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별〉리뷰: 해부된 노동신화를 묻는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수영 님의 글입니다.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 걸걸한 목소리와 과장된 걸음걸이까지. 윤화의 등장 뒤로 벽에 걸린 가족사진이 길게 담긴다.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던 윤화는 머리를 내려 묶은 채 아이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윤화의 삶에 어떤 굴곡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암시하며 시작한다.
윤화는 울산에서 살고 있다. 조선소에서 용접을 비롯해 20년을 근무한 그녀는 베테랑이지만 그만큼 몸도 성하지 않다. 윤화가 울산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지, 결혼만 울산에서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영화에서 윤화의 배경을 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윤화가 부양해야 할 가족들,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사망했던 남편의 가족들이 등장한다. 윤화는 몸을 사용하는 일을 하며 열심히 일해서 번 돈만이 떳떳한 소득이라 외치며 거의 블루칼라 노동자의 상징 같다. 그러나 가족들은 생각이 다르다. 일해서 버는 돈으로는 집 하나 마련하기 어렵다며 금융을 하겠다는 아들, 공부 대신 틱톡(TikTok)을 찍으며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겠다는 딸까지. 윤화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해버린 세상에서도 제대로 살기 위해 백방으로 헌신한다. 윤화가 착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한다.
영화는 윤화와 가족을 통해 크게 두 가지의 전통적 축-노동과 젠더-를 해체한다. 조선소가 최고라며 취직을 종용하는 윤화와 대치하는 자식들이 대표적이다. 자녀들은 기존의 ‘일’을 해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세상에 대해 항변한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없고 내 삶을 그려나갈 수 있는 경제적인 안정성 또한 보장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 둘이 매진하는 것은 불로 소득을 대표하는 두 가지의 신흥 영역-코인 투자로 대표되는 금융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다. 미디어 디바이스의 대중화 및 뉴미디어의 확산으로 누구나 연예인이 될 수 있는 세상 속에서 조선소 어딘가의 뒤치다꺼리하겠다는 바람은 바보처럼 들려온다. 0.9원짜리 비트코인이 5천만 원이 되는 세상 속에서 내가 땀흘려 일하는 노동의 가치는 너무나도 불공평해 보인다. 자녀들은 몸을 움직이는 노동의 가치가 퇴색되고, ‘정신 차려서’ 취직하면 모든 것이 잘 풀렸던 이전 시대의 진리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이 왔음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자녀들의 말을 방증하듯, 윤화 또한 쉽게 대체된다. ‘회사가 살아야 모두가 산다’라는 고루한 문구와 함께 기장은 계속해서 시스템을 탓해대지만, 시스템이 존재하기 이전 침체하기 시작한 중공업 시장과 변화한 노동 지형도는 이미 전제된 변화의 이유다. 기존의 남성 중심적 중공업 노동시장이 해체되며 영화는 그 아래에 숨겨졌던 가부장제 적 불평등을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 가장 말수가 적은 딸은 그림자처럼 가족들의 밥을 차리고 살림을 보태야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를 묵인한 (또는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윤화는 20년간 종사해 왔던 조선소에서 해고되기 직전에서야 본인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죽은 남편의 동료뿐만 아니라 남편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마저 윤화는 형수님에 불과했지만, 회사에 반기를 드는 순간 그녀는 이름을 되찾게 된다.
일련의 과정에 있어 윤화는 흥미로운 역할이다. 그는 가부장제와 노동 신화에 가장 거세게 배신당한 피해자지만, 영화 속 인물 중 그 누구보다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윤화는 20년간 일해온 직장에서 이유 없이 해고를 통보받고 그제서야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장손이라는 이유로 집 명의를 아들에게 넘기고, 종중 땅을 뼈 빠지게 지켜왔음에도 우리 핏줄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공동명의를 뺏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화에게 노동과 젠더를 둘러싼 두 가지 기성의 이데올로기는 그녀가 움직이는 이유다. 그리고 영화는 누구보다 기존의 질서를 내면화한 윤화를 토대로 세상의 변화와 상실을 연결해 그려낸다. 완경, 직업, 집, 그리고 땅까지. 영화 내내 본인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사라진 윤화는 가족들에게 소리친다. “내한테 와이라는 건데!” 질문은 관객들에게도 와닿는다.
사뭇 과하게 느껴지는 연기 톤과 대화 간 정적을 들어내면, 남는 것은 결국 앙상하게 지고 있는 윤화의 삶이다. 변해버린 세상에는 이유가 없기에 자신을 지탱하던 불문법이 조금씩 바스러져도 윤화는 살아 나갈 수밖에 없다. 그는 언제까지 울산의 별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제목이 입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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