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치며 감시하는 사람들
기획상영〈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다시 만나다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4년 3월 23일 (토) 오후 6시 상영 후
참석 김미례 감독 | (화상연결) 에키타 유키코, 오타 마사쿠니
진행 및 통역 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
*관객기자단 [인디즈] 진연우 님의 기록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착취할 수 없다.’는 강령 아래 두텁게 부여잡은 손이 방파제를 만들었다. 자성 없이 드높아지는 오만함은 이 신념을 넘지 못해 산산이 부서지고 꺾인다. 너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인식하고, 치환하고,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은 새로운 파도를 만들어 내고, 이 흐름은 때때로 강자에게서 약자에게로 흐르는 해류를 거스른다.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부여잡고 싶은 마음이라니. 참된 인간의 조건인 고결함이 여기에 있다.
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이하 심아정):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이렇게 영화가 끝났는데도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남아 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리고요. 바쁜 토요일인데 시간과 마음을 들여서 이렇게 영화를 보러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진행과 통역을 맡은 심아정이라고 합니다. 오늘 첫 번째 GV 순서로 세 분을 모셨는데요, 잘 아시는 김미례 감독, 그리고 에키타 유키코 님, 오타 마사쿠니 님. 이 순서대로 자기소개를 간단히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미례 감독(이하 김미례): 안녕하세요. 저는 김미례라고 합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6년에 걸쳐서 만들었지만, 지금 이런 자리를 갖게 되어서 굉장히 기쁩니다. 반갑습니다.
에키타 유키코 씨(이하 에키타 유키코): 저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멘토였던 에키타 유키코라고 합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한국의 감독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게다가 굉장히 깊이 이해하고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몇 번이고 상영되는 걸 보면서 우리가 1970년대에 했던 그 투쟁, 그러니까 한국과 동아시아와 그 사람들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와 싸웠던 그때 ‘우리가 발생시키려고 했던 메시지가 45년이나 걸려서 가까스로 도착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 이 영화를 통해서 여러분을 만나는 일은 뒤늦게 도착한 어떤 편지를 받아 본 사람들을 만나 보는 그런 기쁨입니다.
오타 마사쿠니 씨(이하 오타 마사쿠니): 안녕하세요, 저는 오타 마사쿠니라고 합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저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멤버들이 체포된 이후에 그들을 지원하는 활동으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보통은 책을 편집합니다. 그리고 일본과 세계의 정치사회문화에 관해서 비평을 하거나, 평론을 쓰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50년 전에 일본에서 아주 무거운 과제로서 사회에 충격을 주고 영향을 주는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그 충격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때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제기했던 문제들이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고민되어 오지 못한 채로 긴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김미례 감독과 스태프들이 굉장히 냉정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일본에서도 사건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 이 주제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큰 역할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심아정: 우선 사회자가 출연진에게 준비한 질문입니다. 김미례 감독님, 이번에 극장 상영회를 기획하고 상영하는 것에 대해서 나름의 의미를 두시는 것 같은데요. 거기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미례: 이번 특별 상영회를 기획한 것은 인디스페이스에서 시작이 됐고요, 키리시마 사토시라고 하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한 멤버가 ‘내가 키리시마 사토시다.’라고 밝히고 사망하신 사건 이후로 다시 한 번 한국 사회와 일본 사회에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그래서 이런 특별 상영회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다큐멘터리를 시작했을 때가 저희 아버지 문제로 시작해서 〈노가다〉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운명처럼 저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라고 하는 작업으로까지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어쨌든 에키타 씨와 오타 씨를 참석하게 했고, 그래서 이런 자리에 여러분이 저보다는 두 분에게 조금 더 많은 질문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아직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있고, 저분들도 하고 싶지만 아직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런 자리를 만드는 게 쉽지는 않은 것 같고요. 이런 기회에 여러분들이 좋은 질문을 많이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단지 문을 여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심아정: 에키타 씨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만나기 전에 미례 감독을 몰랐을 때 ‘형무소 안에서 미례 감독의 다른 영화를 봤다.’는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거기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고, 또 2017년에 도쿄 구치소로 옮겨진 이후에 출소하셨을 때 약 6개월 정도 일본의 미디어나 텔레비전, 그리고 기자 회견 등을 일체 하지 않으셨는데요. 그때의 상황과 심경에 대해서 듣고 싶고, 또 에키타 씨에게 사회 복귀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도 들어 보고 싶습니다.
에키타 유키코: 미례 감독의 영화 중에 〈외박〉이라는 작품을 형무소에서 수감 중에 보았습니다. 매달 2회 노역을 쉬고 모두 모이는데요, 그때 이 영화의 DVD가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다른 걸 하면서 영화를 대충 봐서 내용은 기억이 안 납니다만, 어쨌든 일본의 여자 형무소에서 범죄를 저지른 여성들의 사회 복귀를 위한 교육 교재로 〈외박〉이 쓰였던 기억이 납니다. 김미례 감독님이 면회 활동을 하셨어요. 저를 면회 오셨는데 못 만나기도 하고, 또 저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요. 저는 그 김미례가 이 김미례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같이 수감되어 있던 동료 중에 한국인 여성이 있었는데요, 그 한국인 여성에게 김미례 감독에 대해서 물어봤더니 “김미례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1년이 지난 다음에야 ‘어? 나 이 〈외박〉이라는 영화 본 적 있는데.’ 하면서 그때서야 연결이 되고, 그 김미례가 이 김미례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2017년에 도쿄 구치소에 옮겨져서 나온 날 김미례 감독을 처음 실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오는 날에 조용히 나오기 위해서 당국의 협력을 받았고,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는 데 있어서 지원을 해 주었던 지원 위원에게도 협력을 받았습니다. 인터뷰를 안 하고 싶었던 이유는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쉽지 않아요. 또 하나는 저희가 했던 활동이 지하 활동이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우리가 이런 것을 한다.”라고 드러내면서 하는 활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유도 있었고요, 또 친구들을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옛날에 폭파 사건을 일으킨 테러리스트가 나왔다.’ 이러면서 몇십 년 전으로 돌아가서 내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이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그렇게 사회의 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지금 사회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우리는 그때 무엇을 하였나.’라는 것을 지금부터 만날 사람들에게서 배워 가면서 사회로 복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짠, 나왔습니다!”라는 식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고, 그런 식의 인터뷰에는 위화감이 들었습니다.
심아정: 오타 마사쿠니 님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오늘 배포한 자료, 그리고 이번에 오타 선생님 쓰신 글에도 키리시마 사토시의 출현, 그리고 사망 이후 일본 내 보도 태도에 대해서 여러 이의 제기를 해 주셨는데요. 한국의 관객들도 키리시마 사토시라는 인물과 그의 기나긴 도주 생활, 그리고 더불어서 동아시아 간의 무장 전선에 대한 관심이 높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49년 전에 키리시마 사토시가 속했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란 무엇이었는지, 왜 연속 폭발을 시도했는지 그 배경과 맥락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릴게요.
오타 마사쿠니: 오늘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요, 약 50년 전, 그러니까 1970년데 초반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되돌아보는 것인데요. 그 시대를 특징 짓는 굉장히 커다란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미 제국주의의 군대가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를 군사 침략한 사실인데요, 박정희 정권도 군대를 활용했지요. 그래서 이 시기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들에게도 굉장히 크게 다가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시기의 일본은 고도 경제 성장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건으로부터 30년 전, 1945년에 아시아에 대한 침략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하면서 패전을 맞이하게 되었는데요. 일본에서는 그 전후에 헌법에서 전쟁과 분쟁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역대 정권들이 정책적으로 평화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패전의 결과로서 일본 전체가 불타 폐허가 되었는데 전후 30년이 되어서 이렇게 고도의 경제 성장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 것이지?’라고 하는 문제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지요. 전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1950년부터 53년까지 한국 전쟁이 있었고, 일본은 패전한 지 5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국 전쟁에서 얻게 된, ‘조선 특수’라고 하는 한국 전쟁을 계기로 얻게 된 특수 경기로 경제를 복원할 수 있었다라는 사실이 있습니다. 1970년에는 베트남 전쟁이 발발을 했는데요. 이때 또 일본 안에는 미군 기지가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얻은 경제적 이익이 또 있었지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일본의 경제가 부흥한다.’라고 하는 문제 의식이 있습니다.
오늘 영화에서도 보셨겠지만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그때 알아채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45년, 일본의 패전이 무엇이었나.’ 그리고 ‘30년이 지나도 일본의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식민 지배를 하고 중국에 군사 침략을 해서 경제적으로 진출했던 이때의 대기업들이 전후 그대로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특수를 누리면서 계속해서 존속해 오고 있다.’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시대를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는 익숙한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이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한 그런 정황일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 ‘동아시아무장전선’의 사람들은 그런 방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보장하는 기업 활동에 대해서 이것이 무엇인지 문제 제기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문제 제기를 위해서 빌딩이나 산업 연구소 같은 곳을 폭파했는데요, 방법은 측면에서는 논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970년대라는 시대를 생각해 보면 베트남 전쟁을 포함해서 전세계적으로도 민중이 무장을 하고 저항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시대였습니다. 무장 투쟁이 있었던 시대죠. 그래서 그러한 시대 배경에 대한 이유 없이 동아시아 간의 무장 전선을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관객: 키리시마의 친족이 유해의 인수를 거부하여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될 것이라는 뉴스를 보았습니다만, 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옛 동지들이나 지원 활동을 하시는 분들께서 관련하여 나설 수 없는 것이었을지 궁금합니다.
에키타 유키코: 키리시마 님의 유골을 우리 동료들이나 그분의 가족들, 친척들이 받아 올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와 그의 인생이 갈라진 것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우리의 동료로서 추모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지금 현재는 절차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50년 동안 우리와 헤어져서 혼자 지냈을 어려움을 생각하면 너무 슬픕니다. 그래서 우리의 동료로 추모하고, 그가 우리에게 돌아왔기 때문에 함께 있고 싶습니다.
관객: 과거에 시도했던 무장 투쟁에 대해 현재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만약 과거로 돌아가신다면 어떤 활동을 진행하실지 이야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에키타 유키코: 무장 투쟁에 대한 입장에 관해 말씀드립니다. 저는 누군가 지금 다시 한 번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라고 물으면 무장 투쟁이 아닌 방식으로 운동을 하고 싶습니다. 과거 무장 투쟁에 참가했을 당시에는 오타 씨가 말씀해 주신 것처럼 당대의 분위기 속에서 무장 투쟁이라고 하는 것이 해방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운동들이 지지부진한 것도 있었고요, 그래서 이런 무장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일원으로서 무장 투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일으켰던 폭파 사건 중에 ‘미쓰비시 중공업’ 관련된 사건이 있었죠. 그때 많은 사상자들을 냈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우리가 모여서 ‘왜 이런 식으로 살해를 했는가.’를 논했습니다. 그리고 미쓰비시 폭파 이후에 ‘사상자를 내서는 안 된다.’, ‘사람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방침을 더욱 엄격하게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1975년 4월까지 몇몇 투쟁에서 불상사가 생겼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투쟁으로 그렇게까지 전하고 싶었던 것들이 이런 투쟁으로는 전할 수 없게 되어 버린 현실이 되었습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부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방법을 바꿔 보았지만 사람에게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고 물건을 파괴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장 투쟁이라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공감을 얻거나 우리가 원하는 변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했는데요. 그럼에도 일본의 대기업들이 이른바 가난한 나라에 진출하는 것, 경제적으로 침략하는 것을 알선하는 그런 곳으로서 한국산업경제연구소를 폭파했을 때에는 그러한 경제적 진출을 그만두라고 하는 메시지를 목표로 했습니다. 그리고 몇 번의 실패 끝에 ‘그만둔다.’라는 발표를 하게 되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기라고 하는 것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저는 아랍으로 갔는데요, 아랍으로 갔을 때 팔레스타인령의 무장파 해방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경험과 나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사람을 죽이거나 화물을 파괴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커다란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타도해야 될 대상이 이스라엘이든, 누구든 무기의 한계를 느꼈고, 그와 동시에 ‘인간, 자연, 창조물에 대해서 무기라는 것이 부정적인 작용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이런 식으로 만들어 나갈 수는 없다.’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거냐.” 이런 질문을 던지신다면 저는 새로운 관계성을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작은 마을 만들기도 좋고요. 어쨌든 세상을 바꾸고 동료를 늘려 가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건설적인 테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부정적이고, 파괴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자.’ 이런 식으로 말을 걸고 싸움을 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열심히 해 보고 싶습니다.
관객: 에키타 씨가 도쿄 구치소에서 나올 때 굉장히 건강한 모습으로 나오셨는데 건강 관리를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건강히 오래오래 우리와 함께 살아 주시길 바랍니다.
에키타 유키코: 건강 관리에 대해서 말하자면 형무소 안에서 하루 일과를 아주 충실히 따랐습니다. (웃음)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9시 반 잠을 잤고요. 가끔은 숨어서 밤에 잠을 안 자고 책을 읽기도 했지만요. 방 안에서도 그렇지만 저는 몸을 마사지하거나 스트레칭을 아주 잘했고요, 하루에 총 30분 있는 운동 시간을 빼먹지 않고 열심히 운동했습니다. 형무소 안에서의 식사는 비교적 균형 잡힌 영양 식단이 나왔고요. 그리고 계산하지 않아도 염분이나 지방이 많은 음식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식사를 버리지 않고 아주 잘 먹었습니다.
김미례: 질문을 정리하는 동안 키리시마 사토시 씨의 장례를 어떻게 치렀는지 잠깐만 소개할게요. 우선은 가족들한테 인수인계가 되어야 하는데, 가족들이 거부를 했어요. 시체를 받지 않고,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해서 지원 위원회에서 그러면 유족들이 서명해 주면 우리가 장례를 치르겠다고 말했는데 그마저도 유족들이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가마쿠라 시에 무연고자들의 묘가 있거든요, 거기 납골당처럼 안치를 한 건데 에키타 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그래도 키리시마 사토시 씨가 자기 이름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찾아가서 키리시마 씨를 만날 수 있다, 너무 다행이다라는 이야기를 지금 들었습니다.
관객: 현재 일본 사회와 젊은이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은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긍정적인 변화가 있다고 느끼시는지요?
오타 마사쿠니: 지금 일본의 사회 상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공유드리자면, 한국과의 구체적인 관계를 보셔도 아시겠지만 정말로 안타깝게도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자성적으로 되돌아보는 그런 기본적인 태도가 거의 없습니다. 좋지 않죠. 내년이면 패전은 80년입니다. 80년 전에 아시아를 침략한 그 전쟁에 패배했는데요, 사실 그 이후에 만들어 온 사회에서 큰 실패들을 하였죠.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이라고 하는 피해를 전면에 드러내면서 말입니다. 일단 지나간 전쟁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미국의 물량 공세에 압도적으로 패배했다는 인식은 있지만, 일본이 침략 전쟁에 패배했다는 인식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근대 국가 일본이 행했던 여러 행위에 대한 반성이라든가, 그런 책임 의식이라는 것은 굉장히 희박합니다. 청년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요.
심아정: 이제 마지막으로 마무리 짓는 한마디씩을 듣고, 오늘 여러분들이 남겨 주신 질문들은 제가 전부 다 번역해서 ‘지원자 연락회’라는 소식지에 소개드리고 출연진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나머지 멤버분들에게도 전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타 마사쿠니: 오늘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은 지금 사회·정치 사상적으로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굉장히 심각한 상황을 직면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사는 사회를 바꾸려는 사상이라든가 운동은 사실 불평등과 격차, 그리고 차별을 없애는 목적으로서 희망과 꿈을 품고 운동을 전개해 오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일본에 있어서도, 세계에 있어서도 이런 운동들이 제대로 잘 되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운동을 내걸고 있는 어떤 꿈이나 이상을 배반당하는 역사의 축적이 계속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배반이 눈에 띄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사회를 바꾸겠다는 희망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이런 시대의 역풍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여러분과 함께 모색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운동이나 여러 사상들이 축적되어 있을 텐데요, 이렇게 일본과는 다른 전사를 가져 온 한국의 사람들과 어떤 사회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 이런 물꼬를 트는 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에키타 유키코: 한국 감독이 만들어 준 영화 덕분에 이렇게 한국의 여러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너무나 기쁩니다. 그리고 제 생각도 여러분들에게 공유했지만, 여러분들의 생각도 들을 수 있어서 너무 기뻤어요. 제가 말을 능숙하게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지금 세계, 특히 일본에 있어서 변혁이라든가, 주체적으로 변화한다든가 이런 것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요, 제가 형무소에서 나왔을 때 그런 느낌을 굉장히 강하게 받았습니다. 또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이 전쟁이 계속되는데도 세계가 이것을 멈출 수 없다는 점이 굉장히 마음에 힘이 듭니다. 60, 70년대에 우리가 꿈꿨던 이상적인 나라와 이상에 대한 의지가 있었는데요, 그것이 현실과 조금 맞지 않았던 부분들이 있었고 패배의 원인 중 하나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을 바꾸겠다.’라는 커다란 이야기를 할 때는 경제나 사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까운 것으로부터 소박하고 작은 것으로라도 조금씩 바꿔 나가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마음으로 한국분들과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저는 실패했습니다. 저는 실패했지만, 실패 이후에 연결된 사람들로 인해서 내 역할이 또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동료들과 함께 사형제 폐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관객 여러분들에게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하더라도 마지막까지 그 마음을 부여잡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미례: 두 분의 말씀이 무게가 있어서 저는 할 말이 없는데요, 요즈음에 참 사회가 암담하다, 어렵다, 힘들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가운데 이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러면 우리 사회는 아직 변혁의 가능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어쨌든 이제 마지막까지 함께 자리해 주시고, 몇 차례나 이렇게 영화를 보러 와 주신 여러분들게 감사드리면서 저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아정: 마지막으로 대화를 마치면서 감옥에 있었던 다이도지 마사시 씨가 친구와 주고받았던 편지에서 했던 말을 제가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인민이라는 살아 있는 구체적인 존재를 인민, 혹은 대중이라는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잘못은 미래의 조직, 친구, 분별력 있는 인민과 우리가 이어지는 회로를 갖지 못하고 그 때문에 그들을 신뢰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은 일본 인민에 대한 의심과 절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사고 방식은 대중 운동의 경시, 혹은 부정과 이어졌으며 무장 투쟁만이 유일하게 옳다는 사고 방식에 빠져 있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다이도지 마사시가 1982년 12월 21일에 치카프 미에코에게 보내는 서신,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폭파에 대한 자기 비판을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가져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희망이라는 것을 물음으로 던지면서 오늘의 문을 닫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함께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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