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여성캐릭터 잡지 [세컨드 필름 매거진] 인터뷰
- 입체적인 여성캐릭터의 부재와 그 현상의 의미를 짚어보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위정연 님의 글입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다양한 즐거움을 준다. 그 중 단연코 빠져서는 안 될 즐거움은 바로 ‘매력적인 캐릭터’다. 때로는 영화 속 이야기보다 캐릭터가 더 흥미진진한 경우가 있다. 언젠가 영화관 밖을 나서며 매혹적인 등장인물에 앓아 본 경험, 다들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들이 기억하는 캐릭터는 대부분 ‘남성’이지 않은가? 왜 그 수많은 캐릭터 중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는 단박에 떠오르지 않는 걸까. 이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모두가 알고 있지만 마주하기 꺼려하는 불편한 진실일까.
영화 속 여성캐릭터가 등장하는 방식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모인 사람들이 있다. 보다 많은 이들과 문제를 공유하기 위해 잡지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세컨드 필름 매거진(Second Film Magazine)]이다. 6명의 필진과 1명의 디자이너로 구성된 [세컨드 필름 매거진]은 이번 달 ‘vol.1 납작한 여자’ 호로 사람들에게 처음 이름을 알렸다. 오늘은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만 생각해왔던 영화 속 여성인물들의 위치와 현실에 대해 토론해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된 이번 기사는 6명의 필진 중 ‘박지윤 필진(에디터 12)’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SECOND FILM MAGAZINE
Q. ‘퍼스트’가 아닌 ‘세컨드’를 주목하셨다는 점이 궁금해요. 어떤 의미에서 ‘세컨드’인가요?
A. 저희 잡지 문구에 ‘세컨드는 퍼스트가 아닌 것들을 다룹니다’라고 적혀있어요. 지금까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것들을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여성 캐릭터들은 지금껏 단편적으로 소비되어 왔었고, 늘 퍼스트가 아닌 세컨드의 위치에 있었잖아요. 지금껏 세컨드의 위치에 있었던 여성 캐릭터를 중점적으로 다루어 보자는 목적에서 ‘세컨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해하실 수가 있는 게, ‘세컨드’라는 이름 때문에 여성이 남성의 2류가 아니냐는 판단을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저희가 생각했을 때는 단순히 ‘퍼스트와 세컨드’ 또는 ‘주류와 비주류’로 구분 짓는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봤어요. 세컨드라고 해서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변 인물들의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의미입니다.
Q. 이번 창간호의 제목이 ‘납작한 여자’입니다. 이 의미도 세컨드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A. 저희가 ‘납작한 여자’라고 했던 것은 세상에는 다양한 여성이 있음에도 그것을 단면적인 여성캐릭터로만 만드는 것을 비판하자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여성의 신체가 볼륨감 있게 스크린에 전시가 되잖아요. 그런데 정작 여성의 성격은 어떤 욕망도 실존적인 고민도 없이 그저 납작하게만 표현되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Q. 잡지에 필진들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에디터 넘버로 나오는데요,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A. 저희가 이름 대신 숫자를 쓰는 것은 스포츠 운동선수들 등판에 숫자를 매기는 모습을 보고 결정한 거예요. 그들이 ‘프로’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저희도 ‘프로 정신’으로 임하자는 마음으로 이름 대신 에디터 넘버로 결정했습니다. 또 저희는 편집장이 없고 전부다 수평적인 관계예요. 각 개인을 모두 다 존중하자는 저희 잡지의 의도와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도 있어요.
소비되는 여성캐릭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다
Q. 각 에디터 분들이 모여서 처음에 잡지를 만들자고 결정하게 된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A. 사실 1년 전에 연출을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만든 스터디 모임이었어요. 처음엔 막연히 시나리오 연구로 출발했다가 캐릭터 공부도 하게 되었어요. 영화에서는 캐릭터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왜 매력적인 남성캐릭터는 많은데, 여성에게는 (그런 역할이) 많이 주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재 영화판에서는 매력적인 여성캐릭터에 대한 기근을 느끼고 있죠, 이런 것들을 공론화시켜보고자 만들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담론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저의 개인적인 희망은 한국에도 <아멜리에>(2001)와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많이 나왔으면 하는 것입니다.
Q. 참 아이러니한 게 <아멜리에>는 무려 15년 전 영화잖아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매력적인 여성캐릭터를 많이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네요.
A. 네, 그나마 등장하는 여성캐릭터들 중에서도 성적 대상화가 제일 많이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신세계>(2012)의 ‘신우’(송지효 분)나 <달콤한 인생>(2005)의 ‘희수’(신민아 분)를 보면 특별한 역할도 없이 도구적으로 잠깐 나오잖아요. 그 캐릭터의 욕망도 나타나지 않고 자기 서사도 볼 수가 없어요. 대부분의 히어로물에 등장하는 여성캐릭터처럼 성적인 매력만이 주로 어필되죠. 또 나이가 많거나 뚱뚱한 여자는 웃긴 조연 캐릭터로만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Q. 하지만 외적인 매력이 떨어지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관객 유치가 힘들 것이라는 영화 제작자의 입장도 분명히 고려해봐야 할 텐데, 그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A. 저희가 조사를 하다가 1인 영화 관람객에 관한 연구를 보았는데요. 그 결과를 보니, 생각보다 1인 관객들은 다양성 영화를 많이 찾으시더라고요. 또 그분들이 만족스럽다고 답했던 영화들에는 여성 주인공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희가 내린 결론은, 관객들은 단지 예쁜 외모의 여성캐릭터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여성캐릭터들이 충분히 많이 나오기를 원한다고 봤어요. 예쁘지 않은 여성캐릭터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많은 관객이 배우의 외적인 매력보다는 인간적인 매력을 더 원한다고 보거든요.
Q. 최근 <글로리데이>(2015), <수색역>(2016), <족구왕>(2013) 등의 청춘물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거의 모든 청춘영화의 주인공은 다 남성이죠. 왜 여성캐릭터가 등장하는 청춘물은 잘 볼 수 없는 걸까요?
A. 저희도 그런 고민을 했었는데요. 최근에 나온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를 보면서 ‘왜 한국에는 이런 멋진 언니들이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는 여성들의 버디영화가 많이 없잖아요. 투자자들의 인터뷰를 봤는데, 그들은 관객 중 여성의 비율이 높아서 남성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더 많이 만든다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저희가 아까 말씀 드린 연구처럼 여성 관객들도 충분히 다양한 여성캐릭터를 원하고 있다고 봅니다.
Q. 잡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바라봤던 여성캐릭터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있으셨나요?
A. 앨리슨 백델이라는 미국의 만화가가 만든 ‘백델 테스트’라고 혹시 들어보셨나요? 이 테스트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 번째가 영화 속에 여성캐릭터가 최소 두 사람이 나온다. 두 번째, 여성캐릭터 두 명이 대화를 나눈다. 세 번째, 남자 얘기 말고 다른 얘기를 한다. 이런 조건이 있어요. 이 조건을 통과한 영화(2015년 기준)가 정말 적어서 놀랐어요. 결국 여성캐릭터가 자기 서사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테스트인데, 그 결과들을 보면 그만큼 여성캐릭터가 주체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부정적인 결과를 보고 낙담만 하지 않고 그 사이에서 고민을 갖고 좋은 방향 쪽으로 캐릭터를 발굴해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박지윤 필진(에디터12)이 뽑은 영화 속 여성캐릭터
Q.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츰 두각을 드러내는 여성캐릭터들이 보이잖아요. 최근에 보신 영화 중에 어떤 캐릭터가 입체적이었나요?
A. <스틸 플라워>(2015)의 ‘하담’, <리코더 시험>(2011)의 ‘은희’ 그리고 <콩나물>(2013)의 ‘보리’가 입체적으로 그려진 캐릭터 같아요. 특히 <스틸 플라워>에서는 하담이 처해있는 상황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잘 그려졌잖아요. 혼자 세상에 버려진 아이인데,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하담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 인상 깊었어요.
Q. 이번 호에 <스틸 플라워>의 박석영 감독 인터뷰가 실리는데요, 홈페이지에 적혀있는 글 중에 감독과의 인터뷰가 감동적이었다는 글을 봤어요. 어떤 부분이 기억에 남으셨어요?
A. 인터뷰를 하고 나서, 감독님이 인간을 정말 사랑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출 청소년은 약자잖아요. 그런데 약자를 그릴 때 그들이 처한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마냥 자극적인 장면을 많이 쓰는 건 비윤리적이라고 보시더라고요. 그 시선이 때로는 위험할 수 있고, 인물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인거예요. 하담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클로즈업이 아닌 풀샷으로 끝냈는데, 캐릭터가 내면적으로 깊은 연기를 할 때는 클로즈업으로 찍으면 안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하셨어요. 인물이 우는 장면을 가까이서 찍을 자격이 카메라한테는 없을 수 있다고 보신 것 같아요. 그 말씀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Q. 감독님이 하담을 ‘납작한 여자’가 아닌 입체적인 여자로 그리신 것 같아요.
A. 네. 그리고 하담이 마지막까지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인물은 어쨌든 현실 속 사람의 모습을 재현한 거잖아요. 그런데 대부분 영화 속 캐릭터들을 보면 딱히 주변인물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특히 여성캐릭터에서요. 아무래도 감독이 인물들을 그릴 때 고민을 깊이 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데, 연출자는 캐릭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야 될 것 같아요.
Q. <리코더 시험>과 <콩나물>도 언급하셨는데요, <리코더시험>의 은희는 <콩나물>의 보리처럼 적극적이지도 않고 소심한 성격인데, 어떤 면에서 은희를 입체적으로 보셨나요?
A. 은희는 부모님께 사랑받고 싶어 하는 아이로 나와요. 영화 속에서 부모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리코더 시험을 잘 보고 싶어 하는 아이의 욕망이 잘 표현된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생각했을 땐,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해서 꼭 그 인물이 적극적인 성격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각각 처해있는 현실 속에서 캐릭터의 욕망과 서사가 얼마나 다양하게 잘 드러나는지가 중요하다고 봐요.
Q. 은희와 보리 둘 다 아역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어요. 아역은 항상 약하고 보살핌을 받는 존재로 나오는데, 이 두 인물은 그런 아역의 편견을 깬다는 지점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 것 같아요.
A. 네. 사실 아역 자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도 많이 없잖아요. 독립영화이기 때문에 더 자유롭게 표현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Q. 혹시 더 추천하고 싶으신 영화가 있으신가요?
A.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2014)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았던 <토끼의 뿔>(2015)이요. 이 두 영화는 아역이 전체 서사를 이끌어가요. 그 점이 참 좋았어요. 그리고 <콩나물>을 만드신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도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
Q. 그런 영화들을 더 많이 보기 위해서는 여성 그리고 여성캐릭터에 대한 의식 개선이 확실히 더 필요한데요, 이런 상황 속에서 여성 본인들은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보시나요?
A. 발언을 많이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얼마 전에 칸영화제에서 줄리아 로버츠 배우가 하이힐을 벗고 레드카펫에 선 사진을 봤어요. 이처럼 움츠러들지만 말고 소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외국에 비해 한국은 아직 그런 적극적인 행동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할리우드에서는 엠마 왓슨이나 제니퍼 로렌스, 베네딕트 컴버배치 배우가 운동을 활발하게 앞서서 하잖아요. 영향력 있는 배우가 먼저 나서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그렇게 계속 언급을 하면서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는 게 중요하죠. 물론 한국에서도 옛날에 비해서 그런 발언들이 늘긴 했지만, 그러면서 또 혐오도 같이 늘고 있죠. 지금까지 당연시 되었던 권력 구조가 바뀌려니까 혐오가 많아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발언을 하고 세상에 알리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Q. [세컨드 필름 매거진]을 통해 최종적으로 본인이 원하는 목표가 있나요?
A.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원래 연출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었어요. 저 또한 시나리오 몇 편을 썼는데 그동안 캐릭터에 대해 나이브했던 제 자신을 바라보며 반성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시나리오를 쓸 때 무의식적으로 조연인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다루기도 했었고요. 잡지를 준비하면서, 캐릭터와 인간의 복합성에 대해 많이 깨달았어요. 앞으로 시나리오를 쓸 땐 만들고자하는 인물에 대해 마치 다큐멘터리를 다루듯 심층적으로 탐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저희가 나중에 좋은 감독이 되어서 영화를 잘 개봉하는, 그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웃음)
* [세컨드 필름 매거진] 홈페이지 >> http://secondfilmmagazine.wix.com/secondfm
여성캐릭터에게 씌워진 설정은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져버린 이 편향된 구조를, 이제는 우리가 먼저 깨부수고 나올 필요가 있다. 앞으로 다층적인 여성캐릭터가 많이 등장해서 더 풍부하고 다양한 영화가 생겨나기를 바라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떠올렸을 때 그 캐릭터들의 성별이 비교적 동등한 날이 오기를 바란다. 나아가, 누구도 차별당하지 않고 서로가 존중받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바라본다. 주체적인 여성을 꿈꾸는 [세컨드 필름 매거진]의 행보를 응원하며 우리도 그 길에 함께 동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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