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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낯선 얼굴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 그리고 〈여행자의 필요〉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윤정 님의 글입니다.
바라는 것이 있을 때는 진심을 다해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응당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간절히 원하면 기적이 이뤄진다는 익숙한 전언류의 말에는 사실 숨겨진 암시가 있다. 진심을 다하되 진지해서는 안되고 반대로 너무 가벼워서도 안된다. 최선을 다하되 긴장해서는 안되고, 그렇다고 풀려 있으면 안된다. 간절히 원하면 기적은 이뤄질지 모르나 기적이 진정 바라는 대가는 눈에 보이는 간절함이다. 넘치는 욕망 속에서 야심은 부분적으로 허용될 수 있지만 야욕은 일절 감춰야 한다. 숨막히는 눈치 게임의 규칙 속에서 당신은 무엇을 골라 내놓을 것인가?
대학로의 오디션장, 약력과 특기를 나열한 종이 이력서를 두고 마주 보는 사람들이 있다. 몇 초간 펼쳐지는 자유 연기에 뒤이어 이어지는 상투적인 질문과 그에 못지 않은 대답들. 사람은 바뀌지만 왜 그런지 모르게 비슷비슷한 느낌에 권태를 느껴가는 ‘해영(박호산 역)’ 앞에 ‘혜리(전혜연 역)’가 나타난다. 서울대 컴퓨터 공학과 졸업이라는 특이한 이력으로 이미 심사위원들의 이목을 끈 혜리는 지원동기를 묻는 질문에 ‘재밌어 보여서 해보고 싶었다’고 답하며 잊지 못할 첫인상으로 각인된다. 하고 싶으면 하고 떠나고 싶으면 다시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며 혜리가 처음으로 내어놓는 패는 ‘이방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
전략인지, 본성인지 혜리는 극단이라는 작은 집단에 적극적으로 소속되기 보다는 바운더리를 넘나 들며 자신만의 관계를 형성한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옐레나 혹은 ‘은정(방은희 역)’과는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극단 동료들과 관계는 관심 외에 두는 것처럼 종잡을 수 없는 기준 속에서 집단의 구성원들은 혜리의 공백을 이야기로 메워가기 시작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살고 있는 공간은 술자리요, 살고 있는 시간은 담배타임이다. 기묘한 시공간 속에서 혜리의 이름은 씹기 좋은 안줏거리처럼 사람들의 입과 귀를 넘나든다. 술 마시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담배 피우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따로 있다는 듯, 술자리에선 연극과 예술, 후원에 대해 번듯하게 이야기 하면서도 구석진 옥상이나 후미진 뒷골목에서 담배 피울 때는 부적절한 추문, 어딘가 껄끄러운 의심만 남는다. 집단 내 구성원은 목격의 대상이 되는 혜리를 두고 문장을 만든다. 어딘가 터무니 없고 일관성 없는, 그러나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영화 속 상황들은 박원장의 시점을, 극단 프로듀서의 시점을, 때로는 해영의 시점을 따라 보이는 혜리의 모습들을 재현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적어, 혜리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는가?
모순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은 항상 주변을 맴돈다. 시점을 바꿔 타인을 응시하면 그 모순이 여지 없이 쉽게 드러날 때가 있다. 판단을 내려두고 객체를 따라가면 진실 혹은 거짓이라고 명확하게 이분화 할 수 없는 가장 단순한 진술이 남는다. 객체는 그 과정에서 주체로 하여금 그 안에 있는 것을 꺼낼 수 있도록 돕는다. 〈여행자의 필요〉의 ‘이리스(이자벨 위페르 역)’가 만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객체로 두는 진술을 너그러이 허용하는 것처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관찰함과 동시에 관찰자가 되는 이리스의 모습은 여행자의 모습에 적절히 부합한다. 세계와 발 붙이게 하는 무거운 중력과 그에 반해 쉽게 세계에서 탈락하는 사람이 갖는 특유의 가벼움은 걷는 사람이 바라보는 풍경처럼 시시각각 변화한다. 다시 ‘나’를 주체의 위치로 되돌려 객체가 된 혜리와 이리스를 바라본다면 어떤 보습일까? 변하는 풍경에 따라 객체 역시 아마 각기 다른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각각의 얼굴들은 언제나 있었고 어디에나 그 모습 그대로 있다. 예술인복지재단을 통한 은정의 고발을 전해 듣자 극단 사람들은 은정이 취하는 태도가 앞뒤 다르다며 분개하지만, 부당한 계약을 감내하는 마음과 단돈 30만원이 필요해 과거의 일을 끄집어 내는 마음이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혜리도 그렇게 존재한다. 진지함과 가벼움을 동시에 머금은 채로. 눈에 보이기엔 조금 ‘이상한’ 형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과 우연한 장소에서 정면을 마주보게 되는 순간, 길에서 여행자를 의식하지 못한 채로 지나치는 순간, 어쩐지 그 표정들은 유독 낯선 얼굴들이다. 균열을 일으키는 낯선 이방의 감정은 예기치 않게 들이닥친다. 타인을 바라보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교차되는 기분. 사람들이 제각각이라 보는 시선이나 관점에 따라 각자 모두 다르게 보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를 지키며 스스로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은정의 조언이 어쩐지 귓가에 오래오래 맴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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