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또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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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기자단 [인디즈] 정유선 님의 글입니다.
변화의 몸짓은 어쩌면 멀리뛰기나 높이뛰기보다 한 발짝 발을 옮겨보는 행위를 더 닮았는지 모른다. 그만큼 우리는 과거의 나에게서 멀어지기 어렵지만, 한 걸음이라도 발을 떼면 세상을 보는 시야 전체가 달라진다. 〈세자매〉 속 인물들은 눈 부릅뜨고 살아남아 자박자박 걷는다. 그 뒤에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박자박 걸음을 옮겨온 제작의 시간이 있었다. 이화정 기자의 매끄러운 진행과 함께, 공동 프로듀서로도 참여한 문소리 배우와 이승원 감독은 이 영화가 한 걸음씩 나아온 여정을 따뜻하고 진솔하게 들려주었다.
이화정 영화저널리스트(이하 이화정): 이 영화를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제목을 고르자면 ‘지독한 사랑’이 아닐까 싶었어요. 보는 117분 내내 속을 후벼 파는 것 같았는데요, 여러분도 여러 기억이 올라오지 않았을까 싶어요. 단순히 영화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나의 기억까지 불러일으키는 작품입니다. 오늘 〈세자매〉의 둘째 미연을 연기한 문소리 배우님과 이 영화를 연출한 이승원 감독님 자리하셨고요. 먼저 인사 들어보겠습니다.
배우 문소리(이하 문소리): 여기서 이렇게 뵙게 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제가 오늘 옷을 너무 얇게 입고 왔네요.(웃음) 그렇지만 뜨거운 열기로 대화 많이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이승원 감독(이하 이승원): 반갑습니다. 〈세자매〉 연출한 이승원입니다. 저도 오늘 객석에 앉아서 영화를 봤거든요. 관객 분들과 같이 호흡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도 〈세자매〉를 극장에서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 아닐까 싶어요. 마지막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화정: 오늘 마지막 상영이라고 생각하면서 보시니까 “내가 관객들에게 잘못했다. 이렇게 징글징글하게 만들어서 괴롭힌 거 아닌가” 이런 반성은 조금 안 드셨는지.(웃음) 감독님의 감상평을 듣고 싶은데요.
이승원: 혹시 이전에도 이 영화를 보신 분 계신가요? 와, 많네요.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한 번 더 보실 생각을 하시다니.(웃음) 저도 오늘 한 번 더 보면서 새로운 포인트에서 감정에 빠지게 되었던 것 같아요. 초반에 객석에서 너무 힘들어서 나오는 한숨 같은 게 느껴졌거든요. 영화가 주는 감정을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지만, 어쩌면 굉장히 필요한 감정이란 생각이 들어요. 쉽게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들도 많지만, 새롭고 느껴보지 못했던 혹은 잊고 있던 감정을 느껴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화정: 감독님은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저에겐 초반에 너무 웃긴 영화였어요. 문소리 배우님께서는 관객분들 반응을 많이 접하셨을 것 같아요. 이 영화를 만들 때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달라지거나 더해진 생각이 있을 것 같은데요.
문소리: 코로나 시국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많은 관객분들의 직접적인 감상을 전해 받고 소통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안타깝기도 해요. 그렇지만 이런 시국이라고 아무도 개봉 안 하면 그건 더 슬프잖아요. 그래도 뭐라도 개봉해야 될 것 같거든요. 그게 우리일 줄은 몰랐지만.(웃음) 그래도 많은 관객 분들이 봐주시고, 인상적인 감상평도 많았어요. 제 친구인 우미화 배우가 어제 이 영화를 봤나 봐요. 문자가 왔더라고요. “아주 지랄 맞고 좋다”(관객 웃음) “지옥을 체험하고 싶다면 2시간 동안 이 영화를 봐라. 그 끝에 뭔가 있더라” 이런 말씀해주신 분도 계시고. 제 지인들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결같이 “술 안 마시려고 했는데 네가 기어이 마시게 만드는구나” 그런 말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저녁에 술 먹기도 힘든데 미안하다” 이런 답변도 보냈고요.(웃음) 어쨌든 영화를 처음 만들 때의 마음이 많이 전해지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화정: 지옥, 징글징글하다, 지랄맞다, 이런 표현들은 좀 예상을 하셨을 것 같아요. 저는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아이들이 달릴 때부터 뭔가 쫓기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 영화 자체에 관객들도 쫓기고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요. 궁금하게 만들어요. 어떤 계기로 이 작품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주인공들이 달리는 이유를 좀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과거에도 달리고 있고, 현재에도 이들이 달리는 뒷모습을 좇아가는 이유.
이승원: 오늘 저도 보면서 유독 뒷모습이 많은 것 같다고 느꼈어요.
문소리: 우리 앞모습이 보기에 별로 안 좋았던 거 아니에요?(웃음)
이승원: 아아, 아닌데…(관객 웃음) 촬영하기 전부터 뒷모습이 주는 여운을 많이 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우리는 항상 사람의 표정에서만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의 뒷모습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마음들이 드러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이 인물들이 계속 움직이고,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면서도 바쁘고, 그러다가 이 영화의 목표점이라고 해야 할까요? 마지막 바닷가에선 이들이 안착하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관객들도 힘들게 그들의 뒷모습을 쫓아 뛰어가다가 마지막에 사진을 찍는 순간 마음이 좀 놓이지 않았을까 싶고요. 이소라 님의 노래가 한몫을 해주셨고. 여태까지 가져왔던 마음들을 놓을 수 있는, 그런 마지막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소리: 앞모습, 얼굴엔 가면을 많이 쓰고 있으니까. 뒷모습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더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마지막에 저희 셋이 앉아있는 뒷모습이 나오고, 사진을 찍고 넓은 바닷가를 셋이 걸어가고 있는데 저희 아역들이 멀리서 뛰어오잖아요. 저는 과거와 현재가 판타지처럼 공존하는 그 컷이 참 좋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과거의 기억과 불안한 정서들이 지금까지 배어 있고, 이 인물들은 그 힘든 기억을 붙잡고 어떻게든 나아가는데, 그 뒤에는 뭐가 있을까? 그걸 마지막에 횡으로 쭉 보여주잖아요. 우리의 상처든 기억이든 무엇이든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하나로 볼 수 있다면 용서나 화해를 하지 않아도 저렇게 과거와 현재를 한 번에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삶은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찍을 때는 몰랐어요. 해가 지기 전에 촬영감독님이 조금이라도 더 밀고 들어가시겠다고.(웃음) 모래 위에 레일 까는 게 어렵거든요. 레일 까느라 정신없는데 아역 배우들도 세워놓고 “지금 들어와!” 이러면서.(웃음) 해 지기 전 겨우겨우 찍었어요. 시나리오에는 없던 컷이었는데 영화를 완성하고 보면서 ‘이런 장면이 있어 세 자매의 삶이 참 다행이다’ 이런 느낌이 들었죠.
이화정: 그 장면이 없었으면 아까 말한 ‘지랄 맞은’것만으로 끝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난국의 세자매를 하나하나 따라가다가 마지막에 어떻게 끝낼까 고민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이소라 님의 노래는 언제 만나게 되신 거예요? 바닷가 장면과 그 노래가 이 영화의 어혈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승원: 제가 평상시에 음악을 즐기거나 항상 듣는 편이 아니에요. 음악적 지식이 넓은 감독님들도 계신데, 저는 거의 아는 게 없고요. 근데 그럴 때가 있어요. 어떤 감정을 느끼는 순간 우연히 흘러나온 노래를 듣게 됐을 때, 내가 느낀 감정 속에서 그 노래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서 딱 기억에 박힐 때가 있어요. 이소라 님의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는 운전하다가 듣게 됐어요. 그때 무의식 중에 ‘세자매가 마지막에 사진을 남기는데 이 노래와 함께하면 모든 게 풀리겠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음악을 틀고 시나리오를 썼는데요. 어느 순간 그 음악을 듣고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울컥울컥한 감정이 들었거든요. 그게 표현이 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소리: 처음부터 감독님이 엔딩곡은 이 곡이라고 하셨고요. 이소라 님의 ‘날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도 영화 중간에 넣었으면 했어요. 편집 때 넣어 보기도 했는데, 너무 슬픈 거예요. 이소라 님 목소리 자체가 캐릭터가 강하잖아요. 엔딩에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 이 곡만 넣게 되었는데 ‘날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도 촬영하면서 꽤 많이 들었죠.
이화정: 늘 이소라 님의 노래 가사를 들으면 사랑을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본 이후로 계속 〈세자매〉가 생각나고 어느 순간은 감정이 너무 밀려와서 듣다 멈추기도 했어요. 그럴 정도로 이 영화의 뭉친 곳들을 마지막에 풀어주고 영화가 끝난 뒤에 우리가 나눌 이야기를 떠오르게 하는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문소리: 이 노래를 요즘도 종종 듣는데, 들으면서 그런 위로를 받기도 해요. 어쨌든 저희 영화가… 투자 받기도 힘들었고, 끝나는 마당이니까 얘기하자면.(관객 웃음)
이화정: 돈 얘기부터 하실 건가요.(웃음)
문소리: 시작부터 투자 받기 어려웠어요. 거절도 많이 당했고. 시나리오 받고 촬영 들어가기까지 2년 동안 너무나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결국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개봉하고 관객들을 만나게 됐는데요. 코로나 때문에 영화계가 너무 어려운 시기지만 우리가 영화를 포기할 수는 없고. 또 저희 마음으로는 이런 영화를 포기할 수가 없고. 이런 마음을 ‘헛된 희망이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정상이 없는 산을 오르려 한다고 나의 무모함을 비웃지는 말아요’ 보이지 않는 길을 가려고 한다고 그것이 헛되다 말하지 말라는 가사가 저에게는 위로로 들렸어요.
이화정: 한국 영화계를 위로해주는 느낌이었군요.
문소리: 네. 그런 위로. 이런 영화를 만들겠다, 또 관객에게 전하겠다. 인디스페이스 오시는 관객 분들은 그런 마음 많으시겠죠? 앞으로도 이런 영화가 존재했으면 하는 마음. 저도 그 마음이 너무 큰데, 그 마음에 대한 위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소라 님은 신이다.(웃음) 여러 모로 날 울리는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화정: 사실 저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봤을 때 ‘이런 영화가 만들어진단 말이야?’ 하고 박수치고 싶기도 하고, 굉장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승원 감독님이 갖고 계신 색깔이 굉장히 강렬했기 때문이고요. 그리고 문소리, 김선영, 장윤주라는 배우가 보여줄 연기의 끝판이 활자만으로도 예상이 되었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미연이라는 캐릭터, 그리고 희숙과 미옥 모두 보통 영화에서 잘 안 만드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 거죠. 52평 아파트에 살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매일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인물. 이런 인물들이 영화 스토리를 전개할 때 매력적일까? 혹은 이게 투자가 될까? 이런 고민이 많으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미연이라는 인물, 영화에서 잘 건드리지 않는 중년의 여성을 끄집어낸다는 도전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이승원: 저도 시나리오 쓰면서 투자받기 힘들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문소리라는 배우가 있고, 김선영 배우도 있고, 장윤주 배우도 합류하고. 이런 단어로 확정 짓는 것도 우습지만 '여성영화'라고 할까요, 여자들의 모습으로 굴러가는 이야기를 한 곳은 받아주겠지,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적어도 한 곳은 “그래, 이거 돈도 그렇게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의미가 있겠다”라고 해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의외로 몇 년 동안 그 한 팀이 없더라고요.(관객 웃음) 그 많은 투자자 중에 한 팀이 없어요. 우여곡절 겪고, 여기저기 문 두드리면서… 당연히 예상했던 것들이지만 결국 현실의 벽을 많이 느꼈고요. 그래서 ‘앞으로 내가 이런 영화를 또 시도할 수 있을까?’ 겁나는 마음이 있죠.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어쨌든 이렇게 만들어져서 나왔잖아요. 그 ‘한 팀’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부터 결과적으로 영화가 세상에 나왔으니까 앞으로는 한두 팀이 더 생기길 희망하는 거죠. “그래, 그때 보니까 〈세자매〉가 나쁘지 않았더라” 하고 한두 팀 정도 나올 거라는 그런 희망을 기대해봅니다.
문소리: 지금 『세 자매 이야기』라는, 각본이 들어간 책도 나왔는데, 시나리오가 영화 보기 전에 읽는 것과 보고 나서 읽는 게 많이 다른가 봐요. 감독님 전작 두 편이 너무 강렬하고 과격해서 영화를 보기 전 '이승원 감독의 각본'이라는 것만 알고 읽으면 어렵게 느껴지나 본데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이승원 감독님 연극도 많이 보고 아는 사이라 그런지 전 되게 웃긴 부분이 많았거든요. 물론 발랄하게 웃기진 않지만 블랙유머가 있는 거죠. “우리 사는 게 꼭 그렇게 지랄 맞고 웃긴 순간들 있잖아.” 그러면서 봤는데, 몇몇 분들은 전작을 보고 시나리오를 보면 좀 으스스하고 너무 후벼 파기만 하는 느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세자매〉가 만들어지고 실제로 관객분들이 찾아오면 중간중간 웃으시기도 하고 우시기도 하셨어요. 앞으로 감독님께 그런 ‘한 팀’이 더 나타나기 쉽지 않을까요?
이승원: 앞으로 이런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문소리: 그럼 감독님은 이제 안 만드실 거예요?(관객 웃음)
이승원: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문소리: 이제 알탕 영화 만드실 거예요? 우리랑 바이바이 하고?(관객 웃음)
이승원: 아니죠, 아니죠.(웃음)
이화정: 지금 상태의 〈세자매〉 시나리오를 보았다면 모르겠지만, 앞선 작품 〈소통과 거짓말〉, 〈해피 뻐스데이〉와 감독님 연극만 보고 이 감독과 같이 하겠다고 한 것은… 물론 문소리 배우는 용감한 도전을 하는, 현재진행형 배우지만, 한편으론 굉장히 무모한 도전이라는 생각도 항상 들었거든요.(웃음) 왜냐면 이해받기 어려운 인물들이잖아요. 관객에게 전달되어 소통하기 전에, 배우들도 도전하기 쉽지 않은 속성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문소리: 저는 점점 더 재미없는 영화가 많아서… 내가 나이 들어서 이래요? 말하다 보니 자기반성을 하게 되는데. 비슷한 영화들이 나오면 지루하고, 뻔한 영화는 더 보기 싫고 그래요. 〈소통과 거짓말〉은 제가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었어요. 제 취향이 아니었고 감당하기도 힘들었고 놀라웠고요. 그런데 저는 자기 개성을 가진 작가들이 계속 한국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세자매〉를 만들 때에도 감독님의 개성이 대중과 좀 더 만날 수 있도록 계속 같이 고민했던 거고. 자기 색깔과 개성이 분명한 자기 할 말이 있는 작가들이 한국 영화계에 계속 나오고 존재한다는 것은 저에게도 너무 중요해요. 제 인생도 더 재미있어지는 거거든요. 위험하다, 무모하다 이런 생각보다는… 저는 그런 게 없으면 인생이 재미가 없어요. 해보는 과정이 우리에겐 재밌었고요. 재미없는, 백만 번 본 것 같은 안전한 작업만 하면서 보내기는 싫어요. 한 가지 믿음은, 감독님 전작이 취향에 안 맞는 사람은 분명히 있겠지만, 연극도 그렇고 감독님 작품엔 공통점이 있어요. 상처받은 사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 문제 있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가서 안아주는 느낌의 따뜻함도 아니에요. 그냥 똑같이 봐주는 시선. 네가 존재하는구나, 이 정도 시선조차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그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굉장히 멋진 출발인 것 같았어요. 그런 확신은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이 〈세자매〉, 세 여자에 대해서도 그런 이야기일 거라고 확신했고요. 누가 무모하다고 해도 그걸 하다 보면 재미가 있어요, 여러분. 권해드려요.
이승원: 여담인데요. 제 전작들이 다 여기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했거든요. 아마 한 400분에서 500분 정도 보신 것 같아요. 독립영화 중에서도 정말 적은 관객수예요. 인디스페이스에서 GV할 때, 〈해피 뻐스데이〉 같은 경우는 배우가 한 열댓 명 되는데 그중 한 여덟 명인가 게스트로 온 적이 있어요. 관객 분이 다섯 분 계셨고요.(관객 웃음)
이화정: 배우 분들보다 적은 수의 관객 분들이 오신 거예요?
이승원: 네. 〈소통과 거짓말〉도 관객 세 분 계시고 이럴 때 있었거든요. 여기 인디스페이스 프로그래머님이 너무 사람이 없으니까 지인도 불러서 앉히시고.(관객 웃음) 제 전작은 멀티플렉스에 걸리지 않았거든요. 독립예술영화관 중에서도 제 영화는 너무 세서 못 걸겠다고 하신 곳도 많았어요. 인디스페이스는 정말 끝까지, 모든 상영관이 내려갈 때까지 틀어 주셨어요. 그리고 “나는 좋은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안 오지?” 이러셨어요. 그래서 〈세자매〉 PD한테 “우리 인디스페이스는 GV하러 무조건 가야 된다. 나는 영화 찍으면 인디스페이스는 무조건 갈 거다. 여기는 정말 우리 같은 영화를 지켜주는 데다.”(웃음)
문소리: 보은 차원에서 오셨군요.
이화정: 박수 한 번 드릴까요?(박수)
이승원: 인디스페이스 많이 와주세요. 정말 보듬어 주시는 극장입니다.(웃음)
이화정: 영화가 너무 세서 틀어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이승원 감독의 세계에는 분명 그런 요소들이 있는데, 아까 문소리 배우님 얘기하신 것처럼 소외된 사람들을 우리와 똑같은 입장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시각이 있고요. 〈세자매〉도 전작에서 보여준 특징이 관객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표현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쨌든 ‘한 팀’이 계속 늘어나길 바라면서. 이제 관객 분들이 주신 질문을 받아볼게요. 가장 먼저 이런 말이 눈에 들어오네요. “사실상 80만 같은 8만 축하드립니다.” 네. 축하드립니다.(박수)
문소리: 감사합니다.
이화정: 최근에 개봉하는 영화들은 관객수에 몇 배수해줘야 맞는 것 같아요. 영화를 보러 오고 싶어도 못 오시는 분들이 많으니까요. 일단 제목에 대한 질문이 항상 많아요. ‘사남매’가 아니라 ‘세자매’로 제목을 지으신 이유가 있을까요?
이승원: 세자매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 막내 남동생이었다고 생각해요. 가정마다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것이 있잖아요. 가족의 가장 큰 슬픔의 기원일 수도 있고요. 그게 우리 영화에서는 진섭이라는 인물이에요. 마지막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나오게 되는데, 그때 비로소 세자매의 전체적인 퍼즐이 맞춰지면서 이들이 여태까지 끌고 온 답답한 감정들이 공유되고 극이 마무리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자매가 이렇게 올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라고 보아서 세자매에 주력하게 됐던 것 같아요.
이화정: 문소리 배우님께서 공동 프로듀서로서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는지 질문 주신 분도 계시고요.
문소리: 처음에 영화제 뒤풀이 같은 곳에서 감독님을 뵀어요. “영화 잘 봤습니다.” 하고 서로 인사하는데, 저는 감독님 영화도 인상적이었지만 김선영 배우의 연기가 너무 인상적이라 팬이 된 거예요. 그래서 얼른 그 배우한테 인사하고 싶었어요. 뭐 저런 배우가 다 있지 싶고. “다음에 우리 밥 한번 먹어요” 혹은 “술 한잔 해요” 이런 인사하듯이 감독님께서 “다음에 언제 작업 한번 같이 해요” 하시길래 “네, 뭐 시나리오 있으시면…” 그랬는데, 얼른 써보고 다 쓰면 전해드려도 되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아니, 받는 게 뭐가 어려워요, 쓰는 게 어렵지. “얼른 쓰시게 되면 주세요” 그랬는데 진짜 얼른 쓰셨어요. 너무 깜짝 놀랐어요.(웃음) 인사가 기억에서 잊히기도 전이라서 “어머, 진짜 왔네?” 그러면서 읽어본 거예요. 그런데 감독님이 시나리오 쓰시고 바로 보내셨나 봐요. 원래 시나리오 쓰면 투자도 좀 알아보고 여건을 만든 다음에 캐스팅을 시작하는데. 그냥 처음부터 저한테 주셔 가지고.
이화정: 날것 그대로요?(웃음)
문소리: 그 시나리오를 들고 감독님이랑 저랑, 감독님 전작 같이 했던 김상수 프로듀서랑 셋이 만나서 얘기를 했어요. “이거 괜찮은 것 같은데 만들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면서 영화진흥위원회 제작 지원을 해볼까 어쩔까 그런 회의를 몇 달씩 앉아서 같이 하게 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김상수 프로듀서가 저도 공동 프로듀서로 올라가는 게 어떻겠냐고 해요. “왜요?” 그랬더니 “지금 프로듀서 역할을 하고 계시다.”(관객 웃음) 직함을 하나 드릴 테니까 같이 하자고. 처음에는 좀 부담스러웠는데, “그게 도움이 된다면 그러죠.” 하면서 같이 하게 된 거죠. 〈여배우는 오늘도〉라는 작품을 연출하고 제작, 개봉까지 한 경험이 있으니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고요. 작품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프로듀서로서 참여할 수 있어 영화 제작 전반에 굉장히 큰 공부가 된 것 같아요. 또 감독님과 김상수 프로듀서님과 셋이 합이 잘 맞아서 서로 주력하는 부분이 잘 나눠지고 합의도 잘 됐고요. 그래서 얼굴 붉히는 일 없이… 그렇죠? 안 싸웠죠?
이승원: 그럼요. 네. 전혀 없었죠.
문소리: 전 과정에서 마음을 잘 맞춰 끝까지 올 수 있게 됐어요. 이런 과정에 대해서도 감사해요. 홍보할 때 제가 공동 프로듀서 했다고 하면 좀 더 사람들 관심이 가려나 싶어서 더 강조했지만 어쨌든 제 영화 인생에 큰 공부가 됐던 시간이었어요.
이화정: 그래서 항간에 ‘프로듀서여서 더 열심히 홍보 활동을 한다’ 이런 얘기도 떠돌고 그랬잖아요.
문소리: 그렇게 되더라고요, 사람이.(웃음)
이화정: 감독님이 러프한 시나리오를 보내신 게 큰 그림이신 것 같아요. 문소리 배우를 제작에도 참여하게 하시고 성공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또 이런 질문 주셨는데요. “영화를 볼 때 집이라는 공간이 눈에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리 즐겁고 행복한 집이 아니라 도망치고 싶고, 떠나고 싶은 공간으로 보입니다. 세자매에게 과거의 집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리고 성인이 된 후 각자의 삶을 살 때 집은 또 어떤 의미일까요?”
이승원: 그들이 같이 살았던 집은… 세 자매가 가장 벗어나고 싶었던 공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마다의 성격과 이유에 따라, 누군가는 아버지에게 모든 걸 굴복하고 복종하면서 빨리 떠나고 싶어 했을 거고. 누군가는 외면하면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을 것 같고. 그래서 어림짐작했을 때, 미옥은 말도 안 되는 남자와 결혼해서 떠난 것 같아요. 그런데 결국 과거의 집을 떠나 각자의 집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난 그렇게는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하잖아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해요. 대신 마지막에 이들이 바닷가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래도 나는 내 아이를 그렇게 키우지 않을 거야’라는 마음으로는 달라질 수 있다는 거죠. 실수도 하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동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지만, 그래도 ‘나는 이곳을 벗어나고 극복해낼 거야’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조금씩 달라질 거라는 믿음에서 이야기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아요.
문소리: 촬영할 때 에피소드인데요. 미옥이 집에서 첫 촬영을 시작했어요. 집이 다 세트가 아니라 로케이션이거든요. 그래서 그 집에서 관련 장면을 쭉 찍고 그다음에 희숙이네 집, 저희 집, 마지막 교회 찍고 다 같이 시골집으로 간 거거든요. 미옥이 집을 찍는 와중에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됐어요. 저희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좁은 집이잖아요. 다들 마스크 쓰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촬영은 이미 시작했는데, 잡아 둔 장소에서 촬영이 안된다고 다시 연락이 오는 거예요. 저희 아파트(미연 집)도 입주민들이 반대해서 새로 장소를 구해야 했고, 시골 집도 마을에서 반대해서 다시 구해야 했고요. 장소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 이 영화 찍을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거든요. 신실한 교인의 자세로. 주님의 품 안에 있어야 된다, 이런 마음으로 열심히 다녔는데.
이화정: 원래 불교 신자시래요.(웃음)
문소리: 촬영을 실제 집에서 하니까 스태프들이 화장실 쓰기도 불편하고 어디 밥 먹을 데도 없고 추운 겨울에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만큼 공간이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촬영하는 곳마다 바로 앞에 조그만 교회가 있는 거예요. 정말 작은 동네 교회나 개척교회. 그런데 목사님들이 모두 마음씨가 좋으신 분들이셔서 처음엔 저희가 차 댈 데가 없으니까 주차장을 써도 된다 그러셨어요. 그러시더니 점점 화장실도 써라, 식당도 써라. 그래서 저희는 시골에서도 그렇고 거의 매 촬영마다 교회에서 분장하고 밥 먹으면서 촬영했어요. 정말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웃음) 촬영장에서 김선영 배우랑 장윤주 배우랑 저랑 틈 나면 손잡고 기도했어요. “하나님 아버지 이번에도 저희에게 공간을 내어주시고, 보살펴 주시고…”(웃음) 도움을 많이 받고 촬영했어요. 지금 다시 한번 그 교회 목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승원: 미옥 집에서 촬영을 시작했는데, 작은 집이라 도저히 뭘 둘 데가 없어요. 그런데 바로 앞에 있는 교회 목사님이 짐을 두게끔 허락을 해주셨어요. 그 다음부터 우리 제작진은 가는 데마다 교회를 중심에 두고 장소 섭외를 한 거예요.(관객 웃음) 그런데 정말 가는 교회마다 저희를 받아주셨어요.
문소리: 그때가 교회 대면 예배도 중지되어서 대체로 비어 있기도 했어요. 덕분에 저희에게 장소를 내주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화정: 집사님 연기를 보면서 ‘문소리 배우는 언제부터 교회를 다녀서 이렇게 감쪽같이 진짜 교회 다닌 사람처럼 할까?’ 했는데 그런 절실함에 연기에 배어 있었군요. 질문을 좀 더 소개해 드릴게요. 이건 저도 궁금했는데, 사실 세 배우의 연기 스타일도 다르고 캐릭터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역할을 탐낸 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혹시 문소리 배우가 희숙을 연기했다면 어느 부분이 달라졌을까요?”라는 질문 주셨어요.
문소리: 와… 제가 희숙을 했다면… 모르겠어요. 김선영 배우처럼 할 자신이 없어요. 늘 모니터 보면서도 생각했어요. 내가 했다면 저것보다 재미없었을 거다. 장윤주 배우 연기를 보면서는 ‘저 캐릭터 내가 하고 싶다, 나도 좀 마음껏 소리 지르고 욕하고 술 먹고 주정 부리고 싶다’ 이런 생각을 했죠. 인내하는 연기 힘들어 죽겠다.(웃음) 근데 장윤주 배우에게 저랑 선영 배우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윤주야, 네가 앞으로 배우를 하면서 수많은 작품을 하겠지만, 나중에 지나 보면 알게 될 거야. 이렇게 자유분방한 여자 캐릭터는 거의 없어. 남편한테 먼저 하자고 그랬다가 다시 싫다고 그랬다가 이런 여자는 한국 영화사에 없었어. 앞으로도 거의 없을 거야. 너무 부럽다.”(관객 웃음) 그리고 김선영 배우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중간에 가편집본을 보다가 제가 베개에 머리를 묻고 울면서 소리 지르는 장면을 봤대요. “내가 미연이나 미옥이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는데, 그 베개 씬을 보고 "‘아 나는 저렇게 못했겠다. 나랑은 정말 다른 배우구나.’ 이렇게 생각했어.” 하더라고요. 저도 김선영 배우 보면서 그런 지점이 있었어요. 내가 했으면 저렇게는 안 됐겠다, 싶은. 서로의 연기를 모니터하는 것도 정말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이화정: 질문이 굉장히 많은데 다 소개는 못 해 드릴 것 같아요. 광고는 아니지만, 캐스팅과 여러 가지 이야기는 『세 자매 이야기』라는 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한 시간으로 마치기엔 너무 아쉽고 들을 이야기가 많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시간이 더 필요한 영화라는 생각이 매번 드는 것 같아요. 다음을 기대하면서 오늘은 아쉽지만 여기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관객 분들께 드리는 마지막 인사 들어 볼게요.
문소리: 오늘 “80만 같은 8만”이 든 날이에요. 그런 날 여러분과 이야기 나누게 되어 너무 기쁘고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나눌 이야기가 참 많은 영화이기도 해요. 그 마음이 모아져서 세월을, 시간을 이기고 사라지지 않는 영화, 나중에 제 딸이 컸을 때에도 볼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고요. 여러분도 이런 영화에 대한 마음, 애정, 변치 않고 많이 표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감사합니다.
이승원: 이렇게 독립영화전용관에 온다는 건, 이 영화를 선택해서 그 시간에 딱 맞춰서 오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더 값진 시간인 것 같고요. 저는 앞으로도 감독을 하고 영화를 만들 건데, 어쨌든 더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겠죠. 그래야 계속 감독을 하며 살 수 있겠죠. 그래도 저의 첫 시작 같은 영화를 이렇게 찾아 주신 관객 분들과의 시간을 잘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화정: 오늘 오신 분들 대부분 여러 번 관객하신 분들이라 ‘우수 관람객’인 것 같아요. 모두에게 박수를 드리며 다음에 또 좋은 시간 만들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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