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달려온 여배우의 오늘
2018 으랏차차 독립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18년 2월 10일 오후 5시 30분 상영 후
참석 문소리 감독
진행 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지윤 님의 글입니다. (사진제공 신소영 님)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토요일 오후, 배우 문소리의 감독 데뷔작으로 화제가 되었던 <여배우는 오늘도>가 관객들과 다시 만났다. 상영이 끝난 후 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의 인사말로 시작된 인디토크에는 첫 연출작에서 배우로도 활약한 감독 문소리가 함께했다. 바깥의 날씨와는 상반된 따뜻한 분위기에서 부지런히 달려온 그녀의 수많은 오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이하 진행): 개봉 직후부터 동료 여배우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은 영화다. 여성들이 영화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하게 된 게 멋지고 기쁜 풍경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개적으로 나누었던 대화의 경험들은 어떻게 의미가 남았나?
문소리 감독(이하 감독): 많은 선배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아직까지도 그 내용들이 다이어리에 적혀있다. 다 갚지 못한 마음이다. 최근 영화계에 시끄러운 일들이 많지 않나. 미투 운동(#MeToo)도 있고. 나만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여배우들은 자주 모이지 않는다. 같이 작품을 하거나 미용실에서 오가면서 만나지만, 작품이 없으면 자주 만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내 영화를 도와주고자 많은 선배들이 와줘서 마음 안에 연결된 끈이 조금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진행: 극중 ‘문소리’를 연기하는 배우 문소리를 보는 기쁨이 있었고 그것을 연출하는 감독 문소리를 보는 기쁨이 있었다. 그것이 보는 사람과 문소리라는 배우의 거리를 좁혀주는 느낌이 들었다. 또 이후 관객들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며 그 거리의 폭이 조금 더 줄어든 것 같다. 감독님 스스로도 느끼고 있는지 궁금하다.
감독: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로 데뷔하고 임상수 감독님의 영화로 작품을 이어가면서 처음부터 친숙할 수 있는 배우가 아니었다.(웃음) 무겁고 힘든 작품들이 많았다. 시작이 그래서 그런지 좁혀지기가 어렵더라. 그런데 영화를 만들며 내가 나한테 거리를 두고 보았더니 그 거리만큼 관객들과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서 관객들과 더 많이 공감하게 된 것 같다.
진행: 독립영화계에 대해 구석구석 알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감독: 큰 영화로 데뷔를 했지만 단편영화나 저예산영화, 인권영화도 찍어서 개인적으로는 독립영화가 가까운 느낌이다. <박하사탕>(1999)과 <오아시스>(2002) 사이에 일곱 편의 단편영화를 찍었는데, 나한테는 그게 데뷔작만큼이나 중요한 경험이었다. 그 당시 함께 작업했던 분들이 다 독립영화인들이었고 그들에게 너무 많이 배웠다. 그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눴던 것들이 내 인생에서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낯설지가 않다. 마음이 많이 있었고 계속 인연이 있던 곳이라는 느낌이다. 그리고 배급을 하는 과정을 보며 독립영화의 배급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었다. 한국 영화 전체에서 배급의 독과점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서도 더 절실히 느끼게 된 것 같고 공부하는 지점도 많았다.
진행: 지금에서야 보이는 작품의 한계나 단점이 있다면?
감독: 처음부터 장편으로 개봉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만든 영화가 아니었다. 한편 한편의 단편으로 시작했고 문소리라는 사람의 삶으로 세 이야기가 엮여있다. 그렇게 시작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극장에 와서 보시는 관객들에게 부족한 점이 느껴질 수 있겠구나 싶다.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며 찍은 영화다. 학생들이 영화를 만드는 평균 제작비에 맞춰서 찍으려고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에 맞춰서. 장소도 많이 왔다 갔다 했다. 2막에서는 장소가 너무 많아 제작비가 많이 들었다. 그래서 3막에선 장소를 줄여도 보았다. 조명을 많이 못 썼던 것도 큰 화면에서 보면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진행: 다시 학생 문소리로 돌아간 경험이 어떤 용기, 혹은 자신감을 주었는지 궁금하다.
감독: 공부했던 시간들이 지나보면 참 좋은 것 같다. 그때는 ‘이 비싼 학비를 내고 지금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집에서 애는 울고 있는데.(웃음) 공부를 하는 것은 무언가를 회복하기 위한 내 나름대로의 시도였다. 어떠한 일로, 무엇이 무너져서 무엇을 회복하려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공부가 나한테 무언가를 줄 것 같다는 막연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 당시엔 그냥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교정이나 강의실에 있던 그 순간들은 굉장히 평화로운 순간들이었다. 10여년 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과정 속에서 잘 쉬지 못했다. 하루 집에서 쉬라고 하면 꼭 가구를 옮기거나 김치 냉장고 안의 모든 것들을 꺼내보며 일을 만든다.(웃음) 잘 못 쉬는 사람인데, 그렇게 달려왔던 것들이 갑자기 조용해진 그 순간이 좋았다. 그리고 조금 자존감이 흔들렸던 시기였던 것도 같은데, 공부가 굉장히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교수님들이 좋은 가르침들을 많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학원을 졸업했다고 해서 영화적으로 더 전문가가 되거나 더 아는 게 많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냥 계속 공부를 하는 과정인데,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그 방법에 조금 더 친숙해진 것 같다. 이걸 조금 더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 경험들이 나를 더 단단하게 해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영화가 아니어도 될 것 같다. 누구에게든 어떤 공부가 그런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진행: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여배우’라는 개념으로 축소시켜서 생각을 해보자면, 작품이 여배우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선언하고 있단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영화 작업 이후엔 여배우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정립하고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감독: 새로 정립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없었던 것 같다. 예전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조금 진지해 보이고 까다로운 여배우로 생각했다면, 영화 이후에는 영화 일을 하는 사람이나 같은 동료로 더 많이 봐주는 것 같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보면 내가 여배우이기 때문에 갖는 마음들, 받는 시선들, 처해지는 상황들이 거의 죽는 날까지 여전할 것도 같다. 영화의 관계를 더 다양하게 평설하면 조금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시간이 좀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진행: 지금 이 시점에서 영화인 문소리에게 영화란 어떤 의미인가?
감독: 영화하고 사는 거다, 그냥.(웃음) 가장 큰 숙제 같기도 하다. 매일 밤 고민하며 잠들고 고민을 시작하면서 눈을 뜰 정도로 그런 숙제들이 많다. 그런데 그 숙제들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스스로 하겠다고 한 것들이다. 그만큼 영화를 애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영화를 빼면 어떻게든 살아지겠지만, 굉장히 텅 빌 것 같다. 부부 사이도 멀어질 것 같고.(웃음) 학교에서 영화 연기를 가르치고 있기도 한데, 거기서 영화를 빼버리면 내가 학교에 있을 이유가 없어진다. 영화를 안 하면 재미없어서도 못 살겠지만, 삶의 이유가 없어질 것만 같다.
관객: 1막에서 홍상수 감독 영화의 느낌을 많이 받았다.
감독: 여러 감독님들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해외 영화제에서도 소주를 마시는 씬만 나오면 “아, 홍상수스러운 씬이었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한다. 1막 시나리오를 썼을 때, 여럿이 앉아 술을 마시는 씬이 나오니까 주변에서 ‘홍상수스럽지 않을까’하는 우려들을 했다. 그리고 촬영감독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찍었던 촬영감독이었다. 그 촬영감독에게 유일하게 주문한 것이 “홍상수 영화 같지 않게 해줘”였다.(웃음) 얼핏 보기에 술 마시는 분위기에서 홍상수 영화의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내 영화에서는 연애를 안 하지 않나.(웃음) 남자를 다시 만나 따로 2차를 가던가 해야 홍상수 감독 영화스러운 것이지 않겠나. 나는 딱 파하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집에 갔다.(웃음)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 세 가지 단편영화를 막(幕)별로 배치했는데, 그 순서에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감독: 1막에서는 바깥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여배우의 삶이 중요한 부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을 통해서 문소리라는 여배우를 보았다. 1막을 만들고 났더니 발만 살짝 담근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확 들어가서 다 젖으면 어때, 들어가서 어떤지 파헤치고 더 봐봐!’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2막에서는 그 사람의 삶으로 직접 더 들어가서 그녀가 겪는 직접적인 심경과 일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을 담아보려고 했다. 3막으로 가니 ‘이렇게 영화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이 사람이 결국 어디로 갈 것인가. 왜 이러고 사는가. 앞으로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들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장례식에 가 무언가를 보고, 겪고 나오는 이야기를 생각해낸 것 같다. 1막을 만들고 나서 2막을 만들고, 2막을 만들고 나서 3막을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그때마다 생각의 과정들이 있었던 것 같다.
관객: 감독으로서 다른 배우들에게 디렉팅을 하는 과정 중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는가?
감독: 제일 주안점을 뒀던 것은 ‘어떻게 하면 편하게 해줄까?’였다. 배우로서 오래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배우가 편하게 연기할 수 있을까, 지금 배우의 심경은 어떨까, 지금 배우는 뭘 해야 할까, 배우에게 뭐가 필요할까에 대한 답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거기에 맞춰주려 했다. 오랫동안 배우로 일해 왔기 때문에 연출을 할 때도 그렇게 머리가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관객: 세 개의 막에 모두 걸쳐 나오는 것이 불편한 사람과의 술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2차를 가자고 말한다. ‘2차’가 감독님에게 배우로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하다.
감독: 누가 2차를 가거나 3차를 가자 그러면 잘 거절하지 못한다. 그런 원래의 내 성격도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2차라는 것이 영화 안에서는 술자리지만, 우리는 계속 다음 영화를 찍어야 하고 다음 막을 살아야 한다. 인생이라는 것은 끝이 나지 않는다. 한 컷을 찍었으면 다음 컷을 찍어야 하지 않겠나.
관객: 자전적인 내용인데, 작품이 현실을 어느 정도까지 반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감독: 적당히 반영되어있다. 수많은 감독님들과 가졌던 술자리들이 있다. 그것이 다 모여서 하나의 씬으로 만들어진 거다. 실제로 영화 안에서와 똑같은 일이 있진 않았다. 그렇지만 그전에 있었던 수많은 비슷한 일들이 조각조각 영향을 미치고 들어간 부분이 있다. 그래서 현실이 얼마나 반영되어있는지 수치로는 계산할 수가 없다. 굉장히 혼재되어 있다. 많은 것들을 섞어서 만들어놓은 것이긴 하지만, 만들어놓았다고 해서 허구라 생각하진 않는다. 기억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허구가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있지 않나, 확신을 못하겠는. 지금은 <여배우는 오늘도>를 많이 봐서 그 장면들을 내가 실제로 겪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살면서 팩트는 정확하지 않더라도 그때의 느낌과 감정, 생각은 명확히 기억나지 않나. 그것들을 담아내려 했다.
관객: 영화감독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감독: 배우도 굉장히 창의적인 직업이라 생각하는데, 감독이 해내야 하는 창의적인 어떤 것은 정말 차원이 다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책임감이 배우가 연기를 하며 느끼는 책임감과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서 감독이라는 것이 부담스러운 직업이고 힘든 직업이라고 많이 느꼈다. 감독만 한 게 아니라 배우까지 같이 해서 어려운 지점들이 있었다. 무엇을 먼저해야 하는지 순서도 모르겠는 경우가 있었고, 어떤 태도로 하고 있는지 헷갈리기도 했다. 바로 오케이를 못 내리고 다시 모니터 앞으로 돌아와 확인을 해야 하니 시간이 걸리는 점도 어려웠다. 둘을 병행해서 어려웠던 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진행: 마지막으로 관객 여러분들께 끝인사 부탁드린다.
감독: 영화를 보러 와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2018년도 힘차게 달리길 바란다. 작년에 너무 달려서 올해는 신발 끈 좀 묶고 재정비를 해야되나 하는 생각도 든다.(웃음) 좋은 영화로 또 찾아 뵙겠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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