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핀〉리뷰: 한 인물이 믿어지기까지.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태현 님의 글입니다.
나영은 아등바등 까치발을 들고 창문에 커튼을 단다. 집에 새겨진 가족의 흔적은 나영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이후 그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것처럼 나영은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지켜내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영의 기원과는 다르게, 주위 사람들의 삶은 변화를 맞이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서천은 쇠퇴해 가는 마을이다. 동네의 펜션은 이제 문을 닫는다고 하고, 거리엔 사람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동생 성운은 졸업 이후 서천을 떠나겠다고 말한다. 어머니 정옥은 나영이 다니는 지역신문사 ‘서천소식지’의 국장과 재혼을 발표한다. 어머니는 나영이 소중히 여기는 집을 팔고 싶다며 “낡고 텅 빈” 이 곳을 벗어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구하라고 말한다. 나영의 심란한 마음을 달래주는 건 취재 과정에서 만난 볼링이다. 볼링장 사장 미숙에게 볼링의 매력을 듣고, 서울에서 내려온 외지인 해수와 함께 몸을 움직이며, 나영은 두 사람과 마음을 나눈다.
주변을 지금처럼 지키고 싶다는 나영의 욕망은 어쩌면 모든 이들이 지금의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 욕심이기도 하다. 새로운 삶을 꿈꾸는 가족들에게 그의 말은 전달되지 못하고, 그 또한 쉽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찾지 못한다. 〈돌핀〉은 익숙한 안전 범위 바깥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나영의 이야기다. 나영은 새로운 사람들과 움직이고, 볼링공을 굴리고, 대화 나누며 차츰차츰 변화한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뒷걸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영은 어머니와 동생의 말에 똑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볼링은 이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탈출구였다. 나영의 소중한 미덕들을 올바른 자리에 끼워 넣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볼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나영의 마음을 물으며 천천히 곁에 다가가는 해수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근심의 존재를 알아채는 미숙과의 관계는 주변의 것을 지킨다는 핑계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영의 의지를 일깨운다. 소중히 지킨다는 마음은 그것을 무균의 상태로 보존하겠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처럼, 나영은 새로운 길에 접어든 가족들의 곁에서 관계를 회복하고, 삶의 다음 단계를 그려본다. 매번 고장 나던 집의 자물쇠를 도어락으로 바꿔보고, 영화 내내 덧칠하던 탁자에 아름답게 새로운 쓸모를 찾아준다. 커튼으로 방을 채운 햇빛을 가려내던 나영은 이제 방문을 열어둔다. 나영의 미래는 열려있다.
하지만 〈돌핀〉을 보며 장면에서 새어 나오는 의미들이 감흥으로 변하는 일은 흔치 않았고, 그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나영과 성운은 주된 인물처럼 보이지만, 장면 구성에 있어 그들에게 독점적 지위, 혹은 감정을 밝힐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인물의 사연이 입 밖으로 건네어지는 〈돌핀〉에서, 타인의 사연으로부터 느낀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인물의 시간은 화면에 놓여있다기보다 장면 사이에 있다. 나영과 성운이 화면의 바깥을 멍하니 바라보는 얼굴은 자주 등장하지만 지속되지 않고 짧게 잘려 나간다. 이를 인물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지 않는, 주변 인물의 사연이 주요 인물에게 종속되지 않기를 바라는 선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개별 장면은 나영과 성운의 얼굴로 귀결되는 일이 잦고, 주변의 사연은 주요 인물의 결정을 위해 복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의 얼굴을 다루는 클로즈업 쇼트들이 명확하게 의미를 지정해 줄 수 있을 만큼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쉽게 속내를 말하지 않는 두 주인공의 침잠이 관객이 함께할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장면 사이로 유예될 때, 인물들에게 접속할 기회가 상실되는 듯했다. 두 인물과 함께 그들 앞에 놓인 감정을 겪어보고 싶었지만, 한 다발로 던져지는 또 다른 사건들 앞에서 그럴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돌핀〉의 많은 의미들은 간접적으로 전해진다. 볼링을 삶에 비유한 많은 말들, 길게 지속되는 클로즈업으로 보여지는 나영 부모님의 시계, 주인공들의 상황에 빗대어 생각해 볼 만한 사연들. 하지만 이들은 존재 혹은 행위라기보단, 비유와 상징으로 다뤄진다. 그 자체가 문제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물들의 감정적 순간이 잘려 나간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 전환의 문제와 더불어, 제한된 러닝타임 안에서 의미를 전달하는 문제가 지극히 사업가적 효율성에 기대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한 명의 서사, 혹은 행위에 이입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믿어지는 이미지나 상징들로 대체되는 것 같았다. 특히 볼링의 경우, 인물들이 볼링을 치는 순간은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진다. 나영은 갈등 앞에서 탈출구로 볼링장을 찾지만, 볼링공을 굴리는 일은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이다. 성운이 외지인과 볼링 내기를 할 때, 볼링을 치는 일은 보여지지 않고 곧장 결과로 넘어간다. 볼링을 치다 자주 넘어지는 나영은, 정확하게는 볼링을 ‘치다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볼링을 ‘치자마자’ 넘어지는 것으로 보여진다. 볼링은 혼자와 다투는 스포츠라고 〈돌핀〉은 자주 말하지만, 그 감흥을 영화 안에서 발화된 대사 이상의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돌핀〉의 인물들은 영화가 제시한 비유와 상징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교훈의 대리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나의 장면이 끝난 순간으로부터 새로운 감흥이 피어오를 자리가 만들어지기보단, 의미로 전부 환산되어진 장면이 지나갔다는 감상을 받으며 스크린과 나 사이의 믿음이 옅어지는 듯했다. 〈돌핀〉을 보며 인물은 어떻게 연출자의 의미를 대신 전달하는 이가 아니라 유기적인 세계 안에서 욕망을 가지고 행동하는 한 명의 사람으로 믿어질 수 있을까, 그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새로운 관계를 나영에게 내어주고, 그 파장이 그에게 닿기를 바라는 〈돌핀〉의 이야기에 애틋함을 느끼면서도, 나영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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