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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Playing/정기상영 | 기획전

5월 인디포럼 월례비행 '사회적 거리보기' 비평

by indiespace_은 2020. 5. 28.



 인디포럼 월례비행 5월 

체념, 순응, 균열 그 이후: <윤리거리규칙> <Godspeed> <나의 자리>



글: 김소미('씨네21' 기자)



세 편의 영화에서 인물들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는 것은 학교, 조직, 가족이라는 오래된 집단이다. 이곳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규칙을 따라야 한다. 규칙은 곧 생존을 위함이다. <윤리거리규칙>에서는 입시의 성공이, <Godspeed>에서는 보스의 만족이, <나의 자리>에서는 가부장의 질서가 곧 지켜져야 할 무엇이며, 이 시스템 속에서 안타깝게도 우리의 존엄은 자주 묵살된다.



이정곤 감독의 <윤리거리규칙>은 ‘이성 간 50cm 거리 유지’ 새 학제가 들어선 어느 예술고등학교 교실의 혼란 속에 카메라를 놓아둔다. 미술과 서현은 음악과 병찬과 2년 가까이 연애 중인데, 진학을 위해 면학 분위기를 중시하는 동급생 민주의 신고로 강제전학 위기에 처한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서현의 자유의지는 곧 자신의 미래를 담보하는 진술서 앞에서 금세 체념 당한다. 결국 그는 스스로 병찬과 거리 두기를 택한다.


박세영 감독의 <Godspeed>는 정해진 동선과 규칙, 암호를 공유하며 비밀리에 물건을 배달하는 조직원들의 뒤를 밟는다. 오늘의 배달 품목은 오랜만에 귀국한 조직 보스를 위해 러시아에서 어렵게 들여온 생물이다. 몇 명의 인물들이 일말의 접촉 없이 규칙대로 물건을 주고받는 동안, 관객은 C(세번째 배달원)가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D(네번째 배달원)에게 신변의 위협을 알리는 찰나를 목격한다. 이후 D는 임무를 마치는 순간 화면 밖으로 끌려나가고, 사운드를 통해 죽음이 암시된다. 이 예기치 않은,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응징은 물건의 최종 배달지인 작은 일식집의 주방장 역시 피해가지 못한다. 익명의 행위자들은 정해진 안무를 마치고 유유히 퇴장하거나 익명의 또 다른 감시자들에 의해 제거된다.


이지현 감독의 <나의 자리>는 남자친구와 동거를 시작한 엄마의 새집에 기어코 자신의 침대를 옮겨 두려는 딸 재아의 이야기다. 그곳은 엄밀히 말하면, 남자가 자신의 어린 아들과 원래 살고 있던 집이어서 엄마가 들어갈 자리는 있어도 재아를 위해 마련된 공간은 없다. 깨끗한 결속을 다지는 연인 앞에서, 재아는 묘하게 엄마와 자신의 관계가 지워지는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다. 좁혀지지 않는 야속한 심리적, 물리적 거리 속에서 재아는 어른이 되기를 요구받는다. 



"저 지금부터 남자 안 만나면 홍대 갈 수 있어요?"라고 따져 묻는 서현, 배달 물품을 몰래 열어본 뒤 생선이 든 비닐봉지를 찔러 더 큰 구멍을 내는 D, 낡고 큰 자기 침대를 꾸역꾸역 엄마의 이삿짐 트럭에 실는 재아. 세 사람은 규칙의 속박 혹은 견제로부터 그 경계에 최대한 다가가기 위해 꿈틀거려 본다. 우리는 학생, 조직원, 딸이라는 기호로만 존재하는 이들이 종종 황망한 표정을 내보이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정작 <윤리거리규칙>은 홍익대학교에 입성하지 않고, <Goospeed>의 보스는 끝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나의 자리>는 재아의 방을 내어주지 않는다. 리얼리즘 드라마인 <윤리거리규칙>과 <나의 자리>에서 서현과 재아는 적당히 체념하고 돌아서지만, <Goodspeed>의 D는 뚜껑을 열어 실체를 확인하는 위험하고 상징적인 시도를 한다. 그 결과 D는 납득할 수 없는 광경을 본다. 한 여름날에, 살아있는 물고기 한 마리를 봉지에 담아서, 구태여 여러 명이 릴레이 하듯 도보로 옮기는 현장을 D는 알아채 버린다. 이 영화에서 감시자들에 의해 제거되는 D와 주방장은 모두 어처구니없는 '그것'을 봐버린 인물들이다. 시스템은 우리가 적당히 모르고, 적당히 속아주기를, 약간의 찜찜함을 감내한 채 그 자리에 계속 있어 주기를 바란다.



표면적으로 인물들은 '선택'한다. 서현은 병찬에게 “그냥 그렇게 (떨어져 지내는 것으로) 하자”라고 답답한 듯 타이르고, D는 "말하지 마. 내일 나오지 마"라고 C를 위험에서 떨어트리고, 재아는 침대를 포기하고 돌아간다. 그렇게  <윤리거리규칙>이 씁쓸한 현실에 안착하는 동안 <Godspeed>는 부조리극이 되려 하고, <나의 자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성장담의 가능성을 모색하려 한다. 이 영화에서 모녀가 자기 이야기를 그제야 터놓고 대화하는 자리는, 집 안이 아니라 아파트 쓰레기장 앞에 버려진 매트리스 위다. 버려진 섬에서 서로 적당히 떨어져 않은 엄마와 딸은 그제야 각자의 상태를 고백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혼자 아파트를 빠져나온 재아가 돈까지 받아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사이, 골목 모퉁이에서 갑자기 자전거를 탄 소년이 나타나 커브를 틀다 풀썩 넘어진다. 그 역시 재아만큼 심란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재아는 본능적으로 달려가, 아이와 자전거를 일으켜 세워준다. 재아를 당혹시켰던 어른 세계의 거리는 그렇게 단숨에 좁혀진다. 아버지와 어머니, 집과 가족의 세계, 그 바깥에서 배회했던 미성숙한 인간들이 저들끼리 조우하는 순간에 재아는 예기치 못하게 어른이 된다. 편입되거나 퉁겨져 나가기를 선택해야 하는 세상에서 <나의 자리>는 저 멀리 어둠 속 모퉁이에서나마 잠시 숨통을 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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