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빛〉 리뷰: 은은한 밤빛도 누군가에게는 흔적을 남긴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정성혜 님의 글입니다.
인디즈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인디다큐페스티벌 정기상영회 인디토크 기록을 맡게 된 단편들 중 오래 기억에 남은 작품이 있었다. 제각기 다른, 그것도 각각의 색이 아주 뚜렷했던 세 편의 다큐멘터리를 엮었던 상영에서 유독 기억에 남았던 것이 김무영 감독의 〈랜드 위드아웃 피플〉이었다. 살던 아파트를 떠나야 할 상황을 마주한 재미 한인 이주자들을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은 이 영화가 가진 특이한 아름다움이 유독 기억에 깊이 새겨졌고, 〈밤빛〉의 상영 소식이 가끔 들릴 때마다 김무영 감독의 이름은 언제나 그때 그 작품을 봤던 시간으로 나를 돌려놓았다. 극장에 앉아 마주한 〈밤빛〉의 첫인상은 예상하지 못한 풍경이었지만 역시나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주인공 ‘희태’는 죽음을 목전에 앞둔 시한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전기도 통신도 시원찮은 깊은 산속에서 희태는 약초를 캐어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희태가 생활하는 공간인 산은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거의 바로 등장하는 겨울 산의 풍경을 마주하고 압도당하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말 그대로의 설산의 풍경을 넓게 배경으로 두고 그가 일상을 어떻게 보내는지, 영화는 덧붙이는 말 없이 그저 보여준다. 카메라는 주로 고정된 채로 인물이 풍경 안에서 행동하는 것을 조금 멀리서 보여주는데, 이러한 방식의 연출로 인해 더욱 대자연의 존재감이 부각되기도 했다.
겨울을 지나 영화의 시간은 여름으로 건너뛰고,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가던 희태에게 오래전 연락이 끊긴 전 아내의 아들 ‘민상’이 찾아온다. 희태의 상황을 닮은 듯 고요하던 설산의 풍경 역시 푸르른 생기를 띄는 생명력의 공간으로 분위기가 바뀐다. 산 중턱에 위치한 희태의 집으로 가기 위해 두 사람은 도로변에 위치한 짧은 돌다리를 건너는데, 희태의 공간인 산에 민상이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 장면은 영화의 말미에 민상이 떠나면서 비슷하게 다시 한번 반복된다.
〈밤빛〉에는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같은 산을 오르내리는 행위 자체가 그러하듯이, 영화는 같은 풍경 속 반복되는 행동과 그로 인한 인물들의 변화에 주목한다. 영화의 주된 장소인 산이라는 공간에 조금 더 주목해보면,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공간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변함없이 있는 듯하다. 산도 그러하지만 해가 뜨고 지는, 어떤 것도 멈출 수 없는 대자연의 섭리 같은 것들. 계절과 시간에 따른 풍경의 변화를 제외하면, 자연은 어떠한 변주의 공간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적 공간이 인물과 만나 개인적 공간이 될 때, 예를 들어 희태가 매일같이 다니던 산을 민상과 함께 오르며 이야기 나눌 때, 겉보기엔 다를 바 없는 어떤 풍경은 잊지 못할 순간이 되어 흔적을 남긴다. 또 관객에게도 영화에 몇 번이나 등장하는 산 정상과 해가 뜨는 찰나의 풍경은 매 장면이 크게 다를 것 없는 풍경이지만, 계속해서 변화하는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을 따라간다면 매번 다른 감흥을 주는 특별한 매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목인 ‘밤빛’이라는 단어를 곱씹어보면, 영화가 품고 있는 은은한 빛들이 떠오른다. 야광별과 촛불, 희태가 혼자 오르는 산길을 밝혀주는 손전등과 밤과 아침 사이에서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까지도 떠오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외로움과 고독으로 삶의 마지막을 보내던 희태의 밤에 새어 들어온 빛 같은 존재인 민상을 가장 잘 표현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희태에게 민상이 그러했듯, 두 사람이 산에서 함께 보낸 2박 3일의 기억에서 어떤 빛은 민상의 마음에 남아 언젠가 마주할 어두운 순간을 밝혀줄 밤빛으로 떠오를지도 모른다. 〈밤빛〉은 비록 서로를 환하게 밝혀줄 햇빛은 아니더라도 마음 한구석을 아스라이 밝히는 밤빛과도 같은 애틋한 관계를 보여주며 인상적인 아름다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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