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고: 분노의 적자〉 리뷰: 네버 다이 하트
*관객기자단 [인디즈] 진연우 님의 글입니다.
가장 무서운 게 뭐냐, 라는 질문에 여러 가지 답을 내놓았었다. 하루아침에 가진 것들이 모두 사라져 안전지대를 박탈당하는 것, 아끼던 소중한 무언가가 흔적도 없이 내 세상에서 증발해 버리는 것. 해마다 나를 지탱하는 것들이 바뀌어 많은 답들을 내놓았지만, 이제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유일하다. 나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더는 그 무엇도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것만은 가져가지 말아 달라고 마지막 패처럼 내밀었던 것들이, 곱씹어 보면 다 사랑하는 마음이었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잃을까 봐 겁이 나고 간절해지지만, 그 마음 자체가 소진되어 버리면 세상은 무(無) 그 자체라는 것을 점차로 느끼게 되었다. 내밀한 고백이지만, 실은 가장 무서운 것이 뭐냐는 질문에 할 수 있는 말이 많이 없던 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그렇게 마음이 가난한 시기에 이 영화를 만났다.
백승기 감독의 영화를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숫호구〉, 〈인천스텔라〉 등 ‘C급’을 내세우는 필모그래피로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꾸준히 모험심이 부족했던 나는 종종 그의 이름을 마주치게 되면 시놉시스를 훑는 정도로 탐색을 마무리하고는 했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를 즐기는 이들이 있기에 웃을 준비를 하고 갔지만 솔직하게 처음에는 잘 웃지 못했다. 방어적인 마음으로 스크린을 대면했던 탓도 있지만, 처음 맛본 백승기 감독의 ‘스타일’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린 탓이다. 하지만 나는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끝내 이 영화에 마음이 열리고 말았는데, 꾸준히 밀어붙이는 뚝심에 설득당해 이따금 웃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영화 안에서 마주한 사랑이 값졌기 때문이다.
〈잔고: 분노의 적자〉에는 이경영과 김수미, 크리스토퍼 놀란과 브래드 피트가 함께 나온다. 또 이 영화는 타란티노이면서 동시에 채플린이기도 한데, 버스터 키튼을 닮은 ‘잔고’가 찰리 채플린식 연기를 한다는 것이 재미있다. 게다가 이 영화, 무성 영화이면서 서부극의 장르성에도 꽤나 충실하다. 서부극에 주로 사용되는 쇼트와 장르 규칙을 따르면서 끝까지 영화를 전개해 나간다. 채플린의 서정성과 서부극의 마초성이 한 영화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기는 해도, 〈잔고: 분노의 적자〉는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마구잡이로 공존하는 무대다. 한국 영화와 할리우드 영화가 같은 선상에 있고, 무성 영화와 스타일리시한 액션 영화가 시간선을 깨부수며 공존하는 영화의 빌런이 조태오이면서 디카프리오인 걸 보고 있던 어느 순간에 문득 ‘이 사람 영화 진짜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외로 수차례 인용하던 타란티노의 이름이 겹쳐 보였던 건 비디오 가게에 죽치고 앉아 하루 종일 영화만 봤다는 어느 영화광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백승기가 이 영화를 만들 때의 마음과 비디오 가게에서 돌부처가 된 타란티노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스크린에 ‘애관극장’이라는 친숙한 간판이 보였을 때 마음이 크게 동했다. 그 간판과 맞닥뜨린 순간 감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가 인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동시에 이 영화는 그가 잃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한 아주 긴 고백이 되리라는 것도. 그러자 이 영화의 많은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서부극의 장르 규칙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평면적인 스토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게 된 순간 승리가 담보되어 있을 ‘잔고’를 조금은 간절한 마음으로 응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잔고가 구하고자 하는 것은 동생이었지만, 백승기가 사랑하는 것은 그보다 많아 보였다. 그의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시퀀스 하나를 떠올려 본다. 좁게는 인천 지역의 사람들이, 넓게는 백승기와 연결되어 있을 사람들이 그의 영화가 되어 줄 때. 총에 맞는 시늉을 하며 웃는 모습들이 하나같이 즐거워 보였는데, 짐작건대 아마 감독은 이 모습을 많이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백승기가 사랑하는 영화’에서 이들은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고 느꼈다.
아직도 종종 크레딧의 해맑은 웃음들을 떠올린다. 빚갚으리오가 ‘S.A.W 프로젝트’를 실행하려는 이 시대에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저렇게 맑은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황야의 총잡이보다 강한 무기를 지닌 사람들일 것이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행한 노동이 적을 처단하는 궁극의 스킬이 되는 뻔뻔한 세계관에서 사실은 남몰래 위로도 받고, 그 마음을 질투하기도 했다. 나는 꺼지지 않는 심장의 사나이가 앞으로도 뚝심 있게 뻔뻔했으면 좋겠다. 백승기의 영화가 계속되는 한, 이 정체 모를 무모한 힘은 언제까지고 우리 편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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