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향해 가는 마음들
〈딸에 대하여〉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4년 9월 9일(월) 오후 7시 상영 후
참석 이미랑 감독, 김규진 작가, 임세미 배우
진행 하미나 작가
* 관객기자단 [인디즈] 서민서 님의 기록입니다.
원작 소설 『딸에 대하여』의 작가의 말 중, 이런 구절이 있다.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중략) 그럼에도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소설도 끈질기게 지속되는 그런 수많은 노력 중 하나가 아니었는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 〈딸에 대하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이해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나와는 상관없을 것이라 여겼던 일이 곧 나의 일이 될 때, 너에게서 나의 모습이 비춰질 때, 우리는 비로소 성찰함으로써 성장한다. 서로를 향해 가는 여러 형태의 단단한 마음들이 모인 〈딸에 대하여〉의 인디토크 현장에 함께했다.
하미나 작가(이하 하미나): 안녕하세요. 모더레이터를 맡은 하미나 작가입니다. 오늘 인디토크에 김규진 작가님, 이미랑 감독님 그리고 임세미 배우님 함께하실 건데요, 각자 한 분씩 인사를 드리면서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근황도 공유해 주시면 어떨까요?
김규진 작가(이하 김규진): 안녕하세요. 한국 국적 레즈비언 김규진입니다. 혹시 뉴스에서 아기를 낳은 레즈비언 이야기를 보셨다면 그게 바로 저고요. (웃음)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감상이 굉장히 남달랐어요. 오늘 인디토크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랑 감독(이하 이미랑): 안녕하세요. 〈딸에 대하여〉 연출한 이미랑입니다. 일을 열심히 하고 왔어요. (웃음)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임세미 배우(이하 임세미): 안녕하세요. 〈딸에 대하여〉의 그린을 연기한 배우 임세미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요즘 드라마를 찍고 있고 마침 휴차여서 놀러 왔어요. 함께 영화 이야기 많이 하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미나: 막 영화 끝나고 모두 여운에 젖어 계실 것 같은데요, 〈딸에 대하여〉는 2017년에 나온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이 굉장히 베스트셀러였잖아요, 그래서 감독님께서는 처음에 이 소설을 어떻게 접하게 되셨나요? 그리고 이번 영화가 감독님의 첫 장편이라고 들었는데요, 첫 장편 영화로 워낙 성공적이었던 소설 원작의 영화를 택하신 게 굉장히 부담되셨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점들을 염두에 두셨는지, 어떤 점이 어려우셨는지,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미랑: 원작 소설을 좋아하셔서 오신 관객분들도 아마 꽤 많으실 거예요. 심지어 원작의 덕을 굉장히 많이 보고 있는데요. (웃음) 『딸에 대하여』 소설이 2017년도에 출간되고 소문이 자자해서 저도 바로 찾아 읽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되게 좋더라고요. 그때는 판권을 누가 사 왔다는 정도만 들었고 영화화 기회가 저에게 올 거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2020년쯤에 제작사인 아토 측으로부터 제가 선택을 받게 됐어요. 프로듀서님은 저랑 이창동 감독님 인연으로 알던 분이셨고 저의 작품을 아시기도 해서 저한테 ‘이런 작품이 있고 너의 세계와 이 작품이 맞을 거 같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이 작품을 만들게 됐고요, 원작이 너무 좋고 원작 나름대로 이미 세계관이 섬세하게 잘 표현되어 있어서 사실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저는 연출을 전공했지만, 문학도 같이 전공했어서 소설을 영화로 옮겼을 때의 어려움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충실한 각색을 하되, 영화적으로도 완성도 있게 만들어보자, 여러분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장면들이 있으실 텐데 그걸 제 나름대로 잘 장면화해서 체험시켜 드리자는 목표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하미나: 임세미 배우님께도 질문이 있어요. 극 중에 그린이라는 역할을 맡아주셨는데 소설을 먼저 읽고 그린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게 되셨는지, 아니면 시나리오를 먼저 읽고 그린을 알게 되셨는지, 그린과의 첫 만남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임세미: 우선 독립영화 배우들의 성지 같은 지금의 회사에 오고 나서 독립영화를 너무 찍고 싶었고 회사 대표님도 저에게 ‘〈딸에 대하여〉라는 작품에 그린이라는 역할이 있는데 너랑 너무 잘 어울려서 시나리오를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시나리오를 먼저 읽었어요. 다 읽자마자 집 앞에 있던 책방에 가서 원작 소설도 바로 사서 읽었는데 그때 이 작품이 저의 어떤 한 공간에 크게 자리 잡았던 것 같아요. 이 작품을 찍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 들어찼던 기억이 납니다.
하미나: 오기 전에 세미 배우님의 유튜브를 보고 왔는데요. (웃음) ‘세미의 절기’를 보면 기후 위기나 비거니즘 같은 이야기들이 나오더라고요. 사실 조금 놀랐거든요. 왜냐하면 배우 입장에서는 비거니즘이나 환경과 관련된 주장을 했을 때 많이 공격받는 것도 사실이잖아요. 어떤 입장을 내세우는 게 사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어떤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셨나요?
임세미: 저도 어쩌다 보니 제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을 알게 됐고 또 그러다 보니 〈딸에 대하여〉라는 작품도 제 마음에 들어왔던 거였거든요. 사실 저는 비거니즘이라는 게 뭔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그냥 모두 다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했고 저 스스로도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이라고 느꼈어요. 약자나 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혹은 어떤 존재나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게 쉽지는 않더라고요. 누군가한테는 질타받을 수 있고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앎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지금 하지 않으면 저도 제가 좋아하는 것들은 지켜낼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하미나: 너무 좋네요. 운동하면 또 한국 국적 유부녀, 유자녀, 레즈비언 김규진 작가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웃음) 인디토크를 준비하면서 규진님이 밟아오신 행적을 쭉 살펴보면서 다시 한번 놀랍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전에 미디어에서 비쳤던 퀴어 아이콘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게이나 트랜스젠더이거나 희극인인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일반인의 얼굴을 한 레즈비언 아이콘으로 세상에 나와주신 게 소수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가장 큰 힘이 되어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레즈비언 아이콘으로서 김규진 작가님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는지 너무 궁금해요.
김규진: 원작 소설이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알고는 있었지만 당시에 저는 지금처럼 오픈 레즈비언도 아니었고 와이프를 만나기 한참 전이었고 훨씬 더 취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책으로부터 도망쳤어요. 그러다가 인디토크 제안을 받고 용기를 내서 소설을 읽었는데요, 재밌었던 건 2017년은 이제 7년 전의 이야기니까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제가 너무 다르고 또 그때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도 너무 많이 달라졌잖아요. 예를 들면, 작품에서 엄마가 ‘너희가 혼인 신고를 할 수 있니, 자식을 가질 수 있니?’ 물어보는데 가질 수 있잖아요. (웃음) 그래서 그런 것들을 이제는 할 수 있게 된 지점이 저에게는 너무 흥미로웠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만약 소설을 읽고 지금 다시 영화를 봤다면 또 감회가 새롭지 않았을까, 그때 용기를 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미나: 규진님이 스스로 그때는 너무 취약했다고 말씀하신 것도 되게 놀라운데 어떻게 지금 이렇게 강해지신 거예요?
김규진: 세미 배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이런 걸 할 거야’하고 마음먹어서 되는 활동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내가 나답게 살다 보니 흘러 흘러 용기 있는 일들을 연쇄적으로 하게 되고 그것들이 쌓이면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느낌이 훨씬 강해요. 사실 지금도 저는 굉장히 취약하고요, 다만 그냥 그때그때 울고 다시 눈물 닦고, 이런 쪽이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하미나: 제가 영화를 두 번 정도 봤는데 보면서 느꼈던 게 엄마가 시종일관 너무 심각한 거예요. 그런데 심각한 엄마에 비해서 오히려 두 딸은 굉장히 씩씩해 보이더라고요. 저는 이 영화가 돌봄에 대한 영화라고도 생각하거든요. 엄마가 제희를 보살피면서 제희에게 공감하고 자신의 불안이나 공포를 많이 투사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요. 사실은 ‘딸에 대하여’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엄마가 스스로 자신의 노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수박 장면이 눈에 띄었어요. 엄마가 수박을 먹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하잖아요. 엄마는 큰 수박을 혼자 힘들게 들고 오지만, 그린과 레인은 수박을 씩씩하게 같이 들고 오죠. 그리고 그렇게까지 힘들어 보이지 않아요. 그런 명랑함과 씩씩함이 그린이라는 인물이 세상과 적극적으로 마주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과 연결돼서 느껴지더라고요.
임세미: 그렇게 둘은 힘들지 않게 서로를 나눠가면서, 의지하면서 살아간다는 게 수박으로 표현됐다고 저희도 생각했어요. 감독님의 아주 좋은 연출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웃음)
이미랑: 되게 단순한 비유잖아요. 당연히 혼자 들면 더 무겁고 나눠 들면 더 가벼운 법인데, 우리는 그걸 알지만 엄마만 모르는 거죠. 그 시점도 재밌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우리는 다 아는 사실을 엄마만 몰라서 엄마가 저렇게 애가 타는구나, 이것도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는 엄마의 어떤 모순성이기도 해요.
하미나: 제목은 ‘딸에 대하여’지만 실은 ‘엄마에 대해서’ 많이 보여준다는 점이 참 독특한 시점인 것 같아요. 다음으로 소설에는 없었지만 영화에 새롭게 삽입된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데요, 마지막 에필로그 장면과 네 여성이 함께 케이크 먹는 장면이 영화에 새로 삽입된 장면으로 알고 있어요. 그 장면을 넣게 되신 경위와 어떤 것들을 더 보여주고 싶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미랑: 케이크 나눠 먹는 장면은 원작 소설에도 있어요. ‘모두가 기다리는 케이크를 나눠 먹고 즐거운 순간은 늘 너무 이르거나 늦게 도착한다.’ 이런 문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엔딩 에필로그는 조금 고민이 많았어요. 크게 보면 장례식장 엔딩이 하나 있고 한 호흡 조금 쉬고 나서의 에필로그 같은 엔딩이 또 하나 있잖아요, 원래 1차 완성본은 장례식장 안에서 끝나는 거였어요. 타이틀이 뜨고 ‘엄마가 편안히 잠에 이른다. 그 얼굴이 미소까지는 아니지만 이제 엄마도 엄마의 일상을 담담하게 살아갈 수 있겠구나’ 이렇게 엔딩을 맺으려다가 저희 영화 팀 안에서 내부 모니터링을 했는데 생각보다 엄마가 안 행복해 보인다는 거예요. 엄마가 이전과는 변했냐고 물으면 저는 변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건 저만 느끼는 감정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느끼는 감정의 폭은 그 정도로도 적당했는데 이건 저만의 폭이었던 거죠. 그래서 관객분들에게는 엄마에게 변화가 있었다는 걸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예전 같았으면 보이지 않았을 횡단보도의 두 여자아이가 그냥 친한 친구처럼 보이다가 그린, 레인과 같이 살다 보니 그 친구들이 연인이라는 걸 알게 된, 엄마의 작은 성장을 보여주고 싶어서 본 촬영이 다 끝나고 다음 해 4월에 다시 찍어서 추가로 붙인 장면입니다.
하미나: 지금 상상해 보면 장례식장 장면에서 끝나는 게 사실 어떻게 보면 표면적으로는 엄마에게 아주 큰 변화는 아닐 수 있거든요. 엄마는 여전히 장례식장에서 레인이 누구인지 제대로 소개하지 않죠. 하지만 어쨌든 길을 걷다가 알아보는 어떤 사람들이 생긴 거죠. 그리고 관객으로서는 그때 엄마의 미소가 마음을 되게 편안하게 해줬던 것 같아요. 규진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규진: 저는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만들고 싶어서 많은 노력을 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실적일 수 있지만, 소설은 이야기가 갑자기 뚝 끊기는 느낌이 조금 들었거든요. 그런데 영화는 장례식장 장면만 해도 재단 사람들은 오지 않지만, 그린과 레인의 친구들이 와서 나름 북적북적한 장면과 함께 엄마가 약간의 미소를 짓는 걸 보면서 이런 형태의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엄마가 조금 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것처럼 받아들여져서 좋았어요.
하미나: 임세미 배우님께 질문이 있어요. 저는 영화에 여자들이 잔뜩 나와서 좋았거든요. (웃음) 감독님도 여성이시고 프로듀서도 여성이고 배우들도 대부분 여성이에요. 그래서 실제로 현장 분위기는 어땠을지 궁금해요.
임세미: 말씀해 주신 대로 여성들이 많아서 너무나 좋았어요. 민애 선배님과 윤경과 감독님, 또 같이 일하는 강사 배우들이 전체적으로 다 여성이셨어요. 그래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같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순간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영화를 찍고 나서 영화제를 돌면서도 저희는 계속 함께 했거든요. 같이 바다를 보면서 와인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추억을 하고. 마냥 좋았던 것 같아요. 서로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연대하고 또 의지하면서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하미나: 세 분께서는 영화에서 가장 아끼는 장면이 있으세요? 저는 관객으로서 말씀드리면, 진짜 사소한 장면인데요, 오민애 배우님이 은행에 다녀와서 딸이랑 통화를 하다가 대출이 안 된다고 하니까 딸이 전화를 뚝 끊어요. 그때 ‘어머 얘가’ 이러시는데, 그 찰나의 표정과 말투에서 너무 많은 게 느껴지는 거예요. 딸이 엄마를 너무 믿고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분명히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면서 엄마도 약간 서운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금방 넘어가 버릴 수 있는, 이 작은 장면이 저는 그렇게 좋더라고요.
임세미: 오늘은 그린이 기자와 싸우는 장면이 생각나요. 저의 비건 동지이자 여경인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그 장면이 너무 좋았다는 거예요. 사회에서 여성이어서 불편했던 점, 힘들었던 부분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거든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가끔 단체방에 물어보기도 하고 이게 옳은 일인지 생각하는 그 마음도 너무 안타깝고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었는데, 거기서 ‘그린이 불편함을 참아가면서 시원하게 할 말을 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고 힘이 났다’고 얘기해줘서 이 장면을 꼭 말하고 싶었어요.
이미랑: 저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항상 말씀드리는 게 국수 장면인데요. 재단에 찾아가서 사무장에게 ‘우리 어르신 어떻게 방도가 없겠느냐, 후원금 받았던 아이들이라도 연락처를 받을 수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재단 사무장이 ‘혹시 어르신한테 무슨 약속 받으신 거라도 있냐?’고 해요. 이다음 장면이 ‘후루룩’ 국수 먹는 소리에요. 그저께 김중혁 작가님이랑 수박을 먹으면서 관객과의 대화를 했는데, 그때 김중혁 작가님께서 그 국수 먹는 소리를 ‘후루룩 국수 말아 먹는 소리 하고 있네’ 이렇게 들으셨다고. (웃음) 그 표현도 너무 재밌고 그냥 그 장면을 보면 속이 뚫려요.
김규진: 저는 케이크 먹는 장면에서 엄마가 어릴 때 오븐 없이 빵을 만들어줬다고 얘기를 하니까 그린이 ‘그랬나? 맞다.’하고 회상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그 장면이 어떻게 보면 약간 비현실적으로 행복한 모습이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사실 제희를 요양시설에서 집으로 모시고 오고 서로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된다는 게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잖아요. 저는 조금 비현실적일지라도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관객이어서 그런 다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어요.
하미나: 자연스럽게 전통적인 가족의 틀을 깬 모습이기도 하죠. 보통 영화에 여러 형태의 음악이 삽입되고는 하는데, 〈딸에 대하여〉에서는 음악보다는 일상의 소리에 집중하신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고 관객 분께서 질문 주셨어요.
이미랑: 저도 음악을 잘 쓰고 싶은 감독 중 하나인데요. (웃음) 실은 음악 감독님께 다양한 곡을 요청했고 음악을 넣어보려고 했는데, 제가 편집을 너무 빡빡하게 해서 음악을 넣을 여유 공간이 없었어요. 보면 아시겠지만, 장면과 장면 사이의 호흡을 짧게 해놓아서 음악이 장면에 잘 안 맞더라고요. 그래서 장례식장 장면의 곡과 엔딩 곡, 두 개만 남았고요. 또 엄마의 외로움과 적적함을 표현하려면 여름밤의 일상 소리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택배 기사 지나가는 소리 같은 일상의 소리를 찬찬히 쌓아 올렸습니다.
하미나: 엄마와 제희, 그린과 레인의 각 배우님을 캐스팅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요.
이미랑: 세미 배우님은 저도 ‘세미의 절기’를 보고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이야? 어쩜 이렇게 멋있지?’ 생각했고 너무나도 그린 같았어요. 그런 활동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배우로서 자기 사생활을 드러낸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거든요. ‘비건의 삶이 어렵지 않아요. 환경을 지키는 게 생각보다 여러분 가까이 있어요’ 하고 자신을 다 드러내면서 활동을 실천하시는 거거든요. 그 모습에 반해서 그린 역할을 제안 드렸고요, 레인의 하윤경 배우님은 대부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같은 시리즈물로 얼굴을 많이 익히셨을 건데, 실은 그전부터 단편이나 〈경아의 딸〉처럼 적은 예산의 영화도 많이 출연하셨고 좋은 작품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실 만큼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으신 배우세요. 그때 되게 바쁘셨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흔쾌히 참여 해주셨어요. 오민애 선배님이야 더 말할 것도 없죠. 지금 이렇게 한국 영화가 불황기인데 극장만 가면 오민애 배우님이 나오시는. (웃음) 저에게는 허진 선생님이 네 명의 캐스팅 중에서 가장 꼭짓점이었어요. 어렸을 때 텔레비전으로 많이 봤었는데, 한동안은 뜸하시다가 〈곡성〉이랑 〈조제〉에서 인상 깊게 출연하신 거 보고 제가 먼저 제안 드렸고 다행히 받아주셔서 네 명의 연대하는 아름다운 여성 캐릭터가 만들어졌습니다.
하미나: 임세미 배우님께 하윤경 배우님과 연인 연기를 위해서 노력했던 부분이나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냐는 질문이 있고요. 또 감독님께 성소수자와 그 가족의 삶을 이해하고 다루기 위해 노력하신 부분이 있는지 여쭤보는 질문도 있네요.
임세미: 일단 제 주변의 짝꿍과 함께하는 친구들에게 인터뷰를 했었고요. PD님과 감독님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성소수자와 그 가족에 대한 책도 참고 했었어요. 그리고 당시에 ‘남의연애’라는 예능이 있었는데요, 보면서 같이 울고 웃고 출연자분들께도 DM을 보내서 질문했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저희가 퀴어 축제에 가서도 촬영을 했었거든요. 거기서도 많은 분들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조금씩 다가갔던 것 같아요.
윤경 배우와는 미리 약속하고 기술적으로 그린과 레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서로 맞춰갔어요. 중간중간에 그냥 둘이 편안하게 대화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거의 의식주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오늘 하루는 어땠냐, 뭐 먹었냐, 우리 뭐 만들어 먹을까’ 이렇게 그냥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상적인 대화를 했었어요.
이미랑: 제가 어제 〈윤희에게〉의 임대형 감독님과 씨네큐브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했거든요. 임대형 감독님과 이야기 하다가, 중년의 남성분이 배우자 생일이라 같이 영화를 보러 왔다고 하셔서 저희가 다 같이 축하를 드렸어요. 그러고 밤에 관객분들이 남겨주신 후기를 보려고 트위터에 들어갔는데, ‘나와 내 동성 애인은 살면서 저런 말을 큰 용기를 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하시면서 〈윤희에게〉처럼 소수자를 응원해 주는 영화가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하고 우리도 소수자로서 그런 응원을 받고 싶다는 말씀을 적어주신 글을 봤어요. 제가 그날 소수자성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서 우리 모두 다 각자의 다른 소수자성이 있다는 식으로 뭉뚱그려서 말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글을 보고 나서 제가 사려 깊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영화 역시 제가 당사자성이 없다 보니까 이런 부분을 계속 놓쳤던 것 같아요.
그래서 무슨 노력을 했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제가 이 영화가 보편적인 영화라는 말씀을 드림으로써 소수자성을 계속 뭉뚱그려 놓는다는 인상을 받으신 것 같더라고요. 그런 점에 있어서는 저는 오늘도 계속 배우고 있고요, 그래서 어제 트위터 글을 보면서 ‘왜 나는 이 영화가 그들을 응원하는 영화라고 당당하게 말씀드리지 못했을까, 왜 서운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시게 했을까’ 이런 생각이 많이 들어서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이 조금 불편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노력을 하려고 스스로도 계속 노력 중입니다.
하미나: 이런 이야기가 나와야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모두가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김규진: 안 그래도 저 관객분이 받았던 인상을 제가 관객과의 대화 참여 요청을 받았을 때, 영화 홍보 자료를 보면서 약간 느꼈어요. 영화는 계속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고 한 기자님은 ‘그냥 퀴어물인 줄 알았는데,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고 글을 써주시기도 했는데요.
첫 번째로 이 영화가 퀴어일까? 퀴어인 인물이 나온다고 해서 퀴어물이지는 않잖아요. 영화를 본 모두가 말하듯이 제목은 ‘딸에 대하여’지만 사실은 ‘엄마에 대한 이야기’고요. 퀴어적인 특징은 중요한 주변 인물에 더 가깝죠. 두 번째는 만약 퀴어물이라고 느꼈다면, 왜 굳이 퀴어물이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일까?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쓰였는데, 오늘 그 부분을 감독님께서 짚어주셔서 저도 역시 관객이자 당사자로서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고 앞으로의 관객과의 대화에서 감독님께서 하실 이야기들도 더 기대가 되는 것 같아요.
이미랑: 이런 부분이 영화를 찍을 때도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 같아요. 이게 공부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저희 영화가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한 거야?’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데, 제가 그 실천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이야기를 정말 듣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하미나: 규진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이 이야기가 모녀의 이야기잖아요. 규진님이 딸이었다가 최근에 어머니가 되셨는데 출산 이후에 육아를 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접할 때나 영화를 볼 때나 소설을 볼 때, 정체성의 변화가 관점의 변화를 가지고 오기도 하는지 궁금했어요.
김규진: 이 영화는 너무나도 그린과 저의 모습, 그리고 저희 엄마와 주인공의 모습이 닮았기 때문에 저에게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이전까지는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어서 미숙했다는 얘기들을 많이 하고 엄마가 되기 전까지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엄마를 계속 용서하려고 노력을 했었는데, 딸을 낳고 나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영화 속 주인공은 딸에게 굉장히 큰 잘못을 하고 있고요. 만약 딸이 제가 원치 않는 혹은 사회가 원치 않는 길을 간다고 해도, 막아주고 보호해 주고 싶지 굴절해서 딸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가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미나: 세 분 모두에게 드리는 질문입니다. 사실 엄마랑 딸이 되게 닮았어요. ‘이게 남 일이야? 왜 남 일에 신경 써.’ 하면서 남 일에 제일 많이 신경 쓰는 두 사람이 나와요. (웃음) 그래서 ‘남 일이란 게 뭘까? 어떨 때 우리에게 남 일이 남 일이 아니게 되는 걸까?’ 이런 질문을 저도 스스로 하게 됐거든요. 타인이지만 혹은 타인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돌보고 돌봄을 받는 관계에서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세 분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한데요, 질문이 조금 어렵다면 여러분이 집처럼 느끼는 순간이나 상황이 궁금하기도 해요.
김규진: 가족이란 상호 동의가 너무나도 중요한 것 같은데요, 그냥 혈연이라고 가족이 되는 건 절대 아니고 서로 간에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제 딸도 저희를 진정한 가족이라고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웃음)
임세미: 일단 내가 지키고 싶은 것, 내가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대가 되고 그것을 행해야겠다고 생각될 때는 먼 얘기가 아니라 그냥 제 얘기가 될 때인 것 같아요. 나와 직접 마주 될 때, 코로나가 나한테 옮겨질 때, 쓰레기가 내 입으로 들어올 때 아니면 내 가족이나 내 동물이 축산업 동물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고 느껴질 때, ‘내 이야기구나’ 생각되는데요. 그래서 가족의 형태로 태어날 때의 가족도 가족이지만, 제가 마음을 두는 곳, 또 제가 연대하려고 하는 어떤 대상들도 가족이 되는 것 같아요.
이미랑: 제가 임세미 배우님께 여쭤본 적이 있어요. “왜 환경 운동하세요? 왜 비건하세요?” 그때 임세미 배우님이 뭐라고 대답하셨나면, 저 때문에 한다고, 내가 불편해서 한다고. 저는 이 질문에 듣고 싶은 대답이 정해져 있었나 봐요. 보편적으로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라든가,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든가 하는 대답을 많이 하는데, 자기 때문에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저희 영화의 엄마도 제희를 이타적으로 돌보는 것 같지만, 실은 미나 작가님이 말씀해 주셨듯이 제희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린도 동료 교사를 위해서 그렇게 싸우는 것 같지만, 자기가 바로 다음 해고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요. 레인도 그냥 그린과 같이 있고 싶어서 그린의 엄마가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까지 감내하면서 같이 사는 거거든요. 이런 게 이타심처럼 보이지만, 다 자기 안에 있는 이기적인 이타심인 거죠. 결국은 이게 다 자기의 문제기 때문에 남의 일이 아니게 된 거예요.
그랬을 때, 케이크 먹는 장면에서 저는 실은 네 여성이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찍은 건 아니었어요. 한국 사회가 가족주의가 굉장히 강하잖아요, 그래서 저희 영화를 해석하실 때 대안 가족이나 어떤 세대의 모든 여성이 모여 있는 가족의 형태를 많이 말씀하시는데, 따지자면 그린이랑 엄마만 혈족이고 나머지는 다 남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공동체를 상상하면서 그 장면을 찍었어요. 제 세대의 모든 여성은 가족을 가지느냐, 아니면 가지지 않느냐는 선택을 해야 해요. 혼자 사는 건 버거우니 연대를 하는 삶이 있을 수도 있고 적극적으로 가족을 꾸리는 삶이 있을 수도 있고요. 저에게 저희 영화에 대해서 ‘가족이란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는 이런 공동체의 감각이었어요. 그래서 이런 공동체 감각의 상상력을 우리가 가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하미나: 너무 좋네요. 언젠가 최현숙 선생님께서 ‘우리는 대안 가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대안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던 게 기억이 나는 답변이었어요. 대안 가족이나 가족의 어떤 또 다른 모습만을 계속 상상하지만, 감독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사실은 가족이라는 말 대신 공동체의 모습이 필요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시간이 거의 다 돼서 마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임세미: 다른 때보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오늘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상처 주고 싶지 않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랑: 영화에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두 분께도 특별히 감사드려요. 영화를 찍을 때, 나름 공부한다고 두 분의 모든 글을 찾아 읽으면서 ‘내가 정말 편협했구나’ 하고 스스로 돌아보기도 했는데요, 그 두 분을 이렇게 뵐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너무 반가웠습니다.
김규진: 저는 오늘 인디토크가 제가 도망쳤었던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서 너무 좋았어요. 사실 저도 성소수자를 자식으로 둔 부모의 마음은 몰라요. 그래서 저의 세계도 영화를 보면서 조금 더 확장됐던 것 같아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미나: 저도 관객석에서 이렇게 반짝반짝한 눈으로 지켜봐 주시는 게 너무 보기 좋아서 행복했습니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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