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부터 탈출하기
〈여행자의 필요〉, 〈잠자리 구하기〉, 〈힘을 낼 시간〉의 과거와 기억
안소정 /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관객기자단 인디즈
연말과 새해를 맞이하는 시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미래를 계획하고 더 나은 자기 자신을 꿈꾼다.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 모여 현재의 내가 되었듯, 그 위에 한 해가 더 쌓인다면 나는 얼마나 변화할 수 있을까? 변화한다면 어떤 방향일까? 내가 아닌 내가 되고 싶은 마음과 새해 다짐은 얼마큼의 거리를 두고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품은 채 2024년에 개봉하여 관람한 독립영화들을 되돌아보며, 내가 아닌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담긴 세 작품을 골랐다. 이 작품들에서 과거와 기억은 나로부터 탈출하기'와 '나와 함께 살아가기' 사이에서 계속해서 흔들린다. 2024년에 만난 과거가 키워드인 영화들의 기억 방식을 복기하며 자주 잊어버리다가도 문득 다시 떠올릴 새해 다짐을 적는다.
2025년은 과거와 마주하며, 그 속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나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과 나와 함께 살아가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지금까지의 시간 위에 한 겹이 더 쌓이고 기억이 늘어간다. 기억을 가진 채 살아간다는 게 버겁기보다 위안이 되는 순간이 더 많기를 바란다.
〈여행자의 필요〉
- 미끄러지는 말들 속에서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한 여행
프랑스에서 온 과거를 알 수 없는 인물인 이리스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독특한 불어 수업을 진행한다. 여행할 때나 쓸 수 있는, 길을 묻거나 물건의 가격을 묻는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아주 깊은 이야기를 불어로 할 수 있게 만드는 수업을 지향한다고 이리스는 말한다. 이리스가 각기 다른 인물과 함께하는 수업은 비슷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이리스는 자신의 수업을 듣는 상대방에게 악기를 연주하고 난 뒤 어떤 감정을 느꼈느냐고 묻는다. 상대방은 뭘 느꼈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악기 연주를 좋아해서 "Happy" 했다고 답한다. 이리스는 원하는 답이 아니었는지 다시 같은 질문을 한다. 이번에는 멜로디가 아름답게 느껴졌다는 답이 돌아온다. 이리스는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무슨 감정이 들었느냐고 재차 묻고, 상대방은 솔직히 원하는 만큼 잘 연주하지 못한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예전보다 나아졌고 점점 나아지는 자신이 아주 조금 자랑스럽다고 덧붙인다.
이리스는 상대방에게서 무언가 깊은 얘기를 끄집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어가 아닌 영어로 말하기 때문인지, 잘 모르는 사람인 이리스에게 털어놓기 어려운지, 상대방은 피상적인 이야기에 머무른다. 모든 인물은 영어로 원하는 말을 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적확한 단어를 고르며 드문드문 말을 멈춘다. 즉각적으로 맥락과 뉘앙스를 느낄 수 있는 모어와 달리 영어로 발화하는 게 일상적이지 않은 인물들은 '말하는 나'에서 한 발짝 떨어진다. 말하고 싶은 것보다 말할 수 있는 것에 머무르거나 표면적인 부분에 머무른다. 자기 자신과 완전히 일치될 수 없는 발화는 틈을 만들고, 점점 화자가 직접 감각할 수 있는 세상과 조금씩 거리감이 생기며 미끄러진다.
"내가 기니피그가 되는 것이군요?"라고 묻는 원주에게 이리스가 다른 목적은 없다고, 장기 같은 걸 가져가는 흉악한 사람이 아님을 주장하는 장면이 이런 미끄러짐을 보여준다. 이해할 수 없는 불어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이리스의 불어 수업을 듣는 인물들, 한국어도 불어도 아닌 영어로 서로에게 말하고 듣는 인물들, 그리고 관객 역시 한국과 프랑스의 배우가 영어로 말한 대사를 한국어로 번역한 자막을 읽는다. 언어로부터 시작된 틈이 작품 전반에 감돈다.
이리스는 감정을 묻는 자신의 질문에 학생이 영어로 답하면 볼펜과 인덱스 카드를 꺼내 그 내용을 쓰고 소리 내 불어로 읽기 시작한다. 방금 상대방이 말한 내용이 토대가 되었지만, 사뭇 다른 내용이다. 그 내용의 끝에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이 존재는 누구인가’가 반복된다. 이리스는 방금 자신이 말한 내용을 적은 인덱스 카드를 상대방에게 건네며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라고 안내한다.
이리스가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로 말할 때는 상대의 말을 불어로 바꾸어 말하며 인덱스 카드에 적을 때나 도서관 앞에서 만난 이에게 윤동주의 시를 불어로 번역하여 읽어줄 때뿐이다. 상대방은 이리스가 불어로 말하는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리스가 적확한 번역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이리스가 말한 내용은 상대방이 미처 말하지 못한 깊은 부분을 짐작해서 말하는 것 같지만 이리스가 상대방의 말에 자기 자신을 투영한 결과물로 보인다. 수업을 듣는 학생에게 이리스가 말하고 적어주는 '내가 아닌 내가 되고 싶은 나'라는 구절이 반복될수록 이리스가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하는 중인지 의문이 생긴다.
"기억에 빠져버리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야 해요."라고 악기 연주 중인 인국에게 말하는 이리스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이리스는 다른 인물들의 기억이나 감정, 과거를 묻지만, 한 번도 자신의 기억이나 깊은 감정을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리스의 가장 사적인 면에 접속한 인물은 인국이다.
낯선 이리스의 존재에 수상함을 느낀 인국의 어머니 란희는 인국에게 이득 없이 움직이는 사람은 없다며 인국이 이리스에게 뭔지, 이리스가 인국에게서 무슨 이득을 얻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타박한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리스는 한국에서 머물 곳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국과 함께 지내는 것 같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인국이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보아주는 것 때문에, 속세에서 도를 닦는 것 같은 맑은 영혼을 지녔고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최대한 사실에 근거해서 살고자 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국 역시 이리스가 자신을 재능 있는 시인으로 보아주기에 이리스에게 마음을 활짝 연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인국과 이리스는 나 아닌 다른 사람, 내가 느끼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욕망을 서로에게 충족시켜 주고 있다. '나'라는 사람은 결국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된다. 이리스가 여행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히 장소나 편의가 아니라,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과거로부터 벗어나면서 누군가가 자신을 새로운 모습으로 발견해 주길 바라는 욕망으로 보인다.
이리스는 '나'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을 아는 이들이 없고 언어가 다른 곳에서 '나'라는 존재도 바뀔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짐작하건대, 과거의 이리스는 지금과 같은 여행자의 방식으로 살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 갑자기 뚝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리스는 정서적, 문화적 뿌리가 다른 곳에서 새로운 '나'를 형성하고 있다. 축적된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난 자리에서, 새로운 삶을 실험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인국은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집을 나선 이리스가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자, 그녀를 찾아 나선다. 첫 만남과 마찬가지로 인국은 근린공원의 어딘가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누워 있는 이리스를 찾아낸다. "당신이 나를 찾아냈군요!"라고 말하는 이리스는 기뻐 보인다. 이리스에게 인국은 자신을 두 번이나 발견해 준 사람이다. 어딘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지만 누군가가 나를 발견해 줬으면 하는 마음 역시 여행자의 마음이다.
하지만 이리스와 인국의 관계에도 균열은 있다. 이리스는 자신을 친구로서 좋아하느냐고 인국에게 묻고, 인국은 그렇다고 답한다. 이리스는 두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고 인국은 두 번이나 같은 대답을 한다. 이리스의 얼굴에 짧게 그늘이 진다. 서로 다른 마음을 품은 채 두 사람은 두 사람의 집으로 향한다. “그곳이 나의 집인가요?"라는 질문을 품은 채.
〈잠자리 구하기〉
- 과거는 현재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있다는 감각
다큐멘터리 〈잠자리 구하기〉에 흐르는 시간은 나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한 유예의 시간이다. 고등학교 3학년 교실 풍경이 담긴 기록은 자신을 긍정하기 어려운 환경을 이루는 요소들을 보여준다. 수능 디데이가 다가오는 교실에서 학생들은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한 시간을 보낸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장래 희망' 기입란은 미래가 직업과 대학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도록 상상력을 축소시킨다.
교실에서 노트북 앞에 앉아 소리 내어 쓴 자기소개서를 마지막으로 읽어보며 최대한 공적인 표현을 쓰는 동시에 '너무 아는 척하는 것 같을까 봐 염려하는 모습은 대학 입시에서 뭔가를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동시에 너무 많이 아는 척하지는 않는, '청소년다움'을 요구하는 모순적인 잣대를 상기시킨다. 자기소개서는 효용이나 능력과 무관한 자신의 모습을 소거하고 누군가에게 논리적으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쓰인다. 특기자로 갈 것도 아닌데 왜 영상을 찍고 영화를 만드느냐는 선생님의 말 또한 꿈으로 둔갑한 대학 입시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교실 풍경에 얹어진다. 점점 줄어드는 디데이 숫자와 반비례하면서 자조 농담을 하고 웃는 학생들의 모습과 함께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을 구성하는 순간들이 쌓인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지만,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이란 가능성이 열린 상태로 학생들은 어서 수능 날이 지나기만을 기다린다. 한국의 제도권 교육 안에서 대학 입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 갔던 시절이다.
〈잠자리 구하기〉는 감독이 고등학교와 입시에서 벗어난 시점에 기록을 갈무리하고 완성되었다. 영화 속 시간은 수능 디데이로 시작하여 재수와 대학 입학까지 시간순으로 흐른다. 과거의 기록이 '현재'와 처음으로 교차하는 지점은 사람들과 싸우고 힘들어하는 친구의 소식을 접하고 더불어 감독 자신이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고민하면서 시작된다. 입시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무언가 유예되고 있다는 느낌은 과거의 느낌과 연결된다.
한국의 입시 제도 속 자신과 친구들의 과거를 돌아보는 것에서 출발한 기록은 계속해서 유예를 느끼는 사람이 과거와 관계 맺는 방식, 삶을 사는 방식을 재고한다. 과거와 현재를 엮을 때 기억과 기록은 한 점으로 만족스럽게 모일 수 없고, 필연적으로 불균질하게 뻗어나간다.
영화가 과거를 불러오는 방식은 과거와 현재가 수능이나 대학 입시를 기점으로 단절되거나 나뉘는 게 아니라, 유기적인 흐름 안에서 연장선에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마치 나는 처음부터 애벌레가 아니었다는 듯이”라는 내레이션이 말하듯 애벌레가 변태를 거쳐 나비가 되는 것처럼 아예 형태를 달리하고 과거와 단절되어 마침내 원하는 존재가 되는 성장이 아니다.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걸 인지하며 삶을 기승전결 서사 구조가 아닌 방식으로 바라보려는 기록이다. 사람들은 고통스럽거나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시간에 서사적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의 삶을 만족할 수 있는, 이해할 수 있는, 견딜 수 있는 서사 구조로서 받아들이려 한다. 고교 시절과 입시가 끝이 나고 계속해서 현재를 부정당했던 이때의 경험은 마치 이 과거가 진정한 성장을 위해서는 잊히거나 성장을 위한 지반처럼 미화되기 위해 희미하게 사라져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잠자리 구하기〉는 이런 기억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길을 적극적으로 택한다. 성장으로 향하는 미래와 한 단어로 정리될 수 있는 명사로서의 장래희망이 아닌 동사로서의 기억의 방식을 택한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과거의 나 자신,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했던 나와 우리를 잊지 않기 위한 기록은 후반부에 이르러 카메라를 들고 찍는다는 행위로서 삶의 방식으로 수렴된다. '반(反)성장담'을 말하는 〈잠자리 구하기〉의 시선은 볼라뇨의 시 「낭만적인 개들 」처럼 성장하지 않겠다는, 망각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느껴진다.
"이윽고 악몽이 내게 속삭였다. 넌 성장할 거야.
고통과 미로의 환영을 뒤로하고
넌 잊을 거야.
그러나 그 시절에 성장하는 것은 죄악이었으리라.
나는 말했다, 난 낭만적인 개들과 여기에 있어
그리고 계속 여기에 머물 거야."
-로베르토 볼라뇨, 「낭만적인 개들」-
영화 속에서 원하는 모습의 내가 되었을 때야 호명되는 과거가 아닌, 유예와 상실이라는 접점에서 사라져가는 것 같았던 과거의 모습을 발견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모든 유예를 끝내버릴 수 있는, 막연함과 불안함을 끝내 버릴 수 있는 소속은 없다.
〈잠자리 구하기〉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완결이 아닌 확장을 보여준다. 과거의 고생이 현재를 만들어줬다거나 과거의 아픔이 현재의 성취에 보탬이 되었다는 성장의 기록이 아니다. 과거로부터 계속해서 쌓이는 겹 위로 현재를 계속 쌓아나간다는 감각의 기록이다. 부러 벗어나지 않고, 내가 아닌 내가 되거나 세상과 잘 '화해'하는 것이 아닌 과거가 여전히 머무름을 인지한 채, 과거를 손에 쥐고 세상과 마주하는 감각이다.
〈힘을 낼 시간〉
- 상흔을 남긴 과거에서 기억하고 함께할 존재를 찾아내기
〈힘을 낼 시간〉은 은퇴한 아이돌 수민, 태희, 사랑이 활동 당시 가보지 못했던 수학여행을 떠나 제주도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새출발을 위한 여행이지만 세 인물에게 과거가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들은 스무 살이 오면 세상이 끝날 것 같았고, 스무 살을 넘겼지만 여전히 이른 나이에 은퇴해야만 했다.
아이돌 활동은 세 인물에게 각기 다른 방식의 흔적을 남긴다. 수민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먹는 행위에 어려움을 느끼고, 새벽에 홀로 일어나 구토하며 속을 게워낸다. 태희는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다. 이는 미움 받고 싶지 않다는, 오해받거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관성적인 웃음이다. 사랑은 여행 내내 이어폰을 끼고 볼륨을 높여 음악을 듣는다. 멍하게 음악을 듣는 사랑은 둘러싼 현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과거에 겪은 일이 인물의 성격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며 과거는 현재의 인물과 분리될 수 없다.
태희가 귤밭에서 만난 상표에게 세 사람이 아이돌이었음을 밝히자, 수민은 이를 나무란다. 수민에겐 괴로움에 당장 잊고 싶은 과거지만 태희에게는 잊어버리기엔 붙잡을 수밖에 없는 과거다. 세 사람은 얼마 전까지 해왔던 아이돌 활동을 제외하면 자신들을 설명할 말이 없다. 10대 시절부터 20대 초중반까지 보낸 물리적인 시간은 아이돌 활동뿐이며, 이 시간을 부정하거나 밀어낸다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탈출하고 싶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놓아줄 수만은 없다. 마주하기를 피하거나, 끝나버렸지만 붙잡을 수밖에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인 과거는 인물들의 대사와 내레이션으로 묘사된다. 아이돌이라는 정체성이 삶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세 인물이, 아이돌이 아닌 내가 되기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바꿀 수 없는 과거로부터의 상실과 상흔을 마주하는 데에 있다.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과거는 단 한 번 화면에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절박하게 귤 따기에 매달리던 수민이 쓰러지고, 수민의 한 쪽 눈이 클로즈업된 채로 과거의 잔상이 여러 사람의 웅성거리는 목소리와 조명의 변화로 드러난다. 시시각각 변하는 조명 아래 수민의 눈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생방송 중에 수민이 쓰러졌었고,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는 것뿐이다. 수민의 눈이 향했던 곳은 화면에 담기지 않는다. 과거에 수민이 했던 말은 현재 쓰러져 눕혀진 곳에서 일어나며 뱉는 말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 수민이 무엇을 겪었고 보았는지가 아니라 수민이 이를 통해 무엇을 느꼈고 여전히 느끼고 있는지, 과거가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집중한다.
영화는 수민의 행동으로 수민이 무엇을 느꼈고 느끼고 있는지 전달한다. 수민에게 머릿속이 복잡해서 탈출하기 위한 시도로서의 명상은 오히려 기억을 곱씹게 만든다. 수민이 트랙에서 힘껏 달리는 행위는 자신의 신체에 쌓인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털어내고자 하는 몸부림과 같다. 억압당하고 통제당하던 신체를, 머리에 가득 찬 기억 때문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싶다는 움직임이다.
계속 기억에 잠식되던 세 인물 앞에 '러브앤리즈'의 비인기곡을 알 정도지만 팬클럽에 가입하지는 않았던 소윤이 등장한다. 적극적으로 세 인물에게 다가오는 소윤은 이들의 과거를 알지만 그 안에 속하지 않은 현재의 인물이다. 소윤은 피하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 깊게 과거로 빠지는 인물들을 현재로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소윤은 버스 분실물 센터 직원으로 세 인물 앞에 처음 등장한다.
사랑은 자신의 빨간색 캐리어를 여행 초반에 깜빡 잊고 버스에 두고 내린다. 유실물 센터에서 연락을 받고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던 빨간색 캐리어는 내용물을 열어보니 사랑의 캐리어와 전혀 다르다. 세 사람을 알아본 유실물 센터 직원 소윤은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나을 거라며 오래 묵은 빨간 캐리어를 가져가라고 한다. 숙소에서 다른 사람의 옷과 소지품을 구경하는 사랑과 수민, 태희는 신나고 홀가분해 보인다. 가져온 짐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소지품을 가지는 건 다른 삶과 가능성을 상상하는 순간을 만든다. 이후 사랑은 다른 이의 캐리어에 들어있던 것으로 짐작되는 옷을 입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여행 내내 멍하니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던 사랑이 이어폰을 끼지 않은 채 다른 이의 옷을 입고 수민과 제주도 시내를 가뿐히 걷는 장면은 새로운 방향을 찾아가는 도입부다. 수민과 사랑은 시내의 한 식당에서 소윤과 우연히 재회한다.
수민을 중심으로 사랑과 태희 세 사람이 변화의 시작을 맞이하는 동력은 소윤을 비롯한 다른 속내를 숨기지 않고 이들을 대하는 인물들로부터 시작된다. 사연을 듣고 일당을 더 쳐줄 테니 그냥 쉬라고 말하는 상표와 이들의 아이돌 시절을 기억하고 좋아하는 소윤이 동력의 구심점이다. 죽은 사람 얘기를 할 거면 가라고 소윤을 밀어내던 수민은 자신의 매몰찬 행동에도 솔직하게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는 소윤의 행동에 위로를 얻는다. 이후 수민은 없어진 사랑을 찾는 과정에서 애써 외면하던 과거로부터 기인한 불안을 폭발시킨다. 큰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고 책임감과 죄책감을 동력으로 셋 사이에서 중심을 담당하던 수민의 폭발은 감추고 있던 불안을 안아준 인물들에 의해 가능해진다. 사랑을 찾는 시간은 한 번 무너진 이후에 다시 시작할 시간을 가지는 실마리가 된다.
자살로 세상을 떠난 과거 동료에 대한 언급을 피하던 수민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과거와 괴로움을 외면하며 아파하는 대신 마주보며 기억하기로 선택한다. 태희가 수민에게 권하던 명상에서처럼, 기억과 생각을 빨리 보내버리려고 하는 대신에, 곁에 남아 있다면 그 남아있음을 받아들이고 기억한다. 함께 오지 못한 사람을 기억하며 먼 미래가 아닌 당장 제주도에서 무엇을 할지 궁리하며 비로소 현재를 즐기는 인물들은 나로부터 탈출하기에서 나의 과거와 함께 살아가기로 방향을 바꾼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내가 아닌 내가 되거나 나로부터 탈출하기를 멈추고 지금 여기에 존재하겠다는 수민의 선언이다. 화해할 수 없는 과거를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걸 가능케 한 것은 지워버리거나 수정하고 싶은 과거에 사랑한 존재가 있음을, 기억하고 싶은 존재가 있음을 상기하면서 가능해진다. 기억 속에서 성취와 착취, 그리움과 괴로움, 자기 혐오와 자기애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 오는 길과 가는 길이 다르니 헤매도 괜찮다는 수민의 내레이션은 아이돌로서 지내온 과거를 품고 다르게 살아보겠다는 다짐과 같다. 자신의 과거에 함께 했던 태희, 사랑과 자신의 현재를 바라보는 소윤과의 만남은 나와 함께 살아가기, 즉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고자 하는 시간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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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비평전문지 『독립영화 54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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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립영화 54호』는 사단법인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가 기획 및 제작하였으며, 독립영화 소식, 정책 그리고 기획 ‘저작권을 둘러싼 운동들’ 및 독립영화비평상 수상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올해 54호는 기획 ‘저작권을 둘러싼 운동들’에서 독립영화의 공정이용 문화 형성 및 저작권법과 창작 활동을 둘러싼 담론을 탐구하고, 여러 필자의 비평을 통해 주목할 만한 독립영화를 다각도에서 조명한다. 그 외에도 독립영화 지원제도 상황을 포함해 2024년 독립영화계의 주요 소식을 다룬 글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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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영화협회 홈페이지: https://kifv.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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