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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단평] 〈귀신들〉: 정처 없는 생

by indiespace_가람 2025. 4. 21.

*'인디즈 단평'은 개봉작을 다른 영화와 함께 엮어 생각하는 코너로,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인디즈 큐'에서 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정처 없는 생

〈귀신들〉 그리고 〈소공녀〉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보민 님의 글입니다.


동네 풍경을 떠올려본다. 옆집에 부부가 이사 왔다. 아이가 자란다.
또 다른 집이 이사 왔다. 젊은 청년이 자리를 잡는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 독립하자, 나이 든 부부에게 집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부부가 이사한다.
오랫동안 시험을 준비하던 청년은 시험에 합격해 어엿한 사회인이 된다.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하는 청년도 이사를 간다. 양옆 집이 빈집이 된다.

나도 슬슬 새로운 거처를 알아보고 이사한다. 나의 집과도 같았던 그 동네는 더 이상 내 삶의 테두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귀신들〉 스틸컷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집을 옮겨 다닌다. 마치 헌 껍데기를 두고 새 껍데기를 찾는 소라게 같다.

옴니버스 영화 〈귀신들〉은 육체라는 껍데기를 옮겨 다니는 다섯 종류의 AI를 보여준다.

남의 몸으로 둔갑해 돈을 빼앗는 피싱 AI, 인간 대신 주택담보 대출을 갚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1인 가구 AI, 입양되었다가 가족에게 버려진 어린이 AI, 지나간 인연에게 작별 인사를 전하러 온 패신저 AI, 자신이 인간이라고 착각하며 자신을 학습하는 AI를 경계하는 AI. 이 다섯 AI에겐 공통점이 있다. 집 없이 그저 원형의 몸을 빌려 잠깐 살아가는 것. 그리고 몸의 수명이 끝나면 복제된 새로운 몸으로 이사하는 것이다. 마치 귀신들이 떠도는 것과 비슷하다.

완전무결할 것 같던 AI는 인간만큼이나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오류가 없도록 설계된 줄 알았는데 자신이 누구인지를 착각하고, 걱정이나 불안 따위 느끼지 못할 것 같은데 대출을 갚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또다시 가족에게 버려질까 봐 불안해하며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돈다. 그렇게 영화 속 AI들을 추적하다 보면 결국에는 우리의 삶과 많이 닮아있다.

어쩌면 그들도 껍데기의 유한함이 견디기 힘들지도, 집이 없어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 〈소공녀〉 스틸컷


집이 없어 떠도는 인물이 또 떠오른다. 〈소공녀〉 속 ‘미소’는 바라는 게 단순한 인물이다. 그저 담배와 위스키를 즐기며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것뿐. 그런데 물가 상승이라는 벽 앞에 자신이 가진 것 중 무언가는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집 외의 선택지 중에서 포기할 것을 고르겠지만, 미소는 기꺼이 껍데기를 포기한다. 세 들어 살던 집을 반납하고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하는 것이다. 껍데기보다 더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정처 없는 삶이 나쁜 것일까? 사실 이 모든 이야기를 돌아보면, 서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곳곳에 있는 이야기 같다. 유한한 삶의 굴곡 속에서 때로는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고, 금전 문제에 시달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과감하게 손에 쥔 것을 놓아버릴 줄 아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서 질투가 난다. 일이 성공해 안정을 찾을 때도, 실패해 길을 잃고 떠돌 때도 있다.

기꺼이 껍데기를 버리는 용감한 우리를 위하여, 아등바등 껍데기를 지키는 끈질긴 우리를 위하여. 또 새 껍데기로 이사하는 출발점의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지나오는 갖가지 삶에 위로를 던져본다.


*작품 보러 가기: 〈소공녀〉 (전고운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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