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긍정을 뒤덮는 혐오의 공기를 향한 분노와 근심
2018 으랏차차 독립영화 <불온한 당신>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18년 2월 10일 오후 2시 30분 상영 후
참석 이영 감독
진행 차한비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차장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범수 님의 글입니다.
이름이 없었다고 해서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성소수자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기에 자신들의 삶을 꿋꿋이 지켜 왔던 ‘바지씨’와 ‘치마씨’들이 혐오와 차별이 유행병처럼 번지는 21세기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바지씨로 평생을 살아온 일흔 살 이묵 씨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불온한 당신> 인디토크에 차한비 한국독립영화 사무차장(이하 차한비)과 이영 감독(이하 이영)이 함께 했다.
차한비 : 지난 2017년에 개봉해서 여름 내내 관객들과 뜨겁게 만난 작품이다. 개봉 끝나고 나서도 여러 자리에서 관객들을 만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스크린 상영은 오랜만일 듯 하다. 관련해서 소감을 여쭙고 싶다.
이영 : 올해 들어 첫 상영이자 첫 GV다. 굉장히 오랜만이라 떨리기도 하고 기대도 되는데, 영화를 어떻게 보셨는지 의견 많이 나눠주시면 좋겠다.
차한비 : 토요일 점심 상영인데도 많은 관객 분들이 와주셔서 기쁘다. 서두를 여는 이야기로 무겁겠지만 박근혜 정권이 기획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문화체육부, 영화진흥위원회, 국가정보원이 합심해서 문화예술인들을 조직적으로 검열한 사건인데 <불온한 당신>처럼 사회 참여적 성격을 가진 다큐멘터리가 국가 지원 제도에서 심사 탈락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 탄압 속에서도 <불온한 당신>을 기획하고 만든 특별한 계기가 있나.
이영 : 영화를 처음 기획한 보수 정권 시기에는 공공연한 종북몰이가 있었고 ‘종북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성소수자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적대와 공포를 이용하는 증오의 정치가 판치는 상황이 위태롭다고 느꼈다. 이럴 수록 사회적 약자를 향한 공격이 먼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상황을 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기획하게 되었다. 영화를 보면 촬영을 못하게 공격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 외에도 간단치만은 않은 과정들이 더 있었다. 상영을 하지 말라는 협박과 함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이 자신을 혐오주의자처럼 보이게 편집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정부 차원의 검열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차한비 : 영화 구성에서부터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특별히 공을 들였던 부분은?
이영 : 이 영화는 결국 삶과 존재를 지우려고 하는 사람들에 맞서 삶과 존재를 선언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혐오를 선동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곧 삶을 반대하는 논리라고 생각했고,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존엄함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하려고 했다. 이야기를 만들면서 구사한 전략 같은 것을 설명한다면, 이묵 선배와 나의 이야기가 나온 뒤 성소수자들을 공격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의 폭력적인 이야기가 연결된다. 성소수자와 사회적 소수자의 입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도의 연출이다. 혐오 선동 세력은 풀샷과 군중샷을 위주로, 존재와 삶을 선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클로즈업을 위주로 풀어나갔다. 혐오 세력을 풀샷으로 주로 담은 것은 개개인의 책임 이전에 혐오의 논리와 구조를 봐주셨으면 하는 의미였다.
관객 : 이묵이라는 인물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다. 여러 바지씨들을 인터뷰하고 나서 이묵이라는 인물을 고른 건지, 아니면 이묵이라는 인물을 우연히 알게 되어서 찍은 것인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이묵이 면도를 하는 클로즈업샷에서 진짜 수염이 보인다. 여성들은 보통 면도를 매일 하지 않는데 면도를 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준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리고 영화에 나오지 않은 이묵의 이야기 중 흥미로운 게 있다면?
이영 : 전작이 10대 레즈비언들의 커밍아웃을 다룬 <이반 검열>인데, 영화에 나왔던 10대 친구들이 나를 보고 30대도 레즈비언이 있냐고 물어 보더라. 그 때 든 생각이 선배들은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거의 10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오십 명이 넘는 선배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이묵 선배님과의 첫 만남은 2009년 4월이었다. 영화를 찍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좋다고 하셨다. 성소수자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하셨다. 칠십 평생을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같은) 언어도 명칭도 없는 상황 속에서 주변의 부정적인 시선을 이겨내며 살아 오신 분이다. 젠더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움과 매력에 감화되어 이야기에 담기로 했다. 면도와 관련해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연출할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한다. 수염이 짧게 많이 나셔서 매일 면도를 하시는데,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이 중요했기에 영화를 위해 수염을 일부러 길러달라고 말씀을 드리지는 않았다. 퍼포먼스도 아니고 호르몬 치료와도 관련이 없다.
관객 : 영화를 보면서 블랙 코미디처럼 느껴지는 지점이 있어서 많이 웃었다. 세 명이 손을 마주 잡고 ‘예수 만세’라고 외치는 장면 등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냥 웃게 되는 장면이 많지 않았나. 웃기고 발랄한 느낌이 들도록 편집을 한 것인가?
이영 : 한국 사회가 변하는 것처럼 관객의 위치도 변하는 것 같다. 영화를 처음 완성했을 때는 처참한 마음으로 마무리를 지었고 당시의 관객 분들도 고통스러워 했다. 사회적 혐오가 사회적 공기가 되어가는, 그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참담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실소가 나온다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지가 믿겨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광장에서 성소수자를 비롯해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폭력이 자행되는 상황이 과연 허용되는 것이 옳은 가에 대한 질문이 영화에 담겼고 혐오 세력들의 공격은 성소수자들 뿐만 아니라 인권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과 일반 시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성소수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인권 조례를 폐기시키고, 이제는 여성가족부 장관이 혐오 선동 세력들에게 동조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결국 인권과 민주주의를 훼손시키는 행위라는 말을 하고 싶다.
관객 : 선배라는 호칭을 붙이는 이유가 궁금하다. 커뮤니티 내부에서 모두 서로를 선후배라고 부르는가? 그리고 퀴어 퍼레이드에 대해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사람들의 반감을 일으키는 선정적인 춤이 어떤 의미가 있는 행동인 지에 대한 것이었다. 또 개인적으로 혐오담론을 접하면서 공포감을 느끼고 있는데, 감독님은 혐오가 유발하는 공포나 두려움에 어떻게 대처하는 지가 궁금하다.
이영 :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평등을 지향하기 때문에 나이를 앞세운 권위와 위계가 허용되지 않는다. 다만 선배님이 포함된 바지씨 커뮤니티 안에서는 나이 순으로 선배, 후배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레즈비언 같은 낯선 용어를 쓰기 보다는 선배님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설명을 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선배님도 나를 "후배 왔는가"라고 말씀하시면서 맞아 주셨고, 그 삶에 대한 존중의 의미를 담아 선배라는 호칭을 쓴 것이다.
퀴어 퍼레이드의 선정적인 춤이나 복장은 일종의 파티복 같은 개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퀴어 퍼레이드는 성소수자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여서 ‘우리가 이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외치는 자리이자 다양성이라는 가치에 동의하고 또 널리 퍼지길 원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걷는 자리다. 퀴어 퍼레이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옷차림을 핑계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물총 축제 참가자들은 옷을 벗더라도 공격을 당하지 않는다. 다양한 가치를 외치는 목소리에 좀 더 귀 기울여 주셨으면 한다.
관객 : 혐오 발언을 하는 사람을 혐오하는 것도 또 다른 혐오 발언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버이 연합과 같은 사람들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어떤 생각을 하는 지는 우리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혐오 표현이라는 개념은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영 : 혐오를 선동하는 사람들을,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느낀 감정은 혐오보다는 분노에 가깝다. 저런 일이 자행되는 게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분노인 셈이다. 혐오는 으레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보다는 사회적 약자들을 멸시하고 그들에게 모멸감을 안기는 행동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열등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을 향한 공격, 그리고 기득권과 주류 가치관을 공격하는 것은 그래서 다르다. 혐오의 감정을 혼자 품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것을 글과 말을 빌어 외부로 표출할 때는 폭력이 된다. 성소수자를 향한 공격과 혐오가 허용되는 현실에 분노하는 건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함께 목소리를 높여주시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차한비 : 마무리를 해야 할 시간 같다. ‘여성영상집단 움’은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처럼 사회의 비가시화된 존재들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다음 작품에 대한 계획을 짧게 듣고 싶다.
이영 : <해고록>이라는 가제를 가진, 30년이 넘게 복직투쟁을 벌이는 두 여성 노동자 이야기에 프로듀서로 참여한다. 연출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여성영상집단 움을 가능한 빨리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다. 블랙리스트를 비롯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인디스페이스 같은 공간을 통해 많은 관객 분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불온한 당신>의 분노 너머에는 소수자들을 향한 혐오가 소수자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자각하는 근심 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사회의 불신과 갈등을 조장하는 혐오 발언이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뿌리째 흔드는 것을 경계하는 시선. 그 시선이 사각지대에서 소외 받는 사람들을 더 많이 향하는 만큼 우리 사회의 신뢰는 더 굳건해 지지 않을까. <불온한 당신>이 더 많은 관객과 만나기를 바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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