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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 같은 건 없을지라도
〈생명의 은인〉 그리고 〈겨울잠〉
*관객기자단 [인디즈] 강신정 님의 글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내게 인사하는 거라 믿고 싶은 순간이 있다. 나뭇잎이 정말로 나를 반가워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임을 알지만, 진실은 중요치 않다. 신의 존재 여부가 불확실해도 때론 신앙을 갖게 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특히 믿고 싶은 무언가가 신이 아닌 인간이라면 우리는 더욱 멍청해지고 싶다. 그가 믿음직해 보이지 않아도, 그가 내민 손길이 착각에서 비롯된 우연일 뿐이라도, 그를 구원자라 믿으면 그는 나의 구원자가 되고 그의 손길은 분명 구원이 될 수 있다.

영화 〈생명의 은인〉의 ‘세정’도 그 앞에 나타난 출처 없는 ‘은숙’을 믿어버린다. ‘은숙’은 보호가 종료된 자립준비청년 세정에게 본인이 세정을 어릴 적 구해낸 생명의 은인이라 주장한다. 수술비가 필요하다며 자립준비금 500만 원으로 은혜를 갚으라는 은숙은 누가 봐도 수상하다. 그럼에도 세정은 믿고 싶다. 졸업식에 엄마처럼 등장하거나, 사기꾼으로부터 돈을 되찾아주거나, 내 생일을 기억해 미역국을 끓여주는 일은 지금 세정에게 필요한 일이며 은숙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은숙의 실상과 범행, 그리고 세정을 구했던 진짜 이유를 알게 되어도 세정은 은숙을 미워하지 못한다. 은숙에게서 더 이상 구원자 같은 신성함은 발견하지 못할지라도, 그의 존재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세정에게 구원이 되어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의 은인〉이 모든 진실을 알고도 여전히 구원으로 남은 서로를 말하는 반면, 영화 〈겨울잠〉은 진실을 알 수 없는 짧은 만남에도 구원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대학생 ‘구병’은 어느 겨울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 남쪽 끝으로만 가면 모든 일이 잘될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에 기대어 떠난 길에 그는 노인 ‘조송’을 만난다.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조송은 구병의 자전거 문제를 도와주고 구병을 아들이라 부르며 집으로 데려가 밥까지 먹인다. 젊은 날엔 맨손으로 고래를 잡았다며 허풍을 떠는 노인의 눈에서 구병은 외로움을 발견한다. 왜 자신을 아들이라 부르는지 이해하지 못하던 구병이, 자신을 배웅하는 조송에게 조송이 좋아하는 소주 세 병을 건네며 조금씩 마시라는 아들 같은 걱정까지 건네게 된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진실을 감춘다. 구병이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조송의 아들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아들이 있긴 한 건지, 조송이 구병을 아들이라 부르는 마음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런 내막 따위 알지 못해도, 서로의 외로움을 눈치채주는 일에는 서로의 존재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를 아들이라 부르는 낯선 이에게 기꺼이 아들이 되어주는 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에게 구원이 되어주는 건 대단한 서사를 지닌 구원자가 아니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근거도 없이 나타나 500만 원을 달라는 은숙에게 쉽게 기대는 세정은 너무 순진하다. 사정이 어렵다고 해도 반복적으로 사기를 저질러 온 은숙의 과거가 용서되지 않는다. 낯선 할아버지를 따라 집까지 가는 구병이 이해되지 않고, 온종일 술을 마시며 허풍을 떠는 조송의 말들은 진실일까 의심하게 된다.
그럼에도 결국엔 은숙과 세정의 감정선을 이해해 버리고 만다. 조송과 구병의 만남을 운명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에서 구원을 찾는 건,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그 구원이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허구일지라도 나의 현실로 영화를 끌어와 구원자라 부르는 순간, 관객은 분명 구원받는다.

신 없이도 가능한 신앙. 구원자 없는 구원.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평론가 신형철은 이렇게 정의했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 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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