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툼> 인디토크 (GV)
일시: 2014년 6월 25일
참석: 구자환 감독
진행: 이현희 인디스페이스 프로그래머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윤상 님이 작성한 글입니다 :D
6월 25일 저녁 인디스페이스에선 한 달에 한번 돌베개 출판사와 함께 진행하는 <돌베개 책씨 상영회>가 있었다. 6월 25일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절대 잊혀 질 수 없는 날이다. 이날 상영된 <레드 툼>은 ‘빨갱이 무덤’, 말 그대로 좌익을 지지한다는 명분으로 정치 이념과 관계없는 무고한 국민들이 국가에 의해 처참히 학살당한 ‘국민보도연맹사건’에 관한 영화이다. 감독은 그저 묵묵히 어떤 이념도 존재하지 않던 ‘빨갱이 무덤’과, 돌아오지 않는 그들을 평생 가슴속에만 담아두어야 했던 사람들을 어떠한 과장도 포장도 없이 화면 속에 담아냈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이념분쟁과 전쟁의 끔찍하고 추악한 상처들은 아직도 우리 사회 속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영화가 끝난 직후 조금은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로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되었다. 모든 관객들이 이런 뜻 깊은 영화를 만들어주신 감독님께 진심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질문을 이어갔다.
감독: <레드 툼>을 제작한 구자환이라고 합니다. 이 영화를 제가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날 꼭 상영을 하고 싶었거든요. 상영을 해 주겠다는 곳이 없어서 실망하고 있었는데, 돌베개 출판사에서 이렇게 상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진행: 오늘이 6월 25일입니다. 사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6월 25일의 의미를 크게 염두 해 두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 <레드 툼>을 보면서 ‘그동안 정말 관심이 부족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어요. 먼저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은 감독님께서는 어떻게 보도연맹사건을 다룬 영화를 만들고자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감독: 사실 학교 다닐 때는 민간인이 한국전쟁 때 학살됐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못했어요. 더군다나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어 자체도 전혀 듣지를 못했었죠. 기자생활을 하던 어느 날 어디서 유골이 나왔다고 해서 단순히 취재를 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취재를 하다 보니 주민 분들한테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굉장히 많이 듣게 됐어요. 그중 하나가 그 동네에 조그만 계곡이 있는데, 여름철이 되면 사람들이 많이 피서를 온다고 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 계곡이 당시 핏물로 변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논다.”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단지 그 마을 주민들만 자기들끼리 쉬쉬하면서 자기 자식들에게도 전해주지 않았던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알려야겠다는 차원에서 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행: 2004년도의 인터뷰가 들어가 있으니 거의 10년에 걸쳐 제작된 영화인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 영화가 원래 긴 호흡을 가지고 제작되긴 하지만 짧은 기간은 아니잖아요. 10년이라는 기간이 걸리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점이 어떤 것이었나요? 혹은 10년이나 걸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까요?
감독: 10년까지 촬영을 할 생각은 아니었고요. 그 중간쯤에 마무리 하려고 했는데 이 영화만큼은 의욕이 강해서 잘 만들고 싶었어요. 카메라도 좀 여러 대 놓고 다양한 풍경장면도 찍고 세밀하게 인터뷰도 따려고 했는데, 제작비 마련을 못하고 차일피일 시간이 흘러가게 됐었죠. 그러다 2년 전 쯤 우연찮게 지역에서 보도연맹 관련뿐만 아니라 미군에 관련된 학살 장소에 대한 조사연구에 참여를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 ‘이것을 바탕으로 제작을 하면 되겠다’하며 덤벼들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그 당시 사건들을 기억하고 계신 분들이 너무나 많이 돌아가신 거예요. 그때 충격을 받고 ‘더 이상 미루면 사람은 없고 장소만 남겠구나’싶어서 부랴부랴 서둘러 제작을 끝내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한 10년이 걸렸네요.
진행: 지금은 더 많은 분들이 역사적 진실을 가슴에 한처럼 묻고 가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영화는 거의 인터뷰만으로 이루어 졌고 보도연맹에 대한 설명은 간략하게 나오는데, 저는 더 궁금했던 것이 이 사건에 대해서 국가적인 배상이나 이후 움직임, 그리고 현재 어떻게 이 사건이 국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독: 일단은 최근 유족 분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 노무현 정부 당시엔 ‘진실 화해 위원회’가 만들어져 국민보도연맹사건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과거사에 대해 조사 작업이 있었어요. 그때는 만족스럽진 않아도 어느 정도 일정 부분은 진행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당시 조사 활동 기간이 만료된 ‘진실 화해 위원회’가 유족 분들과 연구 담당자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기간이 연장되지 못했어요. 그러면서 또 정권이 바뀌고 이제는 여지껏 파악했던 내용들까지 부인을 하며 “과거 좌파정부에서 이루어진 조사이기 때문에 재조사를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유족 분들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과거 빨갱이로 몰려 죽었기 때문에 연좌제로 그 후손까지 아무리 공부를 잘한다 한들 공직에 진출을 할 수 없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이 분들의 입장에선 살아남기 위해 결국 권력과 경제력을 쥐 사람들에게 빌붙어야 했죠. 그러다보니 자녀분들은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건 알지만 얼마만큼 처참하게 돌아가셨는지는 잘 몰라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국민보도연맹사건이 어떻게 일어났고 자신의 아버지는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있는 겁니다. 그러는 동안에 또 다른 2차 피해, 자신들도 빨갱이로 몰릴게 될까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셨어요.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보상 문제가 나오니까 다시 얼굴을 들고 나오신 분들도 더러 있긴 하지만, 그분들 자체가 일단 국민보도연맹사건 자체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국가가 해결해줘야 할 부분이 어떤 것이라고 정확하게 얘기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런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갈수록 해결이 더 어려워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진행: 사실 국가 폭력에 의해서 자행된 양민학살 임에도 불구하고 판결을 다시금 뒤집으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하니, 이 영화를 많은 분들이 함께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관객 분들도 궁금한 것 있으시면 손들고 질문해주시기 바랍니다.
관객: 인터뷰가 주로 경남지방에서 이루어 졌는데 경남지방에서 학살이 더 많이 이루어졌던 건지 궁금하고요. 마지막 쯤 할머니께서 다시 숨어 살아야 하는 시대가 올까 걱정하셨는데, 영화가 만들어지고 나서 그분들이 보셨는지, 보셨다면 반응이 어땠는지도 알 수 있을까요?
감독: 처음 제가 기획할 때는 전국적으로 다루려고 했지만, 결국 제작비 문제로 포기하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보도연맹으로 인한 희생자가 가장 많은 곳이 경북과 경남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오늘 보셨던 학살지는 경남 지역의 학살지 중 채 10%도 되지 않을 겁니다.
진행: 그럼 혹시 경남지역에서 유독 희생자가 많았던 이유가 있나요?
감독: 국민보도연맹사건의 특징이 한국전쟁시기에 일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전쟁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시는데 실제적으로 보면 전쟁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전투와는 전혀 관련이 없이 일어난 일이에요.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나서 15~30일 사이에 이분들이 학살을 당하게 되는데 아까 할머니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인민군이 점령하기 이전에 국민보도연맹들을 예비구속 하고 학살을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정확하게 보면 그 피해자들은 전쟁과 관련 없이 오직 이념 문제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가셨던 분들인 겁니다.
마지막에 나오신 할머니는 굉장히 겁을 많이 내셨어요. 같이 갔던 선배와 설득을 많이 했는데, 촬영하는 당시까지만 해도 딸에게 제 이야기를 못하고 계셨더라고요. 그런 분들께는 옛날의 그 끔찍했던 기억들을 되새겨드리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습니다. 영화 완성 후 한번은 시사회 형태로 진행했었는데 지역에서 유족 분들이 많이 오셨어요. “우리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다 담아줘서 고맙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관객: 감독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피해자의 진술을 담는다는 게 참 어려운 일 일 것 같은데 감독님의 노력이 영화 속에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시기상으로도 제주 4.3사건을 정당화하는 총리내정자가 등장한 이 시기에 이런 영화가 나오게 된 건 참 뜻 깊은 일 인 것 같습니다. 배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기록 관리차원에서 국가나 다른 공공기관에서 보도연맹학살에 관한 기록물 보존 문제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영화 중간 중간에 보면 학살 장소를 임시방편 식인 푯말을 세워둔 것들이 보였는데 아직까지도 그렇게 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진술을 주로 담으셨는데, 가해자의 진술을 담으려는 시도는 없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감독: 제가 첫 장면의 자막에 희생자를 최소 20만에서 최대 43만 명으로 기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어떤 분들은 20만이라 하고 어떤 분들은 43만까지 이야기를 해요. 국민보도연맹에 관한 사건 만큼은 1960년대 국회에서 조사했던 그 내용 외에 더 이상 조사된 게 없습니다. 그리고 영화에 나오지 않았지만 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키고 박정희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국민보도연맹 유족회를 군사 법으로 회부하는 일이었어요. 때로는 사형을 선고 받기도 하고 무기징역을 선고 받기도 했는데,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박정희 정권이 당시 발굴된 유골들, 그리고 각자 마을에 조사해 놓았던 기록들 까지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록이 없어요.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구전이죠.
그리고 학살 현장에 말뚝 정도로 밖에 할 수 없었느냐고 하셨는데, 지금도 그렇게 방치되어 있습니다. 단지 말뚝을 박아놓은 곳에 GPS측정을 하여 위성표시를 해놓았거든요. 그래서 찾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 이후 경상남도가 했던 일이 그 지역에 푯말로 ‘이곳이 한국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지입니다’라고 붙여놓은 정도고, 아직 발굴은 하지 못하고 있죠.
그리고 가해자를 딱 한사람 찾았어요.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서 정말 찾기 어려웠는데, 진주에서 제가 테이프 세 개 정도를 날리면서까지 끈질긴 인터뷰 시도를 했었죠. 그런데 다른 이야기는 하면서 그 얘기는 끝끝내 하지 않더라고요. 그 당시 전반적 상황들을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중요한 증언이면 영화에 포함시킬까 했지만, 오히려 의구심을 증폭시킬 것 같아서 결국 제외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만나게 된 다른 한분은 당시 교도관을 했던 분인데, 그분은 그 당시 교도소에 와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서북청년단이나 특무대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 이야기 많이 하셨는데, 이후에 자기 인터뷰를 빼달라고 요구하셨어요. 정권이 바뀌니 불안 하셨던 거죠. 그런 사정들이 있었습니다.
진행: 기록으로써 충분히 보존되진 못했지만, 이 영화가 구술사 자료로 남게 되겠죠. 감독님이 인터뷰하신 방대한 분량들이 혹시 어느 정도 될까요?
감독: 10년 동안 며칠을 촬영 했나 헤아려 봤는데 86일이더라고요. 제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제일 먼저 했던 일이 프리뷰 단계를 거치는 것이었거든요. 영상을 틀어놓고 매 타임라인 시간대마다 나오는 오디오와 장면들, 그리고 누구인지 모두 기록을 해요. 그렇게 쭉 해봤는데 A4용지 10포인트로 두꺼운 책만큼 나오더라고요. 그 중 제가 간추려서 이야기를 끌어내 만든 것이 지금 보신 <레드 툼>입니다.
관객: 영상에 나오신 분들을 보면 학살당하신 분들 자체가 빨갱이로 몰렸기 때문에 자기 자식들 이라든지 혹은 자신이 빨갱이로 몰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 60년 동안 마음속에 한으로 품고 살아가셨다고 했는데, 그런 분들을 어떻게 찾아내서 인터뷰를 받으셨고 어떻게 설득을 하셨는지 궁급합니다.
감독: 매번 영화제마다 이 질문을 꼭 하시던데요. 사실 인터뷰가 굉장히 힘들었거든요. 좀 세상이 좋아져서 ‘내가 이렇게 일을 당했다’고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였으면 좋았을 텐데, 2004년도까지만 해도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사람들이 굉장히 겁을 냈어요.
저분들을 찾아낸 건 시골마을의 노인회관에서 이야기를 하면 아는 척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조금 더 물어보면 더 이상 말을 안 하시더라고요. 그분들을 따로 만나서 설득을 하는데 통상적으로 제가 설득했던 방법은 이겁니다. “어르신, 그분들이 정말 억울하게 돌아가셨지 않습니까?”하면, 다 맞대요. 불쌍하게 죽었다고. “그런데 어르신이 그 이야기를 안 해주시면 그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특히 젊은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데, 어르신께서 말씀 안하시고 그냥 이렇게 계시다 눈 감으시면 저분들 정말 억울하게 죽게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꾸준히 설득했어요.
실질적으로 어떤 마을의 경우는 학살된 곳으로 마을사람들이 와서 부역을 했거든요. 죽은 사람들을 파묻었잖아요. 그런 끔찍한 고통을 가진 분들한테 그 이야기를 물었을 때 당연히 이야기 안하려고 하시죠.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죽여서 인근에 묻혀 져 있다는 건 알지만 그게 어딘지는 몰랐어요. 그래서 그것까지 알아내기 위해 정말 노력을 많이 했죠. 저는 말 주변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 했고요. 그렇게 계속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분들도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살면서 한이 맺혔을 텐데,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느 순간 한마디 딱 끄집어내시더니 이건 정말, 말을‘하시는 게’아니라, 말을 ‘토해내시는’거더라고요. 얼마나 한이 맺히셨던지.. 처음에 한번 이렇게 마음이 열리니 다음은 굉장히 쉬워졌어요.
진행: 어쩌면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더 가슴 아픈 기억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게 되지 않나 싶네요. 10년간 이 작업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셨겠지만 아직도 못 다한 말씀이 있다면 관객 분들께 전달 부탁드리고요. 지금 감독님께서는 어떤 작업을 이어나가고 계신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감독: 제가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제 선친도 국민보도 연맹원 이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거든요. 제 선친은 학살당하시진 않고, 영화에도 나왔던 창녕지역에서 아마 당시 순경이 문을 열어줬을 때 살아나가신 것 같아요. 아버님께서 그때 돌아가셨으면 저는 살아있지 못했겠죠. 사실 제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1945~50년을 중심으로 보고 있거든요. 아마 현대사회구조의 모순들을 좀 아시려면 이 사이 오년 간 역사를 뒤져보시고 공부해 보시면 해답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는 사실 고민이 좀 많아요. 지금 극영화를 해볼까 하고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민간인 학살이외에는 마음이 잘 가지 않더라고요.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자꾸 그게 눈에 밟혀요. 그런데 주위에서는 자꾸 말립니다. “<레드 툼> 같은 영화 절대 성공 못 한다. 너 한 번 더 망하면 끝이다.”(웃음) 마음은 가는데 용기는 없고요. 한 쪽은 하고 싶지 않은 데 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혼란을 겪고 있는데 조만간 이번 달 안으로 둘 중 하나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제작비를 마련해야 제가 하고 싶은 영화를 충실하게 찍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먼저 하고 있습니다.
진행: 오늘 영화 보셨던 분들은 이후에도 감독님 작품 관심 있게 지켜봐주시고요. 오늘 이 자리는 돌베개 출판사와 함께하는 영화와 책의 만남입니다. 매달 이렇게 돌베개 출판사가 선정하는 책, 그리고 영화를 통해서 관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7월 에도 민영화와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화인 <블랙 딜>이라는 영화와 만날 예정입니다. 그 영화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 자리를 통해 또 함께 만날 수 있으면 좋겠고요. 이 자리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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