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 리뷰 :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주는 것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유진 님의 글입니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주는 것. 성폭행에 대항하는 한 여성의 투쟁기를 다룬 영화 〈갈매기〉가 택한 화법이다. 영화의 주인공 오복(정애화)은 수산시장에서 일하는 상인인 동시에 다 큰 딸 셋을 둔 엄마다. 일과 가족이 삶의 전부였던 그녀는 공무원과 결혼하는 둘째 딸의 상견례 자리를 무사히 잘 마친 뒤 시장으로 돌아와 딸의 결혼 자금이 될 돈봉투를 챙긴다. 이후 허물없이 가깝게 지내던 시장 사람들과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함께하는데, 그곳에서 사건이 터진다. 동료 상인 기택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 그러나 영화는 이 장면을 직접적으로 그려내는 대신 암전을 통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기를 택한다.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컷과 컷 사이에서 오복은 분명한 형태의 폭력을 겪었다. 그렇다면 관객은 직접 확인하지 못한 그녀의 피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후 이어지는 몇 가지 단서를 통해 피해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다음날 새벽 넋이 빠진 채 지하철 계단을 절뚝거리며 오르다 뒤에서 걸어오던 학생에게 하의에 피가 묻었다는 말을 듣는 오복. 집에 가지 않고 목욕탕에 들러 피가 묻은 하의를 신경질적으로 빨아내는 오복. 이후 오복이 작성한 산부인과 검진표와 딸들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완경이 지났다는 사실.
이렇게 직접적인 묘사 대신 생략과 간접 묘사를 취하는 연출은 그간 미디어에서 범죄 피해자, 특히 성범죄 피해자를 얼마나 무감하게 그려 왔는지를 자각하게 한다.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다룬다고 해서 반드시 성폭행 피해 장면이 등장해야 할 필요는 없는데도, 일부 영화들은 피해자들의 고통에 더욱더 깊은 이입이 가능하게끔 돕는다는 이유를 들며 범죄 피해 장면을 더욱 사실적으로, 더욱 잔혹한 연출을 택해 온 것이 사실이다. 예술적 윤리관의 차이도 분명 있겠지만, 글쎄, 현실의 피해 사실을 완벽히 혹은 더 과잉된 형태로 모사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지 않을까. 오직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객은 보여준 것 이상을 볼 수 있고 들려준 것 이상을 들을 수 있다.
김미조 감독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감독의 윤리적 고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현장에서 오케이 혹은 엔지라고 말해야 하는데, 성폭행 장면이 좋은 장면인지 나쁜 장면인지 얘기할 수 있을까요. 시나리오 쓰면서 오복에 대한 애정이 너무 커졌고, 오복이 고통받는 장면을 찍으며 제가 행복할 수 있을지 걱정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고요. 〈갈매기〉는 성폭력 생존자도 볼 수 있는 영화가 돼야 했습니다. 성폭력을 상세히 묘사하는 영화를 피해자가 제대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감독의 뚜렷한 지향점은 영화 곳곳에 묻어나 있다. 예컨대 오복의 고소 사실을 알게 된 기택이 오복의 가게에 직접 찾아와 난동을 피우는 장면은 이렇게 구성된다. 분노한 기택이 오복의 가게에 찾아와 상을 엎는다. 상을 엎은 기택은 아주 위협적인 기세로 오복을 가게 구석으로 몰아붙인다. 기택을 말리려 함께 따라온 사람들이 그를 제지하고, 오복은 울분에 차 소리를 지른다. 몰아붙이는 기택, 말리는 사람들, 떠밀리는 오복은 우르르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듯이 사라진다. 카메라는 또 하나의 폭력이 쓸고 지나간 자리만을 공허하게 비출 뿐이다. 오복이 고통받는 장면을 찍으며 행복할 수 없었던 감독은 기택과 대치하며 괴로워하는 그녀를 프레임 안에 담는 대신 화면은 고정시킨 채 피사체를 화면 밖으로 내보내는 프레임 아웃 기법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기’를 택한다. 관객은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도, 울부짖는 그녀의 비명 소리만 듣고도 오복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
〈갈매기〉가 탁월한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고통받는 피해자의 면면을 낱낱이 파헤치지 않는 것. 영화 속의 범죄는 현실 속의 범죄와 다르게 사건의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굳이 찍지 않고서도 성폭행에 대항하는 피해자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고통은 카메라에 담기지 않았을 때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 감독은 오복이 성폭행을 당하는 순간과 가해자의 폭력에 맞서는 순간에 블랙 아웃과 프레임 아웃 기법을 씌워 관객이 고통받는 오복을 ‘볼 수 없게’ 한다. 그러나 관객은 그녀의 고통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주는 것. 〈갈매기〉는 바로 이러한 화법으로 세상에 말을 거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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