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를 무시하고 전주에 다녀왔습니다
: 겨우 13시간 (아주 작은)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 방문기
*익명의 인디즈 작성
5월 2일, 전주에 다녀왔다. 그 다음 주에 발표 2개와 과제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기란 쉽지 않아 가는 발걸음은 무거웠고, 전주제 일정도 전날 밤 10시에서야 결정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갔다. 막상 전주 ‘영화의 거리’ 앞에 도달한 순간 내 두 발은 가벼워졌고, 나는 이미 앞만 보고 걷는 관객이 되어 있었다. 발표? 그게 뭐였더라.
영화제의 재미는 너무 많아 다 열거하기도 숨이 차다. 앞으로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영화를 마주하는 것, 내가 살던 곳을 떠나 오로지 영화를 애정하는 마음만이 가득한 동네를 거니는 것, 하루를 영화로 채워도 지치지 않는 신비로운 체력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영화를 통해 마주하는 반가운 얼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전주에 오면 유독 그렇다. 바쁘게 살아 스쳐가던 사람들이 여유를 내 이곳에 모인다.
오전 10시, 전주역에서 빠져나와 버스를 기다리던 나는 무심코 돌린 고개 끝에서 같은 학교 선생님을 마주쳤다. "어? 선생님도 오셨군요!" "긴가민가 했어요! 선생님도 역시!"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후 함께 탑승한 버스 안에서 둘은 잔뜩 떠들기 시작했다. 어떤 영화를 볼 건지, 며칠이나 볼 건지, 어떤 영화를 보고 싶은지. 나는 첫 영화 〈관리처분계획-미아리 텍사스 편〉(장윤미)를 보기 위해 먼저 하차했고, 선생님은 중부비전센터에서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이장욱, 이민휘) 를 본다며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관리처분계획-미아리 텍사스 편〉는 장윤미 감독의 작업으로, 성북구 미아리 재개발을 깊숙이 흡수한 영화였다. 3부로 나뉜 영화는 초반엔 사진 이미지로, 이후엔 투쟁하는 몸짓으로, 마지막엔 기나긴 인터뷰로 진행된다. 성매매업소 청산이라는 정치적 목표 아래 삶의 터전이자 노동지를 잃게 된 이들의 세세한 삶을 포착한다. 살아 숨 쉬는 이들의 격동하는 몸짓과 진솔한 이야기들은 보편적인 감각을 스멀스멀 깨웠고, 간신히 지대에 발을 걸친 처지에서도 서로에게 앞다투어 손을 뻗는 연대의 감정이 범람하는 듯했다. 색안경으로 인지하지 못했던 그들의 일상을 과감하게 미시적으로 훌쩍 접근하는 태도와 그럼에도 시대와 법, 인권과 노동 등 복합적으로 얽혀있어 규정하기 조차 어려운 미아리의 정체성은 굳건하면서도 ‘한’의 떨림이 있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나는 다음 상영관을 향해 뛰쳐나왔다. 다음 영화는 〈토우〉(스테퍼니 랭)였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 지연이 길어졌다.. 속이 타들어 가던 와중, 친절한 또래 여성분의 택시 동행을 제안했다. 망설임 없이 탔다. 덕분에 전북대학교에 신속히 도착할 수 있었다. 영화제에서만 가능한 장면으로 서로 이름도 모른 채 잘 보라는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좌석으로 흩어졌다.
스테퍼니 랭의 〈토우〉는 노숙인 여성이 견인된 자신의 차를 되찾기 위해 벌이는 깜찍한 투쟁 영화였다. 홀로 딸을 키우는 어맨다는 주차 자리를 전전하며 차 안에서 노숙 생활을 이어가지만 딸에게조차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지 못한다. 강아지 관리사로 취업이 되는 순간, 마치 김첨지의 운수 좋은 날처럼 예상치 못한 사고가 터지는데, 유일한 집이었던 차가 사라진 것이다. 차를 돌려받기 위한 소동이 시작되지만, 가난한 처지에 알코올 중독, 솔직하지만 가끔은 얄미운 말투, 그리고 요지부동한 대형 견인 업체의 태도가 겹겹이 가로막는다. 그럼에도 어맨다는 1년간 자신의 소신대로 법정에 서고, 뻔뻔하게 침대도 얻어내고, 주변인들의 도움 속에서 성실하고 진솔한 매일을 살아낸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삶의 아름다움을 집요하게 쫓는,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영화가 끝난 후 갑자기 연락이 왔다. "나도 이 영화 봤어!" 매번 밥 먹자, 얼굴 보자 '말만' 하다가 결국 작업장에서나 마주치던 대학 동기 언니였다. 보자마자 셋로그를 켜서 인사를 대신했다. 첫 영화제라는 언니에게 요목조목 감상을 물으며 잠시간을 짬내어 빠듯한 공동 계획을 세웠다. 제한 시간은 각 30분씩—밥, 문화공판장 작당, 순수한 대화와 이동.
문화공판장 작당으로 질주한 우리는 [100 Films 100 Posters]에서 100개의 포스터를 "우와~" 연발하며 즐겼다.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나의 원픽 포스터는 장률의 〈춘수〉였다. 지난해엔 시간이 없어 엽서 구매로 퉁쳤는데, 역시 실물로 보는 것만 못하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 그 안에 기획전 [시네마 타운]에 이르러선 반가운 공간들이 보였다. [애관극장]에서는 작년 초에 촬영을 했었다. 추운 날씨에 유난스러운 촬영팀의 무지막지한 요청을 너털웃음으로 받아주던 곳인데,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새삼 더 멋진 공간이구나 싶었다. [시네마테크 KOFA]에서 정시 상영에 맞춰 헐레벌떡 뛰어들던 기억도 생생했고, [광주극장]이 배경이었던 〈버텨내고 존재하기〉를 보았던 날도 떠올랐다.

그러나 타임어택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빠르게 전시를 보고 경보로 영화의 거리에 닿아 냉면을 해치웠다. 급하게 젓가락질을 하면서도, 습하고 더운 날 시원한 기운이 들어오자 절로 "살 것 같다"는 말이 새어나왔다. 빠르게 형식적인 인사를 마치고 "어디선가 또 보겠지" 하며 각자의 상영관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번 영화는 올해의 프로그래머 변영주 감독의 〈내일을 위한 시간〉 스페셜 클래스였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으로, 팬심에 앞서 사진부터 몇 장 급히 찍었다. 사실 영화제에 가면 몇 가지 버릇이 있는데, 조금이라도 덜 휘발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GV 메모를 적는 일이 그중 하나다. 이번에도 다급하게 남긴 메모를 몇자 읽어보면 이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대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의 세계 안에서 문장이 나오는 것". 영화적 사유를 머릿속에 꼭꼭 새기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이 습관이 결국 내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데 일조한다는 감각을 얻은 이후, 조금 더 가볍고 재미있게 영화제마다, GV마다 실천 중이다.
약 3시간 후 상영관을 나오다 이전 영화제에서 함께 자원봉사를 했던 지인을 마주쳤다. 매번 영화제와 예술 영화관에서 아주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이다. 우연치고는 꽤 잦다. 영화를 향한 사랑이 어마무시하다는 증거겠지싶다. 반가움은 저편에 두고, 바쁜 그녀를 붙잡을 새도 없이 자리를 옮겼다. 이번엔 서울에서 보던 학교 선생님들을 잠시 만나러 향했다. 타지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치는 감각은 매번 신선하고도 묘하다. 어떤 영화를 봤는지, 어떤 영화를 보고 싶었는지, 좋았는지, 자연스레 새어나오는 이야기의 흐름을 유유히 유영했다.
여기서부터 진짜 타임어택이 시작되었다. 목표는 11시 20분 마지막 기차를 타고 본가 대전으로 향하는 것. 서울행 기차는 전부 매진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영화는 파브리스 아라뇨의 〈호수〉였다. 영화가 끝나는 동시에 택시를 잡아야만 간신히 몸을 뉘일 침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입장했으나, 〈호수〉가 펼쳐내는 너른 풍경들에 초조함은 잊은 지 오래였다. 한 커플이 제네바 호수에서 요트 경주에 참가한다. 그러나 명목상의 경주의 의미는 어느새 사라진 채, 인물들은 세찬 바람을 온전히 맞으며 파도를 따라 움직이고 배 위에서 숨쉰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이미지들 속에 아름다움이 현현되고, 예상치 못한 자연의 변덕은 승화되어 시공간을 유려하게 넘어선다. 쏟아지는 이미지들을 하나씩 짚고 만져가며 체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기도 전에 마음속으로 크게 박수를 치고 상영관을 뛰쳐나왔다. 간신히 택시를 잡고, 기차를 탔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전주영화제 리뷰집에 실린 안성기 선생님의 배우론(〈잠자는 남자: 안성기 배우론〉, 금동현)을 읽었다. 어느새 내가 전주영화제를 온 것이 7번째였는데 귀갓길이어서 그런가 묘한 생각들이 깊어졌다. 시간의 무상함이 깊게 마음에 일렁였다. 그렇게 새벽 1시, 대전에 도착했다. 이제야 배가 고파진 나는 협찬품 중에서 짜파구리를 꺼냈다. 한편 아빠는 도착 1시간 전에야 갑자기 딸이 들이닥친다는 연락을 받았음에도 자연스레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느 영화제를 가든 중간에 집(대전)이 있다는 사실과, 데리러 와줄 누군가의 존재는 나를 아주 용맹하게 ‘무한 도전’으로 이끄는 것 같다. 다치지만 않으면 된다라는 마음은 항상 자유롭게 거니는 자세로 표상된다. 짜파구리를 빠르게 한 그릇 비운 후, 나는 낼 모레 발표를 준비 위해 니콜라 부리요의 『포스트 프로덕션』을 펼쳤다.
약 13시간을 체류한 전주에서, 알뜰하고도 살뜰하게 영화도 보고 반가운 얼굴들도 마주했다. 이번에 전주영화제에서 이전에 참여한 작품도 한 편 상영되었는데, 시간 여유가 없어 스태프들과 만나지 못한 건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도 "또 보면 되지요"라는 작은 위안을 서로에게 건넸다. 스마트폰 중독자에게 폰을 들여다보게 하지 않고, 줄지 않는 배터리를 선사하는 하루는 매우 귀중하다. 고민과 상념으로 허우적거리는 나에게 암흑의 밀실에서 손발을 묶고-실제로는 안 묶지만-영화를 보게 하는 감각은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서게 하는 묘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4편이나 보았으니 그 시간을 생각해 보면, 거의 오늘의 나는 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면 더 행복했을 테지만, 잠시라도 다녀옴으로써 또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견딜 힘을 얻었다. 그러면, 전주 다음에 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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