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따뜻한 이해
썸머 프라이드 시네마 2021 〈우리가 꽃들이라면〉 김율희 감독 인터뷰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정연 님의 글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정우를 위해 상현은 영화 장면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을 쓰기로 다짐한다. 시행착오 끝에, 눈을 천천히 감고 손의 촉감과 주변 소리에 귀 기울여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는 상현. 정우가 마주하는 세상을 상현이 잠시 마주한다. 검은 화면, 이제 정우가 마주하는 세상을 우리가 잠시 마주한다. 바람 소리와 새 소리가 보이고, 상현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남은 여백은 오로지 정우와 우리에게 남겨진다. 그 여백을 상상하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여운을 지니고 〈우리가 꽃들이라면〉의 김율희 감독을 만났다.
〈우리가 꽃들이라면〉은 제목부터 특별한 인상을 줍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관객분들이 제목으로 인해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제목을 설정하시게 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더불어 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 또한 들어보고 싶어요.
일단 영화 속 영화의 제목이 〈우리가 꽃들이라면〉이에요. 그 영화 자체가 상현이와 정우를 이어주는 매개체인데요. 이 영화의 스토리, 또 그 영화 자체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가장 큰 상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속 영화의 제목을 〈우리가 꽃들이라면〉이라고 정하게 된 건, 이 영화 속 등장인물인 석훈은 무언가를 주고 떠나는 입장이고, 윤수는 그것을 받고 남는 입장이잖아요. 그게 정우와 상현의 관계와 유사성이 있어요. 마지막 엔딩 씬에서 등장인물 윤수가 스스로를 좋은 곳에 데려가고 싶다고 하면서 구두를 보내주고 자기 마음을 고백해요. 정우와 상현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정의하진 않았지만 영화 속 윤수의 삶의 바라봤을 때, 서로 다른 모양의 마음이더라도 결국 피어났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제목을 지었습니다. 그대로 이 영화의 제목으로 이어지게 되었어요.
그런 이유 때문에 영화 속 영화로 기존에 존재하는 영화가 아닌,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사용하신 건가요?
네, 상현이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보다가 주인공 윤수를 봤을 때, 어느 순간 윤수와 정우가 닮았다고 느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상현과 정우는 눈을 마주칠 수가 없잖아요. 정우와 윤수가 닮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영화 속 윤수와 눈이 마주치고, 이 영화의 내용을 정우에게 설명해주고 떠나는 것을 자신의 소명처럼 느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마지막 암전 후 내레이션으로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영화의 말미에도 나오는 ‘스스로 좋은 곳에 데려가 줄 수 있다’는 말이요. 그래서 영화 속 영화도 새롭게 찍었죠.
영화는 상현이 책을 읽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상현은 책 속 단어 하나하나를 손으로 따라가면서 읽는데, 그 장면이 시각장애인인 정우가 점자책을 읽는 방식과 상통하는 듯 보입니다. 혹시 이러한 연관성을 염두에 두시고 연출하신 건가요?
맞아요. 영화 속에 저만 아는 지점들이 몇 개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였어요. 연기 디렉팅을 할 때에도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먼저 이러한 지점들을 짚어주게 되면 의식적인 행동이 들어갈 거 같아서요. 디렉팅을 할 때에는 ‘좀 더 꼼꼼하게 읽는다는 느낌으로 해볼까요?’ 이런 식으로만 얘기해서 아마 배우님도 모르실 거예요. 앞서 질문해주신 영화의 연출 계기에 대해 이어 답하자면, 제가 배리어프리(Barrier-Free) 영화를 처음 보고 그 영화의 방식이 사려 깊다고 느꼈어요.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 두 분 다 일을 하시고 할아버지가 저를 키워주셨는데, 할아버지와 같이 걸어가면 할아버지는 무릎이 안 좋으셔서 계단에서는 몸을 옆으로 돌려서 내려가셨어요. 그런데 제가 그런 사소한 부분들이 닮아가더라고요. 점자책을 읽는 것처럼 글씨를 손으로 따라가는 것도, 의식하지 않은 순간에 닮아가는 지점들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이 질문을 보고 놀랐어요. 스태프들도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웃음)
상현과 정우가 같이 밥을 먹을 때에 반찬을 더듬는 정우의 젓가락질이 상현의 눈에 들어옵니다. 상현은 ‘배려하는 마음’으로 정우의 젓가락 앞에 반찬을 놓아주는데, 정우는 오히려 “다 들리니까, 하지 마!”라고 소리치죠. 정우의 대사가 “다 아니까”도 아니고, “다 들리니까”인 이유는 정우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 소리이기 때문인 건가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게, ‘들린다’는 게 네가 지금 나를 과하게 배려하는 것이 들린다는 뜻이에요. 그게 기분 나쁘다는 말이죠. 영화를 보면 정우는 항상 문을 열어놓고 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여름엔 아파트 단지 내 모든 집들이 그냥 문을 열어 놓고 지냈어요. 그런 노스탤지어적인 느낌을 내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정우가 세상의 소리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정우는 세상의 소리들로 스스로 살아가는 방식을 차차 마련해 나가고 있어요. 그런데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너무 과한 친절과 배려를 베푸는 것이 기분이 나쁜 거예요. “지금 너는 좋은 배려를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난 이게 다 들려서 기분이 나쁘다”라고 표현하는 건데요. 정말 화가 나서 소리를 치는 거죠.
비록 앞이 보이지 않지만, “다 안다고” 말하는 정우의 대사는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자신을 무엇인가 결핍된, 부족한 존재들로 대하는 사람들을 향한 말처럼 들렸습니다. 감독님께서 이 장면에 담고 싶은 감정은 무엇이었나요?
정우는 갑자기 시력을 잃게 된 거고, 정우에게 눈이 보이지 않는 건 분명 결핍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충분히 자신만의 방향을 찾아 나갈 수 있는 문제죠. 그런데 “너는 이제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보호를 받아야 해”하고 선을 그어 버리는 행동이 기분 나쁘다는 걸 앞서 얘기한 “다 들리니까, 하지 마”라는 대사에 담고 싶었습니다. 그 후 “다 안다”라고 할 때엔,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싶었어요. ‘이미 네 발소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네가 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네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기분이 나쁘지만, 네 마음이 무엇인지는 알아.’ 이런 느낌으로도 와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대사를 썼습니다.
상현은 영화 속의 영화 〈우리가 꽃들이라면〉의 등장인물 윤수와 눈이 마주칩니다. 이때 상현이 마치 실제로 윤수와 마주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마주봄’은 의도적으로 연출하신 건가요?
그 장면이 윤수가 상심하고 울다가 고개를 드는 장면인데요. 사실 영화에서 그런 상황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건 말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이게 진짜인지, 혹은 상현이 정우와 윤수를 동일시해서 마치 인물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낀 것인지 모호한 느낌으로 연출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에는 상현이 윤수라는 인물과 정우를 어느 정도 동일시하여 바라보는 감정이 담긴 건가요?
그런 것도 있지만, 상현이 정우에게 그 장면을 설명할 때 “그냥 서 있다.”라고 하는데, 영화 속 윤수는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너무 아파서 울고 있잖아요. 상현이 그렇게 말한 뒤에 뭔가 부끄러워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정우에게 나름의 친절을 베풀면서 상현은 스스로 정우를 배려하고 있다는 자만에 차 있었다고 생각해요. ‘내가 해 줘야지’라는 마음으로 했던 일들이 정우를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거잖아요. 상현이 그저 ‘서 있다’라고 설명한 장면은 실제로는 슬픈 순간이고, 인물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울고 있는 장면인데요. 그때 영화 속 윤수와 눈이 마주치며, 상현은 ‘아, 정우가 기분이 나빴겠다.’하고 부끄러움을 느껴요. 상현이 스스로 조금 더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터닝 포인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미처 부끄러움이라는 감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제 인간관계, 삶을 돌아보면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되는 순간은 말하지 않았던 자만심이나 오만을 들켜서 부끄러웠던 순간이었거든요. 그리고 저는 그게 되게 의미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을 해요. 부끄러운 모습을 들키거나 관계가 조금 어긋났을 때 상대와 그냥 그대로 멀어진 적도 있지만, 그걸 마주하고 한 발 더 나아가는 지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상현이 눈이 보이지 않는 정우를 위해 영화 〈우리가 꽃들이라면〉을 해설 녹음해주는 것이 영화의 주된 스토리 라인입니다. 이때 상현이 정우를 위해 녹음해주는 것은 친구로서 단순한 선의로 해석하기엔 두 사람 간의 오랜 시간이 담긴 행동 같습니다. 감독님께서 설정하신 상현과 정우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화의 해설 녹음본을 주는 것 자체로는 상현의 성장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상현은 비장애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잖아요. 이렇게도 녹음하고, 저렇게도 녹음하고, 이리 실패하고, 저리 실패하고. 그렇게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면서 결국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성장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관객과의 대화를 하면 언제나 ‘두 사람의 감정은 사랑이냐 우정이냐’ 하는 질문을 받았는데요. 그런 것을 다 떠나서 그냥 서로 ‘너에게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나에게 네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너도 아마 알고 있을 거야’ 하는 믿음이 있는 관계라고 설정했어요. 어느 순간 상현이 정우의 마음을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해설 녹음을 만들게 되는 거고요. 정우의 외로움이나 하는 감정들이요. 정우가 상현에게 정말 솔직하게 말하잖아요. “눈이 보였던 게 꿈같아”라고. 그런 말을 해줬다는 것 자체가 정우가 자신의 외로움에 공감하는 것을 상현에게만 허락한다는 걸 인지하고 책임감을 가졌으면 싶었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관계라고 설명을 하고 싶네요.
명확한 관계로 규정하지 않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사랑, 애정과 애틋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두 사람의 관계에서 보여주고 싶으셨던 감정이 따로 있었나요?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감정은 이해였던 거 같아요. 어떤 말에 기분이 나빠도 그다음 말을 들어주려면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애정이 필요하고요. 그 모든 포괄적인 의미의 애정이었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을 굳이 고등학생으로 설정했던 것도 과도기에 걸쳐 있는, 중첩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어른이 되기 직전의 경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 한 발 더 나아가자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 감정들의 경계에도 서 있고요. 그런 것들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게 ‘이해와 애정’이라고 생각해요.
“눈이 보였던 게 꿈같아.”로 시작하는 정우의 대사가 있는데요. “다시 기억할 수가 없어서 괴로워. 세상이 점점 좁아지니까, 그래서 화가 나.”라는 대사가 와닿았습니다. 이와 같이 정우의 대사와 상황을 설정하실 때에 감독님께서 참고하신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 영화를 만들고자 했을 때, 처음에는 ‘어떤 자료를 찾아봐야 되지?’ 혹은 ‘누구를 인터뷰해야 하지?’ 이런 생각에 차 있었어요. 우선 다큐멘터리를 찾아봤는데, 당연하게도 모두의 삶이 각각 다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누군가의 삶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할 거야’ 하고 미루어 짐작하는 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제도적인 부분이나 사회적 안전망에 대해서는 분명 그런 성격의 조사가 필요하지만, 이 영화는 감정을 주요하게 다루다 보니까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마음으로 눈을 가리고 영화를 보고 그랬어요. 눈을 가리고 생활하고요. 무식하게 직접 겪어보는 쪽을 택한 거죠. 저희 집 앞 도로에 딱 2시쯤에 도로 청소하는 차가 지나가요. 그리고 옆에는 과일 직판장이 있어서 6, 7시 즈음에 세일하는 소리가 들려요. 눈을 감고 생활을 하니까 처음엔 난감했는데, 그러한 소리들로 시간을 알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내가 맨날 눕는 침대 혹은 맨날 사용하는 물건들이 잘 기억이 안나는 거예요. 분명히 여기 있었던 거 같은데, 없고. 그래서 정우가 시계를 떠올리는 장면을 넣게 됐어요. 계속 우리 집에 있었던 건데, 그것조차 희미하게 느껴지죠. 저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딱 한 번만 눈 뜨고 다시 기억해볼까?”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기억할 수 없다는 게 가장 슬프지 않을까?
저도 이 대사를 듣고 눈을 감고 떠올려봤어요. 우리 집 시계가 어떻게 생겼더라. 그런데 정말 생각이 잘 나지 않더라고요. 본다는 것과 기억한다는 게 다르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가 맨날 봤던 것들 것 기억하지 못했을 때 스스로에게 화가 날 거 같은 거예요. 감독님께서 직접 눈을 감고 생활해보았다는 건 정말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이네요.
시각을 제한하니까 ‘시계 초침이 어떻게 생겼더라’ 이런 것들이 궁금해지더라고요. 점점 궁금한 게 많아지니까 정말 화가 났어요. 아무도 저를 괴롭히지 않았는데 말이죠. “화가 나”라는 정우의 대사 역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내가 너에게 좀 예민하게 굴었어. 날 좀 이해해줘.” 하는 마음이 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담겼으면 하는 마음이었죠.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정우를 발로 쓰다듬는 상현의 장난에 분위기는 밝아집니다. 열심히 역사 수업을 듣는 듯하지만 열심히 대본을 수정하고, 반찬 그릇을 따라 천천히 젓가락질하며 반찬을 집어먹는 정우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등, 정우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받아들이는 상현의 작은 노력들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상현이 따스한 중심을 지닌 사람으로 느껴졌는데요, 감독님께서는 상현을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영화를 실제로 만들면서 빠진 부분인데요. 상현은 친구들이 계속 축구를 하러 나가자고 하지만 소설을 읽는 걸 더 좋아하는, 그런 설정이었어요. 상현을 따뜻하고 사려 깊은 사람보다는 아주 평범한 사람으로 두려고 했지만, 평범한 상현도 우리도 분명 관심을 기울이며 사려 깊은 지점이 있는 사람으로 비춰보고 싶었어요. 저는 그런 게 평범이라고 생각해요. 사려 깊을 수 있는 평범한 사람. 그런 우리를 대표하는 인물이 상현이 되었으면 했어요. 실제로 상현 역의 이지봄 배우도 너무 착한 분이에요. 그래서 조금 더 평균점으로 보일 수 있도록 일부러 더 거칠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천천히 눈을 감고, 손의 촉감과 주변 소리에 귀 기울여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는 상현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정우가 마주하는 세상을 상현이 잠시 마주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상현이 진짜 최종 녹음본을 완성하기 전 이 시도가 필수적이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해당 장면에서 소리가 섞여서 들리지 않고, 물소리, 농구공 소리, 지하철 소리, 사람들이 뛰는 소리가 각각 순차적으로 들리는 연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연출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하루 종일 눈을 감고 생활하는 건 무리가 있어서 매일매일 시간대를 나누어서 눈을 감고 생활을 했는데요. 점점 소리에 익숙해지더라고요. 인지할 수 있는 소리들이 생기니까 “아, 이래서 차종에 따라 배기음이 다르다고 했던 거구나” 이런 생각도 들고요.(웃음) 몇 시간 동안 차도 소리만 듣고 있었으니까요. 이 작품은 단편이다 보니 짧은 순간에 상현이 정우의 세상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바로 전 장면에 정우가 발소리로 사람을 구분하는 내용이 나오잖아요. “정우에게는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소리들이 각각 들렸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현도 영화 내용을 서술하는 게 아니라 소리들을 요소로 살리면서 해설 녹음 대본을 쓰게 되는데 상현이 직접 경험을 해서 깨닫는 장면을 넣고 싶었어요. 이 장면은 여러 방법으로 구상해봤어요. 처음에는 소리들이 모두 섞여 있다가 점점 흩어지는 등… 여러 방법을 생각했는데, 가장 간결하게 눈을 감았을 때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요소요소의 소리들이 들리다가 눈을 떴을 때 늘 자신이 듣던 대로 모두 뒤섞인 소리가 들리는 경험하는 것을 담게 되었어요. 각 소리마다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가 이 녹음을 하는 데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고요. 상현이는 눈을 감고 지하철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사람들 소리를 듣다가 눈을 떴을 때 그 요소들이 구성하고 있는 시각적 풍경을 마지막에 보여주는 식으로 연출하게 되었어요. 내가 들은 소리들로 마주한 광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음악이 매우 아름답게 담긴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대사 자체도 많지 않지만 두 사람은 매우 조용한 말씨로 이야기를 나누고요.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 있고, 영화 엔딩 역시 피아노 곡이 흘러나옵니다. 음악이 영화를 아름답게 만드는 큰 요소라고 느꼈습니다. 음악 및 사운드에 대해 조금 더 신경 쓰신 부분이 있다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일단 정우가 연습하는 피아노 곡이 영화 엔딩 곡이에요. 정우에게 피아노를 치는 설정을 부여했던 건 지금 정우에게 건반을 치는 것이 다채로운 행동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아직 정우는 사고 이후 시력을 잃은 것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인물로 그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피아노 음악을 만들었죠. 90년대 영화 엔딩 곡 같은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음악감독님께 부탁드렸어요. 음악감독님께서 8곡 정도를 들려주셨는데, ‘제가 1번 버전 일부분이랑, 7번의 일부분이랑 이렇게 섞어서…’ 이런 식으로 디테일하게 말씀드렸더니 정말 징글징글하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조각보처럼 꿰매 주신 음악이에요. 저희 영화에 음악은 딱 이 곡 하나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사운드 디자인으로 채운 경우라 이 한 곡에 고민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화면이 암전으로 넘어가고 2분 동안 사운드로만 채워지니 사운드 디자인을 같이 해 주신 프로듀서님과 고민을 많이 했어요. 강물 소리나 기차 소리가 선행되는 지점 등 신경을 많이 썼죠. 물에 빠진 구두를 들어 올려 품에 안는다고 했을 때, 저는 소리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가죽 마찰음도 생기더라고요. 그런 사운드까지 얕게 깔았는데, 있을 때는 잘 몰라도 없어지면 허전하더라고요. 그런 사소한 사운드들도 되게 신경 썼어요.
음악과 소리로 이루어진 엔딩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화면이 검게 변하고 모두 정우와 하나가 되어 영화의 한 장면을 감각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해당 장면을 연출하시면서, 관객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길 바라셨나요?
관객들이 정우와 동화되는 순간을 느끼길 바라기도 했지만 상현이의 성장 과정을 지켜본 관객들이 상현의 노력을 함께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컸어요. 사실 상현이 쓴 영화 내레이션이 완벽하지는 않아요. 소설을 읽는 상현의 느낌대로 관념적으로 표현되는 부분도 있고요. 이 영화를 완벽하게 설명한 내레이션은 아니지만, 정우의 마음으로 상현의 녹음본을 경험하는 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속에서 관객들이 정우의 감정을 느끼길 바랐고요. 배리어프리 영화를 제가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비슷한 마음을 느끼고, 한 번 정도는 배리어프리 영화를 생각하게 되길 바랐던 것 같아요.
문득 떠오른 질문인데요. 정우가 유독 〈우리가 꽃들이라면〉이라는 영화에 애착을 갖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어요.
우선 옛날 영화라는 게 중요했어요. 정우가 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정말 간단해요. 엄마가 되게 좋아해서 집에 비디오까지 있는 옛날 영화이고, 어렸을 때부터 수차례 봐서 이미 그 내용을 다 알고 있어요. 그런 영화 조차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 거죠. 영화 사운드가 조용해지니까 정우가 상현에게 무슨 장면인지 물어봤는데, 그냥 서있다는 대답을 듣고 정우는 정말 세상이 좁아진 기분이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 것도 있고요.
감독님께서 혹시 준비하고 계시는 차기 작이나 계획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장편을 쓰고 있습니다. 다들 이 단편을 보고 제가 따뜻한 영화를 쓸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분노밖에 남지 않는 그런 영화입니다.(웃음) 감사합니다.
'Community > 관객기자단 [인디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디즈 기획] 〈젖꼭지 3차 대전〉 백시원 감독 인터뷰: 가리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2) | 2021.07.28 |
---|---|
[인디즈 기획] 〈틴더시대 사랑〉 정인혁 감독 인터뷰: 잃어버린 ___를 되찾는 시간 (0) | 2021.07.27 |
[인디즈 Review] 〈우리는 매일매일〉: 든든한 우리와 매일이 모여 (0) | 2021.07.20 |
[인디즈 기획] 〈너에게 가는 길〉 변규리 감독 인터뷰: 모두의 행복을 위한 동행 (0) | 2021.07.20 |
[인디즈] 인디돌잔치〈야구소녀〉 인디토크 기록: 주수인의 새로운 챕터 (0) | 2021.07.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