또 너무 전형적인 위치는 얻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레이션의 주체가 없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것을 기억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후세대의 젊은 여성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주체를 흐트러트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라고 했다.’ 이런 부분도 비슷한 맥락이었던 것 같아요.
정지혜: 이제 관객 분들께 질문을 받아볼게요. 감상도 좋구요.
관객: 〈야광〉 감독님께 질문 드릴게요. 영화 자체가 크루징 스팟이 됐던 공간들을 보여주며 남성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고, 중간에 형식적으로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분해하는 과정이 있었잖아요. 그런 내용과 형식이 어떤 식으로 관계되는 건지 듣고 싶습니다.
임철민: 이 영화는 극장에 대한 관심, 그러니까 영화를 만들고 있는 입장에서 좋아하는 것이 상영되는 공간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것인데. 그런데 영화,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하면 빛이나 어둠 같은 것들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그것들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이 영화가 타이트한 구성과 완결된 형식을 가지고 출발한 건 아니었어요. 대략적인 시나리오도 있었고 어떻게 취재를 하고 공간을 다룰지, 이런 기획 정도는 있었지만요. 영화를 하면서 인터뷰를 하거나 공간을 직접 찾아갔을 때 들었던 생각이나 감각이 처음에 상상했던 것과는 되게 달라서 처음의 결처럼 영화를 만들 수가 없었어요. 처음에는 인터뷰 같은 것들을 활용하면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서 공간의 속성에 맞춰서 영화의 형식도 같이 가야 된다는 판단이 섰던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썼던 것도 스코어라는 방식으로 바꾸게 됐어요. 수행자나 스탭들이 좀 더 참여할 수 있도록 폭을 넓히는 방향으로. 과정을 드러내기로 판단한 것도 영화가 가지고 있고 다루고 있는 대상이나 속성하고도 연관되어 있고요. 영화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다가 그런 형식을 가지고 영화를 완성하게 된 것 같아요.
관객: 〈야광〉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영화에서 여자가 산 속에서 눈을 감고 있고 그 여자를 향해 빛을 비추는 장면이 있잖아요. 저는 그 장면을 볼 때 폭력적으로 느껴졌었는데요. 여자가 정물처럼 서 있고 그 주위를 남자들이 둘러싸고, 그게 영화를 보고 있는 여성 관객으로 이어지는 점에서 그러했는데, 저는 이 영화의 설명을 보고 오질 않아서 끝나고 나서야 남성 성소수자의 크루징 스팟에 대한 영화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이 영화에 여성 인물만 등장한다는 게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 부분에 대해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임철민: 처음 시나리오에는 남성 성소수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있었는데요. 그런 방식이 영화와 맞지 않다고 판단이 돼서 걷어내면서 그럼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스코어의 방식을 따르게 됐어요. 간략한 텍스트, 분명한 수행문도 있는 반면 한편으로 모호하고 시적인, 구멍이 난 것 같은 이미지나 텍스트가 함께 있는 스코어였어요. 결국 수행자의 몸을 통해서 그 공간을 읽어내는 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그러면 이걸 누가 수행할 것인지가 되게 중요해진 거예요. 저희는 영화를 만들 때 어떤 틈들을 만들어내고 그 틈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진행했어요. 말씀해주신 부분들도 그런 틈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어요. 처음 계획은 남성 성소수자를 재연한 인물들을 등장시키려고 했는데 영화의 성격이 바뀌면서 다시 고민하게 되었던 거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희가 영화를 펼치고 이런 기획, 이런 과정, 이런 맥락들로 영화를 진행하려고 한다고 주변에 오픈하자 이상하게 여성분들만 관심을 주셨어요. 그러면서 여성들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생기고, 남성 성소수자들의 공간을 다루는데 여성들이 주로 퍼포먼스를 수행하게 되는 상황에 대해 스탭들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어요. 저희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실제로 퍼포먼스를 하는 퍼포머 분도 있고, 아닌 분도 있고, 다양한 계기로 영화의 맥락과 맞닿아서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됐기 때문에 제가 어떤 한 가지로 재단하긴 조심스럽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는 결국 소수자성 같은 것들이 이 영화가 가진 맥락과 공명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이런 상황들이나 질문들을 만들어내는 게 더 중요하고, 어떤 게 퀴어한 선택인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이렇게 가는 것이 영화가 가진 방향성에 맞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요.
정지혜: 저희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번 기획은 역사적인 주체, 당사자성을 넘어서는 작업들에 초점을 맞춰 시작된 것입니다. 지난 인디다큐페스티발 포럼에서 다룬 4편의 작품을 보셨거나 이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혹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어떤 사건을 다루고자 한다면 창작자로서 고민을 해보셨을 것 같아요. 그런 맥락에서 오늘 섹션 주제에 대해서 마무리 말씀 부탁드립니다. 당사자성 너머의 역사, 그리고 그것을 재현하는 창작자들의 고민과 돌파 가능성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권아람: 되게 어려운 질문이네요. 일단 〈463 poem of the lost〉에 대해 생각해보면, 역사적인 다큐멘터리는 이미 끝나버린 시간이나 이미 사라진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항상 맞닥뜨리는 지점이 있어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제가 생각했을 때 역사적인 트라우마나 사건을 재현할 때는 영화 바깥의 시간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 작업을 하면서 태국에서 아주 짧은 촬영 기간을 가지면서 영화 맨 처음에 나왔던 463명의 명단, 그게 놓여져있는 내셔널 아카이브를 찾아갔어요. 그곳은 태국 군부에 의해 운영되는 국립 아카이브이고, 거기 들어가려면 카메라 같은 것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고 신분을 명확히 해야 했어요. 거기 들어가서 빨간 상자 위에 놓인, 바스라질 것 같은 종이 위에 잉크는 사라지고 압력으로만 남아있는 463명의 이름들을 봤어요. 그걸 보고, 만지고 하는 경험이 저한테는 이 작업을 완성하게끔 하는 중요한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내가 살아가면서 하는 고민과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기억, 트라우마들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주관적이고 순간적인 지점이기도 하지만, 영화 외적인 시간을 살면서 만나게 되는 강렬한 순간들이 있고, 그 순간들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다른 분들도 그런 강렬한 계기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임철민: 〈야광〉을 시작할 때 생각했던 중요한 지점과 지금 포럼의 주제가 맞닿아 있어요. 〈야광〉의 경우에는 제가 체험하지 않았던 공간이나 역사에 대해서 영화로 얘기를 해야 한다고 할 때 창작자의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방식, 어떤 것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거든요. 지금 역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보면 다양한 고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말씀하셨던 것처럼 다르기도 하고 비슷한 고민들을 하면서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정지혜: 마무리 말씀 한 마디씩 해주세요.
권아람: 다음 작품으로 70년대 여성 퀴어 공간에 대한 영화를 준비하고 있어요. 기대 많이 해주시고,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철민: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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