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 이상한 여자〉리뷰: 명명하지 않는 자유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민지 님의 글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며 마주치는 것들을 명명함으로써 의미화하고 관습적인 형태로 바꾸어 놓는다. 그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쉬운 방법인 동시에 제약을 의미하기도 한다. 타인이 나에게, 때로는 내가 스스로에게 가하기도 하는 설정 속에 본성은 쉽게 지워진다. 하지만 사실은 그저 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보지 않았을 뿐 달이 사실 빛을 내고 있었다면, 해는 사실 달의 한 모습이었다면?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에서 대부분의 쇼트는 해영의 시선을 경유한다. 오디션 면접으로 시작한 오프닝 시퀀스는 연극에 대한 포부를 밝히는 사람들 사이 혜리의 말을 조명한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했으나 재밌어 보여서 극단에 들어왔다는 혜리는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신을 밝힌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여러 편견을 섞어 혜리의 모습을 왜곡한다. 해영은 극단의 연출을 맡으며 작품에 매진하는데, 혜리에게서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해영이 극단 내에서, 또는 혜리가 일하는 카페를 지나며 그에게 건네는 시선은 일견 관찰하는 듯 보이나 그의 관찰이 혜리의 진실된 모습을 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의 관찰 결과는 타인의 오해로 쉽게 얼룩지고 그는 자신의 행위로부터 매번 발걸음을 돌려 회피한다. 그에 반해 혜리는 자신의 직관을 실천에 옮기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대하는 사람이다. 은정과 올레나는 혜리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네고 자신을 기꺼이 보여주는 관계가 된다.
이러한 두 사람의 대립 이미지는 예술에 대한 논쟁에서도 드러난다. 극단 회식에서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을 때, 혜리는 톨스토이를 인용하며 ‘감정의 전염’을 이야기한다. 해영은 ‘혼술’이라고 답한다. 해영은 소위 ‘순수한 예술가’로 평가받는 사람이지만 그의 태도는 다분히 고립적이다. 시를 쓰고 자유롭게 소통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타인에게 기꺼이 건네는 혜리의 행동을 생각해 봤을 때 톨스토이가 말한 예술의 의미는 혜리 자신이 더 가깝게 느끼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해영이 혜리에게 받은 영감을 소재로 〈이상한 여자〉 각본을 쓰는 것은 일방적인 행위이다. 해영이 정의한 ‘혼술’에 가깝다. 결국 그가 마지막에 각본을 쓰기를 포기한 것은 그 일방적임의 폭력성을 깨닫고 보다 자유로운 예술 행위가 있음을 인식했다는 뜻일 수 있다.
더불어 영화 전반에 드러난 연기 양식의 독특함이 영화의 묘미를 한층 더한다. 연극 무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감정을 일정량 덜어낸 방백과 같은 연기를 펼친다. 감정 묘사보다는 특정 사실이나 인상에 대해 일정한 톤으로 표현하는 연기는 흑백의 이미지와 어우러져 인물들의 속내를 한 번에 알 수 없게 한다. 그럼으로써 관객 역시 혜리를 껍데기로만 파악할 수밖에 없고, 이는 우리가 직접 만들어낸 페르소나 속에 혜리를 가두게 함으로써 그가 그것을 벗어 던질 때의 희열을 한층 강화한다.
혜리는 연습실로 돌아가지 않고 해영에게 ‘달의 빛에 붙잡혔음’을 말한다. 낮의 빛은 해에게서 오나 그것은 우리의 정의에 따른 것이다. 그것은 달일 수도, 해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빛이라는 진리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수만 있다면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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