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쏭의 기적> 한줄 관람평
오채영 | 남은 날들을 바꾸는 순간의 경험에 대하여
박마리솔 | 선율을 가진 언어로 사람과 사람이 맞닿을 때
임종우 |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 만드는 이야기
윤영지 | 마음이 노래가 될 때, 노래가 기적이 될 때
최대한 | 국적을 초월한 연대,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바나나쏭의 기적> 리뷰: 남은 날들을 바꾸는 순간의 경험에 대하여
*관객기자단 [인디즈] 오채영 님의 글입니다.
어느 날, 태어나서 처음 보는 외국인이 불현듯 당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노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상상해보자. 아이들은 즐거워 보이지만, 빠듯한 살림 속에 음악이 돈을 벌어다 주는 것도 아니고 이 합창단이 내 자식들의 미래에 어떤 도움을 주는 지 조차 알 수 없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극장을 나선 후에도 영화가 주는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일에 작은 권태를 느꼈던 요즘, <바나나쏭의 기적>은 가족에게 느끼는 본질적인 감정에 대한 공감만 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도 많은 걸 느낄 수 있는 반가운 영화다.
우리가 매일 카페에서, 또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수 만 가지의 것. 이미 우리의 삶 속에 너무 깊숙하게 자리 잡아 있어도 없는 듯 대기중을 떠도는 것.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문화, 바로 음악이다. 하지만 인도의 어느 빈민가에 사는 어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의 삶을 비집고 들어온 이 음악이 너무나도 어색하다. 이들은 음악을 정식으로 배워 본 적도, 즐겨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불가촉천민이라는 타고난 신분을 거스를 수 없어 기본적인 배움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자식들 만큼은 공부에 열을 쏟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 밤낮 없이 일터로 발걸음을 옮긴다. 다큐멘터리 <바나나쏭의 기적>은 우리가 이토록 당연하게 여겨왔던 ‘음악’의 이름에 무게를 부여한다.
은퇴한 성악가 김재창은 몇 년 전 최하층민들이 모여 사는 인도의 한 빈민촌에 들어와 이 ‘바나나 합창단’을 심었다. 낮은 흙빛의 집들이 모인 판자촌 옆에 웅장하게 지어진 현대식 빌딩의 위용은 마치 그곳이 사람들에게 ‘신세계’를 보여줄 것만 같다. 신두자, 라훌, 마날리를 비롯한 빈민촌의 아이들은 모두 그 곳을 좋아한다. 그렇게 몇 번의 콘서트를 거쳐 무럭무럭 자라나는가 싶었던 바나나 합창단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합창단의 성장에 제동이 걸린다. 부모들이 학업을 위해 아이들을 합창단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 김재창은 아이들이 합창단에 다시 나오도록 부모들을 직접 찾아가 설득하고, 그들에게 직접 음악이 삶을 바꾸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곧 있을 콘서트 무대에 부모들이 함께 서는 것을 목표로 노래를 가르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세 가족의 모습을 통해 인도 하층민의 삶과 애환을 영화는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음악이 주는 경험을 통해 어른들은 점차 내면의 성장을 이룩한다. 돈이나 생활력에서 오는 안식이 아닌 음악과 춤의 향유에서 기인하는 마음의 여유는 어른들에게 또 다른 행복을 알려주고, 무대 경험과 그들을 향한 박수갈채는 자식이나 남편의 인생이 아닌 당신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언제나 두 자매의 엄마이자 도망간 남편의 아내로만 살았을 메리는 무대에서 솔로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가창하며 그녀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주체적인 삶에 대한 용기를 얻는다. 공연 당일, 무대를 위해 자신의 하루치 일당을 포기하는 메리의 대담함은 비교적 많은 것이 갖추어진 삶 속에서도 인생의 주도권을 찾지 못하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가 각 인물들의 스토리를 충실히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관객은 등장인물이 흘리는 눈물, 용기를 담아 내지르는 목소리에 담긴 정서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 보게 된다. 음에 감정을 담아 노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라고 할 때, 이들은 바나나 합창단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좀 더 '인간'다운 삶의 새로운 한 층위를 스스로 발견한다. 빈민가가 노래로 채워지며 변해가는 그 순간들의 포착은 매우 흥미롭게 느껴진다.
최근 주목 받는 신선한 포맷의 다큐멘터리 영화들 사이에서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는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크고 작은 웃음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가족적인 이야기를 통해 가슴 한 켠을 훈훈하게 데운다. 과장도, 억지스러운 쥐어 짜냄도 없이 음악이 그들의 삶을 바꿔나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내는 것만으로 영화는 일상 속의 작은 변화에 목마른 우리들에게 잔잔한 치유와 감동을 건넨다. 악습의 잔재에서 오는 신분의 차이는 그들에게 어려운 환경을 주었지만 개개인의 삶의 귀천까지 규정하지는 못한다. 노래하는 목소리는 똑같이 아름답다. 영화 속에서 우리는 빈민촌에도 따뜻한 볕이 드는 모습을 발견한다. 황폐하게만 보이던 마을의 첫인상은 온데간데 없이 어느새 아늑하고 평화로운 누군가의 삶의 터전만이 스크린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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