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살구〉리뷰: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한들 님의 글입니다.
손수 고르기 전에, 아니, 손이 생기기도 전에, 삶은 일단 주어지고 본다. 나를 낳은 사람들, 나를 기른 땅, 나를 둘러싼 풍경…, 태생의 것들이 첫 번째 내가 된다는 게 우리의 공통 사이다. 무엇이 주어졌는지를 알아가다 보면 나에게 무엇이 없는지도 깨우치는데, 거기가 각자의 갈림목인 것 같다. 〈은빛살구〉는 가져본 적 없는 것과 가진 것, 가지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줄 알았던 것, 갖기 싫은 것, 온갖 종류의 내밀한 속내와 치고받으며 다시 태어나는 청년 ‘정서’의 이야기이다.
‘아파트 청약 당첨’에서부터 출발해 ‘아파트 계약 포기’에 당도하는 동안 정서는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것도 원하고 저것도 원하기 때문이다, 또는 이것도 원하지 않고 저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헤매는 마음을 따라가며, 진심에 가까운 욕망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인생이었다면 정서가 지금보다 웃음에 너그러운 청년이었겠다고 이해하게 된다.
정서는 아파트 계약금을 마련하기 위해 둘도 없이 미워하는 아빠를 찾아간다. 정서는 이 일을 앞두고 망설였었다. 아빠를 만난다면 아빠보다 더한 것 또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내 엄마는 아닌 아빠의 아내, 귓불에 나와 똑같은 점을 가진 이복동생, 그들이 모여 사는 집, 되돌릴 순 없어도 되살아나기는 하는 유년기의 기억까지 전부 이 동네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7000만원 또한 이 동네에 있으므로 정서는 버티기에 돌입한다.
정서의 아빠 ‘영주’는 색소폰을 기막히게 연주하는 횟집 사장이다. 항시 엉큼스러운 너털웃음을 홀홀 흘리는 영주와 어느 때고 은은한 수심을 풍기는 정서를 보고 있자니, 영주가 정서 몫의 웃음까지를 빼앗아 간 듯싶어 미움이 인다. 그런데 그 괘씸한 첫인상 뒤로는 서서히 둘의 닮은 구석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정서에게 없는 것과 있는 것 하나씩만큼은 꼭 영주에게 받았음을 알 수 있어진다. 다름 아닌 ‘믿음 없음’과 ‘경현 있음’이다.
‘경현’은 정서가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이다. 경현이 정서에게 1년 넘게 구애한 끝에 둘은 연인이 되었다. 정서가 1년 만에 돌려준 승낙은 ‘나도 널 좋아해’보다는 ‘이젠 널 믿어’에 가까울지 모른다. 오래전 아빠 영주가 사라지고 정서의 마음이 휑해지자 그 자리를 사람에 대한 불신이 차지했다. 정서는 믿음을 냉소하는 동시에 가장 필요로 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그래서 정서의 사랑에서 조금 더 중요한 챕터는 ‘사랑하기’보다 ‘사랑받기’이다. 경현은 정서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었고 둘은 결혼을 앞두었다. 그럼 이제 다 된 건가…?
경현은 영주 못지않게 아파트 계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계약금의 절반을 경현이 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 아파트는 정서와 경현의 신혼집이 될 예정이다. 경현은 정서와의 결혼을 원하는 만큼 아파트를 원한다. 그 간절함을 지켜보던 정서는 경현이 아파트를 원하는 만큼 결혼을 원하는 것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정서의 불신의 불씨가 빠르게 살아난다. 끝내 정서는 경현에게 이실직고한다.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 날 재밌게 해줘서 좋았다고. 너랑 하는 결혼 같은 것엔 관심 없다고.
이 사달이 경현의 탓으로 느껴지지 않는 건 왜일까. 경현이 정서의 믿음을 지켜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서가 사랑을 다시 배웠기 때문인 것 같다. 믿음이 흔들리자 통째로 무너지는 사랑을 지켜보며 알아채지 않았을까. 사랑에 믿음은 꼭 필요하지만 믿음만으로는 사랑이 아니라는 걸. 사람과의 사랑에서 ‘받기’만큼 ‘하기’를 자신 또한 사실은 원해왔다는걸.
정서가 경현과 더불어 결별하는 또 다른 대상은 회사이다. 정서가 비정규직 웹디자이너로서 일하는 회사에 경현도 정규직 사원으로 소속해 있다. 부장은 노동권에도 계급이 적용된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정서는 부당하게 노동하는 이들을 위하여 부장과 싸운다. 자신을 지켜내는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고 싶다. 그 광경을 목격한 경현이 시선을 돌린다. 이때가 모든 것이 명료해지는 순간이다. 정서가 더 이상 아무것도 참을 수 없어지는, 경현과 완벽히 와해되는, 회사와의 재계약이 불발되는, 대망의 아파트가 증발하는 순간. 핀 뽑힌 수류탄처럼 폭발한 정서는 사위를 초토화시키고 스스로는 미련 없이 텅 비어 돌아선다.
그 모든 선택들을 통과해 정서가 도착한 곳은 공터이다. 풀밭에 풀썩 드러눕는 정서에게 달리 해줄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새로 뭘 꼭 갖겠다 작심하더니 본래 가지고 있던 것도 잃어버리다니. 허탈하려는 찰나, 정서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는 걸 본다. 그 순간 깨닫는다. 고요한 가운데 잠에 빠져드는 정서의 표정, 그것이 이 이야기의 틀림없는 목적지임을. ‘우리는 한 생에서도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날 수 있’*고, 기다림 끝에 지금 여기서 정서가 다시 태어나고 있음을.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이슬아 저)의 제목을 인용하였습니다.
'Community > 관객기자단 [인디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디즈] 〈두 사람〉 인디토크 기록: 사랑과 돌봄 (0) | 2025.02.17 |
---|---|
[인디즈 Review] 〈부모 바보〉: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자식 (0) | 2025.02.06 |
[인디즈 Review]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 명명하지 않는 자유 (0) | 2025.02.03 |
[인디즈 소소대담] 2025. 1 몇 번이라도 기대하는 힘 (0) | 2025.02.03 |
[인디즈 단평]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 이토록 낯선 얼굴 (0) | 2025.01.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