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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숨〉 인디토크 기록: 누구에게나, 누구라도

by indiespace_가람 2025. 3. 20.

누구에게나, 누구라도

〈숨〉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5년 3월 8일(토) 오후 3시 상영 이후

참석 윤재호 감독, 유재철 장례지도사, 보광 스님

진행 남희령 작가

* 관객기자단 [인디즈] 안소정 님의 기록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숨을 쉬며 삶을 살아가듯, 누구에게나 죽음은 다가온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모두에게 공평하지는 않지만, 만약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영화 〈숨〉의 안과 밖으로 죽음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인디토크 현장을 공유한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듯,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고, 누구라도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꿈꿀 수 있기를.

 


남희령 작가(이하 남희령): 오늘 GV 참석한 주인공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보광 스님은 동국대학교에서 18대 총장으로 지내셨고요. 그다음에 동국대 한방병원을 건립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국대의 장례문화학과 석사 과정을 만드셨다고 들었고요. 지금은 정토사 회주 스님으로 계십니다.
그 다음은 영화에도 나왔던 유재철 장례지도사님이십니다. 유재철 선생님은 여러분이 대통령의 염장이라고 알고 계실 것 같아요. 2006년에 최규하 대통령의 장례를 시작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그다음에 전두환 씨, 노태우 전 대통령 그다음에 법정 스님, 송해 선생님, 여운계 선생님 등 굉장히 유명한 분들의 마지막을 함께해 주셨던 분이에요. 
그리고 윤재호 감독님은 〈마담 B〉,  〈뷰티풀 데이즈〉, 〈파이터〉, 그리고 〈송해 1927〉을 연출하셨습니다. 감독님께 영화를 기획하게 된 특별한 이유를 여쭙고 싶습니다.

윤재호 감독(이하 윤재호): 사실 이 영화를 기획한 특별한 큰 이유는 없었어요. 오히려 큰 이유보다는 2017년에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면서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고민들이 생기기 시작했죠.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그것을 개인으로서 받아들인다는 게 어떤 느낌일지, 그로 인한 무게감과 감정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었어요.
그 고민을 하는 과정에서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작가님과도 얘기하면서 유재철 선생님도 만나고, 김세열 선생님도 만나게 됐습니다. 그리고 장례를 치른 그날 새벽, 길에서 파지를 줍는 할머니를 보았어요. 그 순간의 감정이랄까요, 참 묘했어요. 어떤 사람에게는 쓸모없어진 파지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삶을 이어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그 감정이 정말 심오하게 다가왔고, 그런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영화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남희령: 스님께서는 화장 마치고 유골 수습하는 장면에서 합장을 하셨어요. 어떤 뜻이었을까 되게 궁금했거든요.


보광 스님: 저는 어디를 가든지, 국립묘지를 지나거나 무덤을 보게 되면 항상 합장을 합니다. 장례 행렬을 마주칠 때도 합장을 하고, 마음속으로 고인을 위해 기도를 올리죠. 돌아가신 분이 제 마음을 통해 편안하게 떠날 수 있도록, 또 좋은 곳으로 가실 수 있도록 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희령: 혹시 스님도 죽음이 두려우세요? 종교인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보광 스님: 불교에서 바라보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사실 어제가 부처님이 출가하신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8일 뒤에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날, 즉 돌아가신 날이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8일 동안을 용맹정진 기간으로 삼아, 모든 사찰에서 정진하고 기도하며 출가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왜 출가하셨을까요? 그 근본 원인은 바로 생로병사입니다. '생'이라는 것은 단순히 태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늙고, 병들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죠.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처님은 왕궁을 떠나 출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4대문을 지나며 직접 생로병사의 현장을 목격하고, 장례를 지켜보며 출가를 결심하셨습니다. 오늘날을 보면, 태어나는 것부터 병드는 것까지는 인간이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누구도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죽음이라는 것이 종교적 문제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누군가 저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죽음은 삶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한 번만 경험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수많은 생을 거듭하며 죽음을 경험해 왔습니다. 다만, 태어나면서 그 기억을 잊어버릴 뿐이죠. 그러다 보니 우리는 죽음이 다가올 미래라고만 여기는데, 오히려 죽음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취미를 묻지만, 제 취미를 말하자면 죽음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누군가 밤중에 저를 찾아와 '어머니가 돌아가시려 하는데 임종을 지켜봐 달라'고 하면, 저는 바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직접 임종을 지켜보면, 신앙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기독교든 불교든,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그런 믿음 속에서 떠나는 사람들은 마치 잠들 듯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합니다. 반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움 속에서 맞이하는 경우가 많죠.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다가 맞이하는 죽음이라 해도,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평온함이 달라집니다.
이 부분은 아마 유 박사님께서도 많이 보셨을 텐데요. 어떤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큰 괴로움을 느끼지만, 누군가 위로하고, 내세에 대한 희망을 전해주면 점차 편안한 모습으로 떠나게 됩니다. 결국 죽음이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받아들이고 환희 속에서 맞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영화 〈숨〉 스틸컷


남희령: 유재철 선생님, 이번 영화에 대해 감독님께 처음 연락 왔을 때 어떠셨어요?


유재철 장례지도사(이하 유재철): 지금 이런 자리가 마련된 것도, 사실 우리 큰스님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보광 스님께서 대학원에 석사 과정을 만들어 주셨을 때, 제일 처음 그 과정을 다녔습니다. 물론, 그보다 훨씬 전부터 스님과 인연이 있었죠. 스님의 신도분 장례 때 처음 뵈었는데, 그때 스님께서 정토 신앙을 전공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만 하면 고통받는 사람도 표정이 밝아진다’고 하셨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그런 수행을 하셨고, 일본에서도 몸소 경험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아까 영화 속에서 태릉 쪽에서 건물 세 채를 가지고 계시던 한 분이 마지막 순간까지 웅크린 채 돌아가신 모습이 나왔습니다. 저는 죽음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그냥 당하는 죽음,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예전에 조계사에 다니던 후배의 아버님이 아주 가난한 삶을 살다가 돌아가신 적이 있습니다. 이 친구가 스님께서 늘 말씀하시던 대로 ‘아버지, 나무아미타불을 따라 하세요’라고 권했어요. 그런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시는 분이 어떻게 따라 하겠습니까?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마음으로만 따라 하셔도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삼일장을 치르는데, 첫째 날에는 표정이 그대로였어요. 그런데 둘째 날, 일주일 만에 오신 가족들이 ‘어쩜 저분 표정이 이렇게 밝아졌냐’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분이 마지막 순간에 죽음을 받아들이신 게 아닐까 싶어요.
마지막으로, 법정 스님 같은 보통이 아니신 분들은 미리부터 죽음을 준비하시고 맞이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저는 늘 세 가지 유형의 죽음을 경험하고 마주하다 보니, 죽음을 단순히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제안을 받았을 때 너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고, 기쁘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관객: 요새는 시신 처리를 굉장히 간소화하고 있는 추세로 알고 있는데요. 골판지 관도 굉장히 많이 쓰이고 있는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유재철: 예전에는 저도 가족이 없는 분들의 장례를 무료로 많이 치러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자체에서 입찰을 붙여서 처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어요. 솔직히 좀 속상합니다.
그나마 아까 말씀드린 대로, 무연고 사망자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이 생긴 건 다행인데, 입찰을 받은 업체들이 장례 절차를 좀 더 제대로 진행했으면 좋겠어요.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장례를 진행하는지가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준다면, 지금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75만 원, 100만 원으로는 부족합니다.
사실 지자체 예산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보도블록 하나만 덜 고쳐도 수백 명의 장례를 제대로 치러드릴 수 있을 거예요. 고인들을 제대로 모실 수 있도록, 적어도 장례만큼은 제대로 치러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점이 가장 아쉽습니다.

 

관객: 영화에서 장례회 사무총장님과 ‘10년 안식년을 갖자’는 말씀을 하셨는데, 혹시 부부 안식년을 가지실 생각이신가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서 궁금해졌습니다.

 

유재철: 저는 찬성했는데, 요즘 여러 가지 사업이 커지면서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도 조금만 안정이 되면 그 사람이 떠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첫 고모님이 그런 삶을 사셨거든요. 고모님은 비구니 생활을 하셨는데, 60세가 되자 스스로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직접 흙벽돌을 만들어 집을 짓고는, 그 모든 걸 뒤로한 채 훌쩍 떠나셨습니다. 처음에는 백담사에 계셨는데, 신도들이 찾아오자 또 통선사로 옮기셨죠. 그렇게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지내셨고, 지금은 82세가 되셨습니다. 그런데도 눈이 너무 맑으세요. 그렇게 맑은 분을 본 적이 없어요.
제 아내에게 고모님은 롤모델 같은 존재예요. 아버지가 연세가 많으시고, 아내는 막내딸이라 고모님과 친하게 지냈거든요. 두 분이 14살밖에 차이가 안 나니까, 고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 미래를 떠올리게 된 거죠.
아내는 늘 제 보조 역할을 해왔지만, 이제는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아내가 스스로 삶을 정리하고 마무리하고 싶다며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있어요. 저는 언제든지 떠나고 싶다면 가라고 합니다.

 

영화 〈숨〉 포스터


관객: 포스터에는 ‘숨’, 그리고 ‘찾고 있나요?’, ‘사는 의미’, ‘죽는 의미’, ‘죽는 준비’라고 되어 있는데요. 감독님, 영화를 찍으면서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이 감독님께는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합니다.


윤재호: 사실 ‘죽음을 준비한다’기보다는, 이 작품을 만들면서 가장 먼저 던졌던 질문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였습니다. 영화를 만들면서 저는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떠나보낼 수 있는 위치에 와 있는 것 같아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지만, 이제는 ‘그렇다면 나의 죽음은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남아 있죠.
유재철 선생님께서도 늘 말씀하시듯,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미리 준비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모든 생명체의 본능은 ‘생존’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죠. 그런데 그 생존의 과정에서 삶에서 밀려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올 때, 우리는 더욱더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늘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앞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겠지만, 그 질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김새별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결국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는 것이다. 하루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죽음을 잘 맞이하는 길이다.’ 그 말이 저에게 깊이 와닿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던진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답변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지금 살고 있는 하루하루를 좀 더 소중하게 여기고 지금 이 자리에서 숨 쉬고 있는 것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오히려 지금의 삶에 충실하자, 그게 첫 번째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관객: 저는 유재철 선생님께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직접 목격하셨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유재철: 손에 꼽는 장면들이 있겠죠.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꼽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나 법정 스님이 깨끗하게 주무시듯 떠나신 것도 있지만, 저는 제 책에도 썼던 80세에 돌아가신 분홍 치마저고리의 할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할머니는 마흔 살에 혼자가 되셨고, 두 아들과 한 딸을 두고 계셨어요. 돌아가시기 전, 남편이 분홍 치마저고리를 마련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 후로 이 옷을 자녀들의 대학 졸업식이나 결혼식처럼 특별한 날에만 입으셨죠. 그러던 할머니가 80세가 되면서 몸이 많이 불편해지자, 스스로 떠날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곡기를 끊으셨습니다.
아드님과 며느님들이 당연히 반대했죠. 하지만 워낙 단호하셨습니다. 혼자서 40년 동안 두 아들과 딸을 키우시느라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가족들도 그 마음을 알기에 결국 막을 수 없었고, 그대로 두었는데 열흘 정도 지나자 할머니가 소파에 앉아 계셨다고 합니다.
며느님 말씀을 들어보니, 할머니는 아침까지도 열흘 동안 거의 물만 조금 적시는 정도였고, 음식을 드시지 않았다고 해요. 그런데 그날 아침, 목욕탕에 들어가 목욕을 하셨다고 합니다. 기력이 없으셨을 텐데도 몸을 깨끗이 닦으셨겠죠. 그리고 분홍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입고 소파에 앉아 계셨다고 합니다.
아드님이 놀라서 ‘어머니, 어쩐 일이세요?’ 하고 물었지만, 할머니는 힘이 드셔서 가볍게 손짓만 하셨다고 해요. 그리고 아드님이 출근하면서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나갔고, 며느님은 설거지를 하고 집 안 청소를 하며 바빴죠.
그런데 보통 소파는 볕이 잘 드는 곳에 있잖아요. 거기에 할머니가 누워 계시더랍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며느님이 다시 가보니, 할머니는 조용히 싸늘하게 떠나 계셨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는 스스로 목욕재계를 하시고, 떠나는 순간까지도 숨을 느끼면서 가신 것 같아요. 
저도 저렇게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보통의 내공이겠어요? 평상시에 많은 연습이 필요한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런 자리에 불러주시거나 인터뷰 요청이 있으면 열심히 찾아가서 제가 아는 한 이야기를 전하려고 합니다. 질문에 맞는 답변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영화 〈숨〉 스틸컷


관객: 저는 스님께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요. 현재 동국대 생사문화학과를 다니고 있습니다. 학과에 다니면서 ‘이 과를 처음 만든 분이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이 늘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뵙게 된 김에 여쭤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학과가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보광 스님: 반갑습니다. 불교학에도 여러 분야가 있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정토학을 연구합니다. 정토학은 불교의 내세관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원효 대사가 대표적인 분이십니다. 원효 대사는 삼국 통일 후 많은 사람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자, 나무아미타불을 외며 전국을 다니면서 그들의 넋을 위로하셨습니다.
제가 동국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1997년인가 98년에, 큰비가 와서 파주에 있던 천주교 묘지가 거의 떠내려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화장률이 17% 정도였는데, 그때 중부대 교수님을 비롯한 몇몇 분들이 ‘이대로 가다간 국토가 묘지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아파트보다 묘지가 더 많아지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며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러면서 ‘화장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되었고, 이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1998년부터 동국대에서 장례문화학과 개설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동국대 교수로 32년간 재직했는데, 처음에는 모든 교수들이 반대했습니다. ‘장례가 학문이 될 수 있느냐’며 반발이 심했죠. 특히 대학원 석사 과정으로 개설하겠다고 하니, 불교대학 학장님도 반대하셨습니다. 하지만 총장님을 설득한 끝에 결국 학과를 개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을지대학을 비롯한 몇몇 전문대에서 장례 관련 학과가 생겼고, 그곳에서 가르칠 사람이 필요해졌습니다. 당시 장례문화학을 정식 학문으로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유 박사님이 1기 학생으로 입학하셨고, 박사학위를 가진 분들조차 석사 과정으로 들어와 공부할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그분들이 전국의 장례문화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왜 ‘죽음’을 이야기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합니다. 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잘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결국 ‘어떻게 잘 살 것인가’와 직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삶에서도 당당하고 정의롭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매일 식사할 때 ‘공양게’를 외웁니다. 공양게의 뜻은 ‘이 음식을 먹는 것은 생전에는 안락하게, 죽은 뒤에는 극락왕생하기 위해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 외웁니다. 살아 있는 동안 건강한 몸과 행복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죠. 신라 의적 스님의 책에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세 번 죽음을 준비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해야 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순간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처음 장례문화학과를 만들었을 때는 장례 절차와 염습 같은 실무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장례식장 관리, 공원묘지, 봉안당, 수목장, 심지어 장례 보험까지 연계된 산업으로 발전했습니다. 또한, 가족들이 이별의 슬픔을 어떻게 완화할 수 있을지 연구하는 박사 논문도 다수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장례문화가 점점 전문화되면서, 저는 장례지도사 국가 자격증을 도입해야 한다고 20년 동안 정부를 설득해 왔습니다. 동물은 수의사가 관리하는데, 사람은 숨이 끊어진 후에는 의사도 관리하지 않고, 자격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국가 자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끝에, 지금의 장례지도사 국가자격증이 만들어졌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제가 일산병원 설계에 참여했을 때, 염습실에서 나오는 물이 하수처리장으로 가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전염병을 앓았던 환자를 염습한 후, 그 물이 하수처리장으로 흘러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엄청난 감염 위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설계를 수정하여 폐수처리 시스템을 도입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장례식장이 하수처리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미국에서는 장례식장에서 나오는 폐수를 전부 폐수처리장에서 관리합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한강에 그대로 흘려보내고 있어요. 미군 부대에서 페놀 사건이 발생했을 때 문제가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병원에서 발생하는 폐수가 별다른 조치 없이 배출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장례학이 제대로 된 학문으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저는 학문 중에서도 죽음학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숨〉 스틸컷


관객: 제가 작년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세 분을 보내드리는 일을 겪으면서, 이번 주제가 더욱 와닿았습니다. 그래서 가벼운 것부터 무거운 것까지, 총 세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윤재호 감독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파지를 줍는 할머니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아 캐스팅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이 2023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이라면, 지금 그 할머니의 건강은 어떠신지도 궁금합니다.
두 번째로 스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많은 임종을 지켜보셨다고 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임종과 힘들어하는 임종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또한, 종교적 믿음과 삶을 마감하는 태도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유재철 장례지도사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얼마 전에 염습을 하러 갔을 때, 젊은 여성 장례 지도사님이 나오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최근 장례 업계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상입니다.


윤재호: 사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파지를 줍는 할머니를 섭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몇 차례 섭외된 분들이 잘 맞지 않아서 난항을 겪고 있었는데, 마침 제작사 대표님께서 동네에 사시는 이웃 할머니를 섭외하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촬영이 성사되었습니다.
영화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이후에도 대표님께서 지속적으로 소통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할머니께서는 건강하게 지내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광 스님: 불교 경전에서 죽음에 대해 다룬 내용을 조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열반경이라는 경전은 부처님께서 임종을 앞두고, 돌아가시기 3개월 전에 설하신 가르침입니다. 열반경 성행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죽음이란 험난한 길을 가는 것과 같으나, 그 길에는 길동무도 없다. 밤낮으로 가도 가도 끝을 알 수 없는 길이며, 어두운 길에 등불이 없는 것과 같고, 들어갈 문이 없는 집과도 같다. 병이 있어도 치료할 수 없으며, 가도 가도 끝이 없고, 설사 도달한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죽음은 파괴된 곳은 없지만, 보는 이마다 근심한다. 악하고 무서운 빛깔을 띠지는 않았지만, 사람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내 몸이 있어도 내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이런 경전의 말씀을 저는 49재를 진행할 때 많이 인용합니다. 돌아가실 때 임종 염불을 해드리기도 하지만, 그 전에 편찮으신 분들이 계시면 병원에 방문하여 준비를 돕습니다. 가족들은 직접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하거든요. 부모님이 오래 병상에 계시더라도, 미리 장례 준비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가족 중 누군가가 장례 이야기를 하면, "부모가 돌아가시기만 기다린다"는 오해를 받기 쉬워 더더욱 어렵죠.
이런 부분은 성직자가 나서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사나 성직자가 먼저 말해 주면, 환자 스스로도 준비할 시간을 가질 수 있죠. 그래서 저는 이런 내용을 유튜브로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문병을 다녀온 후 그 내용을 유튜브에 올렸는데, 임종을 앞두셨던 분이 오히려 회복되셔서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셨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너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더 안정될 수도 있는 것이죠.
하지만 현실에서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재산을 두고 다투는 집안도 많습니다. 그런 곳에 가서 염을 해드릴 때면, 장례식장에서 입관을 진행하는 선생님들이 들어가 염구(念口)를 해 주는데, 저녁이 되면 저조차도 화장실에 가기가 무서울 정도로 무거운 기운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반면, 죽음을 스스로 수용하고 평온하게 맞이하는 분들의 얼굴은 참 편안합니다. 그런 분들의 입관을 할 때는 한 번 더 얼굴을 보고 싶어질 정도죠.
이와 관련해서 수산 스님이라는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까 합니다.
수산 스님은 대원사 주지를 하셨는데, 60세가 되어서 결혼하셨습니다. 당시 한 마을에 살던 한 여성이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출가를 하셨는데, 결국 수산 스님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60세에 결혼하셔서 자녀 여섯을 두셨죠.
이후에 수산 스님은 대흥사 본사 주지를 하시다가 환속하셨고, 생활이 매우 빈곤한 상황이었지만, 부인은 백양사에서 공양주를 하며 지극정성으로 모셨습니다. 수산 스님은 계속 수행을 이어가셨고, 결국 90대가 되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실 때, 앉은 채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 사진도 남아 있어요.
사실 스님들에게 가장 큰 수행 목표 중 하나가 ‘자탈입망(自脫入亡)’, 즉 앉아서 쓰러지듯 조용히 열반에 드는 것입니다. 누워서 죽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온전히 마친 상태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죠. 그런데 수산 스님은 60세에 환속하고, 자녀도 여섯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수행을 통해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앉은 채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 모습이 신문에도 실릴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결국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죽음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다음 생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형태로 떠나더라도 그렇게 두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저도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정작 제 죽음의 순간이 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유재철: 여자 장례지도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제가 1994년에 이 일을 시작했으니 지금 31년 차입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업계에서 가장 어린 편이었어요. 당시 제 나이가 36이었는데, 장례 업계는 대부분 50~60대 아저씨들이 일하는 곳이었고, 여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할머니나 여성 장례지도사는 필요 없다는 분위기였고, 남성들이 주로 염습을 담당했죠.
그랬던 것이 스님들 덕분에 장례 관련 학과가 생기고, 장례지도사 국가시험도 도입되면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대학을 졸업한 여성들도 장례 업계에 쉽게 취업할 수 있습니다.
제가 30살에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제 딸이 4살이었어요. 그때는 주변에서 ‘딸을 어떻게 시집보낼 거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인식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장례지도사가 주인공으로 나올 정도로 인식이 많이 바뀌었죠.
또, 장례학과가 개설된 학교도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저희를 포함해 전문대까지 합쳐도 전국에 약 7곳밖에 없고, 한 해에 배출되는 졸업생이 기껏해야 150~200명 남짓입니다. 그러다 보니 취업률이 높고,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에 관심을 가지는 젊은 학생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이렇게 업계가 변화하면서, 과거에는 50~60대 남성들이 염습을 하며 노잣돈을 챙기고, 개선 없이 굴러가던 장례업이 점점 발전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젊은 지도사들이 많아지면서 훨씬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변하고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젊은 사람들에게 배울 점이 많습니다. 저는 지금도 틈만 나면 장례식장이나 상조회사의 염습 과정을 직접 보러 가는데, 정말 너무 잘하더라고요. 덕분에 저도 배우는 게 많고, 이런 변화를 보며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영화 〈숨〉 스틸컷

 

관객: 스님께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최소한 10명에서 20명 정도—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형제 등 가까운 가족들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중에는 마주하기 힘든 아픈 죽음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의 죽음은 상대적으로 덜 아프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큰 슬픔으로 다가오죠. 스님께서도 아까 말씀하셨듯이, 이별의 아픔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개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한 말씀만 해주신다면, 문장이든, 짧은 가르침이든, 우리가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을 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보광 스님: 죽음이라는 것은 본인에게는 끝이지만,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됩니다. 특히 자식을 먼저 보내거나, 배우자를 일찍 떠나보낸 경우는 그 슬픔을 감당하기가 더욱 어렵죠.
불교에서는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제도가 있습니다. 바로 49재입니다. 49재는 돌아가신 후 49일 동안 매주 한 번씩 기도를 드리는 의식입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고,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지만, 7번을 반복하며 기도하다 보면 점차 마음이 밝아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아까 영화에서도 나왔듯이, 사람이 임종할 때 가장 먼저 혀가 굳어버립니다. 그래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죠. 하지만 청각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환자실에서 가족들이 수군거리며 장례식을 준비하는 이야기까지도 환자는 모두 들을 수 있습니다.
일면 스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간 이식 수술을 받으며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는데, 본인은 누워 있는 상태에서도 밖에서 신도들과 가족들이 장례식을 준비하는 소리를 다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이후 그 스님께서는 생명 나눔 실천을 만들어 장기 기증 운동을 활발히 펼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돌아가시는 분 앞에서는 작은 소리라도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 순간, 혀가 굳어 염불을 할 수도 없고 기도를 할 수도 없는 경우, 녹음된 염불이라도 들려주면 좋습니다. 듣는 것은 끝까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남의 절에서 불사를 진행하면서 법당에 현판을 새겼습니다.
"청계산 정토사에서 일념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며,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아미타불을 만나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는 화엄경의 구절과 제가 만든 문구를 합친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사람들은 마치 자신만은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내가 태어나기 전 어디서 왔으며, 죽은 후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대해 조사 스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한쪽에 구름이 생기는 것과 같고, 죽는 것은 한쪽에서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한 물건이 항상 존재하니, 이는 죽음과 삶을 초월하여 영원하다."
즉, 구름이 생기고 사라진다고 해서 그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름의 본질은 H₂O(물)입니다. 물은 땅에 떨어지면 액체가 되고, 차가운 곳에서는 얼음이 되며, 뜨거운 곳에서는 수증기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존재도 형태만 변할 뿐,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했지만, 태어나면서 그 기억을 잊어버렸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가까운 사람이 돌아가셨을 때, 즉시 냉장고에 넣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2시간 정도는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제 어머니께서 경주의 동국대 병원에서 돌아가셨을 때, 간호사들에게 "병실 비용은 내가 부담할 테니 2시간만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도 장례식장에서는 곧바로 냉장고에 모시려고 서두르더군요. 병원 총장을 지낸 저조차도 그렇게 부탁했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순간, 사람은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아 회를 떠도 머리와 꼬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인간의 생명 또한 완전히 정지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옛날에는 장례를 치르는 도중에 깨어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돌아가시자마자 냉장고에 넣어버리기 때문에 그런 기회조차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영화 〈숨〉 스틸컷


유재철: 너무 귀중한 시간이어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저와 인연이 있는 장례식장 운영하시는 분들, 장례학과나 생사문화학과 후배님들, 그리고 장로교에 계신 몇몇 분들이 와 계십니다. 저는 그분들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제가 만약 평범한 길을 걸었다면 그냥 일반적인 장례지도사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스님을 만나면서 제 인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스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20여 년 전 스님의 지도 교수님께서 일본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장례에 참석하겠다고 하니, 선생님들은 일정이 있으셔서 먼저 비행기를 타고 가셨고, 저는 ‘알아서 찾아오라’는 말씀을 듣고 혼자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일본의 장례 문화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장례식장이나 상조회사가 시신 처리만 담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에서는 가족들이 스스로 3일장, 5일장을 치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49일 안에, 교수님이 계셨던 학교 강당에서 다시 한번 그분을 기리는 추모식을 열더군요. 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들과 교수님을 존경했던 분들이 모여, 교수님의 삶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 미국에서도 장례식을 직접 경험해 보았습니다. 거기서는 진정한 의미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장례식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무엇을 하나요?
방명록에 이름을 쓰고, 부의금을 봉투에 넣고, 아는 지인들과 이야기하다가 그냥 돌아오지 않나요? 예전에는 ‘목 운동’을 하기도 했죠. 절을 하느라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는 것이었고, 더 옛날에는 ‘팔 운동’이라며 곡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도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형식이 아니라, 남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죽음을 한 번쯤 돌아볼 수 있는 문화가 있느냐입니다. 우리는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걸 바꾸고 싶습니다.
변화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제가 1994년에 장례업을 시작했을 때, 우리나라 화장률이 17% 정도였습니다. 전국적으로 20%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화장률이 90%를 넘습니다. 그러니 장례 문화도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준비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의 삶도 더 윤택해질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미리 준비한 사람들이, 나중에 새로운 장례 문화가 자리 잡았을 때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가끔 학생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대통령 장례를 맡게 되셨나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운이 좋아서 한 번 했더니 잘 됐나 보지, 그러고 계속 맡게 됐어.’ 하지만 실은 그게 아닙니다. 저는 실제로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가 오는 거지, 아무에게나 오는 게 아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도 어떻게 보면 미지의 세계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정년퇴직 후에도 도전해 볼만한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보광 스님: 사실 장례 문화라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유교에서 행하던 전통적인 장례 절차도 없어졌고, 지금 남아 있는 유일한 명맥이 불교의 다비식(화장식)입니다. 그래서 현재 이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있으며, 상당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마 이번 영화도 이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합니다. 예전에 아침마당에 나오셨던 유 박사님도 말씀하셨지만, 지금 우리나라 장례식은 사는 사람 위주이지, 돌아가신 분을 위한 장례식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고인이 평생 불교를 신앙했는데, 상주가 기독교인이라면 장례식에 십자가를 세우고 기독교식 예배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례식은 돌아가신 분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한국의 장례식은 사실상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일 뿐, 고인을 위한 추모의 자리가 아닙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장례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초상이 나면, 가족 이외의 사람들은 초기에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화장 과정까지 모든 절차를 가족들끼리 진행하고, 이후 특정한 날을 정해, 정말로 고인을 추모할 분들만 초청하여 장례식을 진행합니다. 초청된 사람들은 레인 태그를 부착하고, 초청받지 않은 사람들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고인을 위한 의미 있는 장례가 진행되는 것이죠. 우리나라도 화장 문화가 정착되었지만, 여전히 엄숙하고 경건하게 장례를 치를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또한, 화장장 문제도 심각합니다. 님비(NIMBY) 현상으로 인해, 화장터를 짓는 것에 대한 반대가 심합니다.
예를 들어, 최종현 회장이 30억을 기부하여 화장장을 지어달라고 했지만, 각 지역에서 전부 반대했습니다. 당시 저는 보건복지부 위원으로 참여하여 서울시에 새로운 화장장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논의했습니다. 10군데 후보지를 검토한 끝에, 저는 "가장 부유한 지역에 짓자."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결정된 곳이 바로 서초구 원지동입니다.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지금은 그곳에 화장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가보면 호텔보다 시설이 좋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반대했던 주민들은 지금 그 주변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정착했고, 아파트도 들어서면서 오히려 거주 환경이 개선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화장장이나 묘지를 단순한 혐오 시설로 여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일본은 마을마다 화장장이 있습니다. 묘지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마을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사천(寺川)에도 묘지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문화를 정착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이번 영화를 통해 우리나라 장례 문화가 더 널리 보급되고, 올바른 방향으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하리라 기대합니다.


남희령: 제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림태주 시인이 있습니다. 그분이 쓴 에세이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라는 책이 있는데요, 그 안에 이런 글귀가 나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총합이 곧 목숨이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어준다는 것은
나의 소중한 목숨을 내어주는 일이다."
저는 이 글귀를 참 좋아합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목숨 같은 소중한 시간을 저희 영화 〈숨〉에 내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영화가 더 많은 사람과, 더 오랜 시간 숨 쉴 수 있도록 입소문도 많이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긴 시간 동안 함께해 주셔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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